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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캐가 본캐 되는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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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뽀이뽀로밀
작품등록일 :
2013.02.16 11:46
최근연재일 :
2013.04.09 01:15
연재수 :
43 회
조회수 :
71,145
추천수 :
727
글자수 :
296,364

작성
13.03.19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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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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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글자
20쪽

크리스야드[Chrisyard](5)

포르투나 연대기 1부




DUMMY

결국, 성 내부로 들어가는 소대는 크리스야드 후작을 포함한 그 자리에 있는 4명으로 편성이 되었다.

프랙탈을 세기는 데 필요한 도료를 뒤에 달려온 바이스 슈트름의 마법사에게 건네받은 우리는 북문을 통해 진입하기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결국, 그때까지도 페로 녀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랩터에게 잡아먹히기라도 한 것인가? 그새 미운 정이 들었는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찾을 시간은 없었다. 어디, 토끼나 너구리 굴에라도 들어가 안전하게 숨어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멀찌감치 그륜벨트의 북문이 보였다. 하지만 그 앞은 수많은 랩터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는 곳이 되어 있었다.


“저길 어떻게 활보하겠다는 겁니까?”


저런 걸 보고 있자니 생리적인 거부감이 먼저 올라온다. 기습의 용의함과 행동제약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유스타치아 경이 전원에게 무취 마법을 한 번 더 사용해 주었다. 그 때문인지 다행히도 아직 녀석들은 우리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비록 냄새는 안 나더라도, 빤히 눈앞에 있는 먹이를 눈치 못 챌 만큼 랩터들이 호구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정면 돌파. 저 정도 군집의 마물 사이를 눈에 띄지 않게 활보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어차피 들킬 거라면, 화려하게 가는 게 좋아요.”


참으로 간단명료하게 대답한 후작은 마치 산책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뒷짐을 지고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기분이라도 대변하듯 포니테일로 올려 묶은 머리가 경쾌하게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움직이기 편하도록 유스타치아 경이 묶어준 것이다.-정확히는 시켰다.-


“진짜 괜찮을까?”

“후작을 믿어 봐야지.”


내 옆에선 롤랑에게 물었으나 대담이 영 시원치 않았다. 그런 불만스러운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내 표정을 본 롤랑은 한숨을 쉬며 내 등을 툭 하고 두드렸다.


“벌써 정오야. 이런저런 복잡한 책략보다는 정면 돌파 쪽이 시간을 절약하고 두 가지 임무를 모두 수행하는 대는 적합해.”

“일인 군단이나 다름없는 세븐 마스터스가 있기에 가능한 작전이란 말이지? 후우, 난 이 임무의 핵심요소인 저 사람이 제일 불안해…….”


은근히 얼빵한 구석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제발 한눈팔다 우리에게 달려드는 랩터들을 놓치는 일이 없길 간절하게 빌어본다.

그렇게 깜짝할 사이에 뼈까지 잡아먹힐 것 같은 두려움에 미칠 것 같지만, 용기를 내서 살짝 떨어진 후작을 빠른 걸음으로 쫓아가 그 뒤에 바짝 붙었다.


쉬잇!


거의 코앞까지 가서야 우리의 존재를 눈치 챈 랩터들이 다급하게 신호를 내뱉었지만 이미 후작은 움직이고 있었다.


“비키세요.”


슈아앙!

키에에엑!


눈 깜짝할 사이에 랩터들 사이로 길이 만들어졌다. 너무나 손 쉽게 길을 개척하는 그 광경에 어쩐지 화가 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놈들을 뚫고 나오려고 머리 위로 대포를 쏘게 하였는데, 이 사람은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그냥 보이는 족족 날려버리며 길을 만드는군.


“하다못해, 칼이라도 뽑아서 휘두르는 시늉이라도 했으면 이렇게 억울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죠.”

