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눈의 행성 (2)
29.
우주선 밖으로 나가면 개고생이라더니, 그말이 딱 맞다.
“어우. 씨발. 생각보다 더 춥네.”
행성 에브게니아 주거지역의 평균기온이 -16도다. 이곳은 심지어 적도 부근도 아니라 평균기온이 -30도는 될 것이다. 자유로움의 마나로 몸을 감쌌음에도, 존나 춥다.
[ 자유로움의 마나로 몸을 감싸면 냉기와 열기, 그리고 충격으로부터 몸을 감쌀 수 있다. 이를 행성 ‘얀워’에서는 호신강기(護身罡氣) 라 부르기도 한다. 호신강기가 일정 경지에 이르면 총알을 맞아도 아프지 않으며... ]
[빅 데이터] 피셜 그러하다. 하지만 개소리다. 아무리 마나를 두껍게 둘러도 총 맞으면 아프고, 더운 곳에 가면 덥다. 추운 데 가면 당연히 춥지. 마나는 만능이 아니고, 나의 의지를 대변할 뿐이다. 마나의 역할은 그저 충격을 몸이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것뿐이다.
자박- 자박-
어느새 마나석 광산으로 추정되는 첫 번째 부지, 그러니까 아까 내 분신이 정체불명의 놈들에게 뒤진 곳에 도달했다. 눈 속에는 나와 닮은 인형이 파묻혀 있다. 자아가 없는 분신이라 스스로 마나로 환원조차 못 한 것이다.
분신이 놈들 얼굴이라도 봐 놨으면 [빅 데이터]로 누군지 대충 파악이라도 해 놓을 텐데, 쓸모없는 분신 녀석. [누예티네]한테 당해서 그렇게 개죽음을 당해? 한겨울보다도 쓸모없는 분신이다.
아무튼 나는 분신의 사망 지점으로 다가간다.
"..."
내 분신은 진짜 사람 시체처럼 눈 속에 대가리를 쳐박고 있다. 심장 부근에는 총성의 결과물로 보이는 구멍도 하나 있다.
슈우우-
쓰러져 있는 분신에 손을 대자, 그제야 분신은 마나로 환원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분신이 먼지처럼 사라지는 동안, 난 주변 정황을 좀 살핀다.
“흠. 귀찮게 됐네.”
우선 주변 어디에도 총알은 없다. [마나건]이다. 구경은 11mm같은데... 탄흔만으로는 잘 모르겠다. JGN-2인가? 3인가? 아무튼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차피 암시장에서 나도는 무기는 JGN시리즈가 대부분이니까.
그나저나 의문이 하나 생긴다. 대체 뭐 하는 새끼들인데 사람을 이렇게 쉽게 쏴 죽이지?
“일처리하기 편하게 말이야.”
뭐, 그리 나온다면 나야 좋다. 나도 그런 방법이 더 쉽고 익숙하거든. 무엇보다 궁금증이 생겼을 때, 참아 줄 이유가 없다. 선빵은 놈들이 먼저 날렸으니까.
게다가, 추적하기 쉽게 눈 위엔 스노모빌 자국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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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돌아다니다 보니 저 멀리 검은 털의 이족보행하는 야크들, 그러니까 누예티네로 보이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움직임은 전혀 없다. 죽은 게 확실하다. 나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아니. 이런 고마운 녀석들이 있나...”
내 할 일을 이 녀석들이 대신 해 주다니 감격이다. 다만 울면 안 된다. 이 기온에서 울면 그대로 얼어버리니까.
나는 재빨리 반가운 시체를 향해 달려간다. 그러나 가까워질수록, 나의 기대감은 박살이 난다.
파스락-
누예티네처럼 보였던 것은 온통 털뭉치뿐이다. 몸, 몸은 어디 있지? 설마. 아니겠지. 나는 황급하게 주위를 살핀다.
허나 나의 기대감을 박살내기라도 하듯, 눈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발자국과 스노모빌 자국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아니 씨발! 몸뚱아리는 다 어디 갔어? 내가 에브게니아에 왜 왔는데!”
