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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조회수 :
14,506
추천수 :
182
글자수 :
530,484

작성
18.03.06 03:57
조회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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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47화

DUMMY

지평선 너머로 희미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던 태양이 완전히 밤하늘에 넓게 펼쳐진 심연에 의해 가려지자, 끝없이 늘어선 큰 도로변에는 이윽고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만 같은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들이 방금 전까지 밟고 있던 길쭉한 두 사람의 그림자는 점점 존재감이 옅어지다가, 곧 모두 사라져 버렸다. 지기 직전의 황금빛으로 물든 노을을 비추던 건물들에 매달린 고드름 역시 몰려오는 어둠 앞에서 모습을 감춰 버렸다. 도로변에는 길게 줄지어 세워진 가로등이 아주 많았지만, 그 어느 것도 암흑에 파묻혀버린 도로 위에 한 줄기 백광을 뿜어내지는 못했다.


곧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봄이의 등 뒤로 접근해오는 칠흑 같은 어둠은그녀의 작은 입에서 불규칙적으로 새어나오던 입김마저 흔적조차 없이 삼켜버렸다. 더 이상 걸음을 내딛을 수 없을 정도로 주위가 어두워지자 봄이는 몸을 구부리고 가방을 뒤져 손전등을 꺼냈다.


손전등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작동은 잘 되었다. 봄이의 여린 손바닥은 이미 칼바람에 수 시간 동안 노출되어 있어서인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손가락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것을 느꼈다. 오랜 기간 동안 관리하지 못해 헤진 스타킹 사이로 칼바람이 스며들어왔다. 봄이는 뼈 속 골수까지 얼어붙는 것 같은 고통에도 이를 악물고 참아내며 계속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힘겹게 내딛었다.


손전등 빛이 옅게 흔들리며 타이어 자국을 위아래로 비췄다. 타이어 자국은 도로변을 따라 계속해서 이어진 채로 육교 밑 커브길까지 이어져 있었다. 봄이는 잠깐 손전등을 메고 있던 가방끈에 걸고 서서히 아래로 미끄러지는 상훈의 팔을 더욱 강하게 부여잡았다. 그에 따라 상훈의 무게중심이 봄이에게로 쏠리자 다리에 힘이 빠진 봄이는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봄이에게 팔을 감긴 채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던 상훈이 마지못해 말을 꺼냈다.


“이놈아, 난 괜찮다니까.”


“제발 아프면 아프다고 솔직하게 말해요! 그 편이 더 마음이 놓이니까.....”


“살다살다 여자애한테 부축도 다 받아 보는군.”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그 녀석에게 감사해야 하나?”


“아, 씨발. 자꾸 그딴 개소리 하면 진짜로 두고 갈 거예요.”


봄이가 그의 귀에다 대고 소리치자 상훈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봄이는 한 걸음 더 내딛으며 그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허벅지 밑으로 타고 흐르던 피가 굳어서 검붉은 얼룩이 되어 있었다. 상훈은 베인 다리의 상처가 그다지 깊지는 않았지만 움직이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힘줄이나 관절을 스쳤거나, 스며든 병균의 독성으로 인해 마비가 온 것일지도 몰랐다. 상훈의 표정에는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입으로 소리를 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봄이라면 절대로 참아낼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을 힘겹게 억누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봄이는 그의 힘줄 선 얼굴을 쓱 보고는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계속해서 이어진 타이어 자국을 따라 몇 분을 더 걸어갔다. 봄이는 마음 속으로 그들이 나아가는 방향이 잘못된 길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랬다.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출처도 모르고 근거도 없는, 심지어는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조차 모르는 자국 난 길바닥을 따라가는 것 뿐이었다. 아니, 할 수 있는 게 딱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종교가 있다면 굳게 믿고 있는 하늘 위 신에게 빌든지, 그들이 무신론자라면 자신들의 행운에다가 걸고 빌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라도 붙잡고 빌든지. 그것이 전부였다. 그게 끝이었다.


봄이의 체력이 슬슬 바닥나기 시작했다. 혼자서 가벼운 몸을 이끌고 푹푹 빠지는 눈밭에서 중심을 잡기도 상당히 버거운데, 제대로 걷지 못하는 성인 남성의 무게까지 감당하려니 봄이의 다리가 버텨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봄이는 몇 걸음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이고 주저앉을 뻔 했다. 상훈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최대한 그녀에게 기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모두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실낱 같은 희망을 전부 도로의 타이어 자국에 맡겼다.


그들이 커브길을 지나 보이는 또 다른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다시 한 번 대지를 울리는 배기음을 들었다. 봄이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흥분해서 단단히 붙잡고 있던 상훈의 팔도 놓쳐버리고 도로 한가운데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초조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봄이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도로 너머에서 한 쌍의 헤드라이트가 내뿜는 스펙트럼이 나타났다. 봄이는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았다. 욱신거리던 다리의 고통조차 잊어버리고 봄이는 빛을 향해 달렸다. 필사적으로 달렸다. 왼손에 쥐고 있던 분홍색 외투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손전등을 미친 사람처럼 휘두르면서.


“여기요, 기다려요. 사람이 다쳤어요. 제발 멈춰 주세요.”


