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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정님의 서재입니다.

무연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완결

이원정
작품등록일 :
2014.10.12 19:32
최근연재일 :
2015.12.09 17:50
연재수 :
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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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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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8,283

작성
14.10.12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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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5쪽

2장 공동산(崆峒山)에서

DUMMY

1) 떠날 적에


산적의 침입이 있은 지 사흘이 지나고 고양이 새끼 마냥 아련히 눈을 뜨는 무연. 죽은 줄만 알았는데 몸 여기저기서 저마다 아프다고 전해오는바. 고통을 느끼며 살아있음을 알게 된 소년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마음으로 뜬 눈. 생전처음 보는 영감의 얼굴이 나타났다.


“니눔 심줄 튼튼하기가 고래새끼와 같고 뼈다귀의 강고함은 소와 같구나. 니는 어지간하면 죽기도 어렵겠다.”


흐뭇하게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는데 마치 자기 손자 보는 듯이 기뻐하고.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무연의 생사귀환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오히려 자신들이 욕하던 소년이 죽음을 무릅쓰고 마을을 구하려 한 걸 고맙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운의 어미는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말하길,


“저 놈이 경운이를 덮쳐 아이를 죽였고, 약방의 영감님에겐 병을 옮겼습니다. 또한 이번에는 산적 떼를 불러와 남편까지 죽었으니, 모든 일의 원흉은 무연이라는 저 잡놈 때문입니다.”


“허어··· 처녀를 덮치려는 녀석이 어찌하여 마을의 아이들을 구하고 또 사람들을 구하고자 나섰겠는가?”


“그건 마을에서 쫓겨난 녀석이 어떻게든 다시 이곳에서 살아보자 하여 구실을 만들려 나선 것에 불과합니다. 저놈은 흉물 그 자체입니다. 실제로 마을 구한 건 진인 아니십니까?”


이에 삼음진인(三陰眞人) 탄식하며 말을 멈췄고, 마을 사람들은 핏대 올리며 경운 어미 편을 들었다. 삼음진인 그저 속으로 생각하되,


‘무지한 것들이 선심을 받아들이지 못한 저들 탓은 하지 않고 애꿎은 희생의 제물만을 찾는구나. 지금은 말 섞어봐야 감정의 실타래를 헤어나지 못할 것. 다만 애석한 건 무연이란 아이다. 가엽고도 가엽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내가 데려가겠네. 뼈가 붙는 즉시 갈 터이니 그리 알게들.”


침상에 누워 거동이 불편할 뿐, 눈과 귀가 막힌 것은 아니라서 마을의 험한 말은 모두 귀에 걸렸고. 뭉그러지는 자신의 선심(善心)에 억울하고 답답하나 내색하진 못했다. 그저 가슴 깊이 흐느껴 우는 도리 밖에. 그 가운데 얼굴 허연 노인네만 자신을 위로하니 마음은 온통 마을 떠나기만을 원했다. “너는 공동파를 들어 보았느냐?”


“그런 것은 들어본 적 없어요. 저는 다만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아요.”


큰 눈이 벌게지고 물은 그렁그렁 차오르고. 떨구지 않으려 애쓰는데 그 모습이 더 애달프고. 삼음진인 애석하여 아이의 등을 두드리니 결국은 몇 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타고나길 워낙 강건히 태어난 무연인지라 상처가 아물고 뼈가 붙는 것은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보름이 더 지나 무연의 거동에 별 이상이 없자, 그는 아이의 손을 잡고 고을을 떠났다. 떠나는 그들을 배웅하는 사람이 몇 없어 그 모양은 심히 서글펐다 하더라.


2) 삼음진인(三陰眞人) 유태(劉苔)


삼음진인이 수학했던 공동파는 감숙성(甘肅省)에 자리한다.


이 공동파는 구파일방(九派一房)이라는 강호 세력에 속하고. 물론 그중에서 제대로 된 구파라면 소림과 무당이 우선이고 아미, 화산, 곤륜이 비교적 뚜렷하다. 나머지는 때마다 자릴 바꿔 점창, 종남, 청성, 공동, 해남, 천산, 모산 따위는 문주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흥망성쇠를 나눠가지며 구문(九門)으로 쳐주기도 하고 빼기도 한다.


과거 공동파는 제법 성세를 떨쳤다. 다양한 성질의 무공이 조화롭게 섞여 있어 검(劍), 장(掌), 권(拳), 기(氣)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는 현기(玄機) 어린 문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대가리들이 하나둘 썩어가며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는 잡술로 빠지다가, 괜한 힘으로 아녀자들 후리기에 집중하니 현인들은 떠나가고 악인들만 남았다. 세력이 약해진 후에는 그마저도 떠났고.


문파에 사람이 없는데 어찌 번성하여 번창하겠는가. 현재 공동파 곳간에는 남은 쌀이 얼마 없고, 문파의 경계도 희미해져 수도하는 굴에 곰과 원숭이가 제집인 양 노닐며, 짐승들을 쫓아낼 제자 하나 없는 형편이다.


과거와 현재를 모두 간직한 사람이라면 이런 처지가 안타깝겠으나, 오로지 현재만 있는 무연으로서는 전후 맥락을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안타까울 이유도 없다. 그저 인적 없는 곳에서 산짐승을 보며 마음의 휴식을 얻고 있으니 이것도 다행이라면 다행.


