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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1, novel


[시] 소용돌이 속으로

소용돌이 속으로

 

 

화장실 불을 켜면 바퀴벌레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 중 새끼손톱보다 작은 것들은 내가 양치를 하는 동안에도 도망가지 못하고 타일 사이에 드문드문 맺혔다 아직 죽을 자리와 살 자리도 구분 못하는 어린 것들을 두고 달아난 어미는, 더듬이를 흔들며 새끼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어느 집의 장손일지 모르는 그것들은 먹을 것을 찾아 정장자락을 펄럭인다

 

실수로 꺼내 입은 아버지의 정장이 맞춘 듯 딱 맞았다

 

대학 졸업날 십이만 원을 주고 산 내 정장은 옷걸이에서 어깨가 하얗게 세었는데, 양복을 입으면 답답하다던 아버지는 왜 아들에게 이 옷을 사줬는지

죽을 자리와 살 자리를 모르는 새끼들은 어미 대신 먹을 것을 찾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더듬이로 앞을 짚었다 그렇게 앞으로, 앞으로, 계속 앞으로, 더듬이 끝이 내 발에 닿았다

라면에 바퀴벌레가 떨어져도 아무렇지 않게 될 때 즘 어미가 떠난 것은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바퀴벌레를 건져 내는 동안의 시간만큼, 그 만큼의 그리움을 숟가락으로 떠내 하수구에 흘려보냈다

 

샤워기의 물줄기에 타일 사이 버티고 있던 것들이 힘없이 쓸려간다 하수구 구멍 근처에서 몇 번 소용돌이를 치는 동안, 건져낼 수 있지만, 건져내지 않았다 어미들은 거울과 벽 사이에서, 변기 뒤에서, 화장지 심 안에서, 틈에서, 안에서, 지켜본다, 거친 물줄기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것들의 더듬이를

새끼들이 끈질기게 세상이 멸망하는 날까지도 살아남기를 바라며, 어미 없이도 아이들은 잘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더듬이로 말을 했다 사실 어미들도 죽을 자리와 살 자리를 모르기에,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을 뿐이지만

화장실 안은 물소리로 소란스러워 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울지 않았을 것이다

 

꺼내 입은 아버지의 정장을 벗지 못했다




- 월간 시와 표현 2015년 12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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