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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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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멧돼지
작품등록일 :
2022.05.18 23:24
최근연재일 :
2022.06.29 16:29
연재수 :
29 회
조회수 :
4,803
추천수 :
301
글자수 :
137,131

작성
22.05.25 09:29
조회
144
추천
7
글자
10쪽

9. 좀비 (3)

DUMMY

9.


“제가 말했죠. 우리가 과아나크 도착하면, 루비 씨 당신 못 살려둔다고요.”


아라의 싸늘한 말투에, 순간 마나 컴퓨터 옆에 굴러다니는 회색 전동마사지기보다 빠르게 몸을 떠는 루비. 그녀가 이원에게 매달리며 소리쳤다.


“아... 아니! 자자자잠깐만요! 덴탈 마스크 선생님? 제 얘기 좀 한번만 들어 보세요!”


“듣고 있으니까 말을 해.”


“제... 제가 우주선 해킹한 것도 잘못했고! 홀로그램 통신기 해킹한 것도 잘못했고! 큰 돈 쓰게 한 것도 잘못했고... 제가 너무너무 살고 싶은 나머지 주... 죽을죄를 저지른 건 맞는데요...”


“잘 아네. 그래서 뭐?”


“그... 그래도 예쁘고 잘생기신 두 분이 저를 불쌍히 여겨... 약간의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면... 안... 될까요?”


너무나도 간절해 보이는 루비였지만, 이원은 인상을 팍 쓰며 말할 뿐이다.


“... 자비? 이 여자가 장난하나. AC-03에서 여기까지 온다고 워프비로만 2100만 크레딧을 날렸어. 2100만 크레딧이 어디 멍멍이 이름인 줄 알아?”


“그... 그 돈은요! 제가, 제가 꼭 갚을게요! 당장 그렇게 큰돈은 없지만! 저 진짜! 진짜 평생토록 일해서 갚을게요! 저 일 잘해요! 이 집도 제가 돈 모아서 산 거에요! 제발요!”


털썩-!


무릎을 꿇은 채, 열심히 싹싹 비는 루비. 그 모습이 너무 처절해서인지 아라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는 가운데, 이원이 아라의 귀에다 대고 작게 속삭였다.


“하아. 이 여자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데... 아라야.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좀 안타깝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죽여야 하지 않을까요? 괜히 살려뒀다가 나중에 또 저희 우주선 해킹할 수도 있잖아요.”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상황을 좀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는데요.”


“지금 이 루비란 여자를 그냥 죽여버리면, 여기까지 온 데 쓴 2100만 크레딧은 그냥 하늘나라 간 거야. 아니지. 여기서 돌아가는 비용 생각하면 한 4000 정도를 허공에다 날린 셈이지. 그치?”


“... 그렇죠.”


“근데 이 루비란 여자 해커잖아. 그냥 데리고 다니면서 일 시켜서 그 이상으로 뽑아낸다면... 손해가 아니지 않을까?”


“...”


“이 여자 괘씸하긴 하지만 우리 우주선 해킹할 수 있으니 실력은 보증됐고... 무엇보다 이만한 해커의 ‘실물을’ 데리고 다닐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잖아.”


입술에 손가락을 얹은 채로 조용히 듣고 있던 아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쵸. 해커들은 거의 다 실제로는 모습 안 드러내니까요.”


“그치. 해커란 종자들이 원래 일 잘못되면 바로 배신하려고, 항상 화상으로만 일하는 놈들이잖아. 우리도 몇 번 당했고. 그러니까-”


“딴맘 먹거나 이용가치 떨어졌을 때 죽여도 늦지 않으니까, 데리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써먹자는 말씀이시네요.”


“응. 바로 그거지. 아라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일리는 있었지만, 분명 리스크도 있는 판단. 아라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 때, 루비가 아라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따흑! 사모님! 제발 살려주세요! 일 정말 열심히 할게요! 배신도 안 하구요!”


사모님.


스물한 살 여자가 듣기엔 지나치게 올드하고, 어쩌면 기분 나빠 화를 낼 수도 있는 단어였지만.


“서... 선장님 말대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아라에게만큼은, 고개가 이원 반대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마법의 단어였다.


“가... 감사합니다!”


루비의 얼굴에 생존의 환희가 깃든 그 순간, 이원이 나긋나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 그럼 계약서부터 쓰자.”


“넵!”


1시간 후.


“이... 이런 조건으로 일하라구요...?”


블루스 호에 동승하게 된 루비가, 이원이 내민 계약서 파일을 보곤 손을 파르르 떨었다. 19페이지나 되는 계약서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으니까.


1. 월급 없음. ONLY 성과급제. 일한 만큼만 받음. 물론 정산 비율은 이원이 꼴리는 대로.


2. 하지만 일거리가 없어도 블루스 호에서 먹고자고 할 테니까, 매달 하숙비 내야 함.


3. 배신하거나 도망치면 그 즉시 폭발하는 전자목찌 착용하고 지낼 것.


4. 해당 계약은 4000만 크레딧을 변제할 때까지 지속됨.


‘이건 완전 노예 계약이잖아!’


계약서 파일을 아무리 살펴도, 이 각도에서 보고, 저 각도에서 봐도 부당한 계약 내용. 루비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냐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이원은 ‘수틀리면 폭발하는 전자목찌’를 꺼내며 담담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마음에 안 드나 보네. 그럼 그냥-”


“아... 아니에요! 너무 조건이 좋아서 그래요! 아하하하하!”