유태는 날 때부터 몸이 작고 왜소하여 오로지 그가 공동파에 들른 것은 병약한 몸을 강건히 만들기 위함이라. 정식제자도 아닌 속가제자로 입문했던 유태. 하지만 머리만은 명석하여 공동파의 많은 무공을 머릿속에 담고 다녔던 인물이다. 한번은 어린 유태가 자신을 가르치던 사부를 바꿔 달라 간청한 일이 있었다. 스승이 불쾌히 여겨 그 뜻을 묻자,


“제자의 뼈는 가늘고 무르며, 팔 다리 근육은 계집아이와 같으니 지금 배우는 혼원공(混元功)의 성질을 능히 당해내어 대성할 수 없습니다. 파괴력은 떨어지나 유려한 삼음기공(三陰氣功)을 익힌다면 그나마 제 한 몸은 보전할 자신이 서겠습니다.”


매사에 허연 얼굴로 비리비리한 것이 무공 진전까지 더디어 누구에게나 둔재로 여겨지던 유태였으나, 본 일화를 통해 무공에 대한 이해가 높고 강단 있는 성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칭찬을 얻어 주목을 받은 뒤엔 부정 또한 따르는 법. 그의 태도를 문제 삼아 예의 없다 여기는 시선 이 따라 붙었다.


바르고 이치에 맞는 말을 하는 자. 그 존재를 귀히 여겼다면, 그런 사람들이 공동파에 많았다면, 공동파가 망할 지경에 이르지도 않았을 것. 하지만 쇠락하는 공동파를 막기에 유태는 아직 어린데다가 속가제자.


별다른 연줄도 없고 가능성만 있는 상태였으니 누가 이를 알아보고 키워주겠는가. 공동파에 남아있던 마지막 현인인 일양진인(一陽眞人)이 뒤늦게 유태를 정식제자로 발탁하고 열과 성을 쏟았으나, 때는 이미 늦어 침몰하는 배를 혼자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일양진인마저 세상을 떠나자 유태의 상심은 극에 달했다. 그는 공동파를 떠나 유랑을 시작했고, 근근이 들리는 자파의 소식에는 그저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몇십 년이 지나자 공동파는 완전히 쇠락하여 문파의 현판에는 이끼만이 가득하니 그야말로 망했다는 설명이 적절하고.


본의 아니게 일인일문(一人一門)이 된 공동파는 유태와 함께 생명을 다해가고 있던 참이라.


“노인장, 이곳은 사람도 없고 짐승이 많아 사냥하기 적절하네요. 안개도 많아서 나름 경치가 좋아 보고 있으면 편안하고 좋구요.”


남의 속도 모르고 편한 소리 한다 여긴 유태였으나 다음날부터 곳간에 차곡차곡 쌓이는 땔감과 약초, 짐승 거죽을 보고 입이 벌어진 건 사실이다. 늘그막에 손자 얻은 영감이 다른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사지육신 튼튼히 만드는 무공이나 가르치는 것.


“그러면 노인장이 이제 나의 사부가 되오?”


“그렇다, 이 녀석아. 어서 아홉 번의 절을 하고 예를 갖춰······ 아니다. 그게 무슨 짓거리냐. 구배지례 챙긴다고 무엇에 좋을 것이냐. 절은 한 번으로 족하고, 글도 약간은 익히자꾸나. 이제부터는 내가 노인장이 아니라 사부님이다.”


“그러면 노인장, 무공이란 걸 익히면 무엇에 좋소?”


“몸이 튼튼하여 건강해지고, 날랜 몸과 강한 팔을 갖게 된다.”


“나는 지금도 날래고 강하여 사냥을 하는 데에 두려움이 없소.”


“하지만 홀로 곰과 호랑이를 잡을 수는 없지 않느냐?”


“사람이 어찌 혼자 곰과 호랑이를 잡소?”


“힘으로 곰을 제압하며, 호랑이는 느리게 보일 것이다. 무공을 익히면 그리 된다.”


“그 말대로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사부님 하셔요.”


시골 아이라 글을 모르는 것과 삶이 기구하여 일상 예의범절에 어둡긴 했으나 모르는 것은 가르치고, 부족한 것은 채워주면 될 것이라 여긴 유태. 공동파 재건을 위해 사명을 부탁하려던 삼음진인은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선행을 쌓아도 모자랄 판국에 도사라는 놈들이 악업을 하늘에 닿도록 쌓았으니, 문파의 재건을 맡기는 것은 옳지 못하다. 공동파가 나와 함께 땅으로 묻히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귀결일지니···’


하고는 다음날부터 무공과 글을 전하며 하루하루를 같이 보내게 된 노(老) 스승과 소(少) 제자다.


3) 당부


어느덧 흐른 세월에 무연은 열일곱이 되었다. 3년 전에도 이미 성인만큼은 되었으나 이제는 더욱 자라 보통사람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있다. 거기에 넓은 어깨는 곰을 연상시켜 어디 내놔서 누가 봐도 역사(力士)라 부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사부님, 이제는 제가 곰을 잡을 수 있는지요?”


“지금 간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허나 그럴 필요 있겠느냐? 이제는 새로운 것을 익힐 때가 되었다.”


