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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BLOOD

마왕관광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TARBLOOD
작품등록일 :
2014.08.01 21:21
최근연재일 :
2014.09.16 00:05
연재수 :
4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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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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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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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1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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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K46. 넷째 날 (2) - 타리아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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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 통곡의 언덕


“정말요?”

“그래, 어서. 시간 없어.”

단얼의 반복된 물음에 듀반은 조금 짜증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론마드와 아바니가의 사병들마저 돌려보내고 벌판에는 둘만 남았다. 그러고서 몇 분 동안이나 실랑이를 벌였다. 두 사람의 머리위로 희미한 반디공 하나가 빛날 뿐이었다.

듀반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단얼 앞에 오른 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어서!”

듀반이 재촉했다.

단얼은 영 내키지 않았다. 이곳에 올 때도 젊은 병사 둘이 단얼을 들어 날랐다. 듀반 혼자서, 한 팔로 될 리가 없다. 심하게 무리다. 게다가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론마드가 떠나기 전에 조끼를 주고 가서 반나체는 피했지만, 다 큰 여자가 남자의 팔에 걸터앉는 건 민망함의 극치였다.

“가까운 곳이야. 잠깐이면 되.”

듀반이 팔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굵은 팔뚝 위로 근육들이 움직였다.

타리아까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도 알 수 없는데 그렇다고 걸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 잠깐이다. 이 시간에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단얼은 몸을 돌려 듀반의 팔위에 걸터앉았다.

“좀 더 , 좀 더 안쪽으로.”

“이렇게요?”

“그래.”

듀반의 말에 따라 단얼은 엉덩이를 밀었다.

“손.”

단얼이 손을 내밀자 듀반의 왼손이 단얼의 오른손을 마주잡았다. 단얼은 반대쪽 팔로 듀반의 목을 감쌌다.

“이제 날개를 꺼낼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듀반이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단얼은 몸을 옆으로 빼면서도 시선은 최대한 듀반의 등으로 향했다. 조끼 뒤에 난 두 개의 트임에서 순식간에 날개가 쏟아져 나왔다. 듀반의 몸으로 전해지는 강한 진동을 단얼도 느낄 수 있었다. 날개를 한번 꺼내고 넣을 때마다 이런 충격을 견디는구나.

듀반이 가볍게 몇 번 날개를 펄럭였다. 검은 날개와 흰 날개가 바로 눈앞에서 물결쳤다. 이젠 이 날개가 이상하거나 무섭지 않다.

듀반이 점점 강하게 날갯짓을 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몸을 세웠다.

“간다!”

강한 바람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단얼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러는 사이 몸이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바닥이 저만치 멀어져 갔다.

“약간 뒤로 가볼래?”

듀반의 말에 단얼은 오른팔에 힘을 주고 몸을 밀었다. 듀반의 팔이 단단하게 버텨주어 어렵지 않았다. 살짝 몸을 틀면서 자세를 잡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점점 더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좋아. 됐어.”

듀반은 이때까지 여자 여럿 태워 봤는지 꽤 능숙했다. 이제 그의 몸은 공중에 비스듬히 떠 있는 상태가 되었다. 오른쪽 팔에는 사람 하나를 얹고서.

단얼의 몸이 날개에 닿지 않도록 듀반은 팔을 앞으로 빼야 했다. 그 바람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민망한 자세가 나왔다. 듀반의 숨결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다시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날개를 펄럭이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속력에 이르자 때때로 날개를 활짝 펼치고 활강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흰 날개와 검은 날개가 거의 수평을 이뤘다.

듀반의 날개가 펄럭일 때마다 그 움직임이 단얼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근육의 수축과 팽창, 바람의 흐름, 깃털의 떨림까지. 난다는 건 이런 거구나 싶었다. 기계의 힘을 빌어서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진짜 비행이었다.

듀반이 날 때도 그의 반디공은 주인의 머리위에 떠서 따라왔다. 굳이 반디공이 없어도 이미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쪽 지평선과 저쪽 지평선의 색이 달랐다.

“다 왔다.”

듀반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그러게 무리 하지 말라니까.

“벌써요?”

아까는 그렇게 고집을 부리더니 단얼은 짧은 비행이 아쉬웠다.

“꽉 잡아.”

