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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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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22
추천수 :
182
글자수 :
530,484

작성
18.05.28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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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66화

DUMMY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아저씨. 조금만.......”


봄이는 그렇게 말하며 점점 그녀의 어깨에서 내려가던 상훈의 왼팔을 다시 한 번 고쳐 잡았다. 땅바닥에는 흰 파도 같은 눈더미들이 종아리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눈더미를 밟고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아래에서 뽀득뽀득 소리가 났다. 착지할 때 느꼈던 다리의 옅은 통증이 상훈의 기댄 몸무게에 반쯤 눌려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상훈은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 걷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이미 봄이에게 무게중심의 대부분을 맡기고 있었다.


담벽 너머는 예상과는 다르게 아무도 없었다. 빛도 없었다. 길목마다 가로등이 몇 대씩 세워져 있었지만 빛을 내지는 못했다. 한 치 앞도 구별하기 힘든 어둠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봄이는 자꾸만 헛발을 디뎠다. 망토 자락이나 스타킹이 가끔씩 날카로운 가로수 나뭇가지에 걸리기도 했다. 봄이는 그 순간만큼은 천막에서 나올 때 손전등 하나를 챙기지 못한 것을 끔찍이도 후회했다.


몇 걸음 나아가지 않았는데도 봄이의 체력은 금방 떨어졌다. 당장 고통스러운 것은 온 몸을 짓누르는 피로감이었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가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그녀의 등 뒤에 바싹 쫓아오는 검은 그림자를 떨쳐낼 수 없었다. 사실 그녀를 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녀는 무엇인가에 계속해서 쫓기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또 어디에서 나온 것이었을까?


담벽 모퉁이를 돌자 눈에 익은 거리가 나타났다. 한 눈에 들어올 수 있게 탁 트인 거리였다. 양갈래로 길게 뻗은 도로변의 블록마다 앙상한 가로수들이 보였다. 분명히 본 적이 있던 거리였다. 하지만 한 발자국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흐릿한 기억뿐인 장소를 식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들은 똑같은 장소를 몇 번이고 맴돌았다. 어느새인가 눈이 다시 내리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신선하게 느껴졌던 새벽 공기는 점점 그녀의 뺨을 야금야금 베어내는 칼날로 바뀌어갔다. 봄이의 앞을 향한 걸음이 점점 무뎌져갔다. 다리를 움직이기가 힘겹게만 느껴졌다. 호흡 간격도 점점 불규칙하게 바뀌었다. 반쯤 감긴 눈은 다시 뜨기가 힘들었다. 코에서는 자꾸만 콧물이 흘러나왔다.


통제소 근처 도로변에는 자동차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들을 위한 자동차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떤 것들은 눈더미에 몸체의 반이 파묻힌 채로 얼어붙어 있었고, 어떤 것들은 고무 타이어가 폭삭 내려앉아 있기도 했다. 타이어가 추위를 이기지 못해 터져버린 것이었다. 하수도는 아예 얼음으로 꽉 막혀 있었고, 아까 전에 질퍽하던 물웅덩이들은 빙판길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봄이는 절대로 발걸음을 늦추려 하지 않았다.


봄이의 몸에 얌전히 의지하고 있던 상훈은 그녀의 체력이 바닥났다는 걸 눈치챘는지 그녀의 어깨에서 팔을 거두었다. 그러자 봄이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강제로 그의 팔을 자신의 어깨로 끌어당겼다.


“혼자서 걸을 수 있어.”


“웃기지 마요. 제발 부탁인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면 짐이라도 되지 말라구요. 한 번만 더 그딴 허세 부리면 가만 안 둬요.”


봄이의 말에 상훈도 뭔가 켕기는 게 있는지 대답을 그만두었다. 봄이는 이내 그에게서 시선을 치우고 손바닥에 쥐고 있는 열쇠에 맞는 자동차를 찾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동차 대신 다른 것을 보았다.


멀리서 희미한 두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주위는 어두컴컴해서 보이지 않았고 오직 빛이 뻗어나오는 중심점 두 개만 보였다. 그걸 본 봄이는 반사적으로 빛의 진원지로 향할 뻔 했지만 곧 정신을 되찾았다. 어딘가 예사롭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온 몸에 소름마저 돋은 봄이는 이내 걸음을 멈춰섰다.


봄이는 환하게 비추는 불빛을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쪽으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목소리에 홀렸을 때처럼 순간적으로 정신이 희미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봄이가 빛에 홀린 것이 아니었다. 빛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봄이의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리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결코 빛과 자신의 몸이 겹쳐져서는 안 되었다. 빛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숨어야 했다. 봄이의 내면 속 목소리가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디로? 숨을 곳은 없었다. 숨을 곳이 있다고 해도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봄이의 몸이 시간과 함께 멈춰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이윽고 봄이는 어둠 속에서 뻗어나온 두 줄기의 빛에 완전히 삼켜져 버렸다.