하면서 전해준 것이 혼원일기공(混元一氣功)이다. 애초에 이 무공으로 말하자면, 천지간의 힘을 하나로 모은다는 것이니 그야말로 신에 도전한다는 뜻이 내포된 무공. 십성에 달하면 하늘이 놀라고 땅이 절한다는 무시무시한 내공이지만, 도전한 사람은 많으나 처음에 무공 만든 사람을 제외하면 여태 제대로 익힌 자가 없다.


십성에 이르려 하면 몸이 터져 죽어나가는데 어찌하겠는가. 누구나 한 번쯤은 도전하는 마음으로 익히다가 종국에는 고개를 흔들며 포기하는 그런 무공.


유태 또한 이런 위험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무연의 몸뚱이는 자신이 익힌 유려한 계열의 무공보다는 직선적이고 강하게 뻗는 무공이 어울려 보였다. 어쩌면 저놈의 저 몸뚱이야말로 혼원공의 적폐를 해소할 자산일지도 모른다 여겼다.


차차 시일이 지나면서는 패도적인 무공을 하나씩 전수하니 그것을 읊으면 다음과 같다.


혼원일기공(混元一氣功)을 기반으로 혼원장력(混元掌力)을 익히고, 근거리에서 다툴 때 사용할 비봉수(飛鳳手)와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는 행운유수(行雲流水).


공동파 최고의 권은 보통 칠상권(七傷拳)으로 알려져 있다. 익힐 수만 있다면 더 없이 좋으나, 무려 일곱 가지의 서로 다른 경력을 발출하는 권리(拳理)의 복잡함을 무연이 이해하고 펼치는 것은 난망(難望)한 일. 제 아무리 수재인 유태에게서 배웠다지만 무연은 그저 무식쟁이에서 벗어난 수준이지, 갑자기 수재나 천재가 되는 건 아니었다.


삼음진인 또한,


“우선은 그냥 쏟아내고, 던지고, 부수는 것만 생각하여라. 하다보면 절로 어느 때 완급을 조절해야 할지 느끼게 된다. 머리로 상상하며 찾아가는 이도 있고, 몸으로 익혀 느끼는 사람도 있다. 너는 후자에 가까우니 오묘한 기의 운용을 세세한 것에서 찾기를 권하지 않는다. 그 저 큰 길을 따라 꾸준히 운용해도 능히 닿으리라.”


다시 삼 년이 지나 무연은 스물이 됐고, 유태는 그에게 곰과 호랑이 사냥을 허용했다. 사부의 허락을 받은 무연은 기쁜 마음으로 즉시 행동에 옮겼다. 평소에 봐두었던 곰과 호랑이를 찾아가서 곰은 때려잡고 호랑이는 발로 밟았다. 자신의 힘을 확인한 그가,


“다시는 이것들이 두렵지 않게 됐다!”


하고 소리를 지르니 공동산의 축생(畜生)치고 무연을 두려워하지 않는 놈이 없었다. 사부를 찾아 자신의 성과를 보여주며 기세등등한 무연.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유태는 그에게 몇 마디 당부를 남겼다.


“이곳에 살아도 좋고 세상에 나가도 좋으니라. 다만 경계할 것은 너 자신이다.”


“무공으로 논한다면 너와 비슷한 나이에서는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넓고 넓어 사람에 휘말리면 무가 아닌 다른 싸움도 하게 된다. 그러하니 한 번은 더 생각하고 행동해라.”


“네 녀석이 익힌 무공들은 제법 경지에 올랐으나, 모든 것을 매끄럽게 연결하는 것에는 부족함이 있다. 2년의 수련을 더한다면 작은 결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상은 한 없이 둥글고 둥그니라. 같은 일을 반복하고, 같은 역사가 재현되고, 같은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 세상과 사람이다. 순환의 원을 끊고 시작점을 달리 하여 또 다른 원을 만드는 노력이야말로 먼지 같은 인간이 지닌 최대의 가능성일지니······”


“내가 얘기한 네 가지는 모두 머릿속에 새겨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되뇌어 보거라.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가까운 것이고 첫 번째와 네 번째는 평생 갈 것이다.”


평소와 다른 사부의 말에 불안을 가슴에 맞이한 무연. 그의 짐작대로 유태는 자신의 명이 끝에 다다랐음을 알았던 것이다. 유태가 부드럽게 웃으며 상황을 얘기하자, 듣던 무연은 벌써 눈물이 가득해 쏟아질 참이다.


“사부님 가지 마세요. 나를 두고 가지 마세요.”


“말년에 너를 만나 즐거웠으니 기쁘고도 기쁘다. 그것으로 족한다.”


무연은 한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렸고, 눈물과 콧물이 범벅되어 온 얼굴을 가렸다.


그의 기억에 가장 어렵고 외로울 때 곁에서 돌봐 준 유일한 사람이 유태인지라 안타까움과 서글픔은 극에 달했다. 여기에 홀로된 설움까지 겹치니 먹을 것도 원하지 않고, 눈을 감아도 잠에 들지 못했다.


바닥에 누워 눈물을 흘리던 무연은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방황하던 분노가 손발로 옮아가 애먼 나무와 바위만 죽어났다. 주먹질 발길질에 주변은 폐허가 되고. 나무 구멍에 살던 다람쥐도, 같이 어깨 다툼을 벌이던 곰도, 꼬리잡기하던 호랑이도 모두 그를 피했다.


패악질을 부리던 그는 어느 날 괴물을 발견했다. 발밑에 길게 늘어져 자신을 따라 움직이는 괴물을. 도망치려 몸을 비틀어도 떨칠 수 없는 괴물.


