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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내 힘 돌려줘요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완결

가시멧돼지
작품등록일 :
2021.09.03 13:06
최근연재일 :
2022.11.14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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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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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25. 프롤로그 (2)

DUMMY

25.


“자네, 내가 이번이 몇 번째 삶이라고 생각하나?”


“...”


“이번이 무려 3507번째 삶이네.”


이 한 마디를 필두로 라인하르트는 술 취한 노인네마냥 장황하게 자기 인생썰을 풀기 시작했다. 별로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남이사 몇 번을 살던 어떻게 살던 내 알 바 아니니까.


아무튼 말재주 없는 라인하르트가 3시간이 넘게 이야기한 것은 3문단으로 짧게 요약이 가능할 것 같은데, 아마 그렇게 한다면 1문단은 자기 능력 설명일 것이다. 라인하르트의 능력은 [환생]이고, 이는 죽으면 다른 평행세계에서 다시 태어나 새 삶을 시작한다고 한다. 그 과정 속에서 기억이 유지된다는 것, 이게 20분 동안 말한 내용이다.


2번째 문단은 자기 신변잡기. 기억을 유지하면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는 [환생]을 거듭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칠순잔치를 해 본 적이 없다는 것. 그러니까 뭘 어떻게 해도 [공통사건]인 [1차 기업대전]의 끝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에 대한 하소연이다. 이게 40분짜리 이야기.


제 3부는 교장이 된 이유. 결국 그렇게 한 500번 쯤 죽고 나니까, 미래를 뚫기에는 라인하르트 본인의 힘만으로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해 온 우주의 인재가 모이는 이니시움 아카데미의 교장이 되어 그 이후의 세상을 보여줄 사람을 물색하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 이게 2시간이 넘는다.


그 2시간에는 매 평행세계마다 이니시움 아카데미에 오는 녀석들은 다 거기서 거기라 아카데미 내의 모든 학생들을 다 외워버렸다는 신변잡기나, 50번의 환생 끝에 영원의 마나가 어떤 것인지 파악했네 마네 하는 자기 자랑 같은 쓸데없는 내용들로 가득했다.


결론은 뭐 처음 말한 대로, 내 알 바 아닌 이야기였다. 나는 심드렁하게 짧은 감상평을 남겼다.


“결국 이번 생애에서는 칠순잔치를 하기 위해 절 좀 이용해 먹겠다, 이 소리 아닙니까?”


“역시 머리가 비상하군.”


“머리가 이상하지만 않으면 누구나 낼 수 있는 결론 같습니다.”


“그런가? 허허. 사실 처음엔 박준이 내게 미래를 보여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더군. 아무튼 그런 이야기였네.”


젠장. 불러낸 건 나인데 어느새 라인하르트의 페이스에 말려 있다. 이래선 안 된다. 라인하르트가 내게 매달려야 놈이 가진 정보를 다 이끌어낼 수 있다.


“참 안타깝게 됐습니다.”


“무엇이?”


“저는 박준 사부와 달리 ‘이쪽 세계’에서 열심히 살 생각이 없습니다. 라인하르트 교장 당신을 위해 살 생각은 추호도 없고요. 열심히 놀다가, 살 수 있는 데까지만 살고 죽을 겁니다.”


“그러도록 하게. 뭐. 자네 인생은 자네가 사는 거지. 뭐 자네야 입소식때부터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 이게 아닌데.


“늙으면 기다리는 것만 잘해진다네. 이번 생에서 칠순잔치를 못 하면, 난 또 3000번의 삶을 살 것이네. 개중 몇 번은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 보려 하다가, 또 실패할 거고. 그럼 언젠가 또 자네 같은 변수가 있는 평행세계에서 태어나는 날이 오겠지. 그 때 또 실패하면 또 3000번을 죽으면 되네. 그럼 언젠가 그 끝을 보겠지.”


젠장. 라인하르트가 아는 몇 가지 정보들을 빼 가려 했는데, 협상의 여지가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협상을 시도하면 할수록 내가 손해 보는 구조가 될 것이다.


