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실기 (1)
12.
“뭐?”
순간 한겨울에서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전학?
왜 갑자기? 뭘 했다고? 이렇게 밥도 주고 집도 주는 좋은 아카데미가 있는데.
“오윤서랑 김명훈, 전학갔다고. 오류 시나리오가 좋은 핑계거리였겠지. 걔네나 걔네 부모한테나.”
... 점잖게 생각해 보면 이해가 안 가는 행위는 아니다. 두 사람의 판정은 아직 C이고, 마나에 대한 이해도도 낮다. 2학년 2학기로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학기말평가에서 가지치기 당했다는 기록이 남을 바에, 그냥 일선상의 이유로 전학 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실기평가는 또 위험하기까지 하니, ‘오류 시나리오’라는 명분이 있는데 안 나갈 이유도 딱히 없다.
이니시움이 최고의 아카데미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카데미가 이니시움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행성별로 하나씩은 있다. 급이 많이 다르지만.
“그렇구만. 안 됐네.”
“안 되긴 뭐가 안 돼? 하긴, 걔넨 어차피 안 될 애들이야. 2학기로 넘어가지도 못할걸.”
그건 동감이다.
그런데 한겨울 너도 당신도 C판정에다가 간당간당하지 않았냐?
한편 한겨울은, 그저 이를 갈며 첨언한다.
“싸우지도 않고 도망친다는 거만 봐도 알 수 있어. 애초에 걔넨 마인드부터가 글러먹었어. 쓰레기들.”
“...”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내 심장을 후벼 파는 듯한 멘트다. 하지만 네가 뭐라 하든지간에 나는 [공통사건]들에 맞서 싸울 생각은 없다. 이미 한 번 실패한 나는 이제 놀 생각밖에 없다.
“그래서... 새로운 조원들은 누구야?”
“새 조원 같은 소리 하네. 이제 우리 조는 너랑 나 둘뿐이야.”
“뭐?”
“귀 먹었어? 이제 한 학기동안, 앞으로 실기는 너랑 나 둘이서만 해야 한다고.”
순간 당황했지만, 말이 된다.
마나 연구와 학문의 발전도 좋지만, [이니시움 아카데미]가 설립된 가장 큰 목적은 어디까지나 헌터를 비롯한 ‘싸우는 자’들을 양성해내는 것이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은 기업에 고용되어 뮤턴트들과 죽도록 싸울 것이고, 나아가 기업간의 분쟁이 있으면 전쟁에 동원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실기평가라는 것은 결국, 앞으로 현장에서 얼마나 잘 해 나갈 수 있을지를 보는 평가.
임무 수행 도중 조원 누군가가 죽어나가며 인원공백이 생기는 것은, 현장에선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말이 되는 처사다.
“어차피 걔네 둘, 있어봤자 별 쓸모없어. 인원이 부족한 조는 점수 보정 있으니까 차라리 이게 나.”
한겨울도 오히려 잘 됐다는 듯한 표정이다.
한겨울 역시, 2학기로 가는 길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겠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결의’라는 게 담겨 있다.
“너... 힘들겠다.”
“뭐가.”
“이제 니가 3.1인분 해야 하잖아.”
“...”
물론 한겨울의 결의 따위, 내 알 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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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행성을 쑴풍쑴풍 찍어내는 시대라지만, 아무래도 입지라는 게 있다.
비싼 돈 들여 인조 행성을 만들어 놨더니, 이주자가 적어 본전치기도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최대한 테라포밍 예산이 적게 들 만한 위치의 행성을 찾아내야 한다.
그 입지라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궤도의 중심 빛과 열을 공급해 줄 항성의 존재여부다.
그런 항성을 일컫는 말은, 이미 고유명사로 정해져 있다.
“태양이 원망스럽다...”
태양. 지금 날 괴롭히는 존재다.
봄인데도 왜 이리 쨍쨍하냐. 아카데미 중앙에 있는 공원 벤치에서 깨어난 나는, 슬금슬금 기숙사로 향한다.
[ C-1701 ]
“후우.”
어느새 ‘내 방’ 앞에 선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한다.
그리고 결의를 담아, 최대한 조용하게 방문을 열어본다.
“...”
수마의 늪에 빠지신 박준 사부. 아니, 저런 인재가 대체 왜 기숙사에서 놀고 있는 거야? 빨리 기업들이 사부에게 의뢰를 주기를 기도하며, 요즘 신세를 지고 있는 공원 벤치로 돌아온다.