그는 있는 힘껏 도망쳤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어 산 정상에 이르자 괴물도 지쳤는지 몸이 조금 줄어들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안심하던 무연은 문득 뭔가를 느꼈다. 작아진 괴물 또한 자신을 따라 헐떡이고 있었기에. 순간 머리에 싸한 느낌이 엄습했다. 정신 또한 돌아왔다.


달빛이 그려낸 그림자를 괴물로 만든 것도 자신임을 알았다. 그는 자조의 웃음을 지으며 탄식했다.


“사부의 첫 당부를 벌써 잊은 셈이로구나.”


4) 손님 맞이


삼음진인을 보낸 후 다시 홀로된 무연. 괜히 성을 내던 짓은 멈췄으나, 유태의 사망과 함께 무에 대한 성취욕도 수그러들었다. 바라봐주고,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는 까닭에. 태어나 처음 겪은 성장과 인정의 기쁨이 커도 제법 컸던 모양이다.


그는 수련을 하지 않고 글도 읽지 않으며 그저 놀고먹기에만 치중했다.


날이 맑고 좋은 날엔 원숭이를 찾아나서 열매는 뺏어먹고 돌을 던지며 괴롭혔다. 흐린 날엔 곰이 사는 동굴로 들어가 끊임없이 곰의 엉덩이를 차며 심술을 부리니,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분기탱천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눈치 빠른 커다란 고양이만 옆 산으로 도망가서 치욕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삼 개월이 지나자 무연이 사는 곳에 산적인지 도적인지 모를 놈들이 몇 들어왔는데, 경내(境內)에 들어올 때부터 기척을 느낀 무연은 앙큼한 생각이 떠올라 몸을 숨겼다. 이를 모르는 도적들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아, 공동파가 망했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사람은 없고 짐승 천지네?”


“그래도 이쪽에는 사람이 살던 흔적이 있어. 보아하니 얼마 전까지 있던 모양이야. 다행히 지금은 없는 것 같으니 얼른 비급이나 찾아 내려감세.”


한 쪽에서 지켜보던 무연은 비급을 찾자는 말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황당하고 어이없어서. 그러나 도둑들의 경지가 낮아 듣지는 못하고.


어디 한번 실컷 찾아보라는 심정으로 반나절을 지켜보는 무연.


“아, 이건 망한 수준이 아니라 없어진 수준이야. 아무것도 없네?”


“그래도 곳간에는 땔감, 약초 따위가 있는데? 이거라도 가지고 내려갈까?”


“야아! 우리가 산적이지, 약 장수냐? 거 모냥 빠지는 소리 집어치우고 내려갈 준비나 해.”


“빈손으로 대장에게 가면은 죽도록 뚜드려 맞을 일이 훤한데 가긴 어딜 그냥 가? 차라리 여길 거점삼아 새롭게 시작하는 게 났겠네. 그러지 말고 대장을 꼬셔보자. 여긴 터도 있고, 곳간도 있다.”


그 말에 서로 좋다 맞장구치며 낄낄거리다가 다른 산적 놈이 물었다.


“그런데 여기 살던 도사라도 나타나면 우린 어찌 되냐?”


“도사는 무슨? 잘해봐야 사냥꾼이겠지. 쫒아내던가 조무래기로 받아들이면 되지.”


도적들의 장단을 듣던 무연이 드디어 자신의 재미를 펼칠 순간이 왔다고 여겼다. 또한 삼음진인의 뜻으로 공동파 계승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집이 된 이곳을 산적에게 내주기도 싫었고.


산적 몰래 곰의 동굴로 찾아간 무연은 싫다는 곰을 적당히 두들기고 달래어 그들 앞에 풀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곰의 출현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도적.


그 꼴을 보고 좋아라 웃어대던 무연이다. 한참 낄낄대던 무연은 곧 너무 빨리 쫓아냈다는 자책에 빠져 들었다.


‘붙들고 재미를 더 느꼈어야 하는데.’


짧게 본 재미에 아쉬워하던 차에 삼일이 지나고 산적이 다시 돌아왔다. 자신들의 대장과 함께. 두목은 공동파를 둘러보며 감탄을 연발하고 곳간을 보면서는 웃음을 보였다.


근처에 곰이 살아 무섭다는 수하의 태도에는,


“너희 같은 놈들에게나 맹수이지, 내게는 그저 하찮은 미물에 불과하니라.”


하고 큰 소리를 치고.


말을 들은 무연은 심술이 올라 다시 곰을 꼬드겨 그들에게 보냈다. 마지못한 곰이 산적 앞에 나서자 졸개들은 혼비백산하여 갈피를 못 잡았다. 그러나 두목은 잘 만났다는 듯이 호기롭게 외치고.


“어허, 덩치 큰 미물이 감히 이 거력검왕(巨力劍王) 필우님 앞에서 주제를 모르고 나서는구나!”


필우가 검을 뽑아 내려치고, 후려치고, 돌려치는 게 나름 절도가 있다. 은연중엔 냉랭한 기운이 나오는 게 산적치고는 제법이고. 그 덕에 곰의 상처가 하나 둘씩 늘어갔지만, 아무리 손과 발을 휘둘러도 필우의 그림자 하나 잡지 못했다.


