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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캐가 본캐 되는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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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이뽀로밀
작품등록일 :
2013.02.16 11:46
최근연재일 :
2013.04.09 01:1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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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3.18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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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크리스야드[Chrisyard](4)

포르투나 연대기 1부




DUMMY

“그럼 기왕 산책 나오신 김에, 여기 청소하는 거나 도와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기껏 좋은 풍광이 추악한 마물들로 더럽혀지는 중입니다만.”


롤랑이 크리스야드 후작을 보면서 쏘아붙였고, 그 말은 들은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과연 로랜드 특사가 무슨 대책을 발견했는지 너무 궁금한데, 이래서는 느긋하게 얘기를 듣질 못하겠어요.”


아무래도 진짜로 롤랑의 생각이 궁금해서 따라온 듯하다. 한편,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눈치를 보며 쉬쉬거리던 랩터들은 다시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고, 일부는 크리스야드 후작에게 달려들었다.


“어휴, 가까이서 보니 정말 징그럽군요. 저리 비키세요.”


마치 파리라도 쫓아내듯 가볍게 손을 휘젓자, 다시 일진광풍이 일어나 달려드는 랩터들을 저 멀리 날려 버렸다. 그리곤 바닥에 처박혀 움직이지 않았는데 즉사한 듯했다. 게다가 가장 근접해 있던 벨로키랍 몇 마리는 흔적도 없이 핏물로 변했다. 실로 무시무시한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저 사람, 칼도 안 뽑았잖아!


“좀 전에도 그렇고, 각하가 제대로 염동[Psychoring]을 사용하는 것은 처음 보네요.”


방금전까지 전투태세에 들어가 있던 유스타치아 경은 평소의 선선한 태도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것을 들은 나는 신경 쓰이는 단어를 듣게 되었다.


“염동?”

“무예를 익힌 전사가 극한의 수행을 통해 얻는 특수한 능력쯤 된다고 보면 돼. 물론 터득한 사람은 극소수고 알브 에나릴 마법이나 과학처럼 지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가르쳐 준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랩터들이 우글거리는데도 롤랑을 칼을 꼽고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야, 아직 놈들이……!”

“괜찮아. 너도 이 기회에 똑똑히 봐둬 아로. 평생 그륜벨트에서 머물 생각이라면 다시는 볼 수 없는 광경이 될 거다.”


그렇게 말하는 롤랑의 눈은 그야말로 무거울 정도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후작의 싸움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이 녀석은 설마 저것도 그냥 보고 따라 할 생각인 건 아니겠지?

불안이 가시지 않았지만, 일단은 천천히 물러났다. 그리고 동시에 조금 떨어져 있던 후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가볍게 준비운동을 해보도록 하지요. 오랜만이라 힘 조절이 안 될지도 모르니 부디 감안해 주세요. 마물 여러분.”


한 손을 허리춤에 놓고 있던 후작은 자연스럽게 손을 늘어뜨렸다. 랩터들도 빈번하게 신호를 주고받으며 어지럽게 진형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후작이 심상치 않은 적이라 인식하였는지 거의 무방비나 다름없던 우리 세 사람은 먼저 노리고 달려들었다.


슈앙!


다시 한 번 눈앞에서 터친 강렬한 풍압, 아니 이젠 염동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사방에서 달려들던 랩터들을 단숨에 일소한 그 힘. 우리를 중심으로 퍼지게 한 것도, 어떻게 한 것인지 신기할 따름인데. 위력 또한 전율을 일으킬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이런, 부디 섭섭하게 하지 말아주세요. 여러분이 무시하면 모처럼 10년 만에 제대로 싸우려 하는 제 입장이 뭐가 되나요.”


마물들에게까지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는 크리스야드 후작은 천천히 우리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세 명은 제가 특별히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들이랍니다. 함부로 손을 대려 하다니, 하나같이 엄중한 벌을 주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평소와 다름없이 나긋나긋한 말투였다. 헌데도 묘한 오한이 느껴졌다. 그것이 설령 우리를 향하는 것이 아닐 진대도,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크리스야드 후작이 뿜어대는 극저온의 살기는 지금 이 장소를 분명 얼어붙게 하고 있었다.


키에… 키에엑……!