어차피 실기는 오후니, 오전 일정이 뜬다.
“젠장. 씻지도 못했네.”
벤치에 누워서, 옷 냄새를 맡아 본다. 조금은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이거 돈 주고 [수행관]의 샤워실이라도 돌아야 하나.
아니, 미쳤다고 500코인이나 들일 이유는 없지. 땀 흘릴 일을 사전 차단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어제는 땀을 좀 흘려야만 했다. 한겨울의 등쌀에 못 이겨 [수행관]의 모의 던전을 3개나 돌았기 때문이다. 평판을 신경쓰다보면 이렇게 쓸데없는 데에 휘둘린다. 젠장. 물론 난이도는 D 이하의 것들이었다.
나는 한겨울 그 무모한 년 성격을 생각하면 C를 고집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하긴 모의 던전에서 다쳐가지고 실기를 실패할 정도의 얼간이는 아니지.
아. 한겨울 하니까 또 생각난 건데, 얘 생각보다 실력이 괜찮... 아니, 아주 쓰레기는 아니었다.
0.9인분만 하느라 너무 심심해서, 한겨울이 싸우는 걸 조금 관찰해 봤는데 의외로 봐줄 만 했다. ‘싸우는 자’는 어려운 적을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쉬운 적들을 얼마나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처리하는지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 점만 놓고 봤을 때 한겨울은 100점, 아니 99점은 줄 수 있다.
마나량은 확실히 적은데, 마나 운용에 군더더기가 없다고 해야 하나? 디테일로만 치면 [이치를 깨달은 사수] 정예원과도 비슷한 수준이다.
그럼 뭐 하나. 싸우는 방식이 너무 무모하다.
한겨울은 마법사임에도 마검사(魔劍士)처럼 싸운다. 탱크처럼 전진밖에 할 줄 모른다.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치는 겁쟁이는 되지 않겠다며 그러나 본데, 내가 볼땐 그냥 비효율이다.
그게 다가 아니다.
“화염계 마법이라는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도 큰 문제지...“
“허허. 거 참 심각한 일이로군. 누구 얘기인가?”
... 마법사 모자가 태양을 가리며, 내가 있는 자리를 음지로 만들어버린다.
아카데미 내 최강의 컨셉충, 아니. 교장 유피스텔 라인하르트다.
나는 그대로 누워 답한다.
“저희 반에 있는 어떤 애 있습니다.”
“흐음... 2학년 [질서]반의 화염계라... 성영훈이나 한겨울, 둘 중 한 사람이겠군. 허허.”
애들 디테일까지 파악하다니, 교장이라는 직책은 정말 어지간히 할 게 없나 보다.
“좀 걸을까?”
“귀찮지만... 예. 그럽시다.”
“...”
뭐, 시간 때우기로는 충분하다.
그리고 평판을 고려하면, 교장 말 거역해서 좋을 것도 없다. 설마 산책 가지고 땀이 나진 않겠지.
딱. 딱.
라인하르트 교장이 고목나무 지팡이로 땅을 짚는 소리가 시끄럽다. 좀 안 했으면 좋겠건만, 나는 예의바른 학생이라 그런 걸 일일이 지적하지 않는다.
“자네는 왜 겨울 양이 화염계가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성영훈일수도 있죠. 이번에는 안 속습니다.”
“허허... 자네 실기 조를 알고 하는 말일세.”
“... 한겨울 적성이 화염계랑 안 맞습니다.”
“안 맞는다 함은?”
“화염계는 디테일보다 마나량이지 않습니까. 디테일을 할 거면 전류계로 가야죠.”
“호오... 근거가 있나?”
“그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화염계는 열에너지라 디테일 챙기려면 [마나-엔트로피확산식]을 적용해야 하는데, 그건 할 줄 아는 사람이 사실상 전무한 반면 전류계는...”
아차.
또 낚였다.
“허허... 그 마나-엔트로피확산식이 증명되려면 아직 3년도 더 걸릴 것으로 보이는데...”
“... 수업 빠졌을 때 인터넷에서 봤습니다.”
“인터넷에는 아직 증명중인 이론들이 많이 올라오나 보군. 허허...”
“인터넷이라는 곳이 원래 그런 곳 아니겠습니까?”
이 씨...
땀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산책 안 하는 건데.
“겨울 양에게 전류계로 전향해 보라고 조언해 줄 생각은 없는가?”
“제가 그래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허허. 그런가? 멘토 신청을 했다기에, 나는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는 데 취미가 있는 줄 알았네.”
