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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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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글자수 :
530,484

작성
17.12.12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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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39화

DUMMY

그들은 또 다시 지겨운 터널 속으로 발을 들였다. 사방이 어둠으로 둘러싸여 빛 한 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터널 속은 지독할 정도로 폐쇄적이었고, 고립감을 심어주었다. 내부에는 습기가 찬 마른 공기와 축축한 선로를 따라 이어진 나무판자들 뿐이었다. 선로를 따라 물이 흐르는 기분나쁜 소리와 텁텁한 공기 속에서 크게 울리는 그들의 발걸음을 제외하면 터널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쥐 한 마리조차 다니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 봄이는 그 사건 이후로 터널을 끔찍이도 싫어하게 되었다.


잠시 후 정 씨가 상훈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둘은 처음에는 덤덤하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점점 그들의 목소리에 생기가 띠기 시작했다. 봄이는 그런 둘을 뒤에서 바라보며 가끔 발에 걸리는 돌멩이를 발로 차며 걸었다.


봄이는 이번에도 터널 끝에서 정신이 혼미해지는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터널 끝에서 들려오는 조그만 소리에까지 귀를 기울였다. 벌레들이 지나가는 소리, 파이프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 가끔씩 귓가를 스치는 멍한 소리들이 들렸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목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지겨운 소년도 모습조차 비추지 않았다.


이윽고 그들은 터널 끝에 다다랐다. 아까 처음 플랫폼에 발을 딛었을 때의 광경이 다시 한 번 펼쳐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때처럼 따뜻한 공기가 그들을 반겨주지는 않았다. 축축하게 젖어 있는 선로 위 플랫폼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한 줄기 빛조차 들지 않았고, 사람의 그림자란 더더욱 없었지만 봄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상당히 넓었다. 방금 전에 지나왔던 사람들이 모인 역보다 훨씬 넓어 보였다. 상훈이 선로 위 보도를 회중전등으로 비추자 검은 물체들이 빠르게 흩어져 사라졌다. 봄이는 이들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정황상 쥐였을 것으로 추측해 보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자 정 씨가 말해주었던 쥐들이 옮기는 역병 이야기가 떠올랐다. 봄이는 자세히 생각하고 있자니 본능적으로 혐오감이 치솟는 것 같았다.


그들은 선로 위 플랫폼으로 기어 올라갔다. 남자 둘이 먼저 올라서고, 먼저 올라간 상훈이 봄이에게 손을 뻗었다. 봄이는 아무 생각 없이 그의 손을 잡으려고 하다가 순간적으로 꿈 속에서 보았던 그의 뒤틀린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봄이는 5초도 안 되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 그에게 손을 내밀기가 망설여졌다. 왜 자꾸 상훈의 얼굴에 그런 기분나쁜 것이 비쳐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봄이는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에게 약간은 안도감이 들었다. 곧이어 봄이는 그가 내민 손을 잡고 보도 위로 올라섰다. 사실 보도와 이어지는 선로의 높이가 상당히 높아서 상훈이 부축해주는데도 상당히 애를 먹었지만.


“몸은 가냘퍼 보이는데 의외로 장난 아니게 무겁구만.”


상훈이 농담조로 말했지만 봄이가 노려보자 재빨리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었다.


“저 친구 숙녀분께 못하는 말이 없군.”


옆에서 보고 있던 정 씨도 거들었다. 봄이는 수치스럽다는 듯 아예 그들에게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자신을 노려보던 시선이 사라진 상훈이 숨을 돌리고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출출한데 여기서 아침을 먹도록 하지요.”


“그럽시다.”


그들은 곧바로 회중전등을 가방에 받친 채 세워놓고 가방에서 통조림과 물을 꺼냈다. 정 씨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상훈이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야 했다. 봄이는 그들과 약간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서 날이 선 통조림 캔을 손가락으로 땄다. 봄이는 한 쪽 손으로 캔을 잡고 한 쪽 손의 손가락으로 음식을 입에 묻히다시피 넣으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냥꾼? 우리 무리들도 놈들에게 한 번 공격당한 적이 있었지. 우린 그 당시에 친구들을 합쳐서 넷이었소. 우리가 2층 친구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놈들이 처음에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고 했어요. 우리들이 문을 꽉 막고 놔주질 않으니까 놈들이 글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디선가 사다리를 들고 와서 2층 바깥에다가 대더군. 문을 부수려는 기척이 사라지니까 우리는 이상한 낌새가 들어서 2층으로 올라가 봤더니 놈들이 2층 창문에 사다리를 대고 있는 거 아니오? 우리가 재빨리 사다리를 치웠을 때는 이미 녀석들 중 하나가 창틀에 손을 짚고 난 후였소.”


정 씨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털 스웨터 소매를 걷어서 팔을 벅벅 긁었다. 그러자 상훈이 어서 다음 이야기가 듣고 싶다는 듯 다그쳤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정 씨가 소매를 내리고는 눈을 껌벅거리며 말했다.


“어떻게 되었긴. 놈은 창틀에 손을 짚은 채로 대롱거리고 우린 넷이서 창 밖에 불쌍하게 매달린 그 놈을 내려다봤지.”


“다른 녀석들이 도와주지는 않았소?”


