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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조회수 :
14,505
추천수 :
182
글자수 :
530,484

작성
17.09.17 05:00
조회
203
추천
3
글자
8쪽

17화

DUMMY

봄이는 고개를 아래로 푹 떨궜다. 그녀의 목소리는 또박또박했지만 떨리고 있었다. 상훈이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있던 지하실이 한순간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또 다시 방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봄이의 품안에 둥지를 튼 딩이만이 아무 말도 없이 내적갈등에 시달리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낑낑대고 있을 뿐이었다.


“지난 건 전부 잊어버려. 물을 엎질렀다고 해서 다시 주워담을 순 없지. 지나가 버린 과거에 얽매인 채로 헤매봤자 네 발목만을 붙잡을 뿐이야. 네가 예전에 사람을 죽였든 뭘 했든 지나간 과거의 미련일 뿐이고. 물론 예전에야 과거는 과거라 해도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겠지.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더 뭐가 필요하지? 중요한 건 네가 지금 이렇게 멀쩡히 걸어다니고 있다는 거지. 일단 어찌됐든 간에 살아남았잖아. 안 그래?”


살인은 그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봄이의 눈 앞에 있는 남자는 봄이의 씻을 수 없는 악몽과 같은 트라우마를 그대로 그녀에게 안고 가도록 시키는 것 같았다. 봄이는 기분이 묘했지만 상훈이 그녀의 감정을 안심시키기 위해 배려해서 뱉은 말이라는 것 정도는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봄이는 상훈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상훈의 입술이 닫히자 반론이라도 제기하려는 듯 다시 말했다.


“그 말은... 자기 자신만 살아남는다면 상관없다는 뜻인가요?”


장작을 뒤적이던 상훈이 봄이의 말을 듣고 행동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오직 자신만 살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을 발판 삼아 짓밟고 올라서서 자신만의 이기적인 생존에 희생당한 타인들의 목숨을 담보로 올라선다고 해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요?”


“이 세상은 이미 죄책감이고 담보고 뭐고 아무런 의미가 없어. 자신이 쓰러져서 애원하는 상대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잠깐이라도 머뭇거린 순간 자신이 죽게 되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선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만 해. 물론 그게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지. 너도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거야.”


“그 날이란 게 영영 오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어쩌면 너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멍하니 있는 봄이를 마주보며 말하던 상훈이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장작이 타는 소리가 한 번 크게 울려 퍼졌다.


“네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그런 물러터진 성격이 어쩌면 나중에 빛을 볼 수도 있겠지. 솔직히 지금 이 세상의 어디에서 상식이란 게 통하겠느냐만, 혹시라도 그 멍청한 상식이 통하는 상대를 만날 수도 있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건 우리들이지 같잖은 철학이 아니니까.”


“좋으시겠네요. 재미없는 설교를 들어 줄 꼬맹이가 있어서.”


“아니, 그다지. 그래서 넌 이제 어쩔 계획이야?”


봄이의 영혼 없는 대꾸에 질렸는지 상훈은 자연스레 말을 돌렸다.


“부모님을 찾아 떠날 거예요. 부모님의 소식을 가장 마지막으로 알려준 건 삼촌이니까 삼촌을 찾아가면 무엇인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르죠.”


“삼촌이 어디 계신지는 알아?”


“그야 모르죠.”


봄이가 칼같이 말을 끊어버리자 상훈이 깊은 한숨을 쉬며 곤란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다가 무엇인가 좋은 수가 떠오른 듯 봄이에게 검지손가락을 치켜들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여기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정부의 통제구역이 있어. 조금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이라 불안하기는 해도 일단 치안은 조금이나마 유지될 테니 여기보다는 사정이 나을 거야. 그곳에 가면 통제소 입소자 명단을 확인해서 어쩌면 네 가족들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만약 네 가족들이 그 통제소에 들른 적이 없다면 헛고생이겠지만 그래도 다른 통제소 위치를 알려달라고 해서 계속 그렇게 샅샅이 뒤지다 보면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지.”