“진정한 전사는 난적을 만나지 않으면 무기를 뽑지 않는 법이죠. 세븐 마스터스의 손에 무기를 쥐게 할 존재가 있다면, 같은 세븐 마스터스뿐일 겁니다.”


내 작은 푸념을 유스타치아 경이 웃으면서 받아주었다. 그 말을 들으니 또 하나 궁금한 게 생기는군.


“후작 각하에겐 진짜 대포도 총알도 안 통합니까?”


그 질문에 대답한 것은 후작이었다.


“그야, 아무리 저라도 무방비로 맞으면 무사하진 못하겠죠. 하지만 톨케인 같은 사람은 워낙 튼튼한 것이 장점이니, 간혹 맨몸으로 집중포화를 향해 돌진하곤 해요.”


그는 그렇게 다시 한 쪽에서 우르르 달려드는 놈들 향해 염동파를 쏘아 주었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공중에서 흩어지는 랩터들을 잠시 감상했다. 자주 보니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군. 궁금한 거나 마저 물어보자.


“톨케인?”

“톨케인 마드밀러스 후작. 질주하는 산악[山岳], 혹은 폭주하는 화산이라는 이명을 지닌 세븐 마스터스지.”


이번에 답해준 것은 롤랑이었다. 그런데 하필 폭주하는 화신이라니… 성격이 급하다 못해 화산처럼 폭발하기도 하나? 이번에야말로 집채만 한 거인을 연상시키는 이명이군.


“후훗, 혹시라도 그분 앞에서 폭주하는 화산 얘기는 꺼내지 마세요. 청운해까지 날아가는 수가 있답니다.”


쿡쿡 웃으며 얘기해 주는 유스타치아 경이었다. 하지만 이 일이 끝나면 그런 사람과 엮길일 없는 삶으로 돌아갈 테니 모처럼의 충고도 의미 없는 일이다.


“어쨌든 진짜 대포도 총알도 안 먹히는 건 맞네요?”

“뭐, 그런 셈이죠.”


한쪽에선 랩터가 육편이 되어 흩날리고 있는데, 그 장본인은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하고 있다.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힘을 지녔음에도, 자세히 보면 행동과 표정 하나하나에 무척이나 인간적인 모습이 보인다. 나 같은 일반 백성이 가지고 있는 그들의 대한 상식은 어쩌면 많이 빗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나 손쉽게 외성 북문에 도착했다. 반 이상 파괴된 북문 앞에서니 갑자기 숙연한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처음 랩터들이 습격했을 당시, 이곳에서 불시의 죽음을 당한 경비대원도 적지 않으리라. 그 증거로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뜯어 먹힌 뼈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시작하겠습니다.”


북문을 지나치자마자 롤랑이 입을 열었고, 나는 미리 받은 도료를 꺼내 준비를 시작했다.


쉬~ 쉬~


크리스야드 후작의 무시무시한 염동파를 체험한 성 밖에 놈들하고는 달리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랩터들은 불쑥 나타난 먹이를 보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거리를 빼곡하게 채운 놈들뿐만 아니라 지붕 위에 있던 녀석들까지 머리를 내밀며 이쪽을 내려다본다.


“이래서야 사람 사는 곳인지 마물이 사는 곳인지 모르겠군요. 아, 로랜드 특사. 말하는 걸 깜박했는데 집이나 건물 몇십 채 정돈 성하지 못할 거예요.”

“…할 수 없군요. 각하의 뜻대로 하시길.”

“밀리아나는 여기서 두 사람을 지키도록 하세요. 일단 반경 200m 정도까진 적을 일소하고 오겠어요.”

“알겠습니다.”


후작의 명령과 동시에 칼을 뽑은 유스타치아 경이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방금 지나온 북문 입구에도 랩터들이 막아서기 시작한다. 덤벼들지는 못하더라도 퇴로는 차단하겠다는 건가? 영악한 놈들.


“그럼 갑니다.”


염동으로만 적을 상대하던 후작이 드디어 칼을 빼들었다. 심지어는 자세까지 잡았다.


