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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조회수 :
14,499
추천수 :
182
글자수 :
530,484

작성
17.09.13 02:12
조회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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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9쪽

16화

DUMMY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제대로 덮히지 않은 이불을 봄이의 목에까지 끌어올려 덮어 주었다. 봄이는 가죽 이불과 함께 목에 살며시 닿는 남자의 따뜻한 손을 느낄 수 있었다. 남자는 침대 머리맡에 올려둔 생수통 한 개를 봄이에게 내밀며 말했다.


“수분을 최대한 보충해두는 게 좋아.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어 봐. 괜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여기는 안전해.”


봄이는 한쪽 눈으로 남자가 가져온 생수통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생수통을 받아 들었다. 오른 손바닥에 미지근한 감촉이 전해졌다. 사실 원래의 봄이였다면 낯선 사람이 베푸는 호의 같은 건 받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왠지 편안하다는 기분을 느꼈다. 아늑하게 양초 불빛이 어둠을 걷어내고 있는 방 안에 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봄이는 남자가 건넨 물병을 마다하지 않고 벌컥벌컥 마셨다.


봄이가 한참 메마른 목구멍이 젖는 감촉을 느끼고 있는데 남자가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네 이름도 몰랐네. 이름이 뭐니?”


“그런 게 뭐가 중요해요. 어차피 오래 볼 사이도 아닐 텐데.”


봄이가 물병을 남김없이 모두 비우고 머리맡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남자는 그 말을 듣고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먼저 이름을 밝히라 이건가. 나는 유상훈이야. 그냥 상훈이 오... 아니지, 아무렇게나 불러도 돼.”


딱히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하고 생각했다. 봄이가 앉은 채로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윤 봄이에요.”


“의외로 귀여운 이름이네. 외자 이름인가? 네글자 이름 다음으로 신박하군.”


봄이가 흥미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하얀 털을 가진 개 한 마리가 봄이가 앉아 있는 침대 위로 뛰어올라 놀란 봄이의 허벅지 위에 털썩 앉아서 봄이의 손가락을 핥아댔다. 생전 처음 느끼는 이상한 감촉에 봄이의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걘 딩이야. 며칠 전에 가엾게도 눈밭에서 방황하고 있지 뭐냐. 그래서 데려왔어. 먹을 걸 많이 주지는 못했지만 불쌍한 놈이라고. 말도 잘 듣고.”


봄이는 자신의 손가락 마디와 손바닥 사이로 혀를 파고드는 흰 개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기분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아까 남자가 안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상당히 큰 몸집이었다. 귀는 쫑긋 세우고 있었지만 꽤나 큰 눈과 촉촉한 코를 가지고 있었다. 등을 쓰다듬어 보니 털은 상당히 풍성했지만 털 안에 감춰진 몸은 제법 마른 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동물이라도 어쩔 수 없구나, 하고 봄이는 생각했다. 흰 털이 이리저리 엉키고 이물질과 함께 굳어 있어서 촉감은 의외로 빳빳한 느낌이었다. 몇 달간이나 목욕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것은 봄이 역시 예외는 아니었지만.


손가락을 핥는 입을 자세히 보니 잇몸 사이로 날카로운 이빨이 보였다. 털과 몸집은 비록 극한의 상황 속에서 무뎌졌지만 이빨만은 금방이라도 사람의 숨통을 끊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듯이 건재했다. 봄이는 그 날카로운 이빨을 보고 약간은 이 생물이 무서워졌다.


딩이에게 한눈이 팔려 있는 봄이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던 상훈이 쓰고 있던 회색 비니 모자를 벗고 일어서며 말했다.


“슬슬 저녁을 먹자꾸나. 내가 저번에 먹고 남은 바비큐가 있어. 금방 가져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


봄이는 바비큐라는 말에 졸린 눈이 확 떠졌다. 고기라는 말을 들으니 벌써부터 입가에 침이 고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애써 배고프지 않은 척 무표정을 유지했다. 딩이도 무언가를 알아챈 듯 귀가 번뜩하고 커졌다. 봄이와 딩이가 기대에 찬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잠시 후 상훈이 방 면적의 1/3은 차지할 만큼 커다란 드럼통을 가져와 놓았다. 철렁거리는 기름통도 가져왔다. 커다란 드럼통 안에서는 나무 장작이나 숯덩이 같은 불에 타서 그슬린 퀴퀴한 냄새가 났다. 상훈은 드럼통 위에 석쇠를 올리고 장작에 기름을 부어 불을 피우려는 듯 침실의 책상 서랍을 뒤지며 중얼거렸다.


“가만 있자, 성냥이 어디 있더라?”


“이걸 써요.”


봄이가 침대 밑에 놓여있던 가방에서 은색 지포라이터를 꺼내 상훈에게 던졌다. 상훈은 날아오는 라이터를 왼손으로 잡아들었다.


“가끔은 꼬마도 쓸모가 있구먼.”


“...불이나 피우시죠.”


