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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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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글자수 :
530,484

작성
17.10.16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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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26화

DUMMY

봄이는 헤드라이트 높이까지 눈에 파묻혀 있는 갖가지 색상의 차량들을 지나쳐갔다. 마치 순은처럼 맑은 빛을 한가득 뽐내고 있는 순백색의 설탕 더미에 휩쓸려 있는 것 같았다. 대공황 이전에 시끄럽고 날카롭게 경적을 울리며 자유롭게 도심을 마음껏 질주했을 이 주인 잃은 차량들은 지금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대단한 발명품 중 하나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그저 잔혹하리만큼 고요한 백색의 대지에 쓸쓸하게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봄이는 다른 장소와는 다르게 유난히 차량들 주위에만 둘러싸여 마치 얼어붙은 그물처럼 그것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꽁꽁 싸매고 있는 눈더미들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자욱한 공장의 매연 같던 구름이 태양과 함께 깨끗하게 걷히자 눈동자를 태워버릴 것 같은 뜨거운 자외선이 어두컴컴하게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던 인적 없이 텅 비어버린 사거리의 아래쪽을 강렬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봄이가 자신의 치마폭에 찔러 넣었던 스테인리스 개머리도 눈부시게 광을 냈다. 인공적인 빛이 단 한 줄기도 비춰지지 않던 황량한 사거리에 거대한 자연의 빛이 불규칙적으로 가득 퍼지자 보잘것없는 눈송이 입자들이 값비싸고 화려한 보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반짝였다.


그들은 주차금지 고깔이 일렬로 죽 늘어선 큰 도로변을 따라 20분쯤 더 걸어갔다. 봄이는 자신의 눈을 직방으로 내리쬐는 태양빛에 저항하듯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왼손을 들어 눈썹을 가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보자 상훈이 자신과 똑같은 행동을 취하는 것을 보았다. 발꿈치가 저릴 정도로 걷기만 하는 게 지루해진 봄이가 자신의 앞에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는 상훈을 불러 세웠다.


“올바른 길로 오고 있는 거 맞죠?”


그러나 상훈은 대답이 없었다. 봄이 자신도 소리없이 묵음으로 대답하는 것을 나름 즐겼지만 막상 직접 당해보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봄이는 눈부신 태양을 똑바로 마주한 채로 말없이 걸어가는 상훈의 뒤통수를 쏘아보며 다시 소리 질렀다.


“거기 아저씨, 귀 먹었어요?”


상훈이 그 말을 귓전으로 흘림과 동시에 그의 앞에 장대하게 지어져 있는 큰 고층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짜증을 내던 봄이도 그의 발걸음이 멈추자 그의 바로 뒤까지 따라와서 멈추고는 그와 함께 서리가 여기저기 낀 거대한 얼음과도 같았던 고층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수수께끼의 고층 건물은 백화점이었다. 사거리에 도착했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전에 봄이가 잠시 신세를 졌던 동네 재래시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규모가 크고 많은 가게들이 지어져 있었지만 역시나 그 어디에서도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이상하리만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든 가게들은 텅 비어 있었고 모든 가게란 가게마다 셔터가 굳게 닫혀 있어 내부를 엿볼 수조차 없게 되어 있었다. 배수가 되지 않아 넘쳐흐른 하수도를 옮겨 다녀서인지 축축하게 젖은 더러운 시궁쥐들과 무리를 지어 다니며 쓰레기통을 뒤지던 검은 도둑고양이들을 제외하고는 살아있는 생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던 큰길의 횡단보도는 마치 서부개척시대의 황량한 황무지 풍경을 연상시키는 것 같았다.


횡단보도에서 인도로 이어지는 꺾인 계단 왼편에는 지하 주차장과 이어진 것으로 보이는 야외 승강기가 얼어붙어 버린 승강기 입구를 끝내 좁히지 못한 채 벌어져 있었다. 승강기 옆은 은행이었는데 이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은행 입구에는 누렇게 변색된 신문지 조각과 함께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초록빛을 띠는 종이들도 몇 장 보였다. 상훈은 은행 입구에 너저분하게 깔린 축축한 종이 상자들을 밟고 몇 걸음 더 걸어가서 방금 전까지 봄이가 올려다보고 있었던 고층 백화점을 등지고 서서 말했다.


“저 녹색 종이들이 필요 없어지는 날은 절대로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 말을 들은 봄이는 얼음 건물에서 시선을 치우고 한두 장씩 휘날리는 녹색 종이들을 바라보았다. 봄이는 녹색 종이들을 보며 무언가 할 말이 떠오르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생각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할 뿐이었다. 봄이가 무슨 말을 꺼낼지 생각하고 있는데 상훈이 그녀의 대답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 좀 봐. 설마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어. 예전에는 5만 명이 여기 살았는데, 지금은 그림자 한 조각 없는 유령 도시가 되어버렸네. 이런 곳은 처음 봐. 대충 통제소나 보호기관으로 삶을 찾아 떠나갔을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그야말로 이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잖아.”


