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식량
7.
“이 우주정거장을 장악하고 세력을 키운다라. 듣기는 좋다만 난 세력이라 부를만한 게 없는데.”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나와 스페이스 콜로세움 전부가 너의 세력이 되어 줄 테니까.”
“너와 스페이스 콜로세움이?”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바쳐 널 돕겠어. 네가 은하 제일의 세력을 가질 수 있도록 말야.”
유례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룬나임.
레이븐이 속으로 쿡쿡 웃었다.
‘어때. 혹하지? 솔깃하지? 거절 못 하겠지?’
당장 스페이스 콜로세움만 해도 은하에서 가장 유명하고 큰 초거대 도박장이다.
뿐만 아니라 레이븐이 은하 곳곳에 펼쳐 놓은 사업장을 전부 합치면 자금력이 웬만한 행성과 비견될 수준!
당연히 레이븐에게도 속내는 있었다.
‘남자를 컨트롤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출세욕이지. 몇 번은 그냥 힘을 빌려주지만 차차 힘을 빌려줄듯 말듯 안달 나게 하는 거야, 그러다 보면 점점 더 내게 의존하게 될걸? 오호호호!’
이른바 ‘남자의 출세욕을 지배하라’ 플랜!
룬나임이 이반과 훈련하는 사이 그녀가 세운 계획이었다.
“흐으음... 스페이스 콜로세움의 주인 마담 레이븐께서 모든 걸 바쳐 날 도우시겠다라...”
‘그래. 황제의 재목아. 내게 의존하고 의존하다, 결국 내게 벗어날 수 없는 노비가 되거-’
“마음은 고맙지만 정중히 거절하도록 하지.”
“오호호. 잘 생각... 뭐?”
의외의 대답에 레이븐이 눈만 꿈뻑였다.
“잠깐만. 거절한다고? 왜?”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레오니아와 승부중이다. 남의 힘을 빌려서 황제의 자리에 앉아 봤자 아무 의미 없지. 그 자리는 오로지 내 힘으로 올라가야 의미가 있는 거다.”
“그, 그러니까 이건 도움이 아니라... 그래! 투자야! 투자. 네, 네가 진정 황제가 될 남자라면 이 정도 투자는 기본이잖아?”
“글쎄. 내가 볼 땐 너의 일방적인 도움으로 보인다. 난 여심은 잘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 황제가 된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길 여자는 없을 거라고 보는데.”
‘맞는 말이긴 한데... 이 바보같이 고지식한 자식!’
예상치 못한 룬나임의 거절!
기껏 세운 계획이 엉망이 되자 레이븐은 표정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살짝 울상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로 한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 반대?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날 돕는 게 아니라, 내가 너와 스페이스 콜로세움을 은하 제일의 세력으로 키워주겠단 거다.”
의외의 발언에 레이븐이 재차 눈을 꿈뻑였다.
“네가... 날?”
“그래. 애초에 나는 큰 세력을 이끌 만큼의 자질이 없다. 싸우는 것 말고는 장기라 할 것도 없고 우주의 정세에도 밝지 못하지. 하지만 넌 다르다. 수완도 있고 정세에도 빠삭하며 현명하기까지 하지. 내가 직접 세력을 이끄는 것보다 네가 이끄는 세력을 키우는 것이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보이는군.”
‘... 확실히 달라.’
다른 남자였으면 출세욕에 눈이 멀어 옳다꾸나 고맙습니다 하고 레이븐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룬나임은 다르다.
냉정하게 자기 모자람을 인정한다.
그리고 타인의 강점을 받아들여 더 좋은 방법을 내놓는다.
이것이야말로 황제의 자질 중 하나, 거대한 그릇!
‘이 남자... 절대 놓칠 수 없어!’
레이븐의 마음속에서 룬나임의 주가가 또 한 번 올랐다.
“어떻게 생각하나?”
“... 백 번 맞는 말이야. 그게 더 좋은 방법인 건 확실하지. 하지만 세력의 주인이 나라면, 황제가 되는 건 네가 아니라 나일 텐데 괜찮겠어?”
“하하하! 예카테리나 아가씨께선 똑똑하면서 꼭 마지막에 나사가 하나씩 빠져 계시는군.”
“... 그게 무슨 소리야?”
룬나임은 피식 웃으며 레이븐의 턱에 손을 얹었다.
“우리가 승부중이란 걸 잊었나? 금고의 주인을 가지면 금고는 따라오기 마련이지.”
자신만만한 룬나임의 도발!
순간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던 레이븐이 피식 웃었다.
“... 하! 정말 건방지네. 나와의 승부는 벌써 이기셨다 이거지?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한 것 같은데 말야.”
“사막의 전사는 그 어떤 승부에서든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 무조건 이긴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할 뿐.”
