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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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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글자수 :
530,484

작성
17.09.0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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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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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13화

DUMMY

그들은 하얀 모자라도 쓴 듯이 눈이 가득 쌓여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가로수들과 함께 쭉 뻗은 도로를 따라 30분쯤 걸어갔다. 걸어가는 사이에 소수의 다른 사람들을 마주치기는 했지만 봄이는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찬바람이 불어 벽에 붙어있던 전단으로 추정되는 흰 종이 몇 장이 펄럭거리며 바람에 날려 요란한 소리를 내는 빈 깡통과 함께 굴러다녔다. 어느 주택가 근처에 기대어 선 가로등에서는 몸이 비쩍 마른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있었다. 높게 솟은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 빨랫줄처럼 늘어뜨려져 있는 전선들을 보고 봄이는 이제 필요도 없어진 전선들을 왜 철거하지 않는지 의문을 가졌다. 대공황 이후로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전선들은 가끔씩 쉴 곳을 찾아 날아오는 검은 새들의 휴식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 같다고 봄이는 생각하고 있었다. 인적이 없는 뻗은 도로를 말없이 걷다 보니 이윽고 낯이 익은 형형색색의 천막들이 눈에 들어왔다.


도로에 인적이 없던 탓인지 어림잡아 오후 12시 30분은 되었는데도 천막들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인파를 좋아하지 않는 봄이에게는 상당한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곧 열린 천막이 별로 많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저번에 왔었던 때와 다르게 대다수의 천막들이 접혀 있거나 굳게 닫혀 있었다. 닫혀 있는 천막들 중에서는 봄이에게 인심을 베풀었던 떡집 천막도 포함되어 있었다. 봄이는 언젠가 다시 찾아와서 떡집 주인에게 감사를 표하리라고 마음먹고는 얼마 안 되는 인파들 사이에서 그때보다는 한결 더 여유로워진 발걸음으로 천막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조그만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는 했지만 사실 이 시장이라는 곳은 꼼꼼히 따져 생각해보면 생각보다 별 것 없는 곳이었다. 어떻게 보면 길거리 전단지보다 동급이거나 그보다 더 질 낮은 곳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이 시장의 구조는 값싸고 구멍이 숭숭 뚫린 천쪼가리 천막을 쳐 놓고 그 아래서 대충 각자의 집에서 남는 물건들을 늘어놓은 일종의 벼룩시장에 불과했다. 얼마 남지 않는 천막 가게들도 생긴 지 꽤 오래된 동네 빵집이나 소매점 같은 곳이었다. 이런 가게들은 원래부터 자본이 충분했을 뿐더러 비록 손님이 많이 줄었다고는 했으나 오히려 그 덕분에 고정 손님이 꾸준히 생기게 된 것이 가게 유지의 원동력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봄이는 가방을 뒤져 뚜껑의 라벨만 보아도 물려버릴 것 같은 통조림을 몇 개 꺼내들고서 ‘물물교환 환영’ 이라고 써 붙여진 익숙한 빵집 앞으로 걸어갔다.


봄이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음식과 교환할 물건이 있었다. 더 이상 저번처럼 사냥꾼이나 노숙자들에게 쫓겨 가며 눈치를 보며 빵을 훔쳐 먹지 않아도 되었다. 주인이 마침 보이지 않아서 그냥 또 몇 개 가지고 나를까 생각도 했었지만 그만두었다. 봄이는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진열대로 가서 주인을 불렀다.


잠시 후 주인이 봄이의 목소리를 듣고 천막 밖으로 어슬렁어슬렁 기어나왔다. 봄이의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주인이 봄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으로 쓱 훑었다.


“물물교환을 하고 싶은데요.”


주인은 그렇게 말하는 봄이의 얼굴과 인상착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분홍 꼬마, 너 왠지 낯이 익다?”


“그럴 리가요. 교환이 안 된다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당황해서 얼버무리는 봄이가 그렇게 말하고는 재빨리 뒤를 돌아 뛰려고 하는 순간 목구멍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분홍색 후드가 억센 주인의 손아귀에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봄이는 자신과 눈조차 마주친 적 없는 빵집 주인이 자신을 알아볼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못했다. 봄이는 숨이 막힌 채로 자신이 왜 꼬리를 잡혔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과는 체형과 옷차림이 너무 튀어서였을까?


“너 잘 걸렸다. 범인은 범행 장소에 돌아온다는 말이 사실이었어. 네 부모는 어딨냐? 네 부모를 불러오지 않으면 경찰에 인계할 테니 그리 알아라.”


“저기... 일단 이것 좀 놓고 말씀하시죠.”


