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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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릉- 따르릉-
머리 위에 둔 시계의 알람이 울렸다. 할머니 방에 깔린 이불에서 팔을 뻗어 알람을 끄고 아이들이 깨지 않게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제형도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윽-..”
“그냥 쉬어. 오늘은 내가 하면 돼.”
“13인분인데..?”
“괜찮아. 너 온 몸이 멍투성이고 근육통도 있을 테니까 오늘까지는 그냥 쉬어.”
“오후 일은 나갈게.”
“그것도 오늘은 패스해. 애들도 이해해 줄거야. 내일부턴 일 시킬 거니까 오늘은 그냥 푹 쉬어.”
“··· 응.”
오전 7시 2분.
애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거실의 이불을 접고 책상 두개를 폈다. 나는 할머니 방으로 들어가 애들을 깨웠다. 윤일이는 깨자마자 백제형을 봤다. 멀쩡히 살아있는 백제형을 보자 안심 한 건지 울기 시작했다.
“..으.. 아.”
“나 안아프고 괜찮아. 울지 않아도 돼.”
백제형이 윤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윤일이의 입이 뻐끔뻐끔 움직였다. 앓는 소리만 날 뿐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지는 않았다.
“으.. 오.. 고..”
고?
뚜렷한 자음과 모음의 소리였다. 청각의 모든 신경이 윤일이 목소리로 쏠렸다.
“고.. 마워. 고마,워 형아..”
윤일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백제형의 손이 멈췄다.
“어어—!?!?”
방에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윤일이가 약 2달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9월 10일
아직 밭일을 하기엔 덥지만 서서히 여름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요즘은 작물을 수확하고 우리가 오랫동안 먹을 수 있도록 저장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다.
수아 : “야 이거 다 옮겨야겠는데? 본진 지하에 다 안들어가.”
현성 : “1호는 안돼. 애들이 많아서 사고 칠 것 같아.”
아린 : “그렇다고 6호를 쓸 순 없어. 인원이 늘면 집이 계속 모자랄 텐데.”
현성 : “그냥 밭 사이에 있는 그 공장같은데로 옮길까? 어차피 전기도 없어서 쓸 수도 없는 데잖아.”
아린 : “50평 정도니까 꽤 쓸만하겠는데?”
수아 : “거기 문 아래 틈이 커서 벌레가 너무 쉽게 들어와. 일주일도 안되서 벌레 구덩이 될걸?”
현수 : “저희가 손 볼까요? 어떻게 잘 하면 될 것 같은데.”
아린 : “가능해?”
현수 : “근데 1주일은 걸릴 거에요. 사람도 많이 필요할 거고.”
수아 : “그정도면 괜찮아.”
아린 : “내일부터 시작 할 수 있지?”
현수 : “네. 사람은 5명정도면 돼요.”
수아 : “누구 데려갈래?”
현수 : “우주랑 민재는 기본이고.. 요즘 밭일쪽은 바쁘니까 내부 사람이랑 할게요.”
현성 : “그럼 나랑 권수아가 갈게. 너 괜찮지?”
수아 : “응. 괜찮아.”
아린 : “그럼 좀 자러 가자. 나 피곤해.”
수아 : “나 오늘 보초. 간다~”
우리는 지하에서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이미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나는 바로 보초구역으로 갔다. 백제형은 이미 보초를 서고 있었다. 나는 백제형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빨리 왔네.”
“7분 늦었잖아 이미. 미안.”
“괜찮아. 식량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저쪽에 있는 작은 공장같은데에 넣어두기로 했어. 내일부터 개조하려고.”
“누가 개조하기로 했는데?”
“공고애들이랑 나랑 현성이.”
“몸 쓰는 걸 많이 하네.”
“나 몸 쓰는거 좋아해. 마침 심심하던 참인데 잘 됐어.”
저번과는 다르게 우리의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윤일이 사건 이후로 우리의 어색함도 많이 줄었다. 꽤 설레는 기분이었다. 짝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 이게 짝사랑이라고 확정할 순 없었지만 색다른 감각인건 확실했다.
한창 떠들다 시간을 봤을 때는 이미 12시가 조금 넘었다.
“······.”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대화가 끊겼다. 다른 사람이 없을 때 우리끼리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비밀 이야기라도 해봐.”
“······.”
백제형이 머뭇거렸다.
“··· 우리 무리는 원래 16명이야.”
백제형의 사라진 형을 포함해도 무리는 15명이라고 했었다. 지금까지 거짓말을 한 건가?
“쉘터에 들어가고 1달 정도 됬었나? 서희 누나가 죽인 그 애랑 16번째 애는 쉘터를 나가 남들처럼 싸우기를 원했어. 가만히 갇혀있을 수는 없다고 하면서.”
백제형은 지금까지 숨겨온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둘을 중심으로 무리는 점점 나누어졌어. ‘이대로를 유지하자’와 ‘쟁탈전에 참여하자’로. 아무리 생각해도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도전이었지. 그런데 그자식 주위로 붙은 사람들 목소리가 점점 커졌어.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말이야.”
“······.”
“어느날은 내 방에 물이 떨어져서 새벽에 카운터로 내려간 날이 있었어. 말소리가 들리더라고. 언제 쉘터의 물건을 챙겨 나갈까.. 하는 그런 이야기. 남은 사람은 그냥 다 굶어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이야.”
“그걸 듣고 가만히 있었어?”
“···다음날은 그자식이 보초를 서던 날이었어. 애들이 모두 자고 있을 때, 걔를 밖으로 불러냈어. 네 의견에 찬성하겠다고 말하면서.”
“······.”
