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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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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상] 제 1화. 완벽한 여름 밤

< 1, 완벽한 여름 밤 >

 

오래된 성곽의 돌로 깔려져 있는 중후한 매력을 가진 잘츠부르크의 골목은 원래부터 아담하고 늘씬한 골목길이었지만, 오늘은 어디서 온지 모르는 갖가지 종류의 노점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턱에 거리의 공간이 유난히 비좁게 느껴졌다.

평소의 저녁 8시 즈음이라면, 노천의 카페와 술집들로부터 풍겨나오는 맥주 내음과 요리 냄새로 가득했어야 할 거리였다. 오늘은 그보다는 끊이지 않는 잔뜩 들떠있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분주한 걸음 소리, 그리고 끝날 줄 모르는 왈츠 곡들이 모차르트 동상이 세워진 광장에서부터 골목골목 어귀까지 새어나오고 있었다.

 

광장 한복판에 위치한 오래된 대성당을 뒤로 한 채, 그녀는 이 곳 잘츠부르크의 여름밤 향기에 진득이 취해있었다.

이 날을 보기 위해 어디서부터 날아 왔는지 모를 남녀노소로부터 알 수 없는 갖가지 언어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모두가 행복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당연하리라 그녀는 짐작했다.

어느 노파가 팔고 있던 장미꽃 한 송이는 그녀의 옆에 서 있는 검정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의 큼지막한 손에 건네지고는, 이내 그녀의 아담한 손 안에 꼭 쥐어졌다. 덕분에, 늦은 저녁 그녀를 괴롭힐 뻔 했던 차가운 밤공기는 그대로 그들을 스쳐지나간 듯 했다.

어디선가 몰려나온 허리만치 오는 작은 꼬마들이 그와 그녀의 앞을 제치고 나가더니, 군중들의 머리 위 쪽 하늘을 가리키며 시끄럽게 소리 질렀다.

 

‘ Five! four! three! two! one ……! ’

- - 파악! ’

 

갑자기 삽시간에 늘어나고 있는 쏟아져 나온 수천 명의 머리 위로,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폭죽이 터지며 얼기설기 얽힌 넝쿨처럼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의 탄성과 열기로 전해지는 뜨거운 공기가, 화려한 폭죽과 함께 반짝거리며 그들을 감싸 안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여름밤이었다.

 

- - - - -

 

타다닥 타닥 타타타다닥-’

다시 분주해진 소리는, 이번에는 제법 둔탁한 타자 소리가 되어 답답한 사각 공간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선 얼마 전 바꾼 길쭉한 신형 와이드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며, ‘베네치아 라는 타자 빨리치기 게임을 했던 486 컴퓨터 시절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랐다.

 

, 그럼 금요일 7시에 뵈어요.’

 

.

용건을 마친 마지막 문장이 엔터키와 함께 경쾌한 소리를 마무리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 정적도 잠시, 해리의 바로 오른편에 위치한 자동 유리문이 드르륵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의 소음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 ”

 

근래의 IT 회사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길고 꼬불꼬불한 웨이브 머리와, 하이웨스트를 허리까지 치켜올려 입은 호리호리한 체형의 한 여자가 또각또각 걸어왔다.

ERP 혁신팀의 사무실은 개발자들이 조용히 일할 수 있는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에 충분히 높은 파티션으로 지어져 있었지만, 해리의 앞에 성큼성큼 걸어온 여자의 구두굽 소리 만큼은 모든 직원들의 이맛살을 항상 찌푸리게 했다.

 

 해리씨! 요새 뭐 바쁜 일이라도 있나봐요? ”

고 대리님, 아침부터 무슨 말씀이신지.. ”

 

해리가 아침부터 라고 강조했듯, 고 대리는 상호간의 대화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물론 해리 또한 사람과의 면대면 대화에 재주가 있는 것은 - 전혀 아니었다. )

고민아 대리는 해리에게 있어 직장생활의 이상과 현실의 갭을 빠르게 좁혀준, 아주 고마운(?) 선배였다. 회사에 여자가 많이 없다고 해서, 굳이 여자선배는 든든한 롤모델로 따르기 보다는 애초에 엮이는 일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해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알만한 직원들은 그런 고대리를 쑥갓녀라고 불렀다.