나선을 그리며 미끄러지다가 어느 정도 고도가 낮아지자 착륙하기 위해 듀반이 몸을 세웠다. 그 바람에 단얼의 자세도 흐트러졌다. 순식간이라 다시 위치를 바꿀 여유가 없었다. 듀반의 손과 목을 더욱 단단히 잡는 방법뿐이었다.

땅에 내리자마자 듀반은 몸을 낮춰 단얼의 발이 바닥에 닿도록 했다. 역시 많이 해본 솜씨다. 단얼은 재빨리 그의 팔에서 내려왔다. 보는 사람이 없다지만 창피하긴 마찬가지였다.

“좋아. 안 늦었다.”

듀반이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어째서인지 비행이 끝났는데도 듀반은 날개를 넣지 않았다. 한 짝씩 폈다 접었다 하지를 않나, 장난스럽게 공중에서 탁탁 튀기기까지 했다. 비탈을 올라가는 내내 날개 장난이 끊이지 않았다. 단얼은 거기에 맞지 않으려고 충분히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어디가 불편한 걸까. 하긴 우주까지 다녀온 몸이니까.

두 사람이 올라가는 언덕 저쪽에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건물 같지는 않았다. 가까이 가서야 바위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멀었어요?”

단얼은 벌써 숨이 찼다. 어차피 날아올 거 저 위까지 날아가면 좋았잖아. 날개도 그대로 있으면서.

“다 왔다.”

듀반이 바위 옆에 서서 말했다.

단얼은 겨우 도착해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옆에 보이는 무지하게 큰 바위 말고는 이렇다 할 지형지물도 없었다. 두 사람이 올라온 길도 비포장이었다. 주변에 드문드문 키 작은 나무가 보였다. 그게 전부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볼거리라고는 없었다. 그럼 남은 건 뻔했다. 주변보다 높은 지형, 탁 트인 시야, 그리고 현재 시각. 일출을 보자고 듀반은 단얼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다.

“여긴 뭐죠? 타리아 일출봉?”

단얼의 썰렁한 농담이 마음에 들었는지 듀반이 웃었다. 그러다 금방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여긴 통곡의 언덕이야.”

듀반이 바위 옆에 서서 말했다. 이름만 봐도 뭔가 슬픔이 서린 장소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주변이 이렇게 삭막한가.

“누가 통…”

갑자기 나타난 검은 그림자에 단얼은 바로 흰 날개 뒤로 숨었다. 바위 뒤쪽에서 검은 형체가 걸어 나왔다. 다시 보니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검은 옷으로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

듀반과 단얼 쪽으로 다가오더니 뭐라고 중얼거렸다. 소리가 작아서 말읽기로도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단지 중간에 ‘아드파타’라는 단어만 겨우 알아들었다.

듀반은 여전히 날개를 달고 있었다. 오른쪽에 검은색, 왼쪽에 흰색. 이걸 봤으니 이제 난리가 나겠지. 오드윙의 악마니, 괴물이니 하면서.

검은 그림자는 그렇게 서서 계속 중얼거릴 뿐이었다. 무슨 주문이라도 외우는 것 같았다. 듀반도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기도인지 주문인지가 끝나자 그림자는 손을 모으고 이쪽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듀반이 목례로 받았다. 그림자는 바위를 향해 돌아서 다시 주문을 외웠다.

“뭐, 뭐예요?”

단얼이 듀반의 날개 너머로 고개를 내민 채 물었다.

“바록교의 순례자야.”

듀반이 말했다. 성지 타리아의 순례자. 도시에서 한참 벗어난 곳인데도 종교는 빠지지 않았다.

“이 날개를 보고도 아드… 그러니까… 아저씨를 무서워하지 않네요.”

“바록교 경전에 등장하는 아드파타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조금 다르거든.”

듀반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야기를 계속 했다.

“보통은 아드파타가 악에 사로잡혀 에미타를 배신했다고 나오지만 이 이야기는 반대야. 악의 기운에 사로잡힌 쪽은 아드파타가 아닌 에미타였지. 아드파타는 친구이자 주군인 에미타를 구하기 위해 자신 안에 악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그것과 함께 파멸하는 길을 택했어. 그 덕에 에미타는 해방됐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친구의 목숨을 대가로 치른 뒤였지.”