“우선 머리 위에 있는 녀석들부터 정리하도록 하죠.”


가벼운 호흡소리와 함께 또다시 퍼지는 맑은 검명이 들려왔다. 또다시 염동검인가? 처음 봤을 때는 예비 동작도 없었고, 워낙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것이라 무언가 기술을 사용했다는 실감이 나지 않지만. 이번엔 달랐다.

겉보기엔 그저 약간 수평에 가까운 비스듬한 참격, 그러나 그 평범한 참격이 일으킨 결과는 이해를 초월했다.


핑.

우지끈!

쿠구구궁!


건물이… 잘렸다.

그것도 한두 채가 아니라 정면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이 비스듬한 단면으로 잘려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키에에엑!


자연히 건물 위에 있던 랩터들이 떨어져 무너진 건물 잔해에 깔려 압사당했다. 무슨 치즈조각 자르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후작은 건물에서 최소 50m는 떨어져 있었다. 염동이란 건 이런 일도 가능케 하는 힘인가? 어쩌면 마법보다 대단한 능력이 아닐까 싶다.

후작의 일격으로 랩터들 사이에서 혼선이 일기 시작했다. 아마 우두머리가 무너진 건물 근처에 있었던 건 아닐까? 눈에 띄게 우왕좌왕하는 것이, 일전에 슬링으로 우두머리 한 마리를 쓰러뜨렸던 때와 비슷하다.

그렇게 상식을 벗어난 일격을 날린 후작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자리에 있던 상당수의 랩터를 몰고 영지 내부를 향해 달려나갔다.


“저긴 신경 쓰지 말고 여기에 집중해.”

“에…? 아, 응!”


너무나 엄청난 장면에 멍해 있었다.


“각도나 위치를 점검해서 알려 줄 테니까. 잘 듣고 지시대로 그리기만 하면 돼. 도료가 얼마 없으니까 틀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알았다.”


마법에 사용하는 프랙탈의 도료는 사실 무엇이라도 상관이 없다. 정확하게, 그리고 필요한 정령에 맞는 프랙탈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엔 마력을 띈 촉매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마법사들이 쏟아 붙는 마력에 의존해야 하는 터라, 하다못해 효율을 높일 수 있는 특수한 도료를 사용하는 것이다…라고 사전에 롤랑이 설명해 주었다.


“왼쪽으로 35도… 그래, 각도기의 눈금을 잘 살펴서 그리는 거야. 거기서 잠깐! 반전한 다음 일직선으로…….”


계측기와 망원경으로 주변의 지세를 살피면서 롤랑은 작업을 꼽꼽하게 지시했다. 그에 따라 자세를 낮추고, 바닥을 이리저리 오가며 열심히 선을 그리는 나… 그런데 어쩐지 기분이 묘하다?


“조심!”


그렇게 허리도 펴지 못하고 선과 도형에만 집중하던 내 귀에, 유스타치아 경의 날카로운 경고가 파고들었다.


“……!”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코앞에서 데이노니쿠스가 아가리를 쩍하고 벌리며 나를 머리부터 삼키려 하고 있었다. 칙칙한 검은 피부와 대조되는 새빨간 입안이 눈에 들어왔다.


“목표*사지[limbs]*뒤틀림!”


빠른 영창과 함께, 데이노니쿠스의 머리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정반대로 돌아갔다. 이젠 아가리가 아니라 뒤통수가 보이는군. 그뿐만 아니라, 팔다리도 갈대 꺾이듯 반대로 돌아간 채로 그 자리에 쓰러져 미세하게 꿈틀거리기까지 한다.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에 놀라, 눈조차 감지 못한 덕분에 진귀한 광경을 보게 되었지만. 랩터의 질긴 생명력에서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느긋하게 감상할 때야?! 빨리 물러나!”


뒤에서 롤랑이 소리친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바로 몸을 일으켜 물러났다.