“에브게니아에 왜 오셨는데요? 선배? 아라 언니 의뢰때문에 온 거 아니었나요?”
“씨발! 깜짝이야!”
등에 맨 가방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순간 가방에서 무언가가 꿈틀대다가 튀어나온다. 그 정체는 링링의 스킬이자 자아를 가진 분신인 [페르소나]다. 비록 사이즈가 평소의 십분의 일 이지만 말이다.
“안녕하세요! 선배! 오랜만이네요!”
뜬금없이 등장한 [페르소나]는 꾸벅 인사를 하더니, 씨익 웃으며 말한다.
“절 걷어차고 목 자르고 하던 게 어제 같은데 말이에요!”
[페르소나]의 자아는 연속성을 띤다. 그러니까 죽기 전까지의 모든 경험과 기억들이 하나하나 누적되는 셈. 비단 눈앞의 1:10 비율 미니어처도 예외는 아니다. 사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왜 이게 내 가방 안에 있었냐는 것이다.
“너가 왜 내 가방에서 나와?”
“본체가 넣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왜 링링이 내 가방에 분신을 처넣었냐고!”
“그건 본체가 알 일이죠!”
고분고분한 유링링과는 달리 바락바락 대드는 [페르소나].
그것과는 별개로 분신이 자기 맘대로 내 가방 안에 들어갔을 리는 없으니, 유링링이 만들어 넣었다는 말이 당연하다. 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고용주로서 날 감시하기 위해?”
“생각하기 나름이죠.”
이거보다 합리적인 추론은 떠오르지 않는다. 멘토링으로 엮였다곤 하지만 나와 ‘이쪽 세계’의 링링은 서로를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친근한 사이가 아니다. 그런 내게 자기 분신을 붙였다는 건 감시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부터 내가 할 일들은, 아는 사람이 많아서 좋을 게 없는 일들이다. 나는 마나 사브르를 꺼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넌 여기서 죽어줘야겠다.”
“저 또 죽어야 돼요?”
“그래.”
“그럼 뭐 어쩔 수 없죠.”
[페르소나]는 죽음 앞에 담담하다. 애초에 연속성을 가진 [페르소나]기에 가능한 배짱이다. 죽더라도 어차피 링링이 만들어내면 다시 태어나는 셈이니까. 불사조나 라인하르트처럼 죽는 게 죽는 게 아니니까 가질 수 있는 용기다.
슈우웅-
마나 사브르에 힘을 불어넣자 푸른 검날이 나타난다. 딱 모가지를 베어버리려던 찰나, [페르소나]는 유언이라도 남기는 듯 눈을 감은 채 말한다.
“그런데 제가 죽으면 본체 링링이 걱정할 텐데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고작 분신을 왜 걱정해?”
“아뇨! 저 말고 선배 걱정을 할 거라고요!”
이 또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링링이 날 왜 걱정하냐. 우린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아는 한 링링이 만들어 낸 분신인 [페르소나]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거다.
“본체 쪽 링링은 지금. 선배... 제 분신 죽이지 말아 주세요... 라 하는데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냥 믿었다간 큰일 난다. [페르소나]는 ‘거짓된 말’만 안 할 뿐이지, ‘선배...’ 와 ‘제 분신 죽이지 말아 주세요...’ 사이에 어떤 말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이래도 저 죽일 거예요?”
“...”
“멘토링 때처럼 슥삭?”
고민된다. 유링링의 호감도를 얻느냐, 앞으로 내가 할 행동의 자취를 감추느냐의 이지선다다. 나는 짧게 고민하고, 결국 하나의 선택지를 고른다.
스으-
“잘 생각하셨어요!”
“... 젠장.”
내가 마나 사브르를 집어넣자, [페르소나]가 짤깍짤깍 박수를 치며 좋아한다.
유링링의 호감도를 고려해서 당장은 살려두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든 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이 소악마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나와 동행할 때 지켜야 할 한 가지 원칙을 일러두었다.