듀반이 돌아서다가 날개로 단얼의 얼굴을 쳤다.

“아, 미안.”

“그래서, 그 다음에 어떻게 됐어요? 그게 끝이에요?”

단얼이 뒤로 물러나며 물었다.

“에미타는 이 언덕에 홀로 올라 삼십 일 하고 삼 일 밤낮동안 눈물을 흘렸어. 타리아에 홍수가 나고 그 물이 넘칠 정도였지. 타리아로 들어오는 길은 원래 불의 길 밖에 없었는데 그때 흘러넘친 물이 물의 길과 바람의 길을 만들었다고 해.”

듀반은 다시 바위 쪽으로 돌아섰다. 평평하게 깎은 표면이나 새겨진 글자들에서 인공물임을 알 수 있었다. 군데군데 깨진 모서리와 마모된 가장자리에서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듀반이 바위에 손을 짚었다.

“이곳의 원래 명칭은 아드파타의 언덕이야. 통곡의 언덕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건 마지막 인마전쟁이후부터지.”

듀반은 그렇게 서서 바위를 위아래로 살폈다.

바위는 듀반의 키보다도 높았고 길이는 단얼의 다리로도 열 걸음이 넘을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는 납작한 육면체 모양이었다. 각 면은 직각으로 깎였고 마족의 글자 같은 게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서체도 크기도 제각각이라 안 그래도 꼬불꼬불한 글씨가 더 어지럽게 보였다. 줄도 맞지 않아 삐뚤빼뚤이었다.

무슨 의미가 있는 기념물 같았다. 죽은 아드파타를 위한 비석? 혹은 에미타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그것도 아니면 바록교라는 종교의 경전을 새긴 건가?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단얼은 또 듀반의 날개 뒤로 숨었다. 동 트기 전의 어스름 속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검은 그림자 한 무리가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오늘은 순례자가 적군.”

듀반이 말했다.

순례자들은 듀반을 발견하자 이쪽으로 몰려왔다. 차례로 듀반 앞에서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렸다. 듀반은 그들의 인사를 모두 받아줬다. 마치 교주라도 되는 것 같았다.

‘저 사람들도 알아요?’

단얼이 이번에는 검은 날개 뒤에 숨어서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뭘?’

‘아저씨가 마왕이라는 거.’

‘아마 알 걸. 모를 수도 있고.’

듀반은 순례자들의 인사를 받아주면서도 단얼의 물음에 계속 답했다.

‘그럼 왜 절하는 거죠?’

‘내가 아드파타의 날개를 갖고 있으니까.’

듀반이 왜 이곳에 오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다른 곳에서는 괴물, 악마 취급을 받지만 여기서 그는 모두가 떠받드는 신성한 존재다. 이래서 무리하면서까지 오자고 했던 거군.

순례자들은 듀반에게 절을 하면서도 일정 거리 안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공경은 하지만 여전히 아드파타는 그들에게도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몇 분 동안 그렇게 순례자들의 의식이 이어졌다. 그 옆에 딱 붙어 있는 인간은 아예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순례자들은 비석 주위를 돌며 또 다른 의식을 이어갔다. 듀반과 단얼은 방해가 되지 않도록 멀찍이 물러났다.

“저 비석은 뭐예요? 위에 새긴 건 뭐고요?”

단얼이 또 물었다. 이젠 듀반에게 질문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죽은 아기들을 기리는 비석이야. 양쪽에 보이는 글자는 아기들의 부모가 직접 그 이름을 새겨 넣은 거고.”

대체 언제 얼마나 많은 아기들이 죽었기에.

듀반의 설명이 이어졌다.

“마지막 인마전쟁에서 핵무기가 사용됐다는 건 너도 알지? 나중에 마르마자가 오염을 정화하긴 했지만 전쟁 직후의 모습은 처참했어. 특히 폭발 지점에서 가까운 타리아는 타격이 컸지.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건, 급격히 늘어난 기형아 출산이었어. 사람들은 그것을 아드파타의 저주라고 했지. 그리고 조금이라도 정상에서 벗어난 아기가 태어나면 저주라면서 죽여 버렸지. 단지 기형아뿐만 아니라 루크마야처럼 남들과 다른 외모를 타고난 아기들까지 모두 다.”