이제 곰이 느끼길 ‘천상 무연 그놈과 같은 종자다’ 하며 돌아서려는데, 필우가 곰의 퇴로를 차단하며 여기저기 찌르기를 계속했다. 이러다간 애꿎은 곰 새끼만 죽어나갈 판국이니 공동산의 제왕이 어찌 나타나지 않을까.


“이 도적놈아! 죽이려면, 그냥 죽이지. 왜 무자비하게 괴롭히니?”


시커멓고 커다란 게 기척 없이 나타나서 사람처럼 말을 하니 필우 또한 잠시 놀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내 진정하고 무연을 살펴보자 몸뚱이는 커다란 게 가죽이나 겨우 걸쳤고, 얼굴은 온통 수염에 머리는 제 멋대로 풀어졌다.


아무리 봐도 문물의 혜택 없이 곰과 자란 사람 거죽의 짐승처럼 보이고.


“너는 이 곰의 새끼더냐?”


하고 물으니,


“나는 이놈의 형이다.”


라 답하며 주먹이 날아왔다.


강렬한 권풍이 몰아치자 필우는 놀라 몸을 피하고. 무연이 재차 발을 날렸을 때도 무시무시한 기운이 나타나 땅으로 데굴데굴 몸을 구른 필우.


급작스런 선제공격에 기세를 빼앗겨 패배가 명확해지는 시점. 낭패한 기색의 필우는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상대의 결정타가 더는 들어오지 않고. 의아함에 빠진 필우. 영문을 몰라 잠시 생각 했다.


‘일천한 경험이요, 어리숙한 장사로다.’


뒤로 물러나 정신무장을 한 필우. 검을 꽃꽂이 세우며 무연의 몸 여기저기를 찌르기 시작했다. 아까의 냉랭한 기운이 검의 끝 마디마디 퍼지고.


사부와의 대련 때나 볼 수 있던 검기에 무연은 순간적으로 반가웠지만 그것도 잠시뿐. 자세히 본 그의 검세는 기운 하나하나가 잡스러워 너무도 싱겁게 소멸됐다. 안타까움이 늘어 씁쓸함만 배가 시킨 격.


이 가운데 점차 질려가는 건 필우였다.


호기롭게 나설 때가 좋았고, 곰도 물리쳐 자신의 무위를 수하들 앞에서 자랑하는 순간이 좋았다. 마침내 곰을 죽여 유종의 미를 거두려는데 이상한 녀석이 나타나서 훼방을 놓고. 그나마 이때는 마음속 어려움이 없었다.


덩치가 크다는 것은 고작 시정잡배에게나 통할 위협이라고. 그런 놈들 별 것 없다고.


막상 싸움이 진행되자 곤란해졌다. 다투면 다툴수록 자신이 별 것 없는 놈이 되고 있었다. 점차 죄어오는 압박은 이제 견딜 수가 없는 수준. 이대로 계속 가다간 내 목숨만 위태롭게 생겼다. 어쩔까 하던 그는 돌연 뒤로 펄쩍 몸을 날려 무연과 거리를 벌리더니만,


“오해해서 미안하오. 공동의 제자인 줄 몰랐소. 나 또한 공동과 연이 있어 무예를 닦았으니 우리는 이렇게 싸워야할 그런 사이가 아니오. 사부님의 함자가 어찌되시오?”


싸울 때와 다르게 부드럽게 말을 건네는 태도가 이질감을 만들었으나, 억울함은 겪어봤어도 아직까지 누구에게 속아 본적은 없는 무연이다.


사부의 이름을 묻자 응당 떠오르는 것이 유태라는 두 글자인데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얘기 해 볼 순간을 맞이하는 것도 처음이다. 더불어 공동파의 또 다른 후예를 이렇게 만나는가 싶어 벌써 감격할 준비까지 마친 무연.


그는 어투를 공손히 바꾸어,


“삼음진인, 유태. 그분이 저의 사부님입니다.”


그리 답하자, 이제는 허리춤에 칼을 꼽고 만면에 희색을 띠며 다가오는 필우다.


“아, 삼음진인께서는 정말 좋은 분이셨지요. 공동파 내에서도 남다른 인품과 도력으로 인망이 자자하셨던 분 아닙니까?”


필우는 정녕 반가운 듯이 두 손으로 만든 포권을 연신 흔들고.


그런데 무연은 스승이 공동파 내에서 어떤 명망을 얻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사문의 명(命)을 자신에게서 종식(終熄)시키려는 유태가 어찌 자세한 내막을 무연에게 전하겠는가. 더구나 그 또한 수십 년을 공동파와 떨어져 지냈고.


무연은 그저 사부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는 필우가 반가울 따름이다. 타인의 입을 통해 저 좋아하는 사람이 언급되는 것 자체가 기쁨이라. 더구나 유태에 대한 표현이 칭송의 탈을 썼으니 어쩐지 우쭐해지며 기분까지 좋아지는 무연이다.


“형장의 사부님은 존함이 어찌되시오?”


무연이 반대로 물으며 다가서자 이제 둘의 사이는 한층 가까워졌다.


필우가 ‘저의 사부께서는’ 까지 말하다가 포권을 취한 동그란 손을 풀자 검은 주머니 하나가 나타나고. ‘어’ 하는 가운데 주머니는 무연의 얼굴로 향하며 풀어졌다. 순간 당황한 무연은 뭔지도 모르고 가루를 마시게 됐는데 금세 어질어질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더라.


