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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캐가 본캐 되는 날까지

포춘코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뽀이뽀로밀
작품등록일 :
2013.02.16 11:46
최근연재일 :
2013.04.09 01:15
연재수 :
4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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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132
추천수 :
727
글자수 :
296,364

작성
13.03.08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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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글자
19쪽

아스트리드[Astrid](4)-End-

포르투나 연대기 1부




DUMMY

집무실은 나온 우리는 헤밀튼의 명령을 받은 킴을 따라 성내부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현재 다른 좋은 방들은 귀빈들을 위해 비워둔 상태이니, 비록 이 정도라도 양해를 구하오.”


정중히 모시라는 헤밀튼의 말 때문이었는지 킴의 태도도 처음 봤을 때와는 딴판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게 '비록'이라는 말로 겸양할 수 있는 수준의 방이야?

안내된 방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넓고, 척 봐도 고급품으로 보이는 가구와 장식들로 치장되어 있었다. 이거 뭐하나 망가뜨릴까 봐 맘 편히 눕지도 못하겠군. 한편 롤랑은 킴에게 정중한 태도로 답하고 있었다.


“별말씀을. 그보다 저희가 급하게 달려오느라 만족스럽게 요기를 하질 못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곧 사람을 시켜 올려드리겠소. 혹시 따로 필요하신 거라도?”


킴의 물음에 롤랑은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난 딱히… 아!


“저희 둘은 적당히 따뜻한 음식으로 주셨으면 좋겠구요. 그리고 가능하면 구운 생선 한 마리도 같이 올려 주셨으면 합니다. 간은 하지 않은 걸로요.”

“집사장에게 전달하겠습니다.”


킴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고 나와 롤랑도 마주 수그렸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가자, 나는 꽉 막혔던 숨을 토하든 한숨을 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우하, 완전 대접이 달라져서 오히려 긴장될 지경이네.”

“특사로 인정받았다는 증거지. 그렇다고 너무 어깨에 힘줄 필욘 없어. 평소대로 하면 될 일이다.”


가방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은 롤랑은 그렇게 말하곤 소파에 앉았다. 마치 이런 곳에서 살아본 듯한 자연스러움에 반대로 위화감이 들 정도다.


“넌 어떻게 그렇게 침착할 수 있는 거냐? 아까 소공작 앞에서도 그렇고, 반역 얘기가 나왔을 땐 정말 식겁했다고.”

“예상했던 반응이라 놀랍지 않았을 뿐이야. 뭐, 준비했던 것들이 잘 먹혀서 다행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어.”


너무나 태연하게 말하니 이젠 무서울 지경이네그려.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얼굴이냐?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얼굴이지.


“그건 그렇고 아까 그 사람이 아스트리드 소공작인건 어떻게 안 거야? 난 처음엔 그 사람이 공작인 줄 알았는데.”

“아스트리드 공작은 올해 예순에 가까운 사람이라 들었는데 그렇다기엔 너무 젊더군. 그래서 보자마자 소공작인 줄 알았지. 사실 공작이 부재중일 경우도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어.”

“예상했다고?”

“국왕, 달리우스 2세는 현재 병환 중. 그 소식이 들려온 것이 사나흘 전이니까. 최소한 공작은 우리가 오기 하루에서 이틀 전쯤 성도를 떠나 에스펠튜드로 향했을 수도 있을 거라고 예상한 거야. 만약 내 예상이 틀려 공작이 부재중이 아니었다면 아까의 교섭도 달라졌겠지.”


나는 얼마 전 이고르씨에게 왕의 병환소식을 들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롤랑은 그 정보조차 흘려 듣지 않고 변수로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작이 부재중이 아니었으면 아까 같이 말을 이리 꼬고, 저리 꽈서 진행하지는 못했을 거라는 말?”


내 질문에 롤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너 인마, 간혹 내가 뭔 말만 하면 그렇게 웃는데 은근히 기분 나쁘거든?


“아니아니, 그 와중에서도 내가 말을 비튼 걸 알아챈 네가 대단하다고나 할까? 소공작이나 헤밀턴이라는 가신도 즉시 알아채진 못한 것 같은데 말이야.”

“뭘 새삼스럽게. 너한테 사기 안 당하려고 집중하면서 산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아무튼, 질문에 대답 아직 안 했어.”