“아니. 죄송하지만 제 스토커십니까?”
“스토커는 좀 그렇고, 팬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네. 사실 나 말고도 많은 교수들이 자네를 주시하고 있지. 물론 그들은 좋지 않은 쪽으로 보고 있지만 말이야. 허허.”
교수들이 날 주시한다고? 대체 왜? 아니. 알 법 하다. 학기 초에 거하게 저질러 놨으니까.
“아무튼... 겨울 양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으로 보이네.”
“생각은 해 보겠습니다. 내키지는 않지만.”
“어리구먼. 더 기다려야 하나... 허허.”
왜 시비지? 교장만 아니었으면 한소리 했을 것이다.
“이 늙은이는... 자네에게 많은 걸 기대하고 있네. 혹시나 하는 마음이지. 이번 생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그게 무슨...”
“허허. 이만 들어가 보겠네. 자네도 빨리 가 보게, 실기평가에 늦으면 안 되지 않겠는가.”
라인하르트는 그렇게 제 할 말만 하고 교장실로 돌아간다. 정말. 예의없는 늙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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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 [질서]반 교실.
“웬일로 반 전원이 한데 모이나 싶었는데, 그새 두 명이 전학 가 버렸군.”
핸슨 최 교수가 나를 노려보며 말한다. 뭐. 여태껏 아침조회나 종례라는 건 다 빠졌으니, 핸슨 최 교수가 저러는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석봉이나 유링링과 보내는 게 조회와 종례보다 힘을 되찾는 효율면에서 비교가 안 되니, 앞으로도 조회나 종례는 올 생각 없다.
“다들 3월 3주차, 실기평가를 치를 준비는 됐겠지? 미리 공지했듯, 이번 주제는 [청소]다.”
“예!”
“호명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와라. 1조, 성영훈, 김건모, 이헌철, 장영희.”
네 명의 아이들이 앞으로 나와 워프 키트를 받아간다.
“너희들이 투입될 곳은, 행성 큐브릭의 [루드비코 동물원]이다. 건투를 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출발해라.”
“예!”
4명의 학생들이 [워프 키트]랑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행성간 순간이동 키트]의 버튼을 누르자, 일제히 빛무리와 함께 사라진다.
이것이 [이니시움 아카데미]의 실기평가인가.
하긴, [빅 데이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실기평가]
[ 아카데미의 생도들은 우주 전역에 문제가 생긴 지역으로 이동해서 실제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이 때, 이동에는 ‘우주연합’이 제공하는 행성간 순간이동 키트를 이용한다. ]
[ 물론 [기여도]를 측정하기 위해 생도들의 행동들은 모두 촬영되고 있기에, 위험에 처하면 바로 담당 교수가 이동해서 도움을 주기도 한다. ]
[ 하지만 미해결 뮤턴트 발생지역, 즉 던전과 뮤턴트는 언제나 모르는 것이다. ]
[ 1학년 400명이었던 아카데미 생도들이 2학년때는 200명으로 간추려지고, 3학년때는 50명밖에 남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아카데미 내에서 걸러내기만은 아니다. 실제로... (더보기) ]
[ 자세한 정보를 열람하시겠습니까? ]
뭐, 더 알 필요는 없다.
어차피 위험하다 해 봤자 학생 수준 이야기. 현재 내 마나량은 고작 400 언저리지만, 운용하는 실력까지 생각하면 800이라고 쳐도 무방하다.
“다음, 5조. 한겨울, 권민성.”
이번엔 내 차례다. 한겨울도 자리에서 일어나 교탁으로 향한다.
“너희들은 행성 과아나크의 [퍼플호크 파크]로 이동할 것이다. 건투를 빈다.”
“예!”
“예.”
“받아라.”
핸슨 최 교수가 [행성간 순간이동 키트]를 건넨다. 그의 표정이 미묘하다.
“너에게는 정말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권민성.”
“아. 예.”
“학년 수석과 12등이 한 조이니, 둘이어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럼, 바로 출발해라.”
“예!”
“...”
핸슨 최의 표정에서 비웃음 비슷한 게 느껴진다. 한겨울이 [행성간 순간이동 키트]를 사용하자, 밝은 빛이 교실을 가득 채운다.
나는 그 틈을 타, 주머니 속의 [순간이동 키트]를 사용한다. 어차피 행성간 순간이동을 할 때 생기는 에너지 로그는 비슷하게 기록될 거다.
굳이 우주연합의 물건을 써서, 생체 데이터 따위 넘겨줄 이유는 하등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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