슥슥-


‘그래. 씨발! 좀비 안 된 게 어디야! 일단 살고 봐야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데!’


깊게 생각하지 말자며 바로 전자서명을 한 루비. 그녀가 자기 손으로 제 목에다가 붉은색 초커를 끼우자, 이원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축하한다 루비. 이걸로 너도 어엿한 블루스 호의 ‘선원’이니, 앞으로는 나를 선장님이라 부르도록.”


“... 네. 선장님...”


“굿. 바로 떠날 거니까, 짐부터 싸.”


“...”


말없이 책상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가 노트북이나 마사지기 등 자기 물건들을 챙기는 루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라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계약서 보는 거, 진짜 오랜만이네요.”


“응? 아. 맞아. 아라 너도 나 처음 만났을 때 저 계약서 썼었구나.”


“... 네. 그랬죠. 지금은 계약 끝난 지 오래지만.”


“와. 그러고 보니 벌써 너 만난 지 4년이나 지났네. 그 때 아라 너 완전히-”


“예... 옛날 얘기는 그만 하기로 해요. 전 루비 씨 짐 싸는 거나 도울게요.”


얼굴을 붉힌 채 자리를 뜨는 아라. 이원도 피식 웃으며 “그럼 나도 도와야지.”라 혼잣말하곤, 그 뒤를 따랐다.


덜컥- 덜컥- 스윽.


세 사람이 옷, 컴퓨터, 주변기기, 인형 등 필수품부터 자질구레한 물건까지 챙기며 짐을 싸던 와중에, 이원은 지하실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은색 상자 모양의 오르골을 발견했다. 이전에 루비가 구해주면 넘겨주겠다고 했던 아티팩트, [드림 캐처]였다.


“그냥 우리 거랑 아예 똑같이 생겼... 응?”


이리저리 [드림 캐처]를 살피던 이원이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오르골 바닥에 작게 새겨진 글자 때문이었다.


[ 외로움 ]


“... 우리 건 아마 ‘행복’이라 써져 있던 것 같은데...”


“선장님. 루비 씨 짐 다 챙겼대요. 슬슬 가죠.”


“어? 어. 응. 그래. 슬슬 가자.”


스윽-


아라의 부름에, 일단은 [드림 캐처]를 가방에 넣고 움직이는 이원이었다.


---


끼이이-


분명 집에 들어갈 때만 해도 둘이었는데, 문 밖으로 나올 땐 셋이 돼 버린 이원 일행. 좀비 시체들뿐인 황량한 거리에서, 이원이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이젠 뭐... 과아나크엔 더 이상 볼 일 없지?”


“선장님이랑 저는 그렇긴 한데... 루비 씨, 연락해 둬야 할 가족이나 친구 있어요?”


“네? 아... 아뇨. 없어요. 전 옛날부터 혼자여서...”


“잘 됐네. 빨리 돌아가자. 무슨 일 생기기 전에.”


끄덕-


이미 한 번 지나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만큼, 세 사람이 이동하는 동안 좀비가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물론 간혹가다 한두 마리 씩 튀어나오곤 했지만.


“으악! 씨발! 서... 선장님! 저... 저기! 조조조조좀비!”


“응? 저거? 고작 한 마리잖아.”


“워... 원래 좀비 영화 보면 한 마리 때문에 다 죽고 그런다구요- 으악! 저... 저기두 한 마리 더!”


“... 제가 처리할게요.”


루비가 과하게 호들갑을 떠는 걸 제외하면 별 일 없는, 무난한 여정이었다. 그렇게 우주선까지 절반쯤 되는 위치인, 거주구역 D-11의 중심부분을 지나갈 무렵.


[ 우주를 만두에 통째로 담았다! 태양의 맛! 쿄쿠미! ]


살아 있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은 도시에서 외롭게 광고를 재생하는 전광판의 모습에, 아라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정도의 바이오쇼크에도 아직까지 전기가 들어오는 걸 보면, 도미니티카 기술력이 확실히 좋긴 좋네요.”


“그렇... 지? 괜히 수십 개가 넘는 국가형 기업들 중에서 혼자 독보적으로 잘나가는 게 아니니까.”


“그럼 뭐 해요! 2주 동안 살려달라고 죽어라 SOS 쳤는데! 군부는 코빼기도 안 비치는- 흡!”


갑자기 루비의 입을 틀어막는 이원. 루비가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짓고, 아라가 뭔가를 인지한 듯 허리춤의 단검을 쥔 바로 그 때. 세 사람 주위에서 불기둥이 일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륵!


불길은 마치 의지라도 가진 것처럼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번져가더니, 이윽고 이원 일행을 원형으로 포위하는 형태를 갖췄다. 난데없는 기현상에 눈이 휘둥그레진 루비에게, 이원이 조용히 말했다.


“이거 아무래도, 루비 니가 그토록 오매불망 기다리던, 도미니티카 군부가 오신 듯한데.”


“... 으브븝?”


“도미니티카 각성자 부대네요.”


아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길 너머에서 확성기 음성이 들려왔다.


- 아아. 전방의 생존자들에게 알린다. 우리는 도미니티카 제국 제 6마법병단이다. 즉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면, 간단한 검사 이후 안전구역으로 이동시켜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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