조금 전 염동에 운 좋게 당하지 않는 놈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굳어간다. 그리고 서서히 그 자리에서 못이라도 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게 되었다. 단체로 유스타치아 경의 마법에라도 걸린 듯한 광경이다. 그의 이명에 얽긴 이야기는 사실이었단 말인가? 수백을 헤아리는 랩터들이 눈보라의 날개에 사로잡혀 사형집행만을 기다리고 있다.


“갑니다, 이 일격으로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아세요.”


스릉.


아무도 칼집에서 칼을 뽑지 않았는데 귓가에 맑은 검명이 울려 퍼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후두두둑.


눈에 보이는 모든 랩터의 목에서 검은 피가 터지고, 그 머리가 가을 낙엽처럼 그 자리에 허무하게 떨어지는 광경은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엄청난 혈투가 벌어진 것도 아니었다. 현란한 무언가나 좀 전에 보여준 염동같이, 불세출의 위력이 보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칼이 뽑히는 맑은소리가 울렸을 뿐인데, 우리를 그토록 떨게 하였던 랩터들이 순식간에 전멸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지 알 수 있을 만한 지혜는 내게 없었다. 하지만 내 절친한 벗만큼은 이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저게 바로 염동검[Psycho-blade]……?”


그 중얼거림을 듣고 유스타치아 경이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어머, 로랜드 특사는 알고 있었나 보군요. 사령관 각하의 염동비기[over the psychoring].”

“…그저 소문으로 들었을 뿐입니다.”


롤랑은 태연하게 얼버무리려 했지만, 유스타치아 경은 썩 그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그녀의 태도로 봐서는 롤랑이 후작의 염동비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휴우, 그런대로 힘 조절엔 성공한 것 같군요. 까딱 잘못했으면 세 사람의 목도 댕겅 할 뻔했어요.”


다시 싱글벙글하는 얼굴로 돌아온 크리스야드 후작은 그런 살 떨리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수고하셨습니다, 각하. 기왕이면 처음부터 나서주셨으면 했어요.”

“밀리아나, 다른 대원들이 없을 때는 할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잖아요.”


방금…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할아버지?”

“아, 그러고 보니 말을 안 해주었군요. 밀리아나는 제 외손녀랍니다.”


외손녀… 외손녀… 외손녀어?!


“유스타치아 경이 후작 각하의 외손녀라구요?!”


진짜냐는 내 눈짓에 유스타치아 경은 난처한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롤랑도 할 말을 잊었는지 묵묵히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아마 지금까지 일들 중 최고로 경악한 사실이 아닐까? 허허, 진짜 이 사람 여든 살 먹은 노인이 맞았어. 이렇게 다 큰 손녀가 있을 정도면 빼도 밖도 못하겠군.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오히려 누나 동생, 나이 차이가 나는… 이성 친구쯤으로 밖에는 안보이네요.”


연인이라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렇게 표현하기엔 내 양심은 아직 건전하기 짝이 없었다.


“글쎄 말이에요. 자기보다 어려 보이는 할아버지라니, 참 짜증 나는 일 아니겠어요?”

“무슨 말을 그리 섭섭하게 하나요? 저처럼 자상한 할아버지가 또 어디에 있다고요.”


유스타치아 경의 푸념에 크리스야드 후작은 울상이 되어 대꾸했다. 그만둬, 그 얼굴과 나긋나긋한 말투로 손녀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는 영감탱이 흉내를 내지 말라고! 아니, 실제로는 노인이지만 하다못해 말투라도 바꾸던가!


“그건 그렇고. 따라오실 거였으면 처음부터 함께 하시던가요. 이런 타이밍에 나타나셔서, 염동비기까지 사용해가며 무게를 잡으시다니… 나잇값도 못하시고 영웅놀이세요?”

“음… 역시 군대에 있다 보니 입이 상당히 험해졌군요. 요즘 2사단 마법연대의 기강이 해이해진 것 같은데, 이 일이 끝나는 대로 전체기합을 줄 필요가 있겠어요.”

“…할아버지~!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어깨라도 주물러 드릴까요? 아니면 다리?”


저 뒤끝 장난 아닌 여기사가 더할 나위 없이 예쁜 미소를 지으며 후작 앞에서 살랑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역시 군대는 계급사회라는 말을 실감한다. 역시, 똑같이 뱃속이 시커메도 할아버지 쪽이 한 수 위에 있군.