상훈이 기름을 묻힌 장작에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드럼통 안에 던져넣자 드럼통에서 거센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예전이었다면 집안에서 무식하게 드럼통에 불을 피우는 행동은 상식을 한참 벗어난 행동이었지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특별히 화로가 있는 것도 아닌 현대의 집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불길이 어느 정도 번지자 상훈은 비닐에 싸인 꽁꽁 언 베이컨 조각을 석쇠 위로 올려 늘어놓았다.


봄이는 상훈이 말한 바비큐가 고작 이 조그만 베이컨 조각을 말한 것이라는 걸 몰랐다. 봄이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 식량은 지금 세상에서는 구하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봄이는 그냥 잠자코 있기로 했다.


불 붙은 드럼통을 중심으로 방 구석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는 온기가 느껴지자 봄이는 침대에서 내려와 드럼통 앞에 무릎을 구부리고 쭈그려 앉았다. 방의 중심부에서 점점 퍼지는 그슬린 빛이 봄이의 얼굴색을 노랗게 바꿔놓았다. 언 베이컨이 녹으면서 풍기는 고소한 향기를 맡으면서 고기가 구워지는 걸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짧고 조촐했던 식사를 마쳤다. 봄이는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식기를 모두 치우고 그들은 아직 꺼지지 않은 드럼통 주위에 둘러앉아서 손을 녹이고 있었다. 딱딱 타는 장작 내음과 가끔씩 튀어 오르는 불씨만이 방 안에서 지속되는 침묵을 메꾸고 있었다. 봄이는 이곳의 이 아늑한 분위기와 편안함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배를 가득 채우고 나른해진 봄이는 그제서야 지금까지 자신이 있었던 방을 돌아볼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곳은 평범한 주택집의 방이 아니었다. 어떤 집의 지하실인 것이 틀림없었다. 환기구는 몇 군데 있었지만 창문이 한 군데도 없다는 점에서 그 사실을 대략 유추할 수가 있었다. 창문은 없었지만 특별히 갑갑하다는 폐쇄감은 들지 않았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있기에 최적의 장소인 것 같았다. 다만 낮 시간대에 머물기에는 조금 암울한 느낌이 느껴지는 장소였다.


딩이는 봄이의 허벅지 속으로 파고들어 몸을 둥글게 말아서 눈을 껌벅거리며 졸고 있었다. 봄이가 크게 타오르고 난 후 점점 약해지는 불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상훈이 먼저 작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많이 먹었냐? 그러니까 저번에 같이 먹었으면 더 좋았잖아.”


“뭐, 오랜만에 잔뜩 배는 채웠네요.”


봄이가 만족감을 표시하자 상훈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너... 끝까지 고맙다는 인사는 안 하는구나.”


“엎드려 절이라도 할까요?”


“됐다, 됐어. 너는 무슨 놈의 꼬마가 성격이 그렇게 꽉 막혔냐.”


상훈은 그렇게 빈정거리며 쇠꼬챙이로 타는 장작을 몇 번 뒤적이다가 다시 얘기했다.


“그런데, 너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 여기는 우리가 처음 만난 장소하고는 조금 떨어져 있는데.”


봄이는 지금까지 겪어온 일들을 모두 상훈에게 털어놓자 상훈이 안쓰럽다는 얼굴로 혀를 차며 말했다.


“그때는 진짜 죽을 뻔 했어요. 그놈들에게서 죽기 살기로 도망치다가, 도망치는 도중에...”


봄이가 말을 잇지 못하고 무릎을 움찔거렸다. 상훈의 눈썹이 흥미롭다는 듯 약간 위로 올라갔다.


“사람을 쐈어요. 우발적이었다고 하면 우발적이었는데, 확실히 자의지로 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기분이었어요. 정말 끔찍한 기분이었어요. 그때 그 죽어가던 남자가 아직까지 잊혀지지가 않아요. 이게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스스로를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봄이가 말을 끊고 손목을 떨다가 이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사람을 쏜 다음에 권총을 던져버리고 싶었는데 차마 버릴 수가 없었어요. 오히려 꽉 쥐고 현실에서 도피라도 하듯 그 자리에서 도망쳐 버렸어요. 제가 그때 한 일은 잘한 것이었을까요? 저는 이제 어떡하면 좋죠? 이 트라우마를 안고 계속해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게 정말 옳은 일일까요? 저는 정말로 살아있을 가치가 있는 걸까요?”


봄이는 고개를 아래로 푹 떨궜다. 그녀의 목소리는 또박또박했지만 떨리고 있었다. 상훈이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있던 지하실이 한순간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또 다시 방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봄이의 품안에 둥지를 튼 딩이만이 아무 말도 없이 내적갈등에 시달리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낑낑대고 있을 뿐이었다.


작가의말

티말 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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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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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9 티말
    작성일
    17.09.14 02:02
    No. 1

    독자 : 뭐라고 한거 같은데 스킵, 스킵.
    봄 : (부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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