“뭔가 도움을 바라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자네에게 알려줄 것이 별로 없네. 이니시움의 학생이라면 당연히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나아갈 줄 알아야 하지. 내가 아는 것은 어차피 [1차 기업대전]까지뿐이고, 그 뒤의 일은 아예 모르지. 내 정보에 의존했다간 그 이후의 미래로 나아가지 못할 걸세.”


아. 난 그 이후의 일을 안다. [1차 기업대전]이 끝나고도 나는 계속해서 싸워왔으니까. 이 사실을 미끼로 쓴다면 라인하르트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의 일을 저는 압니다. 궁금하시다면...”


“알고 있네. 자네가 평행세계를 건넜다는 사실만 봐도... 대충 짐작은 가지. 3000번의 생을 살아가며 그 이후엔 어떤 일이 있을지 상상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으니까. 하지만 스포일러는 하지 말게. 미래는 내 두 눈으로 보고 싶으니까.”


라인하르트는 뜸을 들이다,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오늘 마윤재 부장이 한 [전쟁 선포]도 처음 보는 일이었네. 재미있는 전개야. 이번 생애는 벌써부터 즐겁군. 여태껏 그 어떤 세계에서도 [세르부스 분리독립 내전] 이전에 이런 사건이 있던 적은 없었는데 말이지...”


“...”


“허허. 너무 내 말만 한 것 같군. 그래서 이 생각보다 더 늙은 노인네를 부른 이유가 뭔가?”


젠장.


아무 소득도 없다. 대화 내내 라인하르트에게 휘둘리기만 했을 뿐 내가 얻은 것은 개 코딱지만큼도 없다.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내를 애써 삼키며, 당장은 조금 참는다.


“그냥 산책이나 하고 싶어서 불렀습니다.”


“허허. 이런 늙은이랑 산책하면 재미없을 텐데.”


“정말 재미없었네요. 한 바퀴 다 돌았으니,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기숙사로 향한다. 라인하르트에게 비굴하게 무언가를 묻는다면, 그도 나를 이용해야 하니 알려주기는 할 것이다.


“그냥 가나?”


“예. 들어가시지요.”


그런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건 치킨 게임이다. 내가 비굴하게 들어간다면 그 이상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아마 라인하르트가 원하는 대로 휘둘리게 되겠지. 나는 누군가의 짐 나르는 당나귀로 살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허허. 늙은이의 말상대를 오래 해 주었으니, 재미있는 사실 하나 듣고 가지 않겠나?”


도박은 항상 절박한 쪽이 잃기 마련이다. 순간 웃음이 새어나왔지만, 라인하르트를 향해 몸을 돌렸을 땐 이미 못 미덥다는 표정을 완성한 상태였다.


“또 별 거 아닌 내용이겠죠.”


“별 거 아니라니, 무려 500번의 환생을 거듭하며 연구한 끝에 알아낸 것이라네. 바로 자네가 가진, 모순의 마나에 대한 것이지.”


남의 속성은 왜 다 까발리고 그러는지. ‘이쪽 세계’에서 내 마나 속성은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라인하르트는 ‘저쪽 세계’의 나를 알고 있으니 당연히 내 마나 속성을 모를 리가 없다.


“자네는 평행세계를 넘으며 대부분의 마나를 잃었을 거야. 그렇지?”


“...”


이건 좀 숨기고 싶었던 것이지만. 뭐, 이미 들켜버린 것 같으니 어쩔 수 없다.


“내가 자네를 처음 본 이후로 나는 모순의 마나라는 것에 몰두했네. 그 비밀을 밝혀내는 데만 무려 500번의 환생, 그러니까 무려 30000년의 시간이 걸렸지. 나 말고도 먼저 연구한 사람들이 있는 것 같지만... 아무튼 나는 자네가 잃어버린 마나를 되찾는 방식을 알고 있네.”


“마나를 되찾는 방법... 저도 이미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허허. 역시 젊은 사람이라 그런지 빠르구먼. 그럼 어디 그 방법을 들어나 볼까?”


“특정한 사람들의 호감도를 얻으면...”


“호감도? 하하하하하!”


라인하르트가 시원하게 웃어제낀다. 평소의 허허처럼 가식적이고 여유를 포장하기 위한 ‘교장’으로서의 웃음이 아니라, ‘라인하르트’로서의 웃음이다.