“후후, 귀여운 손녀의 재롱은 나중에 받도록 하죠. 그나저나 세 사람 모두, 임무의 성과는 있었나요?”

“네, 유스타치아 경의 도움으로 벨로키랍 한 마리를 생포했습니다. 이 녀석으로 작은 실험을 해볼까 합니다.”


마법으로 딱딱하게 굳어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 벨로키랍을 들어 올린 롤랑은, 우리 임무의 목적을 듣지 못한 후작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랬군요. 그거라면 로랜드 특사가 그 자리에서 말하지 못한 것도 수긍이 갑니다. 그럼 실험은 지금부터?”

“그렇습니다.”


벨로키랍을 바닥에 내려놓은 롤랑은 허리춤에서 수통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나를 모함한 모두의 시선이 수통 입구에 고정된 듯하다. 긴장하는 것은 나뿐인가? 후작은 담담한 기색이었고 유스타치아 경은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전투의 향방이 여기서 결정되는 순간인데 태평한 사람들이다.


“물을 부어 보겠습니다.”


벨로키랍 머리 위에 가져간 롤랑은 천천히 수통을 기울였다. 쪼르르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물줄기가 벨로키랍의 머리에 닿아, 서서히 그 칙칙한 검은 가죽을 적셔갔다. 이윽고 수통의 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뿌린 롤랑은 한발 짝 물러나 수통의 마개를 잠갔었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게 끝이야?”


극적인 뭔가가 일어날 줄 알았던 나는 실망감에 그렇게 물었다. 유스타치아 경에 입에서도 한숨이 나왔고, 크리스야드 경은 어깨를 으쓱했다. 오로지 롤랑만이 벨로키랍에게 눈을 떼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고생들 했어요. 결과는 실망스러울진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았어요. 안 그런가요 로랜드 특사?”


위로의 말을 하는 크리스야드 후작은 다시 롤랑을 향해 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롤랑은 벨로키랍을 주시할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래, 이런 식으로 아무 일도 안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냐?


“야, 롤랑…….”

“유스타치아 경. 이 녀석에게 걸린 마법을 풀어 주시겠습니까?”


위로한 생각으로 롤랑을 불렀는데 갑자기 녀석이 그런 말을 꺼냈다. 그리고 어색해진 나는 슬쩍 뒤로 물러나며 속으로 녀석을 욕했다. 망할 자식!


“각하… 아니, 할아버지가 계시니 별일이야 없겠죠.”


롤랑의 부탁에 그녀는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마법을 풀어 주었다.


“어?”


그럼에도 벨로키랍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법 안 풀린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다시 한번 해보죠.”


다시 시도하는 유스타치아 경. 그러나 벨로키랍은 죽은 듯이 멈춰있었다. 그 사실에 실로 기묘한 위화감을 느낀 나는 조심스럽게 벨로키랍에게 손을 갖다 대었다.


퍼석!


“우왁!”


손끝을 갖다 대기가 무섭게 벨로키랍에 온몸이 메마른 논두렁처럼 쩍쩍 갈라지지 시작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놀랐다.


푸스스스!


그렇게 갈라지다 못해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하던 벨로키랍은 끝내 거무튀튀한 가루와 덩어리로 변해버렸다. 롤랑은 그 가루를 만져보고 작은 덩어리를 눈앞에 가져가 살피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석탄?”

“뭐?”


녀석은 대답대신 묵묵히 덩어리를 내게 건네었다. 조심스럽게 덩어리를 받아든 나는 손에 묻는 검댕이와 감촉을 확인하고는 롤랑의 말을 알아들었다.


“진짜 석탄이잖아!”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다. 마법에 걸리기 전까지 사납게 달려들던 벨로키랍이 석탄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정말 석탄인가요?”

“보세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묻는 후작에게 석탄 덩어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리저리 살핀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군요. 마물에게 물을 부었을 뿐인데 석탄으로 변하다니.”

“아마, 보통 물로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진 않을 겁니다. 서쪽 수원에서 흘러든 물에서만 볼 수 있는 변화겠지요.”


