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조회수 :
14,519
추천수 :
182
글자수 :
530,484

작성
17.09.12 00:49
조회
169
추천
2
글자
8쪽

15화

DUMMY

봄이가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본 것은 고요한 정적이 흐르고 있는 방에 어울리는 일렁이는 선홍빛 불꽃이었다. 얼핏 보아서는 접시 위에 놓인 양초인 것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 양초를 들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잘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방 아래에서 손에 들고 있는 양초 불빛만이 환하게 비춰주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남자였다.


“아, 일어났구나.”


봄이가 누워 있는 자리를 손으로 쓸어 보니 표면이 까칠까칠하고 어딘가 텁텁한 냄새가 나는 면 침대 시트였다. 봄이가 몸 위에 반쯤 덮힌 얇은 가죽 이불을 치우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봄이의 이마에서 젖은 물수건이 허벅지 위로 툭 떨어졌다.


“잠깐, 좀 누워 있는 게 좋아. 너 열이 제법 심하다고. 처음에 널 만져봤을 때는 불덩이인 줄 알았어.”


“어떻게 된 거죠? 그 꼬마는요? 어디에 있죠?”


“무슨 꼬마? 거기에 꼬마는 너 밖에 없었어. 너무 급하게 달려가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서 뒤쫓아 봤는데 뒤늦게 시장 골목 귀퉁이에 쓰러져 있는 널 봤어. 거진 20분 동안이나 널 찾아다녔다고. 눈밭에 쓰러져서 고통스러운 듯이 거칠고 빠른 호흡만을 반복하고 있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때 열이 얼마나 심하던지 네 주위에 있는 눈들을 전부 다 녹여버릴 정도였다니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어서 그 꼬마를 찾아야 해요.”


봄이가 급히 일어서려 하자 남자가 양초가 든 접시를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고 일어서려는 봄이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말했다.


“진정해. 지금은 예전과 다르게 약도 없어서 여기서 더 악화되기라도 하면 생명이 위태로울 지도 몰라. 일단은 몸을 좀 사리라고. 무슨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봄이는 자신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차가운 물수건 덕분인지 땀에 젖은 미지근한 이마가 만져졌다. 봄이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이 남자의 말을 듣기로 했다.


“...알겠어요.”


“참, 그리고... 너무 열이 나는 것 같아서 네 외투는 좀 벗겨뒀어. 그 외투도 얼마나 땀이 범벅이던지. 추우면 입어도 상관없어. 다만 이상한 생각으로 그런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줘.”


봄이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저기 까맣게 때가 끼긴 했지만 하얀 빛을 잃지 않은 와이셔츠가 보였다. 그 셔츠도 땀에 젖은 채로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인지 등이 축축했지만 등뿐만은 아니었다.


봄이는 상의를 확인하고 나서 치마도 확인했다. 치맛폭에 있던 권총이 사라져 있었다. 봄이가 남자에게 권총의 행방을 물어보려고 하는데 남자가 그 말을 하길 예상하기라도 한 듯 먼저 말을 꺼냈다.


“아, 그건 잠깐 저기에다 뒀어. 꽤 흥미로운 걸 가지고 있던데. 실린더랑 총열을 확인해보니까 가짜는 아니더군. 그렇다면 예전에는 정말 저세상 갔을 수도 있었겠네.”

봄이는 남자가 한쪽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보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나 한 쪽 탁자에 놓인 권총을 왼손으로 집어 들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고는 비웃듯이 말했다.


“걱정 마. 가져갈 생각이 있었다면 벌써 가져갔겠지. 사람을 잘 신뢰하지 못한다는 건 아는데 여기는 너랑 나밖에 없어. 그러니까 안심해도 돼.”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는 양초 접시와 봄이의 이마에 올려놓았던 손수건을 들고 방을 나가려고 하는데 방 밖에서부터 풍성하게 난 털 뭉치처럼 생긴 물체가 방안으로 어슬렁거리며 들어왔다. 그리고는 남자의 무릎 앞에 서서 낑낑거리며 남자의 종아리를 핥았다.


“참, 너도 있었지.”


남자는 무릎 앞에 서서 두 발을 내미는 털뭉치를 들어올려 안아 주었다. 남자의 품에 안긴 덥수룩한 털 사이에서 어떤 생물의 이목구비가 어렴풋이 드러나 있었다.


봄이는 그 생물과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남자의 뒤통수로 옮기고 말했다.


“그럼 여기는... 아저씨 집인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엄밀히 따진다면 내 집은 아니긴 하지만.”


봄이가 대답하지 않자 남자가 방문을 나서려다가 잊은 게 있다는 듯이 다시 뒤를 돌았다. 남자가 뒤를 돌자 남자의 어깨를 짚고 뒤로 안겨있던 개의 하얀 등이 보였다.