루크마야. 단얼은 쿤다의 황금색 날개를 떠올렸다.

여행 작가 나비답게 듀반은 비석에 담긴 사연을 자세히 설명해 줬다.

쿤다 같은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혹은 태어나기도 전에 버려졌다. 타리아도 원래부터 아드파타를 싫어했지만 바록교의 발상지라 다른 지역에 비해 심한 편은 아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후로는 누구보다도 아드파타를 저주하는 도시가 됐다. 바록교는 이후 본산을 이로크로 옮겨야 했다. 바록교가 옮겨가기 전 에미타와 아드파타를 위해 이곳에 저 바위를 세웠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새겨지지 않은 평평한 돌이었다. 언제부턴가 하나둘 앞면에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죽은 아기의 부모가 한 일이었다. 아드파타에게 아기의 영혼을 의탁하며 이름을 하나씩 새겨 넣은 것이다. 악마의 아기를 낳았다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고문을 받거나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부모들은 몰래 아기를 내다 버리고 또 몰래 이곳에 와서 아기의 이름을 부르다 가곤 했다. 그렇게 계속 새겨넣다보니 자리가 모자라 비석의 뒷면과 옆면까지 아기들의 이름으로 채워졌다. 돌을 세운 본래 의미보다 당시에 죽은 아기들을 추모하는 비석으로 남게 된 것이다.

“지금 저건, 죽은 아기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이야.”

듀반은 의식을 끝까지 지켜봤다. 의미를 알고 나니 단얼의 눈에도 다른 광경으로 보였다. 순례자들은 한발 한발 옮겨가며 경건하게 기도문을 외웠다.

투르가 말한 아드파타의 저주란 게 이거였나. 아기들은 죄가 없다. 아드파타, 듀반의 잘못도 아니다. 그렇다고 갓난아기를 내다버려야 했던 부모들을 비난할 수만도 없다. 잔인하면서 슬프고 슬프면서 화가 나는 이야기였다.

신생아 대략 학살이라니. 전쟁이란 게 사람을 이렇게나 망가뜨리는구나 싶었다. 세계를 갈라놓은 거대 결계가 인간과 마족을 갈라놓지 않았다면, 그래서 전쟁이 계속 됐다면… 두 종족의 미래가 얼마나 끔찍했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어쩌면 이들에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투르도 즈발도. 타리아 사람들, 아니 마왕국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의식이 끝나자 순례자들이 한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간 됐다. 우리도 가자.”

듀반이 말했다. 단얼은 그를 따라 순례자들 옆에 섰다. 두 사람을 따라다니던 반디공은 어느새 사라졌다. 이미 필요 없었다.

저쪽 지평선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렇다 할 구름은 없었는데 안개가 꼈는지 지평선 부근이 조금 뿌옇게 보였다. 붉은 선이 하늘과 지상을 가르고 서서히 노란색에서 남색으로 번져갔다.

마침내 일렁거리는 붉은 덩어리가 지평선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태양이 이렇게 빨리 움직이나 싶을 만큼 순식간에 빛의 공이 떠올랐다. 동그랗게 모양이 잡히면서 완전히 빠져나오니 이미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듀반이 말없이 오른쪽을 가리켰다. 단얼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타리아.

도시가 한 눈에 들어왔다. 이미 해가 떴는데도 처음에는 그림자가 타리아를 덮고 있었다. 분지를 둘러싼 높은 절벽이 만드는 그림자였다. 조금씩 그림자가 걷히며 신들의 도시 타리아가 어둠에서 빛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황금돔, 촘촘하게 들어선 주택가 건물과 인간 관광객을 위한 호텔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삐죽 솟은 레바의 탑까지. 듀반은 이걸 보여주고 싶었던 건가.

단얼이 듀반을 돌아봤다. 그는 아직도 타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얼은 조금 물러나 다시 듀반을 봤다. 검은 날개와 흰 날개. 아침 햇살을 받아 두 날개가 더욱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가만히 있던 듀반의 날개가 조금씩 움직였다. 또 날개장난인가 했는데 이번에는 그냥 활짝 펼쳤다. 두 날개가 양쪽으로 비스듬히 벌어지며 완전히 펼쳐졌다. 아침 햇살을 받아 깃털들이 반짝였다.