롤랑이 후작의 말을 받아 확신하듯 말했고, 유스타치아 경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과 함께 행동하면서 살펴보니, 확실히 이 물이 흘러드는 수로에만 마물들이 접근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마물들에게 이런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은 확인되었군요. 검증은 이걸로 되었다 치고. 로랜드 특사, 이젠 어떤 전략을 구사할 생각이죠?”


후작에 물음과 함께 몸을 일으킨 롤랑의 얼굴엔 평소와 같은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필승의 전략, 그것 외에 무엇을 꺼낼 수 있겠습니까?”

“좋아요. 그럼 일단 이 자리에서 들어 볼까요?”


후작의 말과 함께 롤랑의 작전 설명이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계획을 풀어가기 전에 롤랑은 유스타치아 경에게 몇 가지를 확인했다.


“현재 와 있는 마법연대에서 알브 에나릴 사용자는 총 몇이나 됩니까?”

“전부 합치면 200명 정도입니다.”

“거기서 물의 정령을 다루는 숙련자는 몇이죠?”


자차 이어지는 질문에 유스티치아 경은 잠시 고민하고 나서야 대답을 했다.


“숙련자는 적어요. 열두 명 정도입니다.”

“그럼 물의 정령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을 다 합친다면 어떻습니까?”

“다루기만 하는 거라면 50명 정도 되겠네요.”

“좋습니다. 조금 빠듯하지만, 그것으로 어떻게든 해보도록 하죠. 지금 보시는 그륜벨트 지도를 잘 살펴보시면 파란 점과 푸른 선, 그리고 녹색으로 표시한 선 이렇게 세 종류의 표시를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보이십니까?”


나를 비롯한 그곳에 있는 사람 전부가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파란 선은 이 일대에 물길을 나타낸 것이고, 파란 점은… 성 내부에 있는 우물인가요?”


지도를 단숨에 파악했는지 크리스야드 후작이 물었고 롤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후작은 성 내부에 그려진 구불구불한 녹색 선들에 주목했다.


“이건 나중에 덧붙인 표시 같은데 정확히 무엇인가요?”

“그건 그륜벨트 아래에 흐르는 지하 수맥을 표시한 것입니다. 표기에 정확성에 대해서는 보장합니다.”

“재미있군요. 이 지하 수맥의 절반 이상은 로랜드 특사가 말한 수원과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어요.”


그의 날카로운 지적에 롤랑은 오히려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아마 각하께서는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벌써 알아차리신 것 같군요.”

“음… 글쎄요? 그래도 설명해 주면 고맙겠군요.”


그래, 여기 못 알아먹겠는 사람도 있다고!


“제 계획은 이 지하 수맥을 촉매로 이용해, 그륜벨트 영지에 강력한 물의 정령을 현계 시키는 겁니다.”

“정령을 현계 시킨다구요?”


그 말을 듣고 유스타치아 경이 깜짝 놀란 듯이 반응했다. 뭐지? 정령을 현계 시키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이야? 아님, 무진장 어려운 일이라도 되나? 마법의 지식이 전부한 나로선 의아할 따름이다.


“잠깐만요. 이 정도 양의 지하수를 촉매로 사용한다면, 현계시키는 정령은 설마……?”

“사바니아[Savaniah]입니다.”

“과연, 범람하는 물과 격류가 일어나면 나타난다는 난폭한 정령이군요. 산사태에 이어서 이번엔 수장[水葬] 작전인가요?”


감탄하는 크리스야드 후작과는 다르게 나는 기가 막힐 뿐이었다. 이 자식은 내놓는 계획마다 왜 이 모양이야?


“그 정도 정령이라면 프랙탈을 만들어 유지하는 것도 힘들 겁니다.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정령은 프랙탈 내에서만 현계 할 수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마법사의 수준보다는 머릿수의 기대려는 겁니다.”


유스타치아 경의 지적을 가볍게 넘긴 롤랑은 가방에서 팬을 꺼내 지도위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복잡한 도형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해 마침내 완성되자 그것을 본 유스타치아 경이 감탄했다.


“아쿠아 프렉탈? 그것도 12중첩!”

“아니요, 총 스물여섯 중첩입니다.”


감탄사를 날린 그녀의 오류를 바로잡은 롤랑. 게다가 그때까지 그저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던 크리스야드 후작도 이 대목에선 놀란 듯했다.