“바람*날카로움!”


유스타치아 경의 손끝에서 품어져 나온 칼날 같은 바람이 찢어지는 파공음과 함께 나를 스쳐 지나간다.


키에에엑!


“다리*질풍!”


그것도 모자라 단숨에 20보나 떨어진 거리를 좁힌 그녀는 현란하게 칼을 휘두르며 랩터들의 사이를 종횡무진 누볐다. 외모와 평소 보여주는 태도 덕에 잊고 있었지만, 역시 왕국 최강 군대의 사관다운 눈부신 실력이었다.


“하앗!”


마법과 검술을 동시에 사용하는 그녀의 전투 스타일은 내 평생에 두고두고 기억될 만큼 화려했다. 커다란 송곳처럼 보이는 검으로 벨로키랍 4마리를 동시에 파바바밧 꿰뚫고. 때론 마법으로 적의 발을 묶은 뒤, 방금 보여준 칼날 같은 바람을 쏘아 군집한 데이노니쿠스를 통째로 썰어버리기도 했다.


“하핫! 유스타치아 경도 크리스야드 후작 못지않잖아!”

“음, 아무래도 그녀는 무수한 사관 중에서도 빼어난 실력을 지닌 것 같아.”


신이 나서 소리치는 내게 롤랑이 다가와 한마디 거들었다.


“거기, 두 사람! 느긋하게 감상할 때가 아닙니다. 빨리 작업을 마치지 못하겠어요?!”


싸우면서도 이쪽을 보며 뾰족하게 소리치는 유스타치아 경의 말에 움찔한 우리는 속히 작업을 재개했다. 미처 그리지 못한 선을 마저 채워 넣은 우리는 유스타치아 경에게 알렸다.


“끝났습니다. 유스타치아 경!”

“후우, 여기도 얼추 정리되었습니다.”


그 많던 랩터들을 그 짧은 시간동안 수십 마리나 도륙한 그녀는 칼에 묻은 검은 피를 털어내었다.


“듣던 대로 조심성 많은 녀석들이군요. 잠깐은 앞뒤 좌우할 것 없이 파죽지세로 달려들더니,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거리를 벌리며 이쪽에 빈틈을 찾고 있어요.”


그녀의 말대로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랩터들은 멀찌감치 물러나, 특유의 신호음을 내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닐 겁니다. 크리스야드 각하께서 주변에 있던 무리를 대부분 몰고 간 덕분에, 지금 숫자론 경을 당해내기 힘들다고 판단한 거겠죠. 도망가지 않고 그저 거리만 벌린 것도, 머릿수가 좀 더 모이기 전까지 태세를 정비하려는 걸 겁니다.”


랩터들의 움직임을 냉정하게 살핀 롤랑이 추가로 덧붙였다. 그 말을 들은 유스타치아 경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우리끼리 이동을 시작하면 반드시 따라오겠군요. 가능하면 전부 처리해 꼬리를 끊고 싶지만, 마력의 잔량을 생각하면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겠어요. 처음부터 너무 힘을 낭비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뇨, 잘하셨습니다. 경의 활약 덕분에 놈들이 경계하기 시작했으니 쉽사리 접근하진 못할 겁니다. 애초에 그걸 노리고 강력한 마법만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신지? 저희를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죠.”

“어머, 알아챘어요? 분위기 없는 남자로군요. 그럴 때는 슬쩍, 모른 척 넘어가는 것이 매너랍니다.”

“경의 눈부신 활약에 매료되었을 뿐입니다. 이명이 없으시다면 제가 지어드려도 되겠습니까? ‘춤추는 회오리’는 어떠십니까?”


