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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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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87
추천수 :
182
글자수 :
530,484

작성
18.03.29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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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54화

DUMMY

봄이는 자신의 손등에 내리쬐는 한 줄기 빛을 보았다. 몸의 무게중심이 한 곳에 쏠리지 않고 온 몸에 골고루 작용하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느껴지는 감촉은 푹신푹신했고, 부드러웠다. 봄이는 이 감촉을 떨쳐내고 싶지 않아서 손아귀에 힘껏 움켜잡았다. 촉각은 흩어지지 않았다. 그제서야 봄이는 눈을 떴다.


봄이의 몸 위에 무엇인가가 덮여 있었다. 그녀는 이불을 걷어내고 부스스한 몸을 일으켰다.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침실 머리맡에 놓여있던 작은 접시에는 양초가 모두 녹아흐른 채로 단단히 굳어 있었다. 바깥에서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고, 질서를 지키기 위해 소리치는 소리도 들렸다. 따가운 호루라기 소리가 두 번씩이나 봄이의 귀를 울렸다. 봄이는 잠이 덜 깬 눈을 손등으로 비비고 나서 어슬렁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손톱만큼도 빛이 들지 않았던 어젯밤과는 다르게 해가 뜬 이른 오후의 건물 내부는 어딘가 거부감이 없었다. 어젯밤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숨겨진 건물 내부 흔적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칠이 긁힌 자국, 화려한 색으로 아무렇게나 칠해진 낙서 등이 그 일부였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백열등은 꺼져 있었다. 건물 복도에는 사람들로 인한 최소한의 활기가 돌았지만, 봄이에게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뿐만이 유독 크게 들렸다.


봄이는 계단을 내려가 창구가 있는 로비 대문으로 향했다. 어젯밤에 봄이가 괴물 쥐들로 착각했던 인파들은 여전히 그 곳에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그들의 숫자도 늘었으면 늘었지 줄어든 것 같지는 않았다. 로비에 모여 있는 사람들 왼편으로는 끝없이 이어진 인파들이 창구에서부터 어설프게 줄줄이 서 있었다. 인간 행렬은 보건소 건물 바깥까지 이어져 있었다. 경찰관들이 이들 사이를 돌아다녔고, 호루라기를 불기도 했다. 봄이는 아까 전에 2층에서 들은 호루라기 소리가 이곳에서 들리는 소리였다고 생각했다.


봄이는 그들 사이를 지나쳐 빠져나가 바깥으로 향했다. 늦은 밤 시간대라 그런지 한적했던 어젯밤과는 달리 셀 수도 없을 정도의 군중들이 어지럽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봄이는 보건소 입구 계단을 내려와 정신없는 통제소 내부 광경을 시작점에서부터 끝까지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안 그래도 오밀조밀 늘어선 천막들 때문에 좁아 보였던 공터를 군중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녀는 장사꾼들이 시끄럽게 흥정하는 시장판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만약 있다면 이런 광경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봄이는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몇 번이고 어깨를 치였다. 대놓고 봄이를 밀치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 때마다 봄이는 후드를 눌러쓰고 시선을 피했다. 누군가에게 발을 밟혀도 고통을 억누르며 참았다. 사람이 많지만 좁은 곳은 군중들을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봄이는 그렇게 통제소 한 바퀴를 빙 돌았다.


그러다가 봄이는 면식이 있는 한 남성과 마주쳤다. 그는 봄이를 발견하자 손을 흔들며 걸어왔다. 그는 왼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었다.


“안녕, 봄. 잘 잤어? 아침..... 아니지. 오후 공기는 좀 어때?”


상훈이 비웃듯이 말하자 봄이가 대답했다.


“왜 절 안 깨운 거예요?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한다면서요.”


“그건 네 잘못이지 내 잘못이 아니야, 이 잠꾸러기야. 자기 일은 자기 스스로 해야 하는 거 몰라? 네가 몇 시간이나 잠들어 있었는 줄 알아? 여덟시간이나 내리 잤어. 숙녀가 쉬고 싶다는데 곤히 자도록 내버려둬야지. 다음에도 자꾸 그렇게 세상 모르고 자면 몰래 놔두고 갈 거야.”


상훈이 농담조로 말하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봄이의 눈치를 은근히 살폈다.