“내가 알브 에나릴을 그리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프랙탈이란 것이 여섯 중첩을 넘어가면 너무 복잡해 도식 없이 그리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들었어요.”

“별것 아닙니다. 전에 책에서 본 적이 있는 도식을 그대로 그려냈을 뿐입니다.”


즉, 롤랑 이 자식은 외워두었던 걸 고대로 그려냈을 뿐이라는 것다. 이런 걸 하루 이틀 보는 내가 아니지만, 두 사람이 너무 지나치게 놀라니 덩달아 놀라운 기분이 든다.


“로랜드 특사는 알브 에나릴 사용자였나요?”

“아뇨, 마법학 책을 조금 탐독했을 뿐입니다.”


후작의 눈에서 살짝 날카로운 빛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후작님, 제가 보증하죠. 이 녀석 마법은 전혀 쓸 줄 몰라요. 가끔 마법 같은 일을 벌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지도에 표시한 것처럼 그륜벨트 영지에 프랙탈을 그려 넣으면, 외부에서 바이스 슈트름의 마법사들이 의식주법을 시행합니다. 일단 사바니아를 현계시키면 나머지는 마법사들의 제어력에 달렸습니다. 마력이 전혀 없는 촉매를 사용하는 탓에 현계 시간은 프랙탈의 흐르는 마력 잔량에 비례할 것 입니다. 그 안에 영지 안에 있는 랩터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섬멸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한 롤랑은 잠시 말을 끊고 한 손을 들어 손가락 네 개를 펴 올렸다


“이 계획의 난점은 네 가지. 첫째는 랩터의 소굴이나 다름없어진 그륜벨트 영지에 들어가 프랙탈을 새겨야 한다는 것. 둘째는 마법사들이 프랙탈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해야 한다는 것. 셋째는 의식주법이 진행되는 동안, 무방비가 될 마법사들에게서 랩터들의 이목을 돌리거나 지켜내야 한다는 것. 넷째는 사바니아가 소환될 때까지 영주성을 지켜내야 한다는 것.”

“잠깐만, 기다려 봐. 첫째, 둘째, 셋째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마지막은 어째서? 헬가의 수정벽은 아직 가동 중이잖아. 그럼 굳이 지킬 이유가 없는 거 아냐?”


우리가 기한보다 일찍 도착했으니, 성안에 있는 마석인가 뭔가 하는 것에 마력도 아직 남아 있을 테고. 하지만 나름 타당한 지적을 했다고 생각한 나와는 달리, 크리스야드와 유스타치아 경은 고개를 저었다. 응?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잊었어? 헬가의 수정벽은 정령의 출입을 차단해. 이런 게 중앙에 있는데 프랙탈이 제대로 기동할 리 없잖아.”


롤랑 역시 씁쓸한 얼굴로 지도 위에 영주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랬지 참. 그럼 결국 부대를 둘로 나눠야 한다는 건가? 영주성을 지킬 군대와 마법사들을 보호해야 할 군대로.


“아니, 부대는 둘로 나누지 않아. 나눠서도 안 되고. 가뜩이나 6배 가까이 차이 나는 전력 차인데, 우리 쪽에서 부대를 둘로 나눠 버리면 그 피해는 일루 말할 수 없을 거야.”

“그럼 어쩌려고?”

“우선, 당초에 계획대로 크리스야드 각하를 영지 내로 투입해야지. 동시에 프랙탈을 그려줄 인원을 투입 시킬 거야. 그리고 본대를 영지 서남방으로 이동시켜야 해. 그쪽은 내리막이 형성되어 있으니 부대의 돌파력을 향상시켜 주겠지. 그리고 후작 각하께서 이끄는 소대가 내부를 교란시키고 적의 일부를 분단하면, 대기하고 있던 부대가 일시에 진격하여 적을 북동쪽으로 몰아넣는 거야.”

“하필 북동쪽인 이유는 뭐죠?”


가만히 듣고 있던 크리스야드 후작이 불쑥 물어왔지만, 롤랑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륜벨트의 북동쪽엔 하천을 비롯해 라임 강으로 이어지는 물길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사바니아가 놈들에게 치명적인 물을 통해 소환되어 이 물과 섞이면 훨씬 효율적으로 랩터들을 소탕할 수 있습니다.”