“대신 아무것도 하지 말고 닥치고 있어. 한번이라도 입 뻥긋하면 그대로 너는 목 잘리는 거야.”
“예!”
뭐. 심심할 땐 말동무로 쓸 수도 있겠지. 마나 파장이 높은 지역은 무전기도 종종 바보가 되곤 한다. 젠장.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나는 스노모빌 자국을 따라 열심히 발걸음을 옮긴다.
눈이 조금이라도 내리면, 강풍이라도 불면 이 흔적들은 도로 묻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악천후가 몰아칠 확률은 1%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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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분 정도 발자국을 쫓다 보니 주머니 속 [페르소나], 이하 짭링이 얼굴을 빼꼼 내민다.
“선배. 본체 쪽에서 교신이 왔어요. 뭐라 하냐면- 선배... 너무 멀리 가셨어요... 돌아오세요... 라는데요?”
멀리 왔다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나는 한낱 유아라의 돈을 빼먹고자 에브게니아에 온 게 아니다. [누예티네의 피]를 얻기 위해 여기까지 왔단 말이다.
[ 누예티네의 피 ]
[ 누예티네의 피에는 고농도의 알코올 성분과 다양한 속성의 마나들이 혼합되어 있어, 정제할 시 환각제로 쓰인다. 대부분의 우주연합 행성관리본부는 이를 마약으로 규정하나 극소수의 행성에서는 의사의 처방이 있으면 살 수 있는 약물로 간주하기도 한다. 중독성은 알코올과 비슷하며, 유해성은 알코올 미만이다. ]
마약류는 대체로 무게 대비 가치가 높은 편이다. 또, 가상화폐로 만들어진 [코인]은 어떻게 써도 거래 기록이 남지만, [누예티네의 피] 같은 물건은 거래 기록이 남지 않는다. 암시장에서 쓰기 적격인 물건인 셈이다.
이걸 얻기 위해 춥고 귀찮아도 에브게니아까지 왔는데, 아무래도 먼저 온 손님들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놈들의 자취를 따라, 계속해서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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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탕!
“엄마! 선배. 방금 들었어요?”
“들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눈 덮인 언덕 너머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내 분신을 쏜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면상이나 보고자, 흰 파카의 모자를 덮어쓰고 눈 속에 몸을 숨긴 채 언덕 위로 접근한다. [마나건]을 든 다서 명의 무리가 누예티네에게 총질을 하고 있다. 밀렵꾼이 확실하다.
-훔바!
가슴팍에 구멍이 난 누예티네 한 마리가 흰 눈 위로 쓰러지며 선혈이 낭자한다.
“잡았다!”
“타이링!”
“예. 대장. 가요.”
팍- 팍-
밀렵꾼 중 한 놈이 눈을 헤치며 헐레벌떡 시체로 다가간다. 환부에는 [지혈용 젤]을 들이붓고, 새어나오는 피는 한 방울이라도 흘릴세라 병에 담는다.
지혈용 젤이 환부를 꽉 채우며 지혈이 완료되자, 한 명이 더 다가가 침낭 크기의 대형 가방에다가 누예티네의 시체를 담는다. 녀석들은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 채지 못한 채, 누예티네가 담긴 가방을 스노모빌에 달린 짐수레에 옮기며 말했다. 짐수레 위에는 못해도 열 개의 가방이 놓여 있다.
“안 되겠어. 대장. 이만 돌아가자. 나 발에 동상 걸릴 것 같애!”
“아직 멀었어. 하루에 열다섯 마리 몰라?”
[ 장쯔하오 ( 44세 ) ]
[ 미래의 이명 : 없음 ]
[ 마나량 ; 0 ]
[ 마나의 속성 : 없음 ]
대장이라 불린 녀석은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이다. 대장뿐만이 아니다. 다섯 놈 모두 일반인이다. 하긴 뭐, [마나 건]을 사용할 때부터 예상은 했다. 비싸기는 더럽게 비싼데 마나량 500이면 커버되는 [마나건]을 쓰는 각성자는 많지 않다.