“뭐, 아까처럼 쉽게 가진 못했겠지. 대영지의 영주란 만만히 볼 상대도 아니고, 무엇보다 기백이 달랐을 거다. 나도 여러 가지 준비를 해오기는 했는데. 사실 나는 이미 아스트리드 영지에 바이스 슈트름 부대가 와있을 거라고 예상했고, 그 예상이 틀리는 바람에 걱정을 좀 했지. 하지만 다행이 공작은 지금 부재중이고, 너무 무리한 카드를 꺼내지 않고도 손쉽게 첫 관문을 넘었어.”

“첫 관문이라… 크리스야드 후작은 역시 소공작 만큼 만만하게 넘을 상대는 아니겠지?”


나 역시 소파에 마주 앉으며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롤랑도 크리스야드 후작을 생각하면 그리 낙관적이진 못한지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도 그랬지만 난 그다지 도움이 못될 태니까 속으로 응원만이라도 열심히 하마.”


긴 소파에 다리를 뻗고 눕는 나를 보며 롤랑은 또 한 번 피식하고 웃었다. 그때 조용히 있던 페로가 내 배 위로 올라와 길게 하품을 하며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잘 해오지 않았나. 자네들에겐 최고의 행운이 함께하고 있으니 걱정 말게.”


이 자식에 입에서 행운이란 말을 들으니 묘한 기분이 든다. 난 어째 너하고 엮긴 다음부터 이 모든 고생이 시작된 것 같지?


“후우, 어쨌거나 진짜로 지나가던 행운이 기특하다고 찾아오면 좋긴 하겠다.”

“지나가던 행운?”

“암 것도 아냐, 그냥 혼잣말.”


반문하는 롤랑에게 적당히 대답하는 눈을 감고 머리를 비웠다. 생각해보니 그저께부터 잠 한숨 못 잔 것 같다. 나는 페로의 골골거리를 소릴 자장가 삼아 서서히 밀려오는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꿈 속에서 나는 눈보라 속에 페로와 함께 서 있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눈의 폭풍 속임에도 어째선지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그제야 꿈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꿈에서 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페로는 거센 눈보라 속에서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하늘을 보고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나 하고 고개를 들어 보니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거대한 날개였다. 수를 세면 총 열네 장, 일곱 쌍의 날개가 하늘을 덮고 별 무리 같이 은은한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새의 것인가 하니, 그러기엔 수가 너무 많다. 하늘 위에서 마치 알처럼 무언가를 감싸고 있는 것만 같은 광경에 넋을 빼앗기고 있자니, 발밑에 있던 페로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로군.’


그 말이 열쇠라도 된 듯. 마치 문이 열리는 것처럼 날개들이 서서히 펴지며 그 감싸 안고 있던 것을 들어냈다.


‘정말 그렇군. 오랜만이야.’


일곱 쌍의 날개가 좌우로 펴지고 내 눈에 보인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 여성이 날개를 펴자 거센 눈보라도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너무 압도된 나머지 그 자리에 주저앉은 내 어깨 위로 페로가 올라와 앉았다.


‘항상 느닷없이 찾아오는 줄은 알았지만, 이번엔 꽤나 빨랐군. 그것도 내 주인의 꿈을 통해 나타날 줄이야.’

‘나라고 항상 느긋한 것은 아니야.’


고개를 젓는 그녀의 행동을 따라 밤하늘이 흔들린다. 자세히 보면 밤하늘이 그녀의 머리칼인지 그녀의 머리칼이 밤하늘인지 도무지 구분되질 않을 정도다.

신비하기 이를 때 없는 광경. 계속 입을 열지 못하는 나를 대신에 페로가 말했다.


‘그래서 용건은? 미안하지만 여긴 당신이 먹을 만한 흉몽이 없어.’

‘…그자가 새로운 주인?’


깊고 깊은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빨아들이는 것인가, 아니면 비추는 것인가.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르는 아득한 눈을 마주하는 순간 온몸과 가슴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한다. 공포인지 경외인지, 내가 내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뭐, 일단은 그렇지.’

‘좋지 않은 시기에 만났군. 험한 길을 가겠어.’

‘당신답지 않게 당연한 말만 하는군. 용건이 없으면 나가 주지 않겠나? 내 주인이 당신의 존재 때문에 영혼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네만.’

‘그가 행동을 시작했어.’

‘호오?’


페로는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기보다는 이미 아는 얘기를 들었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지금 나와 내 주인이 처한 상황을 보면 그 정도는 알 수 있네. 하지만 그런 것 치곤 조용하군. 황혼전쟁 때처럼 온 땅이 요란하도록 등장할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와는 다르기 때문이지.’

‘다르다?’

‘미안하지만 그 이상은 말해 줄 수 없어. 나 역시 그의 눈을 피할 수는 없으니까.’