발뺌한다고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봄이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경찰이 이런 하찮은 절도죄 따위에 신경이나 쓸 지 생각해보았다. 순간적으로 빵집 주인과 저번의 그 떡집 주인의 인간성을 비교해 실감할 수 있었다. 자신의 잘못인 건 맞지만 봄이 자신조차 자신이 너무 어처구니없이 잡혔다고 생각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경찰에 인계된다고 생각해보면 그것은 여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일단 봄이는 형법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살인이라는 중죄를 지은 죄인이었다. 비록 목격자는 없었다 치더라도 봄이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그 트라우마란 엄청난 것이었다. 감옥에 갇혀 편하게 사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렇게 생각하니 다리오금이 저려왔다. 주인에게 잡힌 그 상태에서 반사적으로 권총의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오른쪽 치맛폭을 꼭 움켜잡았다. 입술을 비롯한 잇몸이 떨리는 것도 느꼈다. 마치 온 몸이 신고만은 안 된다고 부르짖는 것 같았다.


“저번에는 그랬지만 이번에는 정당하게 물건을 교환하려고 왔단 말이에요.”


“시끄러워, 꼬맹아. 네 부모를 데려오기 전까지는 못 벗어날 줄 알아라.”


봄이의 머릿속에서 극심한 후회감이 몰려왔다. 그냥 맛없고 질리더라도 집에 숨어서 안전하게 캔이나 뜯어 먹는 거였는데. 괜히 맛있는 걸 찾다가 이런 시련이 닥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봄이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면 주차장에서 털보 노숙자를 떨쳐냈던 것처럼 무력을 행사하고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봄이와 주인이 계속해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천막 바깥에서 나지막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빵 하나 주십시오.”


주인이 봄이와 얼굴을 맞대고 으르렁대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홱 돌리고는 봄이의 후드를 끝까지 놓지 않은 채 밖으로 끌고 나갔다. 봄이는 원치 않게 주인의 팔을 붙잡은 채로 천막 밖으로 질질 끌려 나왔다.


“뭘 찾으십니까?”


그 순간 빵을 사러 온 남자와 봄이의 눈이 마주쳤다. 어딘가 소름끼치도록 낯익은 얼굴이었다. 회색 비니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두꺼운 빨간색 오리털 재킷, 장신의 마른 남성이었다.


“응? 너는...”


“이 아이 보호자 되십니까?”


가게 주인이 의문에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억센 손바닥에 후드를 붙들린 채로 끌려나온 봄이는 자신을 보고 굉장히 신기하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을 급히 옆으로 피했다.


“네, 맞습니다. 그 녀석이 어디로 사라졌나 했는데 마침 여기 있었네요.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뭔가 상당히 문제가 있으신 모양이시군요.”


봄이는 저 재수 없는 남자가 하는 말을 듣고 입이 벌어지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머릿속이 재빨리 회전하기 시작했다.


“보시다시피 그렇습니다. 글쎄 이 녀석이 제 빵을 훔쳐갔지 뭡니까.”


“이거면 되겠죠?”


장신의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는 오백 원짜리 두 개를 올려놓았다. 가게 주인은 그걸 보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기왕이면 돈 말고 물건으로 주셨으면 합니다만.”


“아, 잠깐만요.”


남자가 가방을 뒤적이더니 회중전등 한 개와 배터리를 꺼내 주인에게 보여주었다. 주인은 짧게 기른 턱수염을 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봄이의 후드자락을 놔주었다. 하지만 봄이는 자신이 왜 풀려났는지도 모르는 채로 얼떨떨하게 비니모자 남자와 주인을 번갈아서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는 딸내미 간수 좀 잘 하시오. 자꾸 그렇게 내버려뒀다간 몹쓸 버릇 들어요.”


“네, 주의하지요. 그리고 빵을 좀 가져가도 되겠죠? 얘야, 가자꾸나.”


어안이 벙벙해진 채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멍하니 서 있던 봄이는 예전에 보았던 낯익은 남자의 팔에 이끌려 천막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봄이는 이 남자에게 뭐라고 꺼낼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애써 봄이가 남자의 시선을 피하려는데 남자가 먼저 약간의 비웃음이 섞인 듯한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을 꺼냈다.


“오랜만이다? 꼬마 아가씨. 이것도 인연이라는 건가?”


“...그런 호칭으로 부르지 마세요.”


봄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남자가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에는 날 금방이라도 쏴버릴 듯한 눈으로 내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고 별 짓을 다 하더니, 지금은 전과 다르게 많이 기가 죽은 것 같네. 존댓말도 꼬박꼬박 쓰고 말이야.”


“...왜 절 도와주신 거죠?”


“왜 도와줬느냐고?”


남자가 웃음을 그쳤다. 잠시 동안 둘 사이에 자그마한 침묵이 감돌았다.


“가엾은 소녀가 곤경에 처해 있는데, 어른이 되어서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안 그래?”


“고작 그 이유뿐인가요?”


봄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인간의 정이란 것은 완전히 식어버린 것이 아니었나?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냥꾼들과, 자꾸만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이 서로 얽혀 지나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아직 세상은 이 얼어붙은 겉모습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것인가?


봄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가 아무 말도 없이 봄이와 걷는 동안 봄이는 인간의 따뜻한 감정을 처음으로 느껴본 것 같았다. 지금 이 남자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오직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이 되는 인간성에서부터 순수하게 우러나온 선의만을 베풀고 있는 것 같았다. 예전의 떡집 주인도 그랬지만 봄이는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무언가 필히 대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봄이는 절대로 경계를 늦추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시시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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