“의식주법을 행할 마법사들의 투입 시기는 어떻게 되죠?”

“첫 번째 돌격이 있은 후에 전군을 약 500m 뒤로 후퇴시켜, 그곳에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마법사들의 투입은 그 다음입니다.”

“그럼 첫 번째 돌격에서 최소 외성 내부까지는 진격해야 해야 한다는 말이로군요. 흐음…….”


살짝 고민하는 표정으로 지도를 살피는 크리스야드 후작. 롤랑은 거기에 부연 설명 하듯 입을 열었다.


“바이스 슈트름의 장기인 프론트 뱅가드 진형보다는, 파라구아스[paraguas:우산] 돌격진이 적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흐음… 나중에 서서히 펼쳐지는 파라구아스를 사용하기엔 진입로가 조금 좁은 감이 있군요. 내게 좀 더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좋은 생각… 입니까?”

“네에.”


불안해… 저 웃는 얼굴은 롤랑이 터무니없는 일을 벌일 때와 매우매우 똑같다.


“자, 그럼 작전이 정해 졌으니 움직여 보도록 하죠. 방금 한 얘기 전부 들었나요, 보르미웨 군?”

「예, 각하. 본대는 현 시간부로 그륜벨트 서남방으로 이동을 시작하겠습니다.」


크리스야스 후작이 상황을 정리하며 호주머니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통신을 열어 놓고 있었나 보구만. 근데 저거, 볼 때마다 은근히 탐나는 마법구다. 그래도 명색이 마법구인데 장난 아니게 비싸겠지?

아마, 이제 진짜 끝이 보인다는 생각 때문에 긴장이 풀려버린 걸테지. 이 다음에 벌어진 일은 그게 아니면 생각할 수 없다.

후작이 지도를 보면서 정확한 대기 위치를 보르미웨 경에게 알려주고 롤랑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내 눈에는 시종일 관 통신 태블릿만 들어왔다. 그 시선을 눈치첸 크리스야드 후작은 살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거… 갖고 싶나요?”

“네!”


힘차게 대답한 내게 후작은 저 태블릿은 프랙탈 패턴만 기억하면 다른 통신구하고도 연결할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한 대단한 물건이라고 가르쳐 주었다.-오오!- 자고로 남자는 커도 애라고 했던가. 하지만 어쩌겠어. 저거 있음 아무리 멀리 있어도 대화할 수 있는데. 나중에 장사 할 때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니 하나 기념으로 줄 수도 있어요.”

“정말입니까?!”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그럼 그렇지… 갑자기 푹하고 식어버린 기분에-세상에 공짜가 어디있어?- 나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뭔데요, 그 조건…….”

“그렇게 실망할 필요 없어요. 아주 간단한 임무만 수행해주면 그 공로로 증정할게요. 무려 2개나!”


2개?!


“그거, 위험한 건가요?”

“전혀요.”

“어려운 건가요?”

“이보다 쉬울 순 없겠죠.”

“나중에 뒷감당해야 하는 건가요?”

“모든 책임은 제가 질게요.”

“맹세할 수 있어요?”

“그럼요.”

“귀족의 명예 걸고? 사령관 명예 걸고? 세븐 마스터스의 명예 걸고?”

“나 라크펠드 크리스야드에게 속한 모든 명예를 걸고.”

“콜!”

“계약 성사, 우리 함께 그륜벨트 내부에서 신 나게 날뛰어 볼까요?”


손을 맞잡은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뭐? 어딜 가서 날뛰어?

멍하니 크리스야드 후작을 보는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어? 왜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거지? 같은 '사'자만 들어갔지, 이 순 사기꾼 같은 작자가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잘 됐군요, 로랜드 특사. 손발인 맞는 조수를 얻은 것을 축하해요.”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롤랑을 돌아보았다. 난처하게 이마를 짚은 녀석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보 자식.”


들어보니 사바니아를 현계 시키는 26중첩 프랙탈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롤랑밖에 없고, 당연히 후작을 따라 영지 내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걸 옆에 거들 사람이 한 사람 필요하다는 얘기가 내가 태블릿에 정신이 팔린 동안 오고 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롤랑은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너무 위험해서 날 때어 놓고 갈 생각이었는데, 그걸 눈치챈 후작이 태블릿 두 개로 날 낚은 것이었다.


