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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조회수 :
14,504
추천수 :
182
글자수 :
530,484

작성
17.09.28 00:06
조회
144
추천
4
글자
10쪽

21화

DUMMY

봄이는 눈앞에 닥친 운명을 차마 마주보기 싫어서인지 아직 감기지 않은 눈으로 시선을 힘겹게 오른쪽으로 옮겨 자신들을 빙 둘러싼 채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는 군중들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봄이와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시선을 피해 버렸다.


차마 닿을 수 없는 거리인 건 알고 있었지만 봄이는 그들에게로 한쪽 손을 뻗어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불난 집에 남은 마지막 불씨가 꺼지는 걸 지켜보는 구경꾼처럼 아무도 봄이를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누구도 봄이가 내민 간절한 손을 잡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자기들끼리 수군대며 봄이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봄이는 지금 당장이라도 박차고 일어나 저 멀리 떨어져서 그녀 자신에게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동정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한심한 구경꾼들을 때려 죽이고 싶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자신을 본 체 만 체 하는 군중들이 원망스러웠다. 자신의 작은 목을 체중을 실어 힘껏 누르고 있는 뚱보도 원망스러웠다. 담배 피운답시고 자신을 두고 자리를 비운 상훈도 원망스러웠다. 자신을 끝없이 반복되는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세상도 원망스러웠다. 경솔해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늪에 발을 헛디디고 만 자신도 원망스러웠다.


봄이가 모든 것을 포기한 순간 어디선가 거센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 봄이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자신의 숨통을 힘껏 조이고 있던 뚱보의 악력이 약해지자 그제서야 봄이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뚱보의 거대한 상반신이 봄이에게로 쏠렸다. 체중으로 누르고는 있었지만 그 압력은 누군가를 죽이려고 할 때 생기는 순수한 살의에서 빚어진 힘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뚱보의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가 앞으로 쓰러질 때 생기는 단순한 체중의 무게였다.


봄이의 기도와 폐가 제기능을 할 수 있게 되자 그녀는 한꺼번에 몰아치는 산소의 기압을 이기지 못하고 연신 기침을 해 댔다. 목을 졸리는 느낌도 고통스러웠지만 조여진 숨통이 트인 순간이 더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전에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뼛속까지 스며들어 몸서리쳐지는 죽음이라는 의미의 중압감에 밀려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몇 분 동안이나 기침을 하고 난 다음에야 봄이는 자신에게 내리쬐는 태양빛의 역광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남성의 실루엣을 올려다보았다.


손에 각목을 든 남성은 익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젠장,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봄이는 그 말을 듣고 서둘러 뚱보가 쓰러져 기울어진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뚱보의 뒤통수에 난 머리카락이 피에 젖어 짙은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의 정수리에서부터 검은 빛을 띤 붉은 선혈이 그의 죽음을 증명하듯 흘러나와 하얀 눈바닥을 가득 적시고 있었다. 봄이는 이 광경을 보고 또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깊은 곳을 잠식하고 있던 트라우마가 깨어나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어질했다. 눈앞의 남자는 각목을 던져 버리고 주저앉아 움직이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 봄이의 팔을 다급하게 잡아끌며 말했다.


“일어나, 떠나야 해. 경찰이 곧 눈치챌 거야.”


“떠나다니, 어디로요?”


눈앞의 남자는 봄이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녀의 팔을 잡고 일어날 수 있게끔 부축해주었다. 상황도 설명해 주지 않은 채 다급하게 떠나려는 남자의 입가에 남아있던 담배 연기로 인해 봄이는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상훈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눈밭에 쓰러진 뚱보의 일행으로 보이던 두 남자는 뚱보가 쓰러지자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을 내보인 채 얼떨결에 봄이와 상훈에게 길을 터주었다. 군중들도 상훈이 앞장서서 달리자 모세가 열었던 강물처럼 순식간에 규칙적인 간격으로 갈라졌다. 자신의 팔을 잡고 달리는 상훈에게 봄이가 소리치듯 물었다.


“잠깐, 내 가족들은요?”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잖아!”


이들은 신속하게 뛰어 검문소를 지나쳤다. 통제소 입구를 지키던 경찰이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다급하게 달려 나가는 이들을 보고 소리쳤다.


“어디 가십니까?”


한참을 뒤도 안 돌아보고 뛰던 상훈이 멈추어 섰다. 가까스로 상훈을 따라잡은 봄이도 제자리에 멈추었다. 그 자리에서 숨을 고르다가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다름아닌 상훈이었다.


“대체 넌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널 죽이려고 드는 거냐?”