롤랑의 능청스런 대꾸에 유스타치아 경은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저저, 꿀 처바른 입 좀 보소. 저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여기사도 롤랑의 사탕발림에는 어쩔 수 없는 건가? 간혹 쓸데없는 잡지식이나 가르치려 들지 말고 저런 기술이나 전수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명을 달기엔 아직 멀었습니다. 제 위엔 아직도 쟁쟁한 분들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언젠가 그런 시기가 온다면 꼭 그 이름을 쓰도록 할게요. 누가 선점하는 게 아닌지 몰라.”

“영광일 따름입니다.”


아주 그림으로 그린 것만 같은 미소를 날려주는 롤랑이었다. 저걸 따라 하려 했다가 기분 나쁜 놈 취급당한 게 생각이 나는군. 갑자기 가슴이 촉촉해지려 한다.


“뭣하면 내가 부르고 다닐까요? 춤추는 회오리의 밀레이나라고.”


그때, 어디선가 불쑥 하고 튀어나온 크리스야드 후작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이 양반은 언제 돌아온 거야?


“싫습니다. 할아버지가 부르고 다니면 실력 이상으로 과장돼서 퍼질 게 분명하잖아요.”

“휴우, 손녀를 생각해서 말했을 뿐인데 너무 딱 잘라서 거절하는군요. 뭐, 그게 밀레이나 다우니 좋긴 하군요.”


한바탕 휩쓸고 온 사람이라기엔 떠나기 전과 별차이가 없었다. 새하얀 경갑 위로 보이는 작은 먼지 자국이 굳이 흠이라면 흠일까.


“생각보다 빠르셨군요.”

“로랜드 특사가 길을 소상히 알려준 덕분이에요. 자, 다음 장소로 이동할까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한 후작은 멀리 떨어져 있던 랩터들에게 염동파 한 방을 쏴주었다.

바쁜 걸음으로 다음 지역으로 이동하는 동안 여기저기 널려있는 랩터의 시체와 파괴의 흔적을 통해 후작의 활약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몰려든 개미 때를 살충제로 박멸하는 것과 다름없는 학살극이 벌어졌겠지.

그런 식으로 총 스무 군데가 넘는 지역에 프랙탈 도형을 그려 넣었다-도중 마주친 랩터들에 대해선 더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롤랑의 말로는 이 모든 도형이 지맥의 흐름에 따라 마력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프렉탈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당연히 뭔 소린지는 못 알아들었지만, 어찌 되었든 작업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이제 대기한 본대를 진격시킬 차례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크리스야드 후작이 좋은 생각이 있다고 했기에 롤랑은 후작에게 말했다.


“그렇군요. 그럼 함께 남서쪽에 있는 외성 벽까지 가도록 하죠.”


후작은 우리를 이끌고 길을 뚫어가며 외성 남서쪽까지 이동했다. 길게 늘어져 있는 성벽 앞에선 그는 이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서 진격신호를 보내도록 하겠어요.”


입구도 없는 이곳에서 왜 굳이 신호를 보내겠다는 지는 알 수 없지만, 나를 포함한 두 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는 우리를 잡아먹지 못해 약이 바짝 오른 굶주린 랩터들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고, 앞에는 성벽이 가로막고 있는 형국이다. 본래라면 긴장돼 죽을 것 같은 상황인데도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흠… 척 봐도 견고해 보이는 성벽. 아무래도 전력을 다해야 할 듯싶군요.”


이번엔 무엇을 보여줄지 기대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후작의 중얼거림을 들은 유스타치아 경은 오히려 난색을 보이며 우리에게 속삭인다.


“우리, 조금 물러나도록 할까요?”


아니, 물러날 때가 어디 있다고… 당신 눈에는 저 뒤에 랩터들이 안 보여요? 조금만 더 다가갔다간 당장에라도 덤벼들 기색인데.


“할아버지가 세 번째 염동검을 쓸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근처에 있다가 여파에 말려들면 뼈도 못 추릴 수 있어요.”


세 번째 염동검… 호기심이 도는 말이지만 생존본능이 먼저였다. 이미 슬그머니 뒷걸음질치는 내 눈에 미동도 하지 않는 롤랑의 모습이 들어왔다.