“…….”


아아, 진짜 당사자인 내가 들어도 바보 같은 이야기잖아. 아부지, 진짜 세상 살기 힘들어요. 왜 세상엔 나 같이 순진한 시골 청년을 속여 먹지 못해 안달인 걸까요? 갑자기 보고 싶네요. 훌쩍.


작가의말

 영상통화 안 돼는 터치폰으로 노예계약을 맺은 아로운이었습니다...ㅇㅁㅇ!?

 

 후우, 떡밥 회수하느라 이번편은 유독 긴것 같습니다. 뿌려도 적당히 뿌렸어야 했어요(미끼 많이 뿌린다고 고기 많이 잡는 것도 아닌데...OTL)

 

 1만 1천자가 넘는 폭투 분량의 한편입니다. 내용상 너무 늘어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도 드는 군요. 하지만 이제 다음편은 대망의 결말!

 

 그 이후 에필로그 편 하나를 올리면 포춘코드의 첫번째 에피소드는 종료가 됩니다. 라이트노벨 포멧으로 생각하고 썼는데 어째서 이렇게 많아 진 것인지...(네가 말이 많아서란다 ㅇㅁㅇ;) 결국 주말을 탈탈 털었음에도 마무리하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이번주 화요일까지...(이, 이번엔 진짜로 끝내겠습니다!)

 

 혹여 라크펠드의 염동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없으시죠? 다른 분들이 다 쓰시는 검강, 검기, 오러 블레이드 같은 거 쓰기 싫어서 만든 설정이에요. 때문에 세부적으론 좀 다르지만 그런걸로 이해하시고 읽으셔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모티브는 오히려 스타워즈의 포스 능력이지만요.(지, 질문 받기 귀찮아서 하는 얘기가 아니무니다! ㅇㅂㅇ;)

 

 그럼 다음 편에서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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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의뢰[Request](3)-End +20 13.04.08 1,150 2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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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의뢰[Request](1) +12 13.04.05 1,317 24 20쪽
39 분열[Division] - Ep. 2 prologue- +22 13.03.29 1,250 23 13쪽
38 일단락[be concluded]-Ep 1. epilogue- +13 13.03.19 1,497 26 15쪽
37 크리스야드[Chrisyard](6)-End- +5 13.03.19 1,273 19 22쪽
36 크리스야드[Chrisyard](5) +4 13.03.19 1,286 14 20쪽
» 크리스야드[Chrisyard](4) +8 13.03.18 2,003 15 24쪽
34 크리스야드[Chrisyard](3) +5 13.03.17 1,318 20 20쪽
33 크리스야드[Chrisyard](2) +9 13.03.16 1,478 21 19쪽
32 크리스야드[Chrisyard](1) +8 13.03.15 1,653 19 13쪽
31 눈보라의 군세[Blizzard troop](3)-End- +4 13.03.13 1,498 16 20쪽
30 눈보라의 군세[Blizzard troop](2) +5 13.03.12 1,474 13 14쪽
29 눈보라의 군세[Blizzard troop](1) +4 13.03.12 1,566 14 11쪽
28 아스트리드[Astrid](4)-End- +5 13.03.08 1,423 14 19쪽
27 아스트리드[Astrid](3) +9 13.03.07 1,379 15 19쪽
26 아스트리드[Astrid](2) +4 13.03.06 1,244 13 15쪽
25 아스트리드[Astrid](1) +4 13.03.05 1,310 14 16쪽
24 파견[Dispatch](4)-End- +6 13.03.04 1,436 15 14쪽
23 파견[Dispatch](3) +4 13.03.03 1,304 16 14쪽
22 파견[Dispatch](2) +5 13.03.02 1,490 16 10쪽
21 파견[Dispatch](1) +3 13.02.28 1,389 16 13쪽
20 수정벽[Crystal wall](2)-End- +3 13.02.26 1,412 15 19쪽
19 수정벽[Crystal wall](1) +3 13.02.25 1,440 15 18쪽
18 랩터[Raptor](3)-end +4 13.02.23 1,519 15 18쪽
17 랩터[Raptor](2) +4 13.02.23 1,502 1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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