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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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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5
추천수 :
182
글자수 :
530,484

작성
17.12.09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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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38화

DUMMY

“.........살려줘.”


그의 마지막 한 마디가 봄이의 뇌리에 꽂히고 나서, 그녀는 다시 한 번 눈을 떴다. 첫 번째로 눈을 떴을 때는 몸이 가벼웠지만, 두 번째 떴을 때는 아니었다. 봄이가 처음에 손가락을 움직여보려고 했을 때 꿈 속에서처럼 손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수면이 부족했었는지 눈꺼풀도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눈썹 위에 큰 벽돌을 올려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하 역 통로에는 창문이 없었기 때문에 봄이는 현재 시각을 예측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꽤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직감할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어깨에 손을 짚은 채로 굳어버린 목근육을 풀었다. 간단하게 기지개를 켠 후 봄이는 아까처럼 가방끈을 한 쪽 팔로 집어들고 어깨에 걸친 채로 플랫폼으로 걸음을 향했다.


아까와는 다르게 역 통로 내에도 사람이 다니고 있었다. 넓은 플랫폼 통로를 방황하던 사람들 중 대부분은 각 역 플랫폼 내부로 들어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벽에 걸린 노선도를 바라보고 있거나 그저 통로 바닥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수는 적었다. 봄이는 통로 구석바닥에 애석한 눈으로 쭈그리고 앉아 있는 노인을 보며 혀를 차려다가 방금 전까지 자신이 똑같이 앉아서 잠을 잤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만두었다.


봄이는 어젯밤의 기억이 이끄는 대로 한 쪽 플랫폼을 찾아 들어갔다. 들어가고 나니 어젯밤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젯밤에 어둠에 섞여 구슬픈 빗소리만을 울리고 있던 하늘에서는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을 뿐 고요했다. 태양빛이 창가를 지나 플랫폼 내부에까지 흘러들어왔다. 어젯밤 타오르던 모닥불은 꺼져 있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곳에 앉아 있었다. 몇 명은 일어나 있었다. 주위에 빙 둘러있던 사람들 중 몇몇은 무기를 들고 있었다. 봄이는 그것을 보고 눈살이 약간 찌푸려졌다. 무슨 이유에선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봄이는 근심어린 얼굴로 상훈을 찾아보았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가며 익숙한 얼굴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자고 있던 부랑자들 몇 명이 봄이의 인기척을 눈치채자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기도 했다. 이들은 봄이에게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직접적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한참을 찾던 도중 사람들이 모여 있던 보도 왼편에 익숙한 남자 둘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어떤 내용인지 모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봄이가 혹시나 싶어 다가가자 둘 중 한 남자가 그녀를 보고서는 익숙한 목소리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는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어, 일어났냐.”


봄이는 상훈의 얼굴을 보는 순간 꿈에서 봤던 그의 반쯤 썩은 얼굴이 투영되어 비춰졌다. 순간적으로 봄이는 상훈에게 다가가려던 걸음을 멈췄다. 아까 전의 꿈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하고 봄이는 생각해 보았다. 꿈에서의 상훈은 흑사병으로 보이는 역병에 걸려 있었고, 곧 그에게 잡힐 것 같았던 봄이를 정 씨라는 남자가 구해주었다. 지금 봄이가 생각할 수 있는 꿈의 내용은 그것뿐이었다. 그 외에도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은 소년이 했던 말들, 시공간이 휘어지듯 괴상하게 뒤틀려 가는 지하철 역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보이는 플랫폼 내부는 멀쩡했다. 지면을 받치는 기둥도 멀쩡했고, 건조하게 말라 있는 레일도 멀쩡했다. 밤 사이에 빗줄기를 막아주었던 역 내 천장 역시도 멀쩡했다.


이런 봄이의 혼란스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훈은 그녀와 짧게 인사하고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정 씨를 바라보았다. 정 씨는 상훈이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자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 친구라는 미친놈이 하나 있었는데, 하루는 이 놈이 택시 기사를 골려보겠답시고 내 옆에서 택시를 하나 잡았어요. 그랬더니 택시에 타서 이놈이 했던 말이‘서울에서 부산까지 태워다 주면 30만 원 드리겠소.’ 였는데 택시 기사가 뭐라고 했는 줄 아시오? ‘좆까는 소리 마슈. 3,000만 원은 주셔야 해요. 그리고 아저씨 딸이랑 밤놀이도 해야 돼요.’”


