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리안의 왕도
라슬론은 이를 악물었다.
창과 검이 서로 교차했다.
불꽃이 튀기며 수십 번이 넘도록 충돌했다.
‘괴물이야. 말을 타고 또한 수호의 깃발을 들고도 이기지 못하고 있어.’
라슬론은 오스칼을 평가했다.
반대로 오스칼 또한 놀란 눈빛을 내비쳤다.
‘젊은 나이에 이 정도 실력이라니.’
둘은 마주 봤다.
서로 싸움을 시작한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오렌 왕자가 도망칠 시간.’
‘오렌 왕자님이 빠져나갔을 시간.’
서로의 생각이 일치했다.
라슬론은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왕자를 놓치게 된다면 솔리안은 또다시 혼돈에 빠지게 된다.
‘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
라슬론은 성력을 끌어올렸다.
한 손으로는 말고삐를 잡고, 다른 한 손에는 수호의 깃발을 들었다.
실력으로도, 경험으로도, 모든 게 오스칼이 압도적이다.
이대로라면 이기지 못한다.
그렇담.
‘목숨을 내걸고 싸울 수밖에.’
라슬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이 투레질했다.
눈을 번뜩이며 오스칼을 노려보고 달려들었다.
‘어리석군.’
오스칼은 상대가 조급해하는 걸 느꼈다.
초조함이 빈틈을 만들었다.
‘끝이다.’
오스칼의 마나와 검이 일체가 된다.
오러가 담긴 검이 번쩍였다.
라슬론이 달려오는 방향을 향해 오스칼도 달려나갔다.
창이 날아온다.
오스칼이 허리 숙여 피했다.
아슬아슬하게 뺨을 찢고 창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오스칼의 검이 번뜩이며 섬광과 함께 라슬론이 타고 있던 말과 그의 어깨를 베어냈다.
오러 블레이드가 두부 자르듯 두 생명체를 잘라버렸다.
피가 튀며 시야가 잠시 가려지는 가운데, 오스칼은 시선을 올렸다.
라슬론은 괴로움이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식은땀을 흘리며 미소 짓고 있다.
말고삐를 잡았던 손을 놓고, 어깨가 잘려 놓쳐버린 창을 반대편 손으로 움켜잡았다.
‘설마?’
오스칼은 얼어 붙어버렸다.
“내가 이겼소.”
라슬론은 창을 오스칼에게 찔러넣었다.
* *
왕궁의 지하 비밀 통로.
짙은 피 냄새가 났다.
오렌은 겁에 질려 있었다.
말고삐를 쥔 채 말의 배를 계속해서 걷어찼다.
좀 더 빨리, 왜 더 빨리 가지 못하는 거냐고!
어느새 비밀 통로 속의 비명이 멈췄다.
비밀 통로에 있던 이들이 죽거나 멀어진 거겠지.
오렌은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아니, 용기가 없었다.
오렌은 입을 벌려 비명을 토해냈다.
그때, 말이 계단을 보지 못해 발굽이 서로 엇갈렸다.
오렌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낙마했다.
철퍼덕.
그대로 돌계단에 허리가 맞았다.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기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렌은 앞을 바라봤다.
천장이 보인다.
사각형의 옅은 빛줄기.
입구다.
오렌은 급히 손을 뻗었다.
계단을 짚었다. 기어서 천장에 도달했고, 천장 문을 열었다.
보이는 건 왕실 도서관이었다.
“사, 살았···!”
그때, 오렌의 머리카락을 누군가가 움켜잡혔다.
뒤를 돌아봤다.
오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이거 놔! 놓지 못해. 내가 누군 줄 알고! 나는 솔리안의 왕족이다. 왕이 될 자라고. 아니, 왕이다!”
“알고 있기에 놓지 않는 거다.”
유마는 오렌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오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었다.
부하 따위는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는 거겠지.
또한 꼴사납게 낙마하고 얼굴이 엉망이 되었어도.
휘황찬란 한 옷에 의지해, 왕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이놈은 살아도 결국 왕에 대한 집착으로 다시 전쟁을 일으킬 놈이었다.
“네놈이 해줘야 할 일이 있다.”
그래, 오렌 왕자의 역할은 따로 있다.
왕족의 책임.
이 전쟁을 종결시킬 방법.
그건 오렌 왕자가 모두의 앞에서 심판받는 일이었다.
그렇담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도 체념하겠지.
살고자 저항은 해도, 의지가 꺾여버릴 것이다.
유마는 오렌의 머리카락을 잡고 질질 끌었다.
“으아악! 감히, 감히-!”
도서관 문이 열린다.