“좋아. 그렇다면 나 역시 너와의 승부, 무조건 내가 이긴다는 마음가짐으로 굴려 줄게. 어차피 내 노비가 될 남자, 미리 좀 굴린다 해서 문제 될 것 없잖아?”
“원하신다면야. 어차피 제 것이 될 세력을 키우느라 불철주야 고생하실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구르도록 합죠.”
입은 웃고 있지만 눈빛에선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두 사람.
“그럼 긴말 필요 없겠네. 바로 SC-13 장악을 위한 첫 단계를 밟으러 가도 될까?”
“얼마든지.”
******
SC-13 번화가의 고급 카지노.
“장군님은 오늘도 VIP실에서 한창이신가?”
“물론입니다. 마담 레이븐. 바로 안내해드릴까요?”
“아니. 안내는 됐어. 이 남자와 이야기하면서 천천히 갈 테니.”
“마담께서 원하신다면.”
가드의 공손한 인사.
레이븐과 룬나임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 도박판이 한창인 홀을 지나쳐갔다.
“꽤 큰 도박장이로군. 여기도 네 소유인가?”
“그렇지. 대어를 낚으려면 큰 낚싯대가 필요한 법이니까.”
“대어라... SC-13을 사기도박으로 따겠다는 건가?”
“그렇게 쉬운 일이었으면 진즉 땄겠지. 우리가 따려는 건 SC-13이 아니라 SC-13내의 식량 판매 독점권이야.”
“식량 판매 독점권?”
“그래. 제국에서 변방을 통치하는 방식이지.”
판매 독점권.
신성 인류제국이 직접 손이 닿지 않는 변방을 통치할 때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흐음. 여러 세력들이 시장을 분할하면 세금 걷기 까다로우니 하나의 거대세력에 권리를 몰아주고 그 세력만을 관리하는 거로군.”
“맞아. 나름 부패 방지를 위해 5년에 한 번씩 독점권을 갱신하지만, 이곳 SC-13은 20년째 한 사람이 식량 판매 독점권을 가지고 있어. 바로 저 남자, 로메오 장군이 말야.”
VIP실에서 카드를 치는 중년의 남성.
레이븐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로메오의 옆에 앉았다.
“많이 따셨나요. 장군님?”
“누군가 했더니 마담이로군. 참 카드란 게 참 얄궂어. 붙을 만 하면 붙질 않고 안 붙어도 될 때만 붙으니.”
“후후. 게임이란 게 원래 그렇죠. 간간이 붙어서 재미있는 거기도 하고요.”
“맞는 말이긴 하지만... 거 참 재미 한 번 느끼려다가 파산하겠군.”
“에이. 엄살이 너무 심하시다. 장군님껜 푼돈이잖아요.”
“푼돈이지. 하지만 그 푼돈을 소중히 여겨야 해. 푼돈 새다 보면 건물 날리고 공장 날리고 하는 것도 순식간이거든. 껄껄껄!”
저 혼자 신나 웃는 로메오.
레이븐도 영혼 없는 미소로 응수했다.
“그나저나 마담께서 무슨 일로 날 찾으셨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곧 5년 만에 SC-13 식량 독점 판매권 재입찰이 시작되잖아요?”
“그렇지.”
“그 입찰. 제게 양보하세요.”
“... 양보?”
“네. 그간 많이 드셨잖아요. 조금 나눠 먹는 것도 미덕 아닐까요?”
로메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허허. 마담께서 왜 이 늙은이의 사업에 눈독을 들이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구먼. 요즘 장사도 잘 되는 걸로 아는데.”
“식구가 많아지면 사업을 확장해야 하지 않겠어요? 장군님에겐 그리 크지 않은 사업이니 양보해 주세요.”
“... 껄껄껄. 거 참 늘그막엔 돈이 무서워져. 짐승 같은 놈들이 군침을 줄줄 흘리지 않나, 구더기 같은 년들이 들러붙질 않나.”
“오호호. 시체가 너무 썩으면 짐승과 구더기들이 들끓기 마련이니까요. 더 썩기 전에 화장을 하는 것도 방법 아닐까요?”
“이 년이 미쳤나!”
듣던 로메오의 호위, 켄지가 발끈했다.
“장군님. 저 싸가지 없는 년의 주둥이를 제가 지져놓겠습니다!”
“... 여자 얼굴 건드리는 건 도리가 아니지. 하지만 적당히 교육은 좀 시켜서 보내드려라.”
“예!”
화르르르륵!
켄지의 양 손 위에 피어오르는 불꽃!
지켜보던 룬나임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무래도 넌 스페이스 콜로세움에 오면 다섯 번의 전투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 같은데?”
“뭐?”
“마담. 이 자가 왜 다섯 번의 전투도 버틸 수 없을지 직접 보여드려도 되겠습니까?”
윙크를 날리는 룬나임. 레이븐이 웃음을 참으며 부채를 접었다.