듀반.

단얼은 이제 그 이름을 안다. 그 말에 담긴 또 다른 의미도 안다. 듀반의 이름을 부를 때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떠오르던 하나의 심상. 말읽기 마법이 알려준 그 단어의 뜻은,

하늘의 빛.

더 이상 태양을 똑바로 쳐다볼 수는 없었다. 햇볕의 따뜻한 기운만은 느낄 수 있었다.

듀반.

과연 왕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응?”

듀반이 날개를 접으며 단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방금 불렀잖아.”

듀반이 고개를 갸웃 하며 단얼을 바라봤다.

“그, 그게…”

자기도 모르게 이름을 불러버린 걸까.

“…”

듀반은 지긋이 단얼을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렇게 된 거, 그럼 그 얘기를….

단얼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나서 말했다.

“왜 저죠?”

“뭐?”

“아까 그랬잖아요. 별궁에서. 제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요. 마족과 인간의 미래를 위해….”

“응.”

“그러니까, 왜냐고요. 저는 그냥… 대학생이라고요. 마법도 못 쓰고 마나가 뭔지도 모르고, 또…….”

듀반은 씩 웃기만 했다.

“그러니까… 왜 하필 저냐고요!”

“너야 말로 그때 왜 그랬지?”

“제가… 언제… 뭘….”

뜻밖의 반응에 단얼은 말문이 막혔다. 뭘 어쨌단 거지? 무슨 엄청난 일이라도 저질렀나?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학원 땡땡이 친 일, 엄마 몰래 화장품으로 장난 친 일, 반 친구와 싸운 일…… 아무리 떠올려 봐도 세계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엄청난 일을 저지른 기억은 없었다.

“처음 보는 마족 아이들에게 왜 아이스크림을 사줬지?”

듀반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 주변에는 많은 마족과 인간들이 있었어. 하지만 너처럼 행동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그냥 무시하거나 수상한 아이들이라며 수비대에 신고하는 게 전부였어. 오직 너, 너만 그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에에??”

그게 그렇게 엄청난 일이라고? 그냥 아이들에게 고작 100크로짜리 아이스크림 두 개 사준 것 때문에 이 사단이 났다고?

듀반은 저렇게 말하지만 단얼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여림이라도 그랬을 것이고 다른 누구라도 아이스크림을 사줬을 수 있다.

단얼의 대답을 기다리다 듀반이 다시 말했다.

“관문을 통과할 때부터 계속 널 지켜봤어. 내 결계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처음이었거든. 마족들을 대하는 너의 태도도. 쿠수우가 에본이란 걸 알면서도 넌 똑같이 대했지.”

쿠수우라면 쿠루하 쿠수우를 말하는 건가. 설마 그 일까지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럼 대체 그때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단얼은 도저히 듀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도 모르겠니? 먼저 손을 내민 것은 너였어. 난 단지 똑같이 돌려줬을 뿐이야.”

어이가 없는 데다 황당하기까지 했다. 어떻게 아이스크림 두 개와 지난밤의 엄청난 사건이 같을 수 있단 말인지. 그냥 길거리에서 언제든 사먹을 수 있는 고작 아이스크림에 인간과 마족의 미래를 걸겠다니.

듀반의 표정은 진지했다. 농담이 아니다. 단얼은 한숨을 뱉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뭐가 들은 걸까. 그냥 이게 이 사람의 사고방식이라고 해야 할까. 끔찍한 전쟁을 겪으면서 수백 년을 살다보니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된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단얼은 평생 볼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세계인지도 모른다.

“그만 가야지?”

듀반이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아참.

단얼은 서둘러 회중시계를 꺼냈다. 듀반이 슥 보더니 말했다.

“그건 가져가. 이번 여행의 기념으로.”

“하지만, 마법 물품은 갖고 갈 수 없잖아요.”

“괜찮아. 몇 시간 후면 마력이 사라질 거야.”

듀반은 언덕 반대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단얼도 회중시계를 챙기며 그 뒤를 따라갔다.

그러고 보니 옷도 듀반에게 받은 것이다. 문득 옷자락을 들어봤다. 앞쪽에 묻어있던 듀반의 피가 거의 사라지고 안 보였다. 살짝 털었더니 말라붙어 있던 것마저 먼지가 되어 날아갔다.