계략이 성공하여 미소 짓던 필우는 급히 검을 빼어 무연을 찔렀다. 거리가 거리인지라 검봉이 무연의 복부를 뚫고 반대편으로 튀어나오고. 크게 휘청이며 쓰러지는 무연의 몸뚱이를 보다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크게 웃는 필우.


한참을 웃던 그는 너부러진 무연에게 침을 뱉으며,


“멍청하기가 곰과 닮았으니 네 놈 또한 어르신 앞에서는 미물이니라!”


바닥에 누워 기척 없는 무연을 보고 이제 그만 검을 뽑아가려는 필우였는데, 어쩐 일인지 꼼짝도 않는 검이다. 불길한 낌새에 손을 놓고 몸을 빼는 필우였으나, 곧 자신의 손을 덮는 더 큰 손의 감촉을 느낀 필우.


어느새 일어선 무연이 왼손으로 잡은 필우의 주먹에 내공을 가득 쏟았고,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혼원장을 일으켜 가슴을 두들겼다.


필우의 주먹은 원래 크기의 절반으로 줄었고, 가슴은 등으로 피를 뿜으며 구멍이 뚫렸다. 이 급작스러운 상황에 지켜보던 졸개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고. 그 뒤를 곰이 달리며 쫓고.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무연은 상실감에 빠져 며칠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필우와의 사건을 떠올리며 생각건대,


‘사부님 말이 틀린 것 하나 없구나. 그간 수련을 너무 게을리 했다. 고작 산적 두목에게 이런 상처를 입다니.’


실상은 본인이 경솔하게 사람을 믿어 발생한 일인데 과한 자책을 하는 무연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전처럼 잘못을 교정해주거나 지도해줄 사람이 없으니 시행착오는 피할 수 없는 일이고.


다음날부터 수련에 착수한 무연.


아침에는 원숭이의 열매를 훔쳐 먹고 훈련하고, 점심에는 곰이 잡은 먹이를 훔쳐 먹고 훈련하고, 저녁에는 그래도 손수 밥을 지어먹고 쉬었으니 작은 양심이라도 챙기는 삶이다.


그렇게 일 년 정도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 모든 무공이 하나의 차원에서 서로에게 연결됨을 느끼게 됐다. 조금만 더 하면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로 일통되지 않을까 여기게 되고. 계속해서 원숭이와 곰을 착취하며 수행을 정진하던 무연은 열 달이 더 지나자 작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혼원장력(混元掌力)은 혼원일기공(混元一氣功)을 손으로 보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구나. 비봉수나 행운유수 또한 다를 바가 없다. 몸에 달린 것이 팔 다리이니, 어디로든 내보내지 못할 것이 없다. 손으로 보내면 장(掌)이고 주먹을 통해 펼치면 권(拳)이다. 발로 내어 땅을 차면 경공이고, 힘을 실어 휘두르면 각법이다. 무릎으로 보내면 슬(膝)이고, 팔꿈치로 보내면 주(肘)이다.’


‘초식이란 것은 그저 무공을 처음 배우는 이를 위해 기운을 안내하는 지침일 뿐. 충분히 익숙해져 편해진다면 기(氣)와 식(式)을 자유로이 넘나들어 거침없이 흐르게 된다. 아하, 일체물별기식(一切勿別氣式)이란 그런 뜻이었구나. 이것은 사부께서 여러 번 언급하신 말이었는데 이제야 그 의미를 파악하다니!’


다른 건 몰라도 이제 무에 대해서만큼은 나름 자신이 생긴 무연이다. 그 또한 자신의 성장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동안 크게 웃었다.


그는 가슴에 생긴 호기(豪氣)로 몸을 날려 산을 타고 정상에 올라 큰 울음을 토했다. 산천(山川)은 메아리로 화답하고, 초목(草木)이 몸을 털어 그를 반겼다.


5) 또 다른 손님


성취의 즐거움과 함께 산을 뛰어다니며 시간을 보내던 무연.


문득 그가 자리에 앉았다. 가만히 땅바닥에 수를 그리며 뭔가를 헤아렸다. 땅에 그려진 숫자무의미 했으나 의미는 머리에 남았다. 스물 셋에 이른 현재와 십여 년 전의 자신이 떠오른 것.


아득한 추억이 된 과거.


마을 산에서 장작을 패고 약초를 캐던 일. 본의 아니게 돌림병의 원흉이 된 것. 산적 떼의 포악질에 정신을 잃고 눈을 뜨니 보였던 유태. 만남에서 사별에 이르기까지.


기억들이 하나 둘씩 교차 편집되는 가운데 별안간 성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포악한 녀석아, 어찌 나를 이리 괴롭히느냐?”


소리 따라 시선을 맞춰보니 웬 여인 하나가 곰과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다.


하필이면 공동산 맹수 중 최고를 다투는 저놈과 논단 말인가. 이놈은 본의 아니게 무연과 놀아나며 인간과 다투는 것에 익숙해졌다. 하물며 젊은 처자의 앙앙대는 칼질이야 무서워할 것도 없고.


그래도 여자의 몸이 제법 민첩해 곰으로서는 다소 성가시기도 한 모양이다. 처자는 곰의 완력이 무서워 다가서지 못하고. 곰은 그녀를 잡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여자가 처음 곰을 발견했을 때만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적당히 공격을 피해 산 위로 달리면 자연스레 포기하리라 여겼다. 어쩐 일인지 이 곰은 추격을 멈추지 않고 쫓아와 처자를 놀라게 했다.