하인과 하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까아아악!”
“와, 왕자님!”
하지만 그 누구도 달려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겨, 경비병!”
오렌이 소리친다.
“경비병ㅡ!”
오렌의 피를 토해내는 목소리가 울린다.
복도 끝에서 경비병들이 들어섰다.
석궁을 겨누고, 창을 움켜쥔다.
“오, 오렌 왕자님!”
“네놈은 누구냐. 지금 당장 왕자님을 풀지 못해!”
경비병들 거리를 벌릴 뿐, 그 누구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상대가 왕자를 인질로 잡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불길한 예감이 사로잡혔다.
상대는 왕궁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담 외부의 침입자.
그것도 왕자를 잡고 있다.
혁명군이 왕자를 잡은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 전쟁은 끝났다.’
경비병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마는 걸음을 옮겼다.
왕궁의 가장 높은 곳.
그리고 도심 모두가 내려다보이는 곳.
성 주변에서 왕이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었다.
유마는 왕궁의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왕궁 꼭대기의 어느 방.
유마는 짙은 향초가 있는 방에 들어섰다.
경비병이 검과 창을 겨눈 채 뒤따르며 경계했다.
그러면서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침상에 싸늘하게 누워 있는 이를 본 것이다.
“구, 국왕 폐하!”
“죽었나 보군.”
유마의 말에 경비병은 급히 리온 왕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치료사를 불러오라고 소리쳤다.
틀렸다.
죽은 지 상당히 오래되었다.
유마는 시선을 내렸다.
침대 밑, 찢어진 종이들이 보인다.
편지? 아니면 유서일까?
유마는 경비병들을 무시한 채 그대로 발코니로 향했다.
그리고 발코니의 좁은 난간 사이에 오렌의 머리를 억지로 집어넣었다.
“으아아아악!”
오렌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아파, 아프다고!’
그러면서도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오렌은 벗어나고자 손으로 난간 사이를 밀어냈지만.
머리통이 걸려 빠져나오지 못했다.
고통 속에 오렌이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굳어졌다.
모든 게 내려다보인다.
도심, 그리고 성내까지.
모든 이들이 자신의 비명을 듣고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건···?”
“설마 오렌 왕자···!”
“오라···. 버니?”
샤린과 혁명군들이 발코니를 올려다본다.
성벽에 있던 오렌의 병사들은 경계심도 풀어버린 채 무기를 늘어뜨렸다.
오렌은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단상처럼 높이 올려진 발코니.
난간에 걸린 목.
마치 처형대 위와 처형자의 항쇄(項鎖)를 찬 거 같다.
“자, 잠깐, 설마 네놈···!”
“네놈의 죽음을 확인해야 남은 녀석들도 포기하겠지.”
또한 반란으로 희생자가 나왔다.
그들의 분노를 막아줄 인물이 필요하다.
책임자.
그것이 오렌이었다.
오렌은 급히 머리를 굴렸다.
“이런 부당한 대우는 잘못되었다. 왕족에게 이런 행위를 하는 이들은 대륙 그 어느곳도 없어!”
“여기 있지 않은가.”
“샤린, 샤린과 이야기할 수 있게 해 줘!”
유마는 워해머를 어깨에 걸쳤다.
“어차피 반란군의 주동자다. 처형은 피하지 못해.”
국가들이 합의한 대륙법이든, 왕족의 대우든 상관없었다.
유마는 이 전쟁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처형자의 도끼는 없다. 대신 고통 없이 보내주마.”
오렌은 발악하고자 소리쳤다.
“나를 죽인다고 해도 반대 세력이 있을 거다. 그들을 어찌하겠단 말이야! 수년간은 솔리안이 황폐해질 것이다. 차라리 나를 살려 그들을 회유···.”
“그래도 네놈보다는 말이 통하겠지. 사교도를 끌어들이고 백성들을 역병의 실험체로 쓴 악귀보다는 훨씬-!”
유마의 억양이 높아졌다.
눈빛에서 옅은 감정이 내비쳤다.
그것은 분노였다.
유마는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가슴 속 웅얼거림.
정말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다.
“천한 것들이잖아!”
유마가 오렌을 내려다봤다.
오렌이 히쭉거린다.
공포에 질려 눈물을 흘렸다.
“천한 것들이야. 나는 왕족이고. 게다가 이제는 서자가 아닌 왕이다.”
“불쌍한 녀석.”
오렌은 움찔거렸다.
그 말이 상당히 거슬렸나 보다.
오렌은 분노한 얼굴로 유마를 올려다봤다.
유마가 워해머를 든다.