“그리곤 주차장의 흙밭에 서서 걔 목을 찔렀어. 피가 이리저리 튀고 온 바닥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애들은 알아?”
“아니. 숨겼어. 피가 묻은 자갈이랑 흙은 시냇물에 흘려보내고 옆 모텔의 흙을 퍼와서 땅을 메꿨고.. 피 묻은 옷을 야산에 묻고 놈이 혼자 도망친 것처럼 꾸몄어.”
“..철저했네. 무섭진 않았나?”
“몆 주 동안 잠을 못잤어. 아직도 가끔 꿈에 나와. ···근데 우리가 둘로 나뉘어서 결국엔 모두가 죽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나았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도 결과도 마음에 드는 이야기였다.
“걔가 죽으니까 쉘터를 벗어나겠다는 목소리가 점차 줄었어. 근데 백화점에서 죽은 그놈만 포기를 안했지. 그 때 마침 서희 누나가 걔를 죽였고 소음은 완전히 사라졌어.”
“그래서 그 포인트에는 별 반응 안 보였구나.”
“응.”
내가 먼저 비밀을 말해달라고 하긴 했지만 이리 쉽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줄은 몰랐다. 당황스러웠지만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무서워하고 그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무리를 위해 맹목적으로 싸우는 것. 절대 쉽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네 차례야.”
“··· 현수 친구 이야기 알아?”
“현수가 납치돼서 구하러 갔던 이야기?”
“응. 친구가 하나 죽었다는 것도 알아?”
“···응. 들었어.”
“걘 아린이를 강간 하려 했어. 그래서 내가 내쫓았어. 그런데 그걸 현수네가 따라가는 거야. 결국엔 예상처럼 다른 무리에 잡혔고 구하러 가게 됐지.”
백제형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근데 그새끼가 도망치더라고. 현수는 기절했고 애들은 죽기 살기로 싸우는데 혼자서 말이야.”
“······.”
“숨 쉴 자격이 없는 놈이더라. 그래서 도끼를 놈 등에 꽂았어.”
“.. 아무한테도 안들키고 그걸 할 수 있었다고?”
“다들 자기 눈 앞에 있는 칼부터 피하기 바빴을 테니까. 이찬혁을 죽인 도끼도 놈들 도끼였고. 뭐, 운이 좋았지.”
“후유증은?”
“······.”
고개를 돌려 백제형과 눈을 마주쳤다. 웃음이 났다.
“난 쉘터 외의 인간은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아.”
오전 2시 57분.
성찬이와 진호가 보초를 서기 위해 이곳에 도착했다. 나와 백제형은 그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본진으로 올라갔다. 분위기가 바꼈다.
“······.”
나란히 걷는 우리의 팔이 가끔 부딪혔다. 말 대신 짧은 스침만이 오갔다.
삑삑삑삑 -
드르륵- 탁.
현관 가벽의 문까지 꽉 닫았다. 모두 자고 있었다.
부엌에 가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었다. 아이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이 침묵은 내 온 신경을 곤두세우기 충분했다.
“들어가자. 아침에 ㅂ-.”
백제형과 입이 맞았다. 부엌 가벽이 닫히고 우리의 몸이 식탁 위로 옮겨갔다.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으응..”
또 한 번 장소를 옮겼다. 이번에는 아랫층의 침대방이었다. 후레쉬 하나와 사람 둘, 온기가 나뉘는 시간.
적절한 긴장감과 정의 되지 않은 관계. 여자의 약점이었다.
10월 24일.
백제형 무리가 쉘터에 들어오고 다른 무리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평화롭게 2달을 보냈다.
농작물 수확은 끝이 보였다. 남은 것은 고구마와 호박, 배추와 무다. 고구마의 수확은 오늘내일 끝날 것이고 나머지는 우리가 재배하는 양 자체가 그리 많지 않으니 많은 인력은 필요치 않았다.
내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갑자기 뚝뚝 떨어지는 기온에 겨울을 준비했다. 각 집마다 장작을 쌓고 두꺼운 이불과 옷을 꺼냈다. 아이들에게는 감기를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야, 야 권수아. 왜그래? 가서 낮잠 좀 잘래?”
“..어? 어.. 아니. 괜찮아.”
마지막으로 윤후와 윤일이의 옷을 거실에서 정리하고 있을 때, 아린이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너 왜 그래? 요즘따라 계속 졸고.”
“몰라. 나도 당황스러.”
“뭐래-. 어디 아픈건 아니지?”
“응. 그냥 환절기라 그런가봐.”
원래 잠이 없던 체질이라 이렇게 잠이 쏟아지는 건 나로서도 이상한 일이었다.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스트레스 자체인 기분이다.
백제형과 그 일이 있고 나서 우리의 관계는 후진됐다. 정확히는 내가 피했다. 무언가 연애라고 할 만한 단계는 찾아볼 수도 없고, 무언가 진중한 것들이 없었다.
목숨줄이 왔다갔다 하는 이 시기에 쾌락만을 추구하는 행위를 즐기는 건 맞지 않는 것 같아서다. 이 관계가 후에 제대로 된 짝을 찾았을 때 방해가 될 수 있기도 했고.
우리는 아침을 준비하는 사람이라 이 집에서 가장 빨리 일어나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아래층의 침대방에서 같이 나오는 모습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이 일을 숨기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저-“
“이건 없었던 일이야. 애들한테 말하지도 말고 그냥, 없었던 일로 해. 우리 서로 유전자를 공유할 배우자는 제대로 찾아봐야 하지 않겠어?”
그 때 백제형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내가 그를 보지 않았다.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준 셈이었다.
이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전과 같은 어색한 관계를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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