날개를 살짝 떠는 모습이 불안을 얘기해 주고 있는 듯했다.


‘기대하진 않았네. 설마 그런 얘길 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인가? 경고라면 굳이 주인을 통하지 않더라도…….’

‘당신이 선택한 이 아이가 아마도 최후의 희망이 되겠지. 바이로차나와 일루네아가 만난 이 아이야말로 새로운 가능성. 아마 그에게 대항할 유일한 희망일 거야.’

‘…당신의 장기인 예지인가?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얘기하다니 이상하군. 항상 꿈을 통해 보여 주질 않았나.’

‘그는 이미 예전에 힘을 회복했어. 아니, 오히려 새로운 힘까지 손에 넣었지. 아마 이게 내가 모습을 보이는 마지막이 될 거야.’


그 얘기에 이번엔 페로가 놀란 듯했다.


‘실체가 없는 당신을 위협할 정도로, 그의 힘이 성장한 것인가?’

‘아마도… 마지막으로 흉몽을 먹으러 왔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날개에서 깃털이 한 장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터무니없는 소원과 심상치 않은 시련인가? 언제나 그렇지만 이런 역할도 슬슬 질려가는군.’


그 광경을 지켜보던 페로의 말에선 일말의 씁쓸함이 느껴졌다.


‘뒤를 부탁하겠어.’

‘너무 기대는 마시게나… 그리고 언젠가 영원의 땅에서 다시 만나세, 꿈꾸는 은하수의 모르타나트.’


그리고 마치 무수한 눈처럼 떨어지는 깃털들이 눈부신 광채가 되어 사방을 뒤덮어갔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나는 그녀의 눈물을 보았다.




“우왁!”


냐옹!


내가 벌떡 일어난 탓에 놀란 페로가 짤막한 비명을 토하며 바닥에 착지했다.


“눈물… 어?”


주변을 둘러보니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롤랑이 황당한 얼굴을 하고 이쪽을 보고 있고, 페로는 하품을 하곤 몸을 핥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꿈을 꾸었기에 그렇게 요란스럽게 일어난 거야?”


“꿈? 어라?”


꿈… 내가 꿈을 꿨나? 잠이 들긴 한 것 같은데,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보다 내가 잠들었었나?”

“코는 골지 않았으니 안심해. 잠버릇이 얌전한 건 여전한데 그렇게 호들갑을 떨며 깨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군. 악몽이라도 꾼 건가?”


책을 덮으며 묻는 롤랑에게 나는 오히려 고개를 갸웃했다. 악몽? 글쎄… 그렇고 보기엔 머리가 좀 맑은 것 같기도 하고.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역시 꿈에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기억 안 나. 그건 그렇고 이 음식은?”


나는 우리 사이에 놓인 테이블 위에 오른 쟁반과 그 위에 있는 음식을 가리키며 물었다.


“방금전에. 너와 페로가 너무 잘 자기에 깨우기 미안해서 음식은 깨어나는 대로 같이 먹기로 했는데.”

“그런 아까운 짓을! 이거 다 따뜻할 때 먹어야 하는 음식들뿐이잖아!”


내가 역정을 내며 접시를 집어 들자 롤랑은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야, 페로. 여기, 니 좋아하는 생선이다. 또 언제 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배 터지도록 먹어둬. 그리고 제발 이번엔 얌전히 먹어라.”


바닥 어지럽히면 누가 치워야겠니? 내가 생선 접시를 내려주자 몸을 꼼꼼하게 핥고 있던 페로가 귀를 흔들며 다가왔다.


“오, 향이 좋군. 대영주의 주방 솜씨는 어떤지 궁금하던 찰나라네.”


페로가 입맛을 다시며 생선 향을 맡자 롤랑이 수프를 빵에 찍어 먹으며 대답했다.


“대영주의 주방은 왕실 주방만큼이나 정예 요리사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과연 일반 수프나 빵에서도 풍미가 다르군.”

“음, 어디…….”


그리곤 한참 고개를 숙여 정신없이 생선 옆구리를 뜯기 시작하는 녀석에게 한심한 시선을 던져주고, 나는 문득 롤랑이 보던 책에 시선이 미쳤다.


“내가 자는 동안 무슨 책을 읽고 있던 거냐?”

“음? 아아… 딱히 대단한 책은 아니고 푸른 책에 대한 주해본이 있기에 조금 뒤적거려봤어.”

“푸른 책이면 페르기우스 신전의 경전이잖아.”