“미안하지만, 내 신도가 죽어가고 있다. 이제 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도록 하지. 유언을 남길 거면 말해라. 오렌 솔리안이여.”
상대 진심이다.
자신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오렌은 앞을 바라봤다.
모든 이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가 보고 있다.’
하지만 왕으로서가 아닌, 처형자.
죄인으로 보고 있다.
참으로 비참한 최후였다.
결국, 그는 왕좌에 앉아 왕으로 군림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오렌이 힘겹게 말했다.
“솔리안의 왕이다.”
“...”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왕자의 머리가 사라졌다.
유마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무기를 든 오렌의 병사들이 무기를 내려놓았다.
지친 듯 주저앉는 자도 보였다.
경비병들도 좌절한 듯 무릎 꿇고 이마를 감쌌다.
반대로 혁명군이 함성을 내질렀다.
오렌 왕자의 죽음.
이것으로, 솔리안의 내전이 막을 내렸다.
* *
솔리안 왕국의 북쪽.
프랑츠 왕국은 대륙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또한 솔리안의 내전과 역병 등을 빌미로 외교를 단절한 상태였다.
현재 국경 지역은 프랑츠 병사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이제 곧 겨울이 찾아와 북방의 몬스터들을 사수해야 하는 프랑츠 왕국으로서는 역병은 공포 그 자체였다.
보름달이 뜬 밤.
국경의 좁은 다리를 지키던 병사들은 고개를 들었다.
딸랑-.
작은 종소리가 들린다.
짙은 어둠 속에서 나룻배 하나가 보였다.
배에는 4명의 여행자가 타고 있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이들이다.
“어이.”
프랑츠의 기사가 병사들에게 고갯짓했다.
프랑츠의 장궁병들이 등에 있는 화살집에서 화살을 꺼내 겨누었다.
역병을 통제하라고 명령 받았다.
억지로 지나가고자 하는 이들은 죽여도 상관없다는 상부의 명이었다.
그때, 노를 젓던 이가 두 손을 들었다.
“미안하지만, 좀 지나가겠소.”
“그렇게는 안 되오. 현재 국경은 폐쇄되었소. 지금 당장 물러나시오.”
프랑츠 기사의 말에 노를 젓던 이가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가죽 주머니를 꺼내 보여주었다.
달빛이 반사되어 황금빛이 반짝였다.
“...!”
프랑츠의 기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례는 하겠소. 전쟁을 피해 나온 피난민이니, 너그럽게 봐주시오. 아, 역병 또한 걸리지 않았소. 몸을 확인해 보시오.”
“...”
프랑츠 기사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이 넓은 국경 지역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한두 명 정도 빠져나갈 수 있겠지.
“안타깝군. 좋소.”
“고맙소.”
프랑츠 기사는 결국 손에 돈주머니가 들어왔다.
시커먼 단지 하나도 마찬가지였다.
-감사의 뜻으로 이걸 드리겠소.
-이건 무엇이오?
-활력을 좋게 만들어주는 약이라오. 아주 귀한 약이지.
병사들은 나룻배를 탔던 이들이 내건 ‘약’을 쳐다봤다.
“기사님, 약이라고 하던데. 혹 정력에 좋은 거 아닙니까?”
병사들이 군침을 흘렸다.
기사도 나름대로 기대하고 있었다.
돈주머니를 한가득 든 걸 보면 상인이나 몰락 귀족일 터.
그들이 가진 약이라면 당연히 효력도 좋을 것이다.
기사는 단지를 열어보았다.
안 속에 시커먼 액체가 담겨 있다.
악취마저 풍겨왔다.
‘이건···?’
기사가 코를 킁킁거렸다.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액체에 담그고 꺼냈다.
미끌미끌하다.
혹시나 싶어 혀를 활짝였다.
“으윽, 상했잖아?”
기사는 기침과 함께 침을 뱉었다.
쓴 맛이 아직도 입안에 남아 있다.
아쉬운 듯 단지를 쳐다보다가 버리기로 마음 먹었다.
그대로 다리 밑으로 내던졌다.
나룻배를 탄 만월 교단의 교주.
아오펠은 로브를 벗었다.
그리고 저 멀리 짙은 어둠 속 다리를 바라봤다.
기사와 병사들이 ‘역병’을 손에 댄 것을 보며 비웃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된다.’
아오펠은 품에서 심연의 알을 꺼냈다.
손바닥 크기의 뼈로 된 알.
‘이것만 있다면.’
아오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의 소망을 이룰 수 있다.’
- 작가의말
모두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외출 후에는 반드시 손 씻기 습관이 중요합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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