빛을 비춘 사람 한 명이 그들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이 구역은 통제되었습니다. 내부 조사가 끝날 때까지 나가실 수 없습니다.”


의외로 정중한 말투를 건넨 경찰관이 그들에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두 경찰관은 허리춤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봄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들에게서 뒤돌아섰다. 또 다시 봄이의 심장이 요동쳤다. 관자놀이도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거기, 학생이랑 아저씨.”


이번엔 그의 뒤에 있던 경찰관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관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상훈은 봄이의 어깨에 기댔던 팔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봄이는 상훈이 한 그 행동의 의미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봄이는 여전히 등을 돌리지 않은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둘 뿐이었다.


“안 들립니까?”


한 경찰관이 그렇게 말하며 봄이의 어깨를 움켜잡으려 했다. 그 순간 봄이는 번개처럼 경찰관의 손을 뿌리치고 팔꿈치로 그의 콧등을 온 힘을 다해 가격했다.


콧등을 가격당한 경찰관이 짧은 고통을 토해내며 양손으로 코를 싸쥐고 휘청거렸다. 그러자 봄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에게 달려들어 벨트에 달린 권총집으로 있는 힘껏 손을 뻗었다.


봄이가 그들이 당황한 사이 권총집을 풀기도 전에 정신을 차린 경찰관이 봄이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다리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낀 봄이는 권총집을 잡고 있던 손을 놓쳐버렸다.


“아읏!”


미처 고통을 참지 못한 봄이의 이빨 사이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봄이의 한 쪽 무릎이 아래로 꺽였다.


경찰관은 봄이가 주저앉을 틈도 주지 않고 주먹으로 봄이의 얼굴을 무자비하게 때려박았다. 뇌가 어질한 충격과 함께 봄이의 시야각은 거꾸로 뒤집혀버렸다. 순간적으로 봄이는 자신의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착각도 느꼈다. 이윽고 봄이의 몸은 수북이 쌓인 눈밭 위에 초라하게 쓰러져 버렸다.


눈길에 엎어진 봄이는 손가락 한 마디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겨우 열린 그녀의 입에서는 작고 가는 신음만이 새어나왔다. 그 경찰관은 콧등을 움켜잡고는 뭐라고 욕을 하더니 쓰러진 봄이에게 다가가 그녀의 몸을 마구잡이로 짓밟았다.


“젠장, 그만해. 어린애라고!”


상훈이 말리려 들었으나 그를 단단히 붙잡고 있던 경찰관에게 저지당하고 말았다. 코를 다친 경찰관은 온갖 욕을 쏟아내며 이미 축 처진 봄이를 쉬지 않고 걷어차댔다. 그는 몇 분씩이나 더 분풀이를 하며 씩씩대는 듯 했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벨트에 달린 권총집에 손을 뻗어 권총을 꺼냈다.


“그만둬, 이 살인마들아. 정말로 애를 죽일 셈이야?”


상훈이 입을 열기는 했지만, 그것은 상훈이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다. 그들의 눈길이 집중된 곳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가죽 코트를 걸친 백발의 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온갖 안 좋은 심기가 가득 차 있었다. 코를 다친 경찰관은 노인을 보자 시선을 똑바로 노인의 눈에 고정시킨 채로 노려보며 말했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그의 말을 듣자 노인은 마구 흥분해서 소리 질렀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아까 천막에서 말해 주지 않았나?”


노인의 말에 경찰관은 아니꼬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럼요, 말해주셨고 말고요. 그런데 저 꼬맹이가 먼저 제 얼굴을 때렸는데 어떡합니까.”


“그 입 다물고 당장 총 거두지 못해?”


노인이 눈을 부릅뜨고 말하자 경찰관은 조용히 권총을 권총집에 집어넣었다. 그의 행동은 스스로의 의지라기보다는 마치 누군가에게 꼼짝없이 조종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형, 아는 사람이에요?”


옆에서 지켜보던 경찰관이 그에게 묻자 그는 거만한 태도로 크게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럼 이제 어쩔 겁니까?”


“여자애를 놔줘. 네가 붙잡고 있는 저 젊은이도.”


노인이 상훈을 붙잡고 있던 경찰관에게 손찌검을 하며 말했다.


“영감. 당신이 지금 무슨 짓 하는 건지는 알고 있는 겁니까?”


노인이 대답하지 않자 코를 다친 경찰관은 옆으로 몸을 돌리고 같잖다는 듯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그리고는 노인을 조용히 째려보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럼, 이걸로 더 이상 빚은 없는 겁니다.”


코를 다친 경찰관이 그대로 몸을 돌리자 옆에 있던 경찰관이 얼떨결에 상훈을 놔주고는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말했다.


“잠깐만, 저렇게 놔둬도 되는 겁니까?”


코를 다친 경찰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어디론가로 가 버렸다. 그러자 다른 경찰관은 그를 뒤따라가면서도 이쪽을 수십 번 돌아보다가 이내 그를 따라 사라졌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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