인생의 절반 이상을 신전에서 보낸 녀석이 이제와서 웬 푸른 책? 너 푸른 책의 내용은 눈감고도 외우고, 거꾸로도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읽은 거 아니었어?


“거꾸로 읊다니… 날 무슨 거리 예인 취급하고 있는 것 같군.”

“그럼 못해?”

“…하려고 한다면 못할 건 없겠지만.”

“그럼 괜히 툴툴거리지 말고 질문에 대답이나 해봐.”


제 잘난 거 인정해 줘도 뭐라고 해요.


“음, 뭔가 불합리함을 느끼지만 일단 넘어가지. 어쨌든, 이제 와서 푸른 책을 보는 이유는 저번에 페로에 얘기에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야.”

“움?”


페로가 생선을 입에 문채로 고개를 들었다.


“너 부른 거 아냐, 신경 쓰지 말고 먹던 거나 마저 드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밀크 탐닉에 열중하기 시작하는 페로. 징글징글한 자식. 나는 다시 롤랑에게 시선을 주고 되물었다.


“전에 이 녀석이 한 말이라면, 그때 랩터에 대해 말해 줄 때 해준 얘기? 그 검은 용 지스카로그인가 뭔가.”

“맞아. 푸른 책의 내용 중에서도 황금시대부터 백금시대까지의 이야기는 신화로 여기는 학자들이 대다수야. 이 책의 저자 역시 그런 생각을 하는 부류지.”


롤랑은 빵을 내려놓고 옆에 놓은 책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얘기했다. 음, 애초에 푸른 책의 내용도 그냥저냥 아는 편인 나로서는 뭐라고 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래서, 랩터들이 그 지스카로그의 권속인가 뭔가 하는 놈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으니까 갑자기 신화 속 얘기가 사실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거야?”

“단정을 내리기엔 아직 이르지. 좀 더 면밀하게 다른 자료도 검토해 봐야 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형편도 아니고. 그저 따분해서 이 책 저 책 뒤지다가 이걸 발견해서 겸사겸사 생각해 봤을 뿐이야.”

“그럼 그 책에선 뭐 건진 게 없다는 얘기네.”


살짝 기대했던 내가 실망감을 내비치자 롤랑도 작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 아무튼 아직은 이 일에 대해 깊게 생각할 때는 아닌 듯해.”


롤랑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마저 접시를 비웠다. 나 역시 더 말을 붙이지 않고 묵묵히 음식을 입에 넣으며 나름대로 롤랑의 말을 생각해보았다.

페로는 푸른 책의 내용이 사실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는 것은 신화로만 알고 있던 푸른 책의 내용 중 적어도 일부는 사실을 기록한 거라고 볼 수 있다는 얘기.

그 중요성을 당장 실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라도 푸른 책의 내용을 다시 살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아님 아예 케이트 사제님께 알려달라고 하거나.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선 아마 롤랑을 제외하면 푸른 책의 내용을 완벽하게 암기하고 계신 분이실 거다. 롤랑 저 자식한테 배우는 건 사절이다. 또 그것도 못 읽느냐는 식으로 글자 가르치려 들 게 뻔한데 미쳤다고 저 자식한테 들고 가겠어?


똑똑.


그때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소공작께서 두 분을 찾으십니다.”


이번엔 킴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깔끔한 정장차림의 노신사였는데 롤랑은 안면이 있는지 냅킨으로 입가를 훔치고 아는 체를 했다.


“알겠습니다, 알포드씨. 마침 제 친구도 막 일어난 참입니다.”


알포드라고 불린 노신사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아리송한 기분이 든 나는 롤랑을 향해 물었다.


“너 여기 아는 사람 있었어?”

“누구? 알포드씨? 그는 이 성의 집사장이야. 아까 음식을 가져왔을 때 잠깐 이야기를 나눴지. 선대부터 람페루주 가문을 모셔왔다더군.”


내가 세상 모르고 자고 있을 동안 넌 친목질을 하고 있었던 거냐? 정말이지 기가 찰 뿐이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아스트리드 공작에 대해 좀 캐내 보려 했는데. 역시 연륜은 무시할 수 없더군. 알포드씨에게선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어.”


낙담하는 말과는 다르게 얼굴은 재미있다는 얼굴이다. 저 표정으로 봐선 아마 시간을 두고 캐물었다면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듯하다.


“실패한 주제에 자신만만한 얼굴 하는 건 그만두지 그러냐? 그것참 못나 보인다.”

“후후, 그런가? 항상 실패할 때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남자의 실패는 다음 성공을 위한 밑천’ 같은 소리를 하는 네가 그런 말을 하니 참으로 신선하군.”