너무 웃어서 그만 눈물까지 훔친 라인하르트에게, 나는 불쾌감을 꾹 누른 채 묻는다.


“그렇게 크게 웃을 정도로 틀렸습니까?”


“사실 아주 틀리진 않네. 호감도를 얻어서 마나를 되찾을 수야 있겠지. 그런데 접근이 잘못됐어. 마나는 곧 의지, 의지는 곧 마나라는 간단한 사실에 기인해서 생각했어야 하지 않나 싶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퀴즈네. 물질이자 에너지인 게 있나?”


거 참 퀴즈 좋아하는 노인네다.


아무튼 [마나문학의 이해]를 들은 나로서 이게 은유란 걸 모를 리가 없다. 물질은 ‘질서의 마나’이고 에너지는 ‘자유로움의 마나’다. 둘 다 물리축의 양끝에 있는 마나다. 어떤 존재도 질서와 자유로움을 동시에 쓰진 못한다. 나를 빼고.


“없습니다.”


“그 다음 문제. 참거짓이 확실하면서 참거짓이 둘 다 아닌 것은?”


역시 논리축의 ‘진리의 마나’와 ‘허상의 마나’를 일컫는 것이다. 역시 진리와 허상을 동시에 쓰는 사람은 없다. 나를 빼고.


“역시 없습니다.”


“변화하면서 영원한 것은 또 뭐가 있지?”


“... 없습니다. 대체 말하고자 하는 본질이 뭡니까?”


“셋 다 틀렸네! 바로 자네가 있지 않나. 질서와 자유를 동시에 쓰고, 진리와 허상을 공존시키며 변화와 영원까지 쓰는 이상한 존재가 말이야! 모순의 마나는 그런 거네. 세계의 의지를 거스르는 마나, 본질적으로 존재해서는 안 되는 마나지. 자네는 그런 ‘모순의 마나’를 타고났어.”


라인하르트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이것은 이상을 동경하는 소년의 눈빛이었다. 넘어가서는 안 될 산, 한 번도 넘어보지 못한 산의 건너편을 꿈꾸는 소년 말이다.


“이 우주에서 가장 강한 의지가 무엇인지 아나? 바로 [공통사건]이야. 어떤 평행세계든 [공통사건]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순 없지. 이것은 개인이나 일개 집단이나 인류라는 하나의 종(種)이 막으려 해서 막아지는 사건이 아니야. 온 우주에 퍼진 마나가 세상이 그렇게 흘러가도록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지.”


삼천 번이 넘도록 산을 넘어보려 한 소년이지만, 단 한 번도 그 산을 넘어본 적은 없다. 그래서 더욱, 그 소년은 산 너머의 세상을 동경한다.


“모순의 마나는, 그 세계의 의지에 반발할수록 강해진다네. 자네가 마나를 되찾았다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의 호감도를 얻었다는 게 아니야. 그 호감도가 확정된 세계의 미래, 그러니까 [공통사건]을 바꾸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그래서 소년은 마음을 바꾸었다. 건너편의 세상에 다다르는 것이 본인이 아니어도 좋다. 스스로의 발걸음이 아닐지언정 그게 대수인가.


“...”


“자네가 힘을 되찾는 방법은... 바로 세계의 운명을 바꾸는 것일세.”


소년은 단지, 건너편에 있는 세계에 누군가 다다르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눈을 빛낸다. 그가 여태껏 3000번이 넘는 삶을 살아온 이유는 단지 저 산 너머의 세상을 동경했다는 게 느껴진다.


그런 라인하르트를 보며, 나는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아. 이 노인네 역시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되게 시대에 안 맞게 열혈이구나...’라고.


“나는 믿네. 내가 뭘 하지 않아도, 자네는 내게 미래를 보여줄 것이라고. 적어도 자네는 미래에 도달할 것이라고.”


허나 또 한편으론 생각한다.


라인하르트가 말한 게 사실이라면, 한 마나량 3000정도만 회복하면 바로 [공통사건]에서 발 빼야겠다고.


세계의 운명 따위, 내 알 바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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