그 말을 들은 상훈은 웃음을 참기 어려웠는지 킥킥댔다. 봄이는 그 말을 전부 듣고 나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둘을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그것은 마치 벌레를 내려다보는 듯한 눈이었다.


상훈이 한참을 웃다가 자기 옆에서 자신들을 경멸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봄이에게로 눈을 돌린 다음 정 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도 통제소를 찾고 있다고 하더군. 월계 쪽 통제소까지 같이 가기로 했어. 이의 없지? 있어도 있다고 하지 마.”


“저기요......”


봄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불만을 표시했지만 이미 상훈은 정 씨와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상훈은 우연히 만나게 된 이야기상대와 죽이 잘 맞는 것 같았다. 상훈은 분명 봄이와 대화할 때 싫지는 않다는 말투였지만, 즐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훈의 얼굴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 농담이 쉴 새 없이 오고갔다. 봄이는 그런 상훈의 즐거운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주 약간이었지만 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


봄이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드는 것을 포기하고 자리를 피해 주었다. 플랫폼 보도 위를 걸어가고 있는데, 꺼진 모닥불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 너덧 명이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모두 무기를 들고 있었다. 봄이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도 못한 채로 그들을 경계했다. 가방에 권총을 넣어놨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로 치마폭을 뒤졌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 것도 없었다.


봄이가 당황한 눈으로 그들을 경계했지만 그들은 봄이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녀를 지나쳐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그들 중에서는 여자도 있었다. 지나가면서 봄이를 째려보는 사람도 있었고,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긴 무기들을 질질 끌고 가서인지 바닥을 긁는 기분나쁜 소리가 자꾸만 들려왔다. 모닥불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어 보니 방금 전에 나간 너덧 명의 사람들을 ‘탐색조’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봄이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어젯밤에 보았었던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의 무엇인가가 보였다.


봄이는 그것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 가까이 다가갔다. 모닥불 왼편 두 번째 기둥 사이였다. 무엇인가가 잔뜩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봄이가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것의 실체를 보는 순간 봄이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뻣뻣하게 굳은 채로 하얗게 얼어버린 시체들이 옷도 거의 입지 못한 채로 수북하게 산처럼 쌓여 있었다.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추위 때문인지 시체의 부패는 상당히 느리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저마다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슬퍼 보이는 얼굴도 보였고,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도 보였다. 모든 시체들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눈알 자체가 아예 없어진 걸지도 몰랐다. 그것을 본 봄이는 짧은 호흡과 함께 입을 틀어막았다. 봄이의 눈동자가 떨렸지만 시선은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들 사이에는 어젯밤에 본 대머리의 시체도 있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어젯밤 코트를 입은 남자가 대머리를 쓰레기장에 버리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히 형용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지만 그 공포는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았다.


“어이, 꼬마야. 거기 있으면 못 써.”


어젯밤 본 적이 있던 털 코트를 입은 남자였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휘휘 저어 봄이를 쫓아내려 했다. 봄이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무수히 죽여서 산처럼 쌓아놓는 것은 되고, 그걸 쳐다보는 건 안 된다는 소리 아닌가? 봄이는 이런 것도 윗사람들이 시도때도 없이 남발하는 ‘어른의 사정’ 인 건지 궁금해졌다. 동시에 그녀는 매번 다른 사람들에게 듣는 꼬마라는 소리가 슬슬 기분 나빠지기 시작했다. 봄이는 고개를 돌려 코트 입은 남자를 잠깐 동안 노려보고 나서 그를 지나쳐갔다. 이런 봄이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은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꼬마, 무슨 문제 있나?”


“아무 것도 아니에요.”


보도를 좀 더 걸어가자 정 씨와 상훈이 봄이에게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봄이는 그들을 보자 멈추어 섰다.


“슬슬 움직이자. 여기 사람들과 마찰이라도 빚으면 곤란하니까.”


상훈이 말하자 봄이는 그가 말한 마찰이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봄이는 상훈이 낸 이 의견에 대해서는 찬성하고 있었다. 봄이가 말하려 하는데 정 씨가 끼어들었다.


“두 정거장 더 가면 되는 거 맞지요?”


“그럴 거요.”


그들이 봄이를 제쳐두고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봄이는 그들이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다가 이윽고 그들을 따라갔다.


작가의말

추천요정님이 한분 다녀간 것 같은데.........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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