사람 한 명 없는 쓸쓸한 도시를 바라보는 상훈의 눈빛은 어딘가 울적해 보였다. 봄이는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곧게 세워진 가로등의 고드름 맺힌 전선에 검은 새 몇 마리가 날아와 앉는 것을 보았다. 봄이는 자신을 위해 따라나선 상훈이 기죽어 있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또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을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싹트는 걸 주체하지 못해서이기도 했다. 봄이는 잠시 상훈이 생각할 시간을 주고 나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뭔데.”


봄이가 상훈의 눈치를 보며 말하자 그는 시선을 허공에 고정시킨 채로 대답했다.


“정말로 이렇게까지 절 도와주시는 이유가 뭐죠?”


봄이의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이 밟고 서 있던 얼어붙은 황무지에는 검은 새들의 날갯소리밖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상훈은 그녀가 조심스럽게 던진 말 한 마디를 머릿속으로 끝임없이 되새기기라도 하듯이 숨소리조차 멈춘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시선은 먼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것에서 그가 나름대로 고뇌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가 있었다. 끝까지 봄이의 눈과 마주치지 않던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며 동시에 그의 입술이 하얀 입김과 함께 열렸다.


“세상이 이렇게 되어버린 지금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딱 두 가지가 있어. 그게 뭐일 것 같아?”


봄이가 대답하지 않자 그가 덧붙였다.


“하나는 외롭게 무리에서 떨어져 버려지고 잊혀진 녀석들을 도와주는 거고, 다른 하나는 다른 무리에 끼지 못하고 거부당한 녀석들만을 노려 뺏고 죽이는 거지. 난 그저 그 둘 중에서 마음에 드는 쪽을 택해서 살아가는 것 뿐이야. 가끔은 전자가 될 테고, 어쩔 때는 후자가 되겠지. 이런 건 따로 정해놓을 수는 없어. 세월이 지나면서 많은 것이 변하고, 많은 것은 남아있다고들 하는데 몇 년에 걸친 시대적 변화가 지금 인류를 완전히 뒤바꿔놓은 걸지도 모르지. 나 역시 자랑은 아니지만 사람도 죽여 보고, 물건도 많이 빼앗아 봤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내 자신이 죄책감에 시달린 적이 없다고는 말 못해. 그저 상황에 따라 불쌍한 녀석들 사이에서 적당히 이득도 취해보고, 살 곳도 없어져 버리고, 직장도 잃게 되어 길거리에 내몰리고 만 가엾은 녀석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애초부터 선과 악이라는 건 그 누구도 구분지어 놓지 않았으니까.”


봄이는 다른 사람 말을 주의깊게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나 지금의 상훈처럼 남에게 꼰대처럼 훈계를 한다거나 따분하고 지루한 설교를 듣는 걸 강요한다거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지저분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걸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을 봄이가 아니었다. 적어도 상훈을 만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을 때까지는 그랬다. 봄이는 상훈이 말한 마지막 문장을 머릿속에서 곱씹어보았다.


그와 동시에 봄이의 기억에서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두 부부가 기억에서 스쳐 지나갔다. 먹을 것과 물자를 얻기 위해서, 그저 자신이 살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시도한 약탈로 인해서 그 부부의 눈에 비치는 봄이의 모습은 그녀가 끔찍이도 혐오하는 사냥꾼으로 인식되어 버리고 말았다. 봄이의 무의식 속에서는 끝없이 자신이 어쩔 수 없이 했던 살인과 약탈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마 남지 않은 인간성과 도덕성이 끝까지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봄이가 이런 고뇌를 거듭할수록 자기 자신이 점점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묘하게도 봄이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치마폭에 찔러 넣었던 권총의 개머리만큼은 굳게 붙잡고 있었다.


“저번에도 말했었지만, 말로는 도움 같은 건 필요 없다면서 큰소리치는 반면에 얼굴에는 도움이 필요하다고 쓰여 있는 가엾은 여자애를 그냥 모른 척 할 수는 없잖아? 바로 너 같은 녀석들 말이야.”


봄이는 반박하려고 했지만 말문이 꽉 막혀버렸다. 상훈은 당황해서 대답하지 못하는 봄이의 난처한 얼굴을 몇 초 동안이나 더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도 그녀가 한참 동안이나 대답이 없자 그녀에게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고개를 백화점의 입구로 돌렸다.


“그럼, 방해할 녀석들도 없겠다, 여자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쇼핑이나 한 번 해볼까?”


상훈이 그렇게 말하고는 오른손을 들어 흔들며 백화점으로 걸어갔다.


작가의말

후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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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101화 20.12.16 63 1 12쪽
103 100화 20.12.11 29 0 13쪽
102 99화 20.12.08 38 0 12쪽
101 10. 종착점 20.12.07 37 0 11쪽
100 97화 20.12.02 58 0 13쪽
99 96화 20.11.29 67 0 11쪽
98 95화 20.11.28 30 0 14쪽
97 95화 20.11.23 41 0 13쪽
96 94화 20.11.20 40 1 9쪽
95 94화 20.11.19 62 1 9쪽
94 93화 20.11.17 70 0 13쪽
93 92화 19.11.27 57 0 9쪽
92 91화 19.11.24 57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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