“후후. 어디 한 번, 이유를 알고 지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분부대로.”
“... 뭐야? 이 년놈들이 쌍으로 미쳤나-”
켄지의 말이 끝나기 전에 룬나임은 테이블 위의 술병을 집었다.
팅- 화르르르르륵!
도수 높은 술이 몸에 부어지자 켄지는 제 불꽃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아악! 아아아아아악!”
“어디 보자. 옴니무스 프로이단테. 알콜도수 96.3도... 이건 뭐 마시는 게 아니라 소독용이로군.”
“소화기! 소화기 가져와!”
치이이이이이이-
소화기를 가져와 뿌리고 나서야 진정되는 불꽃.
하얀 가루로 범벅이 된 켄지가 소리쳤다.
“이... 이 씹새끼가 뒤지고 싶어서 환장-”
“병신 같은 새끼! 안 닥쳐?”
“자, 장군님.”
“닥치고 뒤로 꺼져 있어!”
주춤주춤 물러나는 켄지.
로메오가 플라스틱 카드를 구겼다.
“오냐오냐 해 줬더니 아주 기어오르는군. 정말로 내게 칼을 들이밀 생각인가?”
“어머. 칼이라뇨. 전 그저 양보를 부탁드릴 뿐인걸요. 비키지 않으신다면 저도 가만히 있진 않겠지만요.”
“SC-13의 곡물공장과 배양육공장은 전부 내 소유야. 독점권을 낙찰받고 나면 실제 식량을 조달할 곳은 있고?”
“걱정 마세요. 낙찰만 받으면 장군님보다 훨씬 더 싸고 좋은 물건들로만 공급할 자신 있으니까요.”
쿵!
테이블을 세게 치고 일어나는 로메오.
그가 VIP실을 떠나며 이야기했다.
“재밌군. 입찰할 수 있으면 어디 한 번 해 봐. 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방해해 주지.”
******
우주정거장에서의 일을 마치고 다시 스페이스 콜로세움.
“아가씨.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번에는 로메오 장군과 식량 판매 독점권을 갖고 경쟁하겠다뇨!”
“조용. 다 코마로프가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단계일 뿐이야.”
“하지만...”
“이반. 내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따지는 걸 아주 싫어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을 텐데?”
“...”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이반.
한편 생각에 잠겨 있던 룬나임이 물었다.
“그나저나 식량을 조달할 곳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이지? 이 근처엔 곡창지대 행성이 없나?”
“있지. 페르세포네라고. 하지만 쓰질 못해.”
“쓰질 못한다?”
“백문이불여일견. 데려다 줄 테니 직접 봐봐. 이번엔 이반도 같이 가도록 하고.”
“예! 아가씨! 분부대로!”
레이븐은 스페이스쉽을 몰고 SC-13과 가장 인접한 행성 페르세포네로 향했다.
상공 3000m에서 내려다보는 페르세포네의 풍경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곡창지대를 전부 로봇들이 장악했군.”
“맞아. 사실 20년 전만 해도 SC-13은 우리 코마로프가의 것이었어. 하지만 제국이 이 일대를 침략했을 때 곡창지대를 전부 장악하고 식량줄을 끊어버리면서 항복했지. 한때 번영을 누렸던 우리 코마로프가가 지금은 도박장이나 운영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야.”
“... 당시의 제국 놈들이 벌인 짓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립니다.”
까드드드득.
이반의 이빨에서 석고상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당장이라도 로봇들만 다 치우면 아직도 쓸만한 땅이라는 거야. 아니. 오히려 비옥해지긴 더 비옥해졌지. 20년이나 지력(地力)을 쓰지 않았으니.”
“잘 됐군.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겠어.”
“그래. 일단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로봇들과 싸울 작전을 제대로 준비해서- 야! 뭐, 뭐 하는 짓이야?”
푸슈우우우-
룬나임이 스페이스쉽 도어를 열자 레이븐이 기겁했다.
“바로 로봇 소탕을 시작하면 되는 거 아닌가? 똑같은 곳에 두 번이나 올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
“미쳤어? 제대로 된 작전도 없잖아!”
“작전이 왜 없어. 둘이나 있는데.”
“... 둘?”
“그래. 여기 하나. 저기 하나.”
룬나임은 자기 자신과 이반을 번갈아 가리켰다.
“... 그게 무슨 작전이야!”
“강한 전사는 애매하게 세워진 작전보다도 더 효과적인 전술이 되지. 애초에 입찰시기를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이 땅을 수복하는 편이 좋지 않겠나?”
“그, 그렇긴 한데-”
“그럼 더 말할 필요 없겠군. 간다!”
말릴 틈도 없이 지상으로 뛰어내리는 룬나임.
레이븐이 절규했다.
“미친놈아! 낙하산도 안 챙기고 어딜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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