하루도 빠짐없이 꼬불꼬불한 긴 웨이브 머리를 매일하고 등장하는 그녀의 노력이 가상해서 일지, 아니면 여자휴게실에서 우연히 듣게 된 썰처럼 - 다 된 요리에 모냥새만 얹어 자기가 갖다 바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불리는 것인지 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이유가 어찌되었든, 그녀를 제일먼저 쑥갓녀라고 부르자고 한건, 해리의 절친 동기 - 지영의 아이디어였다.

 

, 근데 고대리 있잖아.... 왠지 쑥갓 같지 않냐 ? ”

  ? 푸흣, 왠 쑥갓 ? ”

그냥.. 딱 생긴게.. 그냥 푸르딩딩하고, 막 이파리가 - 아 그냥 쑥갓이야. ”

야 뭐래. 크크킄

 

여느 때처럼 신사동의 단골 포차에서 3차까지 달리던 날, 그들은 쌓여가는 술병을 안주로, 눈 앞에 놓인 질겅질겅한 양념 돼지곱창을 씹듯 회계팀의 쑥갓녀, 고 대리를 대차게 씹으며 깔깔 웃어댔고, 다음 날 정작 무슨 대화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가 이야기 했을텐데요? 2년치 장부 데이터를 빨리 달라고요. 당장 다음주부터 감사인들이 우리회사 탈탈 털러 나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이상한 점들은 분석해서 사장님 보고를 해야 되거든요? 근데 백데이터부터 내놓칠 않고 있으니, 내가 이것부터 사장님께 보고 하면 되나 ? ”

 

갑자기 무턱대고 쏘아붙이는 고대리의 따발총 같은 공격에, 해리는 천불이 날 것만 같았다. 해리는 당황할 때 나오는 특유의 입술을 앞니로 깨물어버리는 버릇을 감추지 못하며, 양손의 애꿎은 검지 손톱으로 딱딱 소리를 내고 있었다.

죽일듯한 기세로 노려보는 고 대리에게, 해리는 결심이라도 한 듯 숨을 고르며 용기있게 다시 입을 열었다.

 

... 대리님. 그런데요.. ”

! 

그럼..... ”

 

해리가 뜸을 들이는것 조차 기가 차 보이는 고 대리의 입꼬리 한쪽은 이제 부르르 떨리기 까지 하고 있었다.

 

... 언제까지 드리면 될까요? "

 

그녀의 떠듬떠듬한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옆 파티션에서 작게 아오! ” 하는 답답한 탄성이 들리는 듯 했다.

 

그러니까 해리씨. 정신 좀 차리고 다녀. 사회생활 하루 이틀 했어?

 휴가 쓰려면 옆 직원들에겐 피해주지 말고 썼어야지! "

고 선배님! ”

 

갑자기 허겁지겁 달려온 한 남자의 저음색이 그녀의 폭주를 끼이익 하듯 멈춰 주었다. 인프라 서비스팀 지영이었다.

 

선배님, 지난 번 저희 시스템이 한참 느려서 마감에 문제가 되었던 일 말인데요. 그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제 자리로 와 주시면 설명 드리겠습니다. ”

아 지영씨, 그래? 빨리 알아냈나봐요. 근데 나 지금.. ”

지금 안 되시면 좀 설명이 늦어질텐데.. 저도 오늘 하루종일 회의가 있어서 말입니다. ”

 

고대리는 체증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지영이 그녀의 어깨를 살살 밀며 데려가는 차에 더 이상 말을 덧 붙이지 않고 해리를 한껏 흘기면서 사라졌다. 그런 고대리를 에스코트라도 하는 듯 굽신거리며 ERP 운영팀 파티션을 빠져나가는 지영은, 마침 눈이 마주친 해리에게 한쪽 눈을 윙크하며 의기양양하게 사라져 주었다.