봄이는 목구멍이 찢어질 때까지 소리 지르며 도로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눈부신 헤드라이트 한 쌍은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미 그 자동차가 어떤 자동차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봄이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자동차가 그냥 지나쳐갈 바에는 자신을 들이받고 갔으면 좋겠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바램이었다. 자동차는 봄이를 들이받지 않고 찢어지는 경적을 울리며 그녀를 비켜갔다. 봄이의 두 팔이 떨어졌다. 그녀는 몇 분 동안이나 넋이 빠진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땅바닥에 손전등을 내동댕이쳤다. 삼촌에게 선물받은 분홍색 외투도 패대기쳤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했다.


“야, 이 개새끼들아!!!!! 쓰레기만도 못한 새끼들아!!!!!!”


봄이의 높은 목소리가 둔탁하게 갈라져 암흑이 내려앉은 허공 위를 울렸다. 봄이는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절규하며 비명을 지르다가 하늘 높이 고개를 쳐들고 울부짖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그녀가 흘린 눈물과 함께 섞여 흘러내렸다.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보고 있던 상훈이 절뚝거리며 다가와 봄이의 양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돌아가자. 할 만큼 했잖아.”


“뭐라구요?”


봄이가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상훈을 홱 돌아보며 말했다.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봐도 여기에 통제소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날이 이렇게 어둡고 조용한데 사람들 소리는 물론 한 줄기 빛조차 보이지 않잖아. 그 녀석이 거짓말한 걸 거야. 그만 하고 이제 돌아가자. 아직 늦지 않았어.”


상훈은 차마 봄이의 눈동자를 마주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봄이는 상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소리쳤다.


“돌아가요? 돌아가자구요? 어디로요? 도대체 어디로요? 제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자구요? 거기가 도대체 어딘데요? 제대로 먹는 것조차 하루 이틀이면 다행이고, 아무도 없는 지하 구석지에서 혼자 쭈그려 자던 그 곳으로 돌아가자구요? 만약 돌아간다고 쳐요. 돌아가면 뭐가 있죠? 제가 놈들에게 쫓겨서 도망쳐 나온 집에서 내 가족들이 날 기다리고 있다고 하던가요? 아니면 날 쫓다가 놓치고 칼을 갈던 그 놈들이 떼지어 몰려와서 나한테 따뜻한 죽이라도 준다고 하던가요? 비록 나는 아니지만, 아저씨는 낙관론자잖아요? 아저씨가 예전에 나에게 가르쳐줬던 낙관주의는 어디로 가버렸죠? 내가 홧김에 저지른 살인마저 지나간 일은 다 잊으라는 둥 하면서 어설프게 합리화시키던 그 때의 여유는 어디로 가버렸죠? 난 절대로 안 돌아가요. 비록 지금도 요만큼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지만, 지금 돌아가면 그 요만큼의 꿈도 희망도 없어요. 돌아가자구요? 포기하자구요? 돌아갈 거면 아저씨 혼자 돌아가 버려요.”


봄이는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외투와 손전등을 집어들고 눈보라를 헤치며 앞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그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봄이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붙잡은 채로 계속해서 달렸다. 타이어 자국을 따라 계속해서 달렸다.


한참을 달려가다가, 봄이는 광활한 사거리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다시 주저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떨군 채로 중얼거렸다.


“그래요, 어쩌면 아저씨 말이 맞을지도.”


계속해서 이어져오던, 역에서 나오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있던 타이어 자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음푹 파여 눈이 쌓이지 않아 타이어 자국이 찍히지 않은 큰 도로변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봄이는 더 이상 오열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봄이의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 무엇인가가 끊어졌다. 그녀는 더 이상 제 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세차게 들이붓던 함박눈은 어느새 주저앉은 봄이의 종아리까지 쌓여 있었다. 미쳐버릴 정도로 졸음이 쏟아졌다. 바닥에 쌓여 있던 눈이 마치 따뜻하고 푹신한 침대처럼 느껴졌다. 그 자리에 쓰러져 자고 싶었다.


서서히 감기던 봄이의 눈은, 다시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하는 이상한 소리에 크게 떠졌다. 봄이는 벌떡 일어나려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두 팔과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방금 전 땅바닥에 엎어질 때 짚은 손바닥이 돌멩이에 긁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봄이는 일어나기 위해 피범벅이 된 손바닥으로 눈길을 마구 쓸어댔다. 하얀 눈밭이 새빨간 핏자국으로 칠해졌다.


이상한 소리는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봄이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하지만 눈부신 헤드라이트를 빛내며 그들 사이의 큰길을 지나려고 달려오고 있었다.


봄이는 시선을 자동차에 고정시킨 채로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그녀의 여린 무릎은 계속해서 무너져 내렸다. 봄이는 머릿속은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저 일어나지 못한 채 찻길 한가운데로 온 힘을 다해 기어갈 뿐이었다. 다행히도 자동차가 그녀를 지나치기 전에 봄이가 먼저 차도 한가운데로 움직일 수 있었다. 봄이는 움직이지 않는 무릎을 꿇은 채 차도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자신 쪽으로 곧바로 달려오는 헤드라이트를 직방으로 마주보게 되었다. 봄이는 눈부신 빛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두 팔을 하늘로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온 몸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힘까지 모두 짜내어 소리쳤다.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제발, 부탁이에요. 우릴 도와줘요.”


이윽고 헤드라이트가 봄이의 온 몸을 감쌌다. 자동차는 그녀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눈동자를 찌르는 듯한 눈부신 빛 때문에 봄이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작가의말

이번 화는 좀 많이 썼답니다. 부족한 소설 계속해서 챙겨봐주신 독자분들께 드리는 선물이에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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