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화이트캐슬 - 5
“참, 우리 아까 뗏목 위에서 끝내지 못한 이야기가 있지? 잠수시럽 말이야. 그것의 재료들을 말해주려다 못했잖아.”
“아, 맞다. 그 안에 도대체 뭐가 들어간 거야?”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피식 웃어버렸다.
“별거 아니야. 그냥 좋은 것들로 만들어졌다는 것만 알아줘.”
“별거 아니면 그냥 얘기해줘도 되잖아? 도대체 내가 먹은 시럽 건더기는 뭐였냐고?”
그는 계속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녀가 하도 보채는 바람에 대답해주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곧 보일 반응이 재밌는 볼거리라도 될 것처럼 실실 쪼개면서 말이다.
“건더기는 내가 절구질에 익숙지 않아서 다 갈리지 않은 걸 거야. 자, 이제 말해줄게. 잠수시럽의 재료들은 말이야. 왕두꺼비의 눈알, 물갈퀴, 심장, 허파와 네 발바닥, 대구의 아가미와 심장, 자정에 잡은 물뱀의 혀와 피 그리고 허파, 투명 해파리의 위와 장, 그리고...”
그녀는 그의 대답을 미처 다 듣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입에 손을 갖다 댄 채 화이트캐슬로 급히 뛰어갔다.
그날 저녁, 이안이 직접 그녀의 방으로 저녁식사를 가지고 왔지만 속이 안 좋은 그녀는 침대에 누워 끝내 먹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다른 일행의 걱정도 잠시, 다음날 아침이 되자 그녀의 식욕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 전날 거른 저녁 분까지 다 먹어치워 거북영감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히든벅과 지원은 하루만 같이 지냈다가 다음날 바로 화이트캐슬을 떠났다.
지원은 이안에게 ‘샌드펜’이라 불리는 초록색 펜을 남기었다.
겉보기에는 문방구에서 흔히 파는 볼펜처럼 생겼으나 특별한 사용처가 있었다. 그것으로 벽이나 바닥 등 아무 데나 편지를 쓰고 난 후, 수신인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펜촉을 입 앞에 갖다 대고 “샌드”라고 소리 내어 말한다. 그러면 써놓은 편지의 내용이 사라짐과 동시에 제일 위쪽에 적힌 수신인에게 정확히 전달된다.
어떻게 전달되냐고? 수신인은 갑자기 어디선가 떨어진 종이를 받게 되는데 그곳엔 조금 전에 샌드펜을 이용해서 쓴 편지 내용이 적혀있는 것이다.
만약 수신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것을 펼친다면?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냥 백지로 보일 테니 절대 안심해도 좋다. 송신인과 수신인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편지의 내용을 들킬 염려가 없는 것이다. 물론 세상사 일이 다 그렇듯이 예외란 게 있음을 미리 알려둔다.
만약 독자 여러분이 지금 한 설명이 당최 이해되지 않아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짜고 있다면 당장 그만두시길. 앞으로 이것에 대한 예시가 종종 나올 테니 개미의 IQ만 지녀도 전혀 문제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진 역시 지원에게서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바로 캠핑킷 이층집에서 사용한 적 있는 숙녀옷방 미니어처 모형이었다. 그녀는 기뻐하며 모형이 들어간 투명한 반지 상자를 빨간 핸드백 안에 소중히 집어넣었다. 언젠가 쓸 일이 생길 거라는 즐거운 기대감과 함께 말이다.
이안과 수진은 그곳에서 한 달 넘게 지내었다.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어느새 그녀의 내부에서는 처음 도착했을 때의 설렘이 가시고, 심심함과 무료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안은 그의 방에 처박혀 며칠 동안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무시무시한 태풍이 섬을 지나가는 어느 밤이었다. 바다수영을 마치고 흠뻑 젖은 채 돌아오던 그가 방에서 막 나오는 그녀와 복도에서 딱 마주쳤다. 며칠 만에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그의 젖어있는 흰 티셔츠 아래로 커다란 루비 펜던트가 달린 금목걸이가 훤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거리었다.
“어머 그 목걸이는 뭐야? 나한테 좀 보여줘 봐.”
그녀의 들뜬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이 확 굳어지더니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돼. 저기, 난 피곤해서 빨리 들어가 쉬어야겠어.”
그는 마치 루비가 자신의 심장이라도 되는 양, 그것을 소중히 왼손바닥으로 가린 채 그녀를 재빨리 지나쳐버렸다. 그가 방으로 들어간 후, 그녀는 꼭 도둑으로 몰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팍 상하였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이 이야기를 거북영감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이 그녀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안은 그것을 너무 소중히 여긴 나머지 자거나 씻을 때에도 항상 걸고 있고, 남이 만지거나 혹은 감상하는 것조차 지독하게 싫어한단다. 그것에 대해 물어보거나 말을 꺼내는 것도 금기시했기에 알아서 지켜달라고 그는 그녀에게 부탁했다. 기특하게도 그녀는 이후 그 부탁을 잘 따른다.
하지만 가끔 이안을 쳐다볼 때면 옷 아래 가려졌지만 눈부시게 빛날 루비가 떠올랐다. 그러면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목에 건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 몰래 미소 짓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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