 

만세다. 정지영. 오늘 내가 소곱창으로 쏜다. ’

 

해리는 그제야 깊은 안도의 숨을 쌕쌕 거리며 그녀의 작은 핸드폰에, 경쾌한 손톱소리로 다시 타자를 이어갔다.

- - - - -

 

질끈 묶어 틀어올린 생기다 만 똥머리에, 동그란 자주빛의 티타늄 안경을 쓰고 후드티를 입은 여자는, 이곳 맨 구석에 있는 사각 테이블에서 모니터를 잡아먹을 듯한 얼굴로 아까부터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멈춰버린 듯한 그녀의 얼굴은, 잠시 뒤 딸랑 거리는 문에 걸린 풍경소리에 드디어 마법이 풀린 듯 했다.

 

박해리 ~ ”

어어, 정지영! 여기로 와. ”

 

그녀는 서둘러 노트북을 닫고는, 안경을 벗어 테이블 앞에 두었다.

얇은 안경테에 가려져있던 그녀의 긴 속눈썹과 매끈한 눈매가 이제야 밝은 빛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좀 괜찮냐? ”

뭐가? .. 고대리?

할말은 좀 하고 살아라 이 멍충아. ”

됐어.  나한테 그러는게 원데이, 투데이 일이야? 신경 꺼 너도. ”

어쭈. 너 내가 그타이밍에 안갔으면 너 지금? 아오, 아오, 말을말자. ”

 

그가 이제는 잔소리도 지쳤다는 듯 손사래를 그녀의 얼굴 앞에 대고 설레설레 흔들자, 해리가 씨익 웃으며 그런 그의 손바닥을 탁 쳐 주었다.

 

 자자, 늘 드시던 커피 나왔습니다~. 그리고 제 것까지 3! 결제는 이쪽에 계신 남자분의 카드로 하겠습니다. 카드 주세요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던 댕강한 단발머리의 여자가 트레이에 커피 세잔을 가져와서는 지영에게 앙증맞은 두 손을 지영의 앞에 포개보이며 찡긋 웃었다.

아 뭐야, 건물 카페 사장님이 무슨 일개 샐러리맨의 등에 빨대를 꽂아 ? ”

저기요, 저 하루하루를 목구멍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소상공인이거든여? 따박따박 월급받는 대기업 직장인들은 기부 좀 해 주시져 ? ”

 

1주에 한번 꼴로 보던 그들은, 해리의 긴 여행으로 인해 묵혀져 있던 시간만큼 풀어야 할 이야기들이 산더미 같았다.

이 얼마나 입이 근질근질 했던가. 회사에서 말이 없기로 유명한 해리 조차도, 평소보다 2배속은 더 빠른 흥분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고, 그 턱에 진한 아메리카노 커피잔에 떠있는 얼음들은 따뜻한 입속으로 들어갈 기회도 맞이하지 못한 채, 시무룩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대박대박!! 이건 거의 로코 감이잖아!! 그래서. 연락했어? 와서는? ”

 

작은 얼굴에 꽉 찬 커다란 눈이 마치 토끼처럼 몽글몽글하게 커진 아인은, 거의 울먹거리듯 두 손을 짝짝 쳐가며 해리의 다음 대답을 재촉했다.

 

.. 아니. ”

 

해리는 한숨을 푹 쉬며 빠르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 .. ? 뭐야, 연락이 안돼? 잠수 탔어? 그따위 쭉정이야? ”

 

지영이 먹던 커피를 탁 내려놓는 바람에, 잔에 출렁이던 커피들이 아인의 흰색 블라우스 팍 튀었고 그녀는 !!! ” 하며 지영의 등을 소리나게 때렸다.