“그리고... 아저씨 아니야. 요즘 통 수염을 못 깎아서 그런 진 모르겠지만 이래봬도 대학교 졸업한 지 얼마 안 됐다고.”


“아저씨 맞네요, 뭐.”


봄이가 무표정으로 덧붙이자 남자는 한숨을 쉬더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아까 전에 일어났을 때보다는 두통이 심하지 않았지만 아직 미미한 통증이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봄이는 최근 며칠간 제대로 된 곳에서 쉬지 못해서인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폐해져 있었다. 봄이는 까칠까칠한 침대에 다시 누워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우선 남자의 말을 들어보니 꿈을 꿨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꿈이라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봄이는 분명 시장 골목 끝자락으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정신을 잃었다. 여기까지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 소년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그 소년이 말했던 ‘검은 새’는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봄이는 소년이 알 수 없는 소리로 중얼거렸던 말들을 애써 기억해내려 노력했다. 소년의 말들을 곰곰이 곱씹어보며 무엇인가 숨은 의미를 찾아내려 노력해보았지만 기억에 남아있는 말들은 거의 없었다.


봄이는 눈이 녹아서 젖어 반들거리는 M60 리볼버를 들어올려 살폈다. 봄이가 정신을 잃기 직전 소년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던 걸까. 봄이는 쓰러지기 직전 총소리를 들었다.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쾌쾌한 화약 냄새도 느꼈다. 봄이가 그것을 생각해낸 순간 머릿속이 찌릿하고 울리는 통증을 받았다. 총 소리, 화약 냄새, 그리고 총구에서 일렁이는 한 줄기의 화약 연기, 그리고 쓰러지는 자신.


봄이가 지금까지 저지른 일들이 필름 영사기처럼 재빠르게 지나갔다. 그 일순간의 타이밍에 봄이의 머릿속에서는 소년이 만들어낸 환각 속에서 쓰러지는 자신이 그녀가 쏴서 쓰러뜨린 그 사냥꾼 남자에게 투영되고 있었다.


봄이는 난데없이 찾아온 메스꺼움을 최대한 참으려 하고 있었다. 가슴 끝이 날카로운 무엇인가에 찔린 듯이 찌릿거리고 아팠다. 뱃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올라오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은 봄이가 처음 방아쇠를 당긴 후에 찾아왔던 느낌과 똑같은 느낌이었다. 봄이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있었다. 잠시 동안 식었던 열과 두통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호흡이 빨라졌다. 봄이는 가죽 이불을 움켜쥐었다. 이를 악물고 고통스러움을 버티던 봄이의 입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더 이상 봄이의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남자와 개가 봄이가 있던 침대로 돌아왔다. 남자는 개를 바닥에 내려놓고 차가운 물로 식혀 온 손수건을 다시 봄이의 이마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거 상황이 안 좋네. 아무리 봐도 감기 같지는 않은데. 어서 열이 내려야 할 텐데.”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글 설정에 의해 댓글을 쓸 수 없습니다.

  • 작성자
    Lv.89 티말
    작성일
    17.09.12 07:22
    No. 1

    세상을 이동하는건가 보군요. 아마..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9 티말
    작성일
    17.09.12 07:23
    No. 2

    ...아니군. 그런데 무슨일이 있었으려나?
    어찌 살아남긴 했나본데..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마지막 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16 113화 21.02.13 31 0 9쪽
115 112화 21.02.05 30 0 15쪽
114 111화 21.01.25 33 0 12쪽
113 110화 21.01.20 53 0 12쪽
112 109화 21.01.15 29 0 11쪽
111 11. 끝나지 않는 밤 21.01.11 48 0 13쪽
110 107화 21.01.08 34 0 12쪽
109 106화 21.01.06 124 1 11쪽
108 105화 21.01.05 32 1 12쪽
107 104화 21.01.03 65 1 13쪽
106 103화 20.12.21 46 0 9쪽
105 102화 20.12.20 27 0 16쪽
104 101화 20.12.16 63 1 12쪽
103 100화 20.12.11 29 0 13쪽
102 99화 20.12.08 38 0 12쪽
101 10. 종착점 20.12.07 37 0 11쪽
100 97화 20.12.02 58 0 13쪽
99 96화 20.11.29 67 0 11쪽
98 95화 20.11.28 30 0 14쪽
97 95화 20.11.23 41 0 13쪽
96 94화 20.11.20 40 1 9쪽
95 94화 20.11.19 62 1 9쪽
94 93화 20.11.17 70 0 13쪽
93 92화 19.11.27 57 0 9쪽
92 91화 19.11.24 57 0 17쪽
91 90화 19.11.23 50 0 26쪽
90 89화 19.11.19 55 0 18쪽
89 88화 19.11.17 52 0 17쪽
88 87화 19.11.16 87 0 19쪽
87 86화 19.11.15 57 0 1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