황당함을 느낀 처자는 별 일도 다 있다며 재차 몸을 옮겼다. 두 번째는 나무 위에 올라 좀 쉬고 있던 참인데, 어느새 다가온 곰이 나무 밑동을 잡고 흔들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에 혀를 내두르며 한 번 더 도망친 처자였건만, 기묘한 재주로 끊임없이 쫓아오는 곰. 그렇게 놈과 추격전을 벌이다 화가 뻗친 그녀는 검을 빼어 대결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무연이 보기엔, 토끼 같은 계집애가 곰을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이 자못 귀엽고도 재미나더라. 간만에 구경났다 싶은 그는 좋은 자리에 걸터앉아 열매를 씹으며 흐뭇하게 보고 있는데, 땀을 빼던 처자가 기척을 감지한 건지, 아니면 무연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이쪽을 보았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곰이랑 다투는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곰이랑 친구 같은 작자가 열매나 주워 먹고 앉아서, 도와줄 생각도 없는지, 쳐 웃으며 구경하고 자빠졌으니 처자는 다시 한 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저 자를 공자라 부르기도 뭐하고, 소협이라 부르긴 싫으니 솟아오르던 화가 목구멍에 잠깐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처자는 곧 입을 열었다. 책망 또한 가득 담아.


“이봐요, 사해가 동포라는데 사람이 짐승에게 수모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어서야 쓰나요?”


퍼뜩 정신이 든 무연.


손바닥을 탁탁 털고 일어나 성큼성큼 곰에게 걸어갔다. 무연과 여자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몰랐던 곰이지만, 저 놈이 다가오니 오늘 점심은 글렀다 싶어 포기하려다가. 그래도 가끔 음식도 나눠먹고 하던 사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재차 여자를 공격하려는데,


“이만 됐다.”


말을 할 수 없는 곰이지만, 무연의 이 말은 너무도 많이 들어왔는지라 그 뒤에 무슨 결과가 나오는지 알고 있었다. 더구나 무연이 발로 자신의 궁둥이를 툭툭 차니 이젠 정말 명확하다. 동굴로 돌아가야 할 시점. 아쉬운 기색으로 몸을 돌리는 곰의 뒷모습은 참으로 딱하고도 불쌍하더라.


“이거 먹어라.”


그나마 공동산에서 곰 챙기는 사람은 무연 밖에 없는 것이다. 열매 몇 개가 동굴 가는 길에 ‘척척’ 하고 떨어지니 거지마냥 집어먹으며 좋아하는 곰. 이 모습을 지켜본 처자는 황당하고도 황당한 일의 연속이라 입만 쩍 벌렸는데, 무연이 말짱한 얼굴로 여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는 쪼그맣고 엉덩이가 가볍더구나.”


순간 얼굴이 붉어지며 분노와 수치심에 귀까지 벌게지는 소저.


무연이 삼음진인에게 예를 배웠다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자기 생각에 받을만한 사람한테만 표하는 것이라. 더구나 몇 년 전 필우에게 속은 이후로는 더욱더 이런 성향이 짙어져서 최소한의 갈등조차 하지 않게 됐다.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처자는 벌게진 얼굴로 폭포처럼 말을 쏟아내니,


“이런 산적 같은 놈이 어찌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게냐? 천지간에 홀로 태어나 무식하게 먹고 자고 싸는 것만 익혔더냐? 네놈 같은 것을 무뢰배라 부르지 않으면 그 말을 어디 쓰겠느냐? 곰 새끼와도 말이 통하니 정녕 짐승 같은 놈이로다!”


처음이다. 무연은 이렇게 길고 빠르게 말하는 것을 처음 들었다. 분명 나를 욕하는 것 같은데 어쩐지 화가 나진 않았다. 도리어 소리의 높고 낮음이 물 흐르듯 경쾌해 신기하기만 하고.


그 와중에 처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으니 오히려 걱정이 든 무연이다.


“너는 어디가 아픈 게냐?”


있는 그대로 말만 들었다면 충분히 뜻이 전달될법한 어투였지만, 사람이 어찌 상황을 떠나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을 놀린다고 판단한 처자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 강호에 나와 이런 희롱을 받다니! 차라리 말 못하는 곰 새끼가 났구나. 눈물을 뿌리며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이에 무연은 다소 당황하여,


“나는 저 곰보다 더욱 강하다. 너는 그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야.”


하지만 처자가 먼저 생각한 것은,


‘검이 곰에게 별 소용없었던 것은 곰의 가죽이 워낙 두터워 그랬기 때문이고 사람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보아하니 무지한 야인이라 힘은 좋을지 몰라도 경공의 표홀함이 없으니 오히려 상대하기 수월할 것.’


“무도한 놈에게 엉터리 위협 따윈 듣고 싶지 않다. 충분히 경고 했으니 내 검에 손이 날아가도 원망을 보이지 못할 것이다.”


붉게 달아올랐던 처자의 얼굴이 차분해지며 원래 색을 되찾았다. 검을 단단히 쥔 그녀가 공격을 시작하고.


화살처럼 찔러오는 검의 기세는 빠르고 날카로웠다. 그러나 무연은 계속하여 몸을 피하고. 놀라서 분주한 몸이 아니라, 적당한 간격으로 슬쩍슬쩍 피하는 여유 있는 몸짓.


