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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조회수 :
14,523
추천수 :
182
글자수 :
530,484

작성
17.09.08 01:01
조회
189
추천
2
글자
7쪽

14화

DUMMY

“기껏 구해줬는데 시시하다니 섭섭하네.”


“구해달라고 한 적 없거든요.”


봄이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는 고개를 홱 돌리고 멀찍이 떨어져서 남자와 거리를 두고 걷기 시작했다. 남자는 봄이의 행동에 딱히 아랑곳하지 않고 앞을 보고 계속 걸어갔다.


봄이는 그녀의 오른쪽에 수북이 쌓인 눈더미들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들이 걷고 있는 곧게 뻗은 길은 누군가가 크레인으로 밀어버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눈들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몇몇 시장 천막들은 꼬마들이 먹고 눈밭에다 버린 초콜릿 포장지처럼 천막 지름의 1/3 가량이 파묻혀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의외의 곳이었다. 봄이는 최대한 빨리 이 남자와의 어색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신경질을 냈다.


“자꾸 따라오지 마시고 이제 서로 갈 길 가는 게 어때요?”


“그 쪽이 따라오는 거겠지. 내 집은 이쪽이라고?”


“흥, 그러시겠죠.”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빈정거리자 봄이는 질려버려 아까보다 더 빨리 걷기 시작했다. 봄이는 작은 다리로 성큼성큼 걷던 도중에 무언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잊혀져버린 존재가 떠올랐다. 그제서야 뒤늦게 알게 된 봄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참, 그 녀석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남자가 멀찍이 떨어져서 걷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자신의 뒤로 뛰어가는 봄이를 보고 의아하다는 듯 소리쳤다.


“갑자기 어디로 가니?”


“아저씨는 신경 끄시죠!”


봄이는 아까 지나쳐 온 천막들 사이를 뛰어가며 키 작은 소년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날 오후는 어제보다 햇살이 더욱 강했기 때문에 조금만 뛰어도 발바닥에 땀이 나고 숨이 금방 차올랐다. 몇 백 미터에 달하는 광활한 눈덮힌 벌판을 가로지르고 나서야 무언가에 깊게 빠져든 것처럼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소년을 찾을 수가 있었다.


소년은 동공조차 움직이지 않는 채로 하늘을 가로질러 길게 뻗은 전깃줄에 앉아 있는 검은 새 한 무리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봄이가 소년 뒤에서 멈춰 숨을 고르고 있을 때에도 소년은 뒤돌아보지 않고 새들만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뭐 해. 한참 찾았잖아. 집으로 돌아가자.”


“봄이 누나.”


전깃줄에 나란히 앉아 있던 검은 새들 중 한 마리가 크게 날갯짓을 하며 푸드덕거렸다. 보기에는 까마귀처럼 보였는데 까마귀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지 않아서 이 새들의 종을 확실히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봄이는 소년의 팔을 잡아끌려다가 순간적으로 검은 새들이 모두 봄이를 초점 없는 눈으로 일제히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침 주변에는 인적이 없었다. 치명적인 정적만이 봄이와 소년과 검은 새들을 한 장의 그림처럼 이어주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이 세상에 그들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소년은 봄이를 부르면서도 여전히 뒤통수를 쳐들고 허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봄이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얼른 이 소년을 데리고 어디론가 안전한 곳으로 벗어나고 싶었다.


“저 검은 새들은... 자유로운 걸까? 우리랑은 다르게 편안하게 하늘을 날아서, 저 검붉은 하늘을 가로질러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저 새들은 무엇을 위해서 나는 걸까?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아니면 그저 살기 위해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 말 안 들려? 어서 돌아가자니까.”


봄이가 다그치자 소년이 딱딱하게 굳은 목을 돌려 봄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봄이는 순간적으로 그 소년의 엄청난 위압감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 버렸다.


“돌아가자고? 어디로?”


“바보야, 어디긴 어디야? 너희 집이잖아.”


소년은 눈동자를 크게 뜨고 봄이를 똑바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봄이는 소년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니, 이제 늦었어.”


“아까부터 도대체 무슨 소리야?”


“더 이상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그들이 오고 있어. 아니, 어쩌면 이미 도착해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도. 이제 더 이상 기회는 없어. 이젠 돌이킬 수도 없어.”


“너... 아까부터 뜬금없이 재수 없는 소리나 하고...”


봄이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목젖이 떨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봄이는 소년의 등 뒤에서부터 커다란 운명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보았다. 소년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소년의 동공은 점점 커지고, 초점은 점차 사라졌다. 소년의 입이 마치 웃는 것처럼 귀 밑까지 찢어졌다. 봄이는 소년의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머릿속에서부터 벽이 무너져 내리듯 눈앞을 짓누르는 공포감에 봄이의 다리가 후들거리며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조차 흘러내렸다. 봄이의 오른손이 반사적으로 오른쪽 치맛폭으로 향했다.


하지만 봄이의 오른쪽 치맛폭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봄이는 그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들어 소년을 쳐다보자 소년의 오른손에 무엇인가 반짝거리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검은 새들은 죽으면 어디로 갈까? 살려고 발버둥쳐 봐야 전부 부질없는 짓이야. 검은 새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더 높이 날 거야. 태양을 향해서 더 높이, 점점 더 높이 오르다가, 결국에는 질식할 거야. 그리고 떨어져 죽을 거야. 땅바닥으로, 끝없이.”


“그만해!”


봄이의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초점 없는 소년의 얼굴이 봄이를 향해 웃는 것 같았다. 소년이 손에 들고 있던 반짝거리는 물체가 봄이를 겨눴다. 봄이는 마지막 남아 있는 온 힘을 다해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봄이의 간절한 외침보다 더욱 큰 소리에 묻혀버렸다. 그 소리는 봄이도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였다. 이윽고 어떤 향기가 밀려왔다. 그 향기 역시 봄이도 맡아본 적이 있었다. 눈부신 섬광이 봄이의 눈앞을 가렸다. 쾌쾌한 화약 냄새가 봄이의 코를 찔렀다. 그렇게 느낀 직후, 봄이는 심장에 엄청난 통증이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봄이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봄이는 그대로 눈밭 위에 쓰러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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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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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9 티말
    작성일
    17.09.08 02:37
    No. 1

    자, 다음 편에서 계속.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0 파란1
    작성일
    17.12.21 23:01
    No. 2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상상인지 모호하네요.
    정신병 걸린 여자의 상상속 세상 같기도 하구요. 잘 읽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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