“그 할아버지는요?”


“아까 전에 나랑 같이 구호품 배급을 받았어. 날밤 지새면서 꽤나 일찍부터 기다렸는데도 금방 동나버리더라고. 볼 일이 있다면서 어디론가 가 버렸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 금방 돌아오겠지.”


“그렇게 말하시는 걸 보니 다리는 이제 괜찮으신가 봐요.”


봄이가 입을 삐죽 내밀고 비꼬았다.


“대충 움직일 수는 있겠는데 붕대는 아직 풀 엄두가 안 나. 마비는 어느 정도 잦아든 것 같은데 마비가 풀려도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나. 항생제를 강한 걸 썼는지 다리가 안에서부터 조여들어오는 것 같아.”


봄이는 순간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잘 됐네요.”


봄이가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서 등을 돌리자 상훈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갑자기 어디 가, 오늘 하기로 한 일 잊은 거 없어?”


“지금 찾아보려고 하잖아요. 어디 있는 지 알아요?”


봄이가 목만 돌려 상훈을 뒤돌아보자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손목을 걷어 시계를 쳐다보고 나서 말했다.


“전화소는 뒤쪽이야. 전화를 하려면 예약을 해야 한다는데, 오후 네 시까지 예약을 받는다더군. 지금 빨리 줄 서지 않으면 오늘 안에 예약 못 할지도 몰라. 족히 몇 시간은 서야 할 걸. 내가 대신 서 주려고 했었는데 관뒀어. 네가 한 번 직접 봐봐. 신이 저절로 날 걸.”


상훈의 말을 듣고 봄이가 그를 지나쳐 뒤쪽으로 걸어갔다. 천막 주위를 둘러싼 군중들 말고도 뒤쪽에 대기열이 하나 더 있었다. 그 쪽 대기열의 규모는 천막 주변이나 창구 주변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무지막지했다. 봄이는 끝없이 늘어선 대기열의 끝을 헤아려보려고 하다가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그녀가 살아생전 한 번도 보지 못한 군중들의 물결이었다. 마치 인파들이 모여 길고 거대한 용 한 마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봄이는 기겁을 하고서 상훈에게 돌려 따졌다.


“설마 저게 다 줄인 건 아니겠죠?”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는 좋겠지. 저 쪽에서 줄 서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상훈이 봄이에게서 등을 돌리자 이번엔 봄이가 그를 붙잡았다.


“기다려요. 어딜 가려구요? 무서우니까 나랑 같이 있어요.”


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꼼짝없이 목이 졸렸던 기억을 되새겼다. 그렇게 생각하자 숨이 턱 막혀왔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중 하나였다. 상훈은 그녀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다시 봄이에게 돌아오기는 했지만, 시선은 여전히 뒤를 향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 가 싶더니 자꾸만 그는 무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뒤를 흘깃거렸다. 그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은 봄이가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상훈은 고개를 돌려 봄이의 눈을 마주보다가 뜸을 들이며 말했다.


“아니, 별 건 아닌데..... 누군가가 우릴 자꾸만 미행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뭐랄까, 우리가 여기 온 그때부터 쭉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상훈의 말에 봄이가 얼굴을 찡그렸다.


“뭔 소리예요, 기분 나쁘게.”


봄이가 그렇게 말하며 상훈의 소매를 툭툭 건드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기분 탓인가..... 그건 그렇고 얼른 줄부터 서자. 이러다가 해 떨어지고 본전도 못 뽑겠다.”


“지금이 몇 신데 벌써 해가 떨어져요.”


“농담이 아니야.”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상훈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마치 소용돌이처럼 빽빽이 몰려 있는 군중들을 보자 봄이는 또 다시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보기만 해도 염증이 났고, 신물이 올라왔고,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상훈은 그런 봄이의 뒤에서 양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아 주며 말했다. 이번에 그의 행동에는 꽤나 힘이 실려 있었다.


“이번에는 그런 멍청한 짓 안 할 거지?”


봄이는 상훈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군중들도 쳐다보았다. 대기열에 몰려 있는 군중들과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상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싶더니 이내 고개를 들고 상훈을 쳐다보며 말했다.


“안 할게요.”


작가의말

고맙습니당.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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