총성이 사라진 날
궁정동에서 대통령이 죽던 날 총소리가 서울 곳곳에서 울렸다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던 밤에 이십대를 갓 넘은 아버지는 종로주점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통금시간을 피해 문을 잠근 주점에서 잠든 아버지는 그날 밤 얼마 전에 전역한 군대 꿈을 꿨다 민주화고 빨갱이고 관심 없던 아버지는 다음날 라디오에서 나오는 비보(悲報)를 들으며 다방에서 커피를 마셨다 사람들은 저마다 혀를 찼고, 대통령의 대가리와 심장에는 총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버지는 노동자도 자본가도 아니었기에 총구멍이나 최루탄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통령을 쐈던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야수와 같던 심정은 죽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독재가 끝났다며 환호했다
아버지란 것에 정년퇴직 따윈 없다 육십이 가까운 나이에 퇴직금이고 사대보험이고 말도 꺼내지 못했다 아버지는 노동자가 되었고 돈에는 대가리도 심장도 없어 총을 쏠 수 없었다 야수의 심정도 없었고, 총도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며 사임당이고 세종이고 나발이고,
총소리만 귀에서 맴돌았다
옛날 사람들은 가끔 과거를 그리워하기에, 깜빡 잠들었던 아버지의, 총소리가 들리던 그날 밤, 통금 사이렌 소리와, 문을 닫아걸던 주점 주인과, 친구들이, 죽어버린 야수의 심정과, 뛰지 않는 유신의 심장, 그날 밤 꿈을 꿨다
- 월간 시와 표현 2015년 12월호 발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