“이 옷은요?”

“그것도 가져가. 이제 더 이상 총탄에서 널 지켜주진 못 하겠지만.”

듀반이 등 뒤에 대고 말했다.

언덕 아래는 절벽이었다. 듀반은 그 앞에서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잡았다. 어서 타라며 또 단얼 앞에 오른팔을 흔들었다. 아까는 그래도 어둡기라도 했지. 이젠 환한 대낮이다. 그렇다고 절벽을 내려갈 수도 호텔까지 걸어갈 수도 없다.

“그 날개로 날아가도 괜찮아요? 사람들이 다 볼 텐데.”

단얼의 물음에 듀반은 웃었다.

“심리위장 마법을 쓸 거니까 걱정마.”

그건 또 뭔지. 별별 이상한 마법이 참 많다.

“어서 타. 버스 놓치겠다.”

단얼은 결국 두 번째로 듀반의 팔에 올라탔다.

듀반이 날갯짓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로 이륙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절벽 쪽으로 걸어갔다.

아니…. 아저씨를 못 믿는 건 아닌데 이건 좀 위험하지 않나.

듀반은 그대로 절벽에서 뛰었다. 그와 동시에 날개를 활짝 펼쳤다. 비스듬히 활강해 내려가다가 지표를 스쳐지나가듯 미끄러져 다시 높이 날아올랐다.

그때 단얼의 눈앞에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첫째 날 타리아로 들어오던 순간 봤던 광경이 떠올랐다.

고개를 돌리니 저 앞에 낮은 둔덕 위 공터가 보였다. 일행이 버스에서 내려 처음으로 도시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던 장소다.

다시 반대쪽을 봤다. 방금 듀반이 뛰어내린 절벽이 보였다.

[저 위로 올라갈 수 없나요?]

[인간 관광객은 출입금지입니다.]

문문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듀반은 단얼을 그곳에 데려다줬고 가장 멋진 타리아를 보여줬다. 그곳에서 만난 마족 순례자들도 단얼을 쫓아내지 않았다.

회중시계의 마법이 사라져가는 걸까. 단얼은 조금 나른하다고 느꼈다.

듀반이 날갯짓을 하며 속력을 높였다. 흰 날개와 검은 날개가 동시에 움직였다.

신들의 도시에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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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K42. 셋째 날 (19) 14.09.12 342 0 14쪽
41 K41. 셋째 날 (18) 14.09.11 311 0 13쪽
40 K40. 셋째 날 (17) 14.09.10 290 0 15쪽
39 K39. 셋째 날 (16) 14.09.09 347 0 17쪽
38 K38. 셋째 날 (15) 14.09.08 350 1 14쪽
37 K37. 셋째 날 (14) 14.09.07 359 0 12쪽
36 K36. 셋째 날 (13) 14.09.06 495 1 13쪽
35 K35. 셋째 날 (12) 14.09.05 306 0 17쪽
34 K34. 셋째 날 (11) 14.09.04 422 0 18쪽
33 K33. 셋째 날 (10) 14.09.03 349 0 15쪽
32 K32. 셋째 날 (9) 14.09.02 206 0 15쪽
31 K31. 셋째 날 (8) 14.09.01 407 0 18쪽
30 K30. 셋째 날 (7) 14.08.31 263 1 15쪽
29 K29. 셋째 날 (6) 14.08.30 392 0 15쪽
28 K28. 셋째 날 (5) 14.08.29 368 0 14쪽
27 K27. 셋째 날 (4) 14.08.28 388 1 14쪽
26 K26. 셋째 날 (3) 14.08.27 268 1 14쪽
25 K25. 셋째 날 (2) 14.08.26 400 2 16쪽
24 K24. 셋째 날 (1) 14.08.25 257 2 16쪽
23 K23. 둘째 날 (17) 14.08.24 406 4 14쪽
22 K22. 둘째 날 (16) 14.08.23 293 2 12쪽
21 K21. 둘째 날 (15) 14.08.22 311 2 17쪽
20 K20. 둘째 날 (14) 14.08.21 332 4 11쪽
19 K19. 둘째 날 (13) +1 14.08.20 465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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