해리는 이제야 진짜 그녀가 있어야 할 세상에 돌아온 것을 실감하는 것 같아 마음이 오히려 편안했다. 티격거리는 아인과 지영을 앞에 두고, 그녀는 조용히 식어빠진 아메리카노를 홀짝거리며, 나지막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연락 못해, 잃어버렸어. ”

“ .. ?

공항에서. 누가 가져가버렸어. 망했어 진짜. ”

아니 뭘 알아들을 수 있.. ”

어떤, 어떤 멍청한 새끼가. , 그거 나 잃어버리면 진짜 안돼거든? ”

그러니까 뭘, 그 남자 연락처를 잃어버렸다고 ? ”

!!! 몰라!!! 공항에 다시 한번 전화나 하고올게!! 

 

벌떡 일어나 남은 커피를 벌컥벌컥 원샷 해버리던 해리는, ‘이 썅썅바!!’ 를 연신 외치더니 핸드폰을 가지고 다시 밖으로 뛰어나갔다. 갑작스런 그녀의 폭주덕에 조용해진 아인은, 혼자서 조용히 흰색 블라우스에 얼룩진 커피 자국을 물티슈로 문지르고 있었다.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해리의 시뻘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영은, 손에 들고 있는 커피를 좀처럼 마시지 않을 것 처럼 보였다.

 

----

 

잘츠부르크 처럼 아름다운 도시를 본 적이 없어. ”

 

작은 산의 꼭대기에 웅장하게 자리한 바로크 양식의 요새를 바라보며, 그가 조용하게 이야기 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웅장하고. 자연속에 도시가 있고. 역사를 보러 왔는데,, 현재가 있고. 정말 이 곳처럼 우아하게 조화로운 도시가 또 있을까. ”

그러니까. ”

 

그가 시를 읇듯 이야기하자, 그녀가 재빨리 맞장구를 치며 말을 이었다.

 

이 좋은 것들, 더 이상 보게 둘 순 없지. ”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의 앞을 대여섯명은 되는 꼬마부대가 제치고 나와 신나게 목청을 높여댔다.

 

“ Five! four! three! two! one ……! ’

- - 파악! ’

 

갑자기 삽시간에 늘어나고 있는 쏟아져 나온 수천 명의 머리 위로,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폭죽이 터지며 얼기설기 얽힌 넝쿨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이제 어깨 뒤로 넘겨져 있던 후드를 조용히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검정색 캡 모자를 꾹 눌러쓰는 것은, 옆에 있던 그도 마찬가지였다.

 

삐이이익 -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마을 광장 전체를 뒤덮는 순간, 축제를 이끌던 왈츠 음악 소리마저도 고요해졌다. 축제를 보러 달려 나온 수많은 인파들과 관광객들의 탄성은 이제 파도처럼 몰려오는 술렁임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꽃을 팔던 노점상들도, 갑작스런 사람들의 소란에 서빙을 하다말고 달려나온 상점의 일꾼들도 이 이상하고도 웅장한 광경을 보기위해 달려나왔다.

 

광장 중앙에서부터 흘러나오던 그들의 웅성거림은, 잠시 뒤, 찌를 듯한 비명으로 바뀌며 골목골목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족히 건물 5층 크기 정도로는 보이는 광장 중앙의 커다란 LED 판에는, 음악에 즐겁게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 대신 번쩍거리는 이제 성난 불빛과 함께 까만 실루엣의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와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서로에게 손을 맡겼다. 천천히 뒤를 돌아, 점점 발걸음을 빠르게, 더 빠르게, 그렇게 시작된 잰걸음은 광장의 반대편을 향해 이제는 힘껏 발길질을 하며 나아가고 있었다.

행여나 그와 그녀가 광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을 놓칠 새라 보여주기라도 하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그들에게도 거리 양 옆의 노천 카페들의 통유리창에 반사된 검은색의 실루엣이 선명하게 비추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1년을 기다려온 8월의 축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갔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여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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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일상 | 제 1화. 완벽한 여름 밤 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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