JGN시리즈가 싼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유로움의 마나석’이 장착되어 있으니 몇 억 코인은 가볍게 호가한다. 물론 무기류는 우주연합이 통제하는 물품 중 하나이기에, 암시장에서나 구할 수 있는 물건이다.
“아. 진짜 며칠 동안 뼈빠지게 일했는데, 오늘은 좀 쉬자! 대장!”
“고작 5일 일해 놓고 우는 소리야!”
“대장. 나도 쉬고 싶은데.”
“맞아. 나도 오늘은 쉬어야겠어! 그냥 내일 스무 마리 잡자고! 돌아가서 피나 뽑자!”
“이... 이 새끼들 왜 이래?”
장쯔하오, 그러니까 대장 노릇을 하는 녀석은 자기 무리에서 여기저기서 불만이 튀어나오자 당황하기 시작한다. 멍청한 녀석. 이럴 땐 한 명 두들겨 팬 다음에 다시 한 번 말해 봐라 해야 하는 게 무리를 통솔하는 기본적인 방식인데.
“대장! 안 가면 나 진짜 뭔 짓 할지 몰라!”
“나도.”
“... 알았다! 오늘은 이만 철수! 캠프로 복귀한다!”
결국 대장이라는 자기 부하들의 등쌀에 못 이겨 두 손 들고 말았다. 우두머리의 무력이 졸개들을 압도하지 못할 때 나오는 현상이다. 만일 저 자리에 있는 게 박준 사부였으면 말대꾸한 녀석들 팔다리를 다 잘라 놓지 않았을까?
“누예티네들 다 실었지!”
“보면 몰라?”
“그래. 나도 모르겠다. 대신 내일 스무 마리는 무조건이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고. 대장.”
부아아앙!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설산을 넘는 스노모빌. 밀렵꾼 녀석들이 자취를 감추고 나서야, 나는 털모자 위에서 모든 걸 관찰한 링링의 [페르소나]에게 묻는다.
“야. 짭링. 당연히 따라가야겠지?”
“잠시만요. 선배.”
[페르소나]는 잠시 눈을 감고 양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다가 입을 연다.
“본체가 말하길, 아라 언니랑 실장님은 가지 말라는데요?”
뭐. 링링 본인도 내가 따라지 않길 원하는 눈치니 사실상 3:1이다. 하지만 내 알 바 아니다.
“그래? 그래도 갈 거야.”
“본체가 너무 무모하다는데요?”
“야. 너 점점 대충 전한다?”
“본체랑 이제 꽤 멀리 떨어졌잖아요. 이곳 주변에 있는 마나 파장들의 간섭도 있고.”
“... 아무튼 무모한 일 아니라고 전해라. 절대 다칠 일 없다고. 참나. 링링도 내가 한겨울처럼 무모한 멍청이인줄 아네.”
나는 무모한 짓 하지 않는다. ‘저쪽 세계’의 유아라? 죽었다. 유링링? 오래 살아남긴 했지만 죽었지. 김명민? 죽었겠지? 하지만 난 살았다. 살아서 ‘이쪽 세계’까지 왔다. 살아남는 스킬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는다. 애초에 [마나건]따위나 쓰는 쓰레기들에게 죽을 가능성은 개 코딱지만큼도 없다.
“선배. 대체 왜 저 녀석들을 따라가시려는 건데요?”
“... 세계의 운명을 위해서.”
“예? 세계의 운명이요? 선배 어디 아프세요?”
“죽을래?”
“아뇨. 지금은 죽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럼 가만히 있어.”
“넹.”
[페르소나]는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한다. 아무튼 나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 마나를 되찾았습니다. ]
[ 마나량 : 2238(-22952) ->2248 (-22942) ]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마나가 되찾아졌으니까. 물론 세계의 운명 따위는 관심 없고, 내가 원하는 것은 닷새나 모았다는 [누예티네의 피]다.
자박-
나는 스노모빌의 자국을 따라,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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