봄이는 정부라는 말에 온 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어두운 불안감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봄이가 소리쳤다.


“안 돼요. 잊었어요? 난 범죄자라구요. 잡혀서 영영 못 나올 지도 몰라요.”


“걱정 마. 그 곳에 네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입증시킬 만한 증거는 없을 테니까. 네가 가진 그 장난감만 어떻게 숨길 수 있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상훈이 그렇게 말하며 쭈그려 앉아있는 봄이의 왼쪽 허벅지 옆에 놓인 은빛으로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리볼버 권총을 아까 치켜들었던 검지로 가리켰다. 그러자 누워서 졸던 딩이도 귀를 쫑긋 세우며 덩달아 상훈의 손가락 끝을 따라서 시선을 옮겼다.


“...숨길 방법이야 어딘가 있겠죠. 그것보다 걱정인 건 제가 삼촌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가 2년 전인데, 대부분의 사실이 기억이 안 나지만 딱 하나 확실한 건 여기서 상당히 멀었던 곳이었다는 거죠.”


“예전에 살던 곳이 어디였다고 했지?”


“말한 적 없어요. 그렇지만 아마 제 기억상으로는 경기도... 안성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안성이라고? 이거 골치 아프겠는데.”


상훈이 주먹을 턱에 괴고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봄이는 그런 상훈을 바라보며 제발 상훈의 입에서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 수 있게끔 마음속으로 두 손 모아 빌었다.


“좋아, 우선 이 근처 통제소에 가 보자. 거기서 입소자들을 쭉 둘러본 다음 없으면 다른 통제소로 이동할 수밖에 없겠구나. 사실 네 가족이 정부 통제소에 있을, 아니 왔다 갔을 가능성도 거의 전무하지만 말이야.”


봄이는 상훈의 이 계획이 상당히 비효율적이라고 느껴졌지만 특별히 딴죽을 걸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봄이가 생각해왔던 계획이 비효율적이었으면 훨씬 더 비효율적이었지 상훈의 계획보다 낫지는 않았으니까. 사실 봄이는 전국 방방곡곡을 하나하나 뒤지면서 찾을 생각이었다고는 절대로 말하지 못했다.


“그럼 내일부터 출발하도록 하죠.”


“오늘은 늦었으니까 말이야. 오늘은 우선 푹 쉬자. 넌 아까 누워있던 침대에서 자려무나. 어린 숙녀분을 위해서라면 땅바닥에서 자줄 순 있으니까.”


상훈이 말을 끝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봄이도 땅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봄이가 일어서자 지금까지 그녀의 품속에 있던 딩이가 누울 공간이 없어져버려 품에서 내려왔다.


“잘 자라.”


상훈은 그 한마디를 끝으로 어디론가 가 버렸다. 봄이는 일어서서 드럼통에 있던 얼마 남지 않아 거의 꺼져버린 불씨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려 침대로 향했다. 가만히 앉아서 눈치를 보던 딩이도 봄이를 따라 침대 위로 뛰어 올라왔다.


봄이가 이불을 끌어당겨 올리자 딩이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몸을 둥글게 말아 누웠다. 딩이의 털은 빳빳했으며 더럽혀져 있었고 냄새도 났지만 편안하고 안정된 기분을 가져다주는 것 같았다. 딩이를 팔로 감싸안은 채 침대 반대편으로 돌아누워 입술을 우물대던 봄이도 뒤늦게서야 입을 열었다.


“...아저씨도요.”


그날 밤 봄이는 처음으로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작가의말

티말 님 코멘트 넘넘넘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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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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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9 티말
    작성일
    17.09.17 10:38
    No. 1

    그리고 이 소설은 끝났다고 한다.

    - 라고 쓰고 독자는 도망갔다.


    ...주인공인 봄은 피곤해서 자고 있다. 알았으면 화를 냈겠지만 푹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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