윽, 하여간 어디든 찌를 틈을 안 주는 녀석이다.


“됐고, 빨리 나가자. 지체 높은 소공작을 기다리게 했다가 말이라도 바꿀까 무섭다.”


무안해진 내가 그렇게 얼버무리려 하자 롤랑은 짙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니가 이겼어. 이기니까 좋냐? 망할 녀석.


“그런 반응 보일 거 없어. 아로 네 덕분에 긴장은 조금 풀렸으니까… 고맙다.”

“응? 뭐라고?”


마지막 말은 작아서 달 들리지 않았다. 롤랑은 대답하지 않고 웃으며 먼저 방문을 나섰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저 녀석… 그나저나 긴장했다고? 천하의 롤랑이?”

“지금부터 만나는 인간이 그만큼 대단한 자라는 소리겠지. 세븐 마스터스이자 바이스 슈트름 부대의 사령관이라면 이 나라의 한 축을 담당하는 거물. 롤랑이 남다른 재능의 소유자이긴 하나 긴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네.”


득득득득득


어느새 식사를 마쳤는지 페로는 소파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너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발톱을 가는 중이라네. 자고 일어나니 찝찝하더군.”


그럼 지금 그 비싸 보이는 가죽 소파를 발톱으로 뜯고 있다는 거냐?!

터져 나오려는 고함을 입으로 겨우 막고. 혹시라도 누가 볼까 황급히 페로를 낚아채 방을 나섰다. 나중에 소파값 물어내라고는 안 하겠지? 니 주인은 평범하고도 가난한 소작농이란 말이다. 이 망할 고양이 새퀴야!


“표정이 왜 그래? 뭐 문제 있어?”


방문을 나서니 롤랑과 집사장 알포드씨가 서 있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살핀 롤랑이 의아하듯 물어왔다.


“아, 아냐. 가자고!”


아놔, 떨려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롤랑은 내 기색을 위아래로 살피더니 한숨을 푹하고 쉬고 알포드씨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알포드씨의 표정도 별다른 이상이 보이질 않으니 일단은 안심해도 좋은 건가?


“야, 롤랑. 우리가 앉았던 소파 말인데… 그거 얼마나 나갈까?”


알포드씨에게 들리지 않도록 귓속말로 롤랑에게 묻자 롤랑은 다시 한숨을 쉬며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30실링 정도 하겠지. 보아하니 사고 친 것 같은데 혹시라도 문제가 되면 무마해 줄 테니까 지금은 입 다물고 있어.”


30실링?! 페로, 이제 너하고 난 아무 사이도 아니다. 그리고 롤랑, 역시 넌 진정한 친구야! 이 신세는 나중에 부자 되면 꼭 갚을게. 딱 30실링만큼만!


작가의말

드디어 라크펠드 크리스야드의 등장을 앞두고 있습니다. 주말 동안 그에 관한 얘기를 쓰고, 다음주에 찾아뵙겠습니다.

 

 이런 스케줄 탓에 연참대전 참가는 요원하네요... 아악! 불금인데 일일일! 정녕 제게 다중분신술을 가르쳐부질 고인은 안 계신건가요?(ㅇㅂㅇ;;)

 

 또 하나의 습작인 이블익시드도 일단은 조금씩 비축분을 쌓아 놓겠습니다. 그쪽은 일주일에 한두 편 연재하면 많이하는 거라고... 정말 여러 이야기를 동시 연재하시는 분들을 보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평균 연독율이 저번 편부터 상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조금씩이지만 흥미를 가져주시는 분들이 늘어나서 기쁘고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진짜 모두 행복하시고, 최고의 행운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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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눈보라의 군세[Blizzard troop](3)-End- +4 13.03.13 1,498 16 20쪽
30 눈보라의 군세[Blizzard troop](2) +5 13.03.12 1,474 13 14쪽
29 눈보라의 군세[Blizzard troop](1) +4 13.03.12 1,566 14 11쪽
» 아스트리드[Astrid](4)-End- +5 13.03.08 1,424 14 19쪽
27 아스트리드[Astrid](3) +9 13.03.07 1,380 15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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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수정벽[Crystal wall](2)-End- +3 13.02.26 1,412 15 19쪽
19 수정벽[Crystal wall](1) +3 13.02.25 1,440 15 18쪽
18 랩터[Raptor](3)-end +4 13.02.23 1,519 15 18쪽
17 랩터[Raptor](2) +4 13.02.23 1,503 1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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