“야, 물러나자는데?”

“난 됐으니, 넌 유스타치아 경과 함께 물러나 있어.”

“인마, 나도 궁금하긴 한데 그러다 진짜 죽으면 어쩌려고?”

“세븐 마스터스의 힘을 반드시 이 두 눈으로 확인해 둬야 해. 너무 떨어지면 더욱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져.”


롤랑이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난처한걸, 이러면 아무도 못 말리는데… 할 수 없지.


“그럼 나도 여기 있으련다.”

“…무리할 필요 없어.”

“후작 각하가 따로 물러나라는 말은 안 했잖아. 우리한테 피해 안줄 자신이 있나 보지.”


근거는 없었지만 그렇게 확신했다. 지금까지 지켜본 후작의 능력으로 볼 때, 그리고 사람됨을 생각해 보면 우리의 안전을 생각해서 한마디 했을 법한데도 아무 말이 없었다.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로군요. 두 사람 다. 대체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떻게 기른 건가요?”


허리춤에 양손을 올리며 핀잔을 주는 유스타치아 경은, 그럼에도 우리의 옆에 남아 방어 마법을 시전해 주기로 했다.


“시작한다.”


나직하게 말한 롤랑의 말에 전방에 후작을 주시했다. 지금까지 한 손으로만 칼을 휘두르던 그가 이번엔 양손으로 힐트를 부여잡고 칼끝을 내렸다. 그리고 서서히 등 뒤로 빼는 자세를 취한 뒤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세븐 마스터스의 힘을 확인하고 싶다 하셨죠? 그럼 잘 보도록 하세요. 저것이 염동력의 최대 방출로는 세븐 마스터스 제일이라 평가되는 할아버지의 격멸극참[Ultimate Deadly Strike]이에요.”


후작에게서 뿜어지는 파동에 공기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그것만으로도 뒤에 있던 랩터들이 겁을 집어먹고 더욱 뒤로 물러났다. 말려들면 죽는다. 그런 류에 본능이 가리키는 대로, 지금 후작이 하려는 일의 위험성을 감지한 것이다.

염동력이 극에 오른 후작의 머리카락이 솟아오르며 어지럽게 흔들린다. 그렇게 퍼지고 퍼져 그륜벨트 전체를 뒤덮을 것 같은 기세가 갑자기 쑤욱 빨려 들어가듯 후작의 칼끝으로 모여들었다.


우우우웅.


요동치기 시작하는 검의 울음, 그것으로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한 후작은 있는 힘껏 성벽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후우우웅!


보이지 않은 어떤 거대한 힘은 그렇게 크리스야드 후작의 검에서 해방되었다. 그 흉포하기 짝이 없는 맹진[猛進]이 성벽에 부딪히는 순간.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소리가 나며 눈앞에 성벽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저, 저, 저, 저……!”


그 흔한 돌가루조차 날리지 않았다. 영지민이 아닌 사람이 보면 처음부터 성벽 따위는 없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잔해조차 거의 남아나질 않았다. 건물을 자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터무니없는 그 위력 앞에, 천하의 롤랑도 눈을 부릅뜨며 떨고 있었다.


“빌어먹을…….”


어째선지 욕을 내뱉으며 아랫입술을 깨무는 롤랑. 무엇이 그리 분한지 녀석의 눈은 후작을 쏘아보며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작가의말

계속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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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파견[Dispatch](2) +5 13.03.02 1,490 16 10쪽
21 파견[Dispatch](1) +3 13.02.28 1,392 16 13쪽
20 수정벽[Crystal wall](2)-End- +3 13.02.26 1,412 15 19쪽
19 수정벽[Crystal wall](1) +3 13.02.25 1,441 15 18쪽
18 랩터[Raptor](3)-end +4 13.02.23 1,519 15 18쪽
17 랩터[Raptor](2) +4 13.02.23 1,503 1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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