“도와주긴 무슨. 그저 나머지 놈들은 바깥에서 매달린 그를 멍청하게 올려다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소. 우리 넷이서 창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그 녀석을 어떻게 할지 생각중이었소. 놈은 올라오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지요. 그러다가 그 놈이 뜬금없이 우리 넷에게 한 말이 뭔지 아시오?”


정 씨가 그렇게 말하며 차고 있던 칼을 꺼내 통조림 뚜껑을 갈랐다. 상훈이 잠시 생각하는 제스쳐를 취하고는 말했다.


“따뜻한 커피라도 한 잔 달라고 했소?”


“....살려줘, 였어요.”


봄이는 그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봄이의 머릿 속 누군가가 자신의 귀에다 대고 소리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봄이가 식사를 하던 손을 멈추고 정 씨를 바라보자 정 씨는 자신에게 오는 봄이의 시선을 한 번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참 웃기지 않소? 제 발로 남의 집에 기어들어와서는 처음으로 하는 말이 살려달라는 소리라는 게 말이오. 우리가 어떻게 손을 써보기도 전에 놈은 창 밖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소. 마침 불을 피우고 남은 드럼통을 집 앞에다가 쌓아 놓았는데, 놈은 보기 좋게 그 위로 떨어져 버렸지요. 쌓아 둔 드럼통이 넘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뼈 부러지는 소리도 들렸소. 나는 차마 그 광경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기침을 했다. 봄이는 그런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 씨는 자신을 쳐다보는 봄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 상당히 어렸어요. 저기 저...... 이름 모를 아가씨보다 조금 더 큰 녀석이었는데. 많아도 고등학생 정도밖에 안 되어 보였는데.”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그들 사이에서 흘렀다. 정 씨가 다시 한 번 말을 꺼냈다.


“생각해 보니까 그 녀석들은 전부 어렸던 것 같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고등학교 일진..... 그런 거 있잖소? 그런 녀석들 같았어요. 친구가 눈밭에서 피를 쏟아내는 걸 보고 당황했는지 모두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지만.”


“밑에서 사다리를 세워 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


두 무릎을 세우고 팔로 감은 채 앉아서 듣고 있던 봄이가 끼어들었다. 두 남자의 시선이 잠깐 동안 봄이에게로 모였다. 정 씨가 다시 한번 소매를 걷어 팔을 긁으며 말했다.


“어른들보다 꼬마가 더 영리할 때도 있군.”


정 씨가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는 먼저 터널 안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어 들어가며 말했다.


“어서 통제소로 갑시다. 시간이 그리 많은 게 아니니까.”


봄이는 무언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어디서부터인가 무언가가 잘못된 것 같았지만 그것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정 씨의 뒷모습을 끝까지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봄이는 가방을 챙기고 그를 따라가려 일어서는 상훈에게로 다가가 팔을 붙잡았다. 그가 돌아보자 봄이가 말했다.


“저기, 아저씨. 저 아저씨 말인데요. 어딘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상훈이 시선을 위로 보내며 의문에 찬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디가?”


봄이는 그렇게 짧고 강하게 말하는 상훈의 말에 완전히 대답하지는 못하고 얼버무렸다. 사실 자신이 확신이 제대로 서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냥.....그냥요.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그냥 예감이 그래요. 가까이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기분도 들고..... 아무튼 어딘가 이상해요.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봄이가 말끝을 흐리자 상훈이 봄이의 양 어깨를 잡아 주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통제소까지만 함께 가기로 했으니까. 예전에 그 녀석이 말해준 게 정말로 맞다면 얼마 남지도 않았어. 한 정거장만 더 간 다음에 출구로 나가면 될 거야. 최대한 빨리 통제소를 찾아서 녀석을 데려다 주고, 우린 우리 할 걸 하면 돼. 그런데 몇 번 출구랬지?”


“1번 출구요.”


“그래, 얼마 안 남았으니까 불편해도 참아. 알겠지?”


봄이는 불만에 찬 눈으로 잠시 동안 생각하다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상훈이 그런 봄이의 얼굴을 마주보고 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봄이의 엉킨 머리를 빠르게 쓰다듬고 나서 다시 가방을 정리하는 데 주의를 돌렸다.


“먼저 가 있어. 이것만 정리하고 따라 갈 테니.”


“저......”


봄이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데 상훈이 괜찮다는 얼굴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자 봄이는 그를 몇 번 더 돌아본 다음 어둠 속으로 사라진 정 씨를 따라 나섰다.


몇 걸음 가지 않아서 정 씨가 멀리서 보였다. 봄이는 눈을 반쯤 찡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는지 보려고 했지만 내려앉은 어둠 때문인지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봄이가 정 씨의 등에 회중전등 불빛을 비추자 그가 황급히 봄이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이 보였다. 그의 행동에 의문을 가진 봄이가 그에게 한 마디 던졌다.


“아저씨, 거기서 뭐 해요?”


“아니, 뭐. 별 거 아니란다. 상훈이란 친구는 어디에 두고....”


봄이가 자신이 지나 온 플랫폼 안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정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어서 가자꾸나.”


봄이가 회중전등을 다시 그에게로 비추자, 그가 벨트 사이에 차고 있던 작은 칼이 회중전등 불빛을 받아 짧게 빛났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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