무연은 처자의 공격을 찬찬히 살피며 전날의 필우 그리고 사부의 검세와 비교하는 중이었는데, 둘 모두 유태의 검에는 미치지 못했다.


여인네의 검은 나름 정묘한 맛은 있으나 힘이 부족해 파괴력이 떨어졌고, 마찬가지로 정묘함이 떨어지나 힘만 살린 필우와는 서로가 다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곰을 잡을 때는 필우가 유리하겠지만.


처자의 검을 충분히 구경한 무연. 이제 흥미를 잃어 싸움을 끝내려는데 처자가 말했다.


“그래도 명색이 사내라는 작자가 어찌 여인을 상대로 도망만 다니느냐? 네 놈이 무(武)를 안다면 이처럼 욕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상대를 놀려 마음을 흔들려는 격장지계(激將之計). 하지만 무연은 처음부터 놀려질 마음이 없는데 어찌 말려들 수가 있는가. 따분한 얼굴로 슬슬 피하기만 하는 무연이다. 이마저도 통하지 않게 된 처자는 그저 갑갑하고 답답할 뿐이고.


“이제 그만 하는 것이 좋겠다.”


드디어 놈이 공격한다 싶었던 처자는 내심 무척 반겼다. 속도차를 이용해 무연을 골탕 먹일 생각에 벌써부터 설레는 소저. 상대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손에는 은근히 힘을 실고. 순간 무연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니가 졌다.”


별안간 옆에서 들려오는 남정네 목소리.


깜짝 놀란 처자가 선 상태 그대로 굳었다. 가만히 고개 돌려 옆을 확인하니, 자기 얼굴보다 큰 주먹이 그녀를 맞이하는지라 심히 기분이 상한 처자. 덥수룩한 수염이 얼굴 대부분을 가린 영락없는 야인. 문물의 혜택이라곤 듣지도 받지도 못했을 것 같은 자에게 패한 셈이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더욱 인정하기 싫어졌다.


“그대는 나이도 많고, 산에서 오래 수련한 도사인데 힘없는 아녀자가 상대할 수 있나요? 응당 비무의 방식은 달랐어야 해요. 도사라면 선과 덕을 아울러 쌓는 것이 기본이니 내가 제안하는 새로운 비무 방식을 수락할 것이라 의심치 않아요.”


갑자기 도사 칭호를 받게 된 무연. 처자의 말을 들어보니 얼핏 맞는 말 같기도 하여 곧 수락하려다가 잠깐 생각해보니 이건 순 억지라. 하지만 근래의 깨달음으로 자신감이 충만한 무연은 소저의 제안이 겁나기보다 오히려 궁금했다.


‘허허’ 웃으며 새로운 비무를 어찌할지 물어보는 무연과 그에 답하는 처자.


“그대는 두 발을 떼지 않고 나의 공격을 피해야 해요. 십초를 피한다면 내가 지는 것으로 하겠어요.”


무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잡고,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처자가 활기찬 얼굴로 검을 쥐자, 검에 엷은 금빛이 어리며 아까보다 강한 기세를 품었다.


기세가 좀 더 강해진 걸 본 무연이나 별 걱정은 들지 않았다. 충분히 견습한 검이기도 하고, 힘의 차이가 뚜렷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검이 들어오는 길목마다 연신 장력으로 압력을 가했다. 검은 매번 그의 몸에 닿지 못하고 휘어졌으며, 매번 어긋난 검은 위협이 되지 못했다. 칠초가 지나도록 무연의 방어를 뚫지 못한 그녀는 뒤로 펄쩍 물러났다.


검을 쥔 손을 추스르고 긴 호흡을 내쉰 그녀는,


“이제 마지막 삼초에요. 온 힘을 다할 테니 당신은 조심해야 할 거에요.”


이전까지와 다른 소저의 자세와 기도에 빛바랜 호기심이 되살아난 무연. 내심 기대하며 그녀의 검초를 기다렸다. 그의 바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처자는 바닥을 열심히 비벼 먼지를 잔뜩 피워올리기 시작하고.


설마 그 사이로 검을 던지나 싶어 지켜보는데, 과연 그 사이로 검이 날아오더라. 허탈감에 빠진 무연이 손을 뻗어 검을 잡을 때,


“그대는 두 발을 떼면 안 되니 나를 따라오면 지는 겁니다.”


하고서는 깔깔대며 몸을 돌렸다. 황당한 지경에 빠진 무연이 발을 뗄까 말까 고민하는 순간 그녀는 바람처럼 산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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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수정본을 완성했습니다. 15.12.09 1,365 2 1쪽
8 7장 그들 각자의 고민 +4 14.10.17 4,388 145 24쪽
7 6장 명불허전(名不虛傳) +3 14.10.14 4,337 134 43쪽
6 5장 무당의 반응 +5 14.10.12 4,527 149 23쪽
5 4장 낙양에서 +4 14.10.12 5,893 153 40쪽
4 3장 채가장(蔡家壯) +5 14.10.12 6,928 190 30쪽
» 2장 공동산(崆峒山)에서 +2 14.10.12 7,348 157 35쪽
2 1장 귀소불능(歸巢不能) +3 14.10.12 12,612 254 13쪽
1 서장 - (수정본) +2 14.10.12 13,348 279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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