“아저씨도... 방금 전에 사람을 죽인 거예요?”


상훈이 숨을 몰아쉬다가 방금 전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하는 봄이의 깊은 한 마디에 생각을 멈추고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뭐, 그렇지. 자랑은 아니지만 이번이 처음은 아니야.”


봄이는 그렇게 말하는 상훈의 한 마디에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여기서 살인의 도덕성과 정당성에 대한 토론으로 꼬투리를 잡는다면 이어질 뻔한 설교가 눈에 선했다.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살인이라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시킬 뻔 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자신이 그런 어처구니없는 합리화를 하려고 들었단 사실이 역겹지만은 않았다. 봄이는 이 사실에 의구심을 품었다. 그들은 한동안 서로를 멍청하게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봄이는 상훈의 근심어린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피로가 몰려왔다. 가까스로 찾은 통제소에서는 몸과 마음만 상했을 뿐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떨궜다. 봄이는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낡은 운동화와 헤진 스타킹이 보였다. 봄이는 현재 그녀가 직접 볼 수 있는 수준에서의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


“결국엔 이렇게 되는군. 너 뿐만 아니라 나도 쫓기는 신세가 되겠어. 목격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더럽게 많았으니까 말이야.”


이어지던 정적을 깬 상훈의 말을 듣고도 봄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 피곤해지겠어. 네가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러서 그 뚱보가 널 죽이려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고 딱히 알려달라고 캐묻지도 않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런 태도 유지하면 목숨 보전하기 힘들어. 내가 언제까지나 도와 줄 수도 없는 노릇일 테고.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어쩔 뻔했어? 그 뚱보가 널 죽이기 직전까지 몰고 가서 마지막에 정말로 죽여버렸으면 어쩔 작정이었냐고.”


봄이는 웬만해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말하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가 없었다. 봄이는 짜증 섞인 어조로 말했다.


“저기요, 도와주신 건 정말로 고맙고 제가 지구대에서 개같이 행동했다는 것도 알겠는데요, 그 사람이 먼저 시작한 일이에요. 저는 죽기 직전까지 갔었다고요. 좀 밀쳤다고 사람을 그렇게 때리는 미친놈이 어디 있어요?”


“다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그러니까 왜 섣불리 나서고 그래? 세상이 이렇게 된 시점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해? 그 자리에서 당장 칼에 찔려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어. 치안이 유지되던 예전 세계에서는 범죄가 없었는 줄 알아? 대공황으로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은행 파산으로 인해서 그들이 믿던 자본주의가 몰락하고, 그 여파로 가정은 피폐해지고 마비되어 버렸어. 그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살아보겠다고 정부 관리하에 있는 통제소에서 간간이 생계유지하는 사람들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봤어?”


“그래요, 그렇네요. 그냥 이 멍청한 꼬맹이가 죽게 내버려뒀으면 거기서 꽁무니 빼고 달아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참 유감이네요. 나 때문에 쉴 곳도 없어지고 경찰한테 쫓기게 된 기분이 어때요?”


봄이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신경질을 냈다. 상훈은 그런 봄이를 질렸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난 네 말대로 살인도 해 본 적이 있고, 길거리에서 시체도 수도 없이 많이 봤어. 난 이런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널 몇 번이고 도와줬어. 솔직히 꼬마에게 보답 따위는 바라지도 않지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지는 못할망정 넌 정신머리부터 고쳐야 할 것 같구나. 그런 상태로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야.”


봄이는 짜증을 내면서도 방금 전 상훈이 자신을 향해 내뱉은 말을 되받아치지는 못했다. 동시에 상황이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기름 좀 얻어 보겠다고 총구를 들이미는 꼬마에게 기름도 주고, 멍청하게도 시장에서 돈도 없이 빵을 훔쳐먹다 걸린 꼬마도 구해주고, 주제넘게 까불다가 죽을 뻔한 꼬마도 구해 주었으니 말이야. 더 이상 내가 도울 건 없을 것 같구나. 네가 그리도 바란다면 어쩔 수 없지. 이제 서로 갈 길 가자꾸나.”


감정에 휩쓸려 아무렇게나 마구 짜증을 발산한 봄이였지만 상훈이 방금 한 말은 결코 그녀에게 반갑지 않았다. 상훈은 그 말을 끝내고도 한동안 봄이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등을 돌려 봄이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티말 님 코멘트 늘 감사드립니다! 더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다면 좋을 텐데.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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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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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9 티말
    작성일
    17.09.28 09:25
    No. 1

    음, 살았네요.
    과연 이 소설의 끝은 어찌되련지..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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