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녹차. 님의 서재입니다.

엑시타투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녹차.
작품등록일 :
2017.06.08 23:03
최근연재일 :
2017.06.24 11:13
연재수 :
36 회
조회수 :
10,077
추천수 :
54
글자수 :
233,206

작성
17.06.10 18:56
조회
367
추천
3
글자
12쪽

3화.

DUMMY

“다들 이미 봤겠지만, 헷갈리지 않게 다시 한번 대련 표 확인하도록. 그리고 집에 가도 좋다.”


그간의 정에 새삼 담당 교수는 오밀조밀 모여 있는 자신의 제자들 얼굴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마지막까지 긴장 풀지 말고, 아직 끝난 거 아니야. 잘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로 다치지 않게 해라.”


십몇 년을 이곳에 몸담고 있었지만, 그는 늘 졸업을 앞두면 그 말을 했었다. 조심해라. 대련용 검을 쓴다 하여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기에 매해 그 날만 되면 부상자가 꼭 나왔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억지로 분위기를 잡고서 조심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발레르랑 리비오만 남고 다들 집에 가도 좋다. 이상.”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끝나기를 기다리던 발레르는 뜬금없이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교수는 발레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리비오의 일당들은 발레르와 리비오를 번갈아 쳐다보며 마지못해 연병장을 빠져나갔다. 웅성웅성 거렸던 소음들은 한 명 한 명 빠져나갈 때마다 조금씩 줄어들어 마침내 교수를 포함한 셋만이 남았을 때 다른 사람은 물론 소음 또한 남아 있지 않았다.


발레르 자신이 알던 교수는 이제껏 학생들에게 깊게 관여한 적이 없었기에 그에게서 어떤 말이 나올지 그는 짐작할 수 없었다. 굳은 얼굴로 천천히 다가오는 교수를 보며 둘은 조금의 긴장을 느꼈다.


“몸 관리는 다들 잘 돼가나?”


그들 앞에서 걸음을 멈춘 교수는 앞의 제자들이 조금 굳어있는 걸 보고는 본론을 먼저 꺼내지 않고 환기를 시켰다.


“...”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교수는 새삼 애정어린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을 부른 이유는 다른 건 없고 내일 있을 대련에 대해서 말해줄 게 있어서 불렀다.”


그는 뜨거운 뙤약볕 때문인지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서인지 말을 잠시 끊었다.


“내일 둘이 대련하는 건 이미 봐서 알고 있겠지? 그리고 더글라스 가문이 내일 여기 온다는 소문 역시 들었을 거다.”


“네.”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얘기해 주자면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래서 너희들에게 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너희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교수는 문득 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됐다. 어느새 그들 사이로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여름 특유의 뜨거운 바람이 아닌 상쾌한 바람이. 그는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굳어진 얼굴에 표정을 조금은 풀 수 있었다.


“절대 서로 다치게 하지 마라. 절대로.”


약간의 긴장감을 가진 채 듣고 있던 리비오는 아까 들은 얘기를 반복하자 김이 샜다.


“교수님, 그 얘기는 아까 하셨습니다.”


“그래, 하지만 너희는 조금 다르다. 나머지 애들에겐 자유롭게 공수를 나누며 그 안에서 부상을 조심하라는 얘기였다면, 너희는 서로 수비적인 형태에서 검을 나눠라.”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리비오는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왜죠?”


“너희 둘은.”


그는 음성을 조금 높이며 리비오의 말을 막았다.


“너희 둘은··· 내가 지금껏 봐온 애들 중 가장 뛰어나다.”


낯 뜨거울 수 있는 말이었지만, 교수는 한없이 진지했다.


“내 오랫동안 많은 아이들을 가르쳐 왔지만, 너네만큼 재능이 있던 애들은 없었다. 다른 사람이면 욕심을 내 볼 수도 있지. 자신이 기른 제자 중에 더글라스 가문에 들어갔다고 자랑할 수 있으니 말이야. 그래. 너희 둘이라면 더글라스 가문의 눈도장을 받는 건 정말 꿈만은 아닐 거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서로 죽일 듯 맞붙어야 할 테지. 하지만 나는···.”


발레르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저 헛소문인 줄로만 알고 있던 더글라스 가문이 온다는 이야기부터 교수의 알 수 없는 이야기.


“교수 된 자로서 어느 누구하나 놓치고 싶은 마음이 절대 없다. 너희에겐 더할 나위 없는 일생일대의 기회겠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확률 적은 도박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아까 말한 것처럼만 해도 분명히 이름 꽤나 들어본 곳에서는 알아보고 데려가려 할 거다.”


잠자코 듣던 리비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발레르도 썩 내켜 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는 내심 내일 대련을 통해 리비오를 무릎 꿇게 만들고 싶었다. 지금껏 당해온 수모를 한 번에 갚아줄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라이벌이라며 소문이 나 있는 것도 기분 나쁜데 가끔 멍청한 아이들 중 자신보다 발레르가 더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리비오로서도 발레르와 같으면 같았지 다른 마음은 아니었다.


둘의 모습을 쳐다보던 교수는 들리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 둘의 관계를 모른다는 건 교육자로서 박탈감이다. 아무리 그들끼리 쉬쉬한다 한들 소문은 늘 그렇듯 바람 속에 심어져 넓고 빠르게 흩어지며 풍속이 커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한 말이 둘을 위해 한 착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서로가 평범한 관계였다면 이런 말조차 꺼내지 않았을 그였다. 애초에 학생들에게 엄하기로 소문났고 사생활에 관여하지 않는 것을 나름의 철칙으로 삼았던 그 자신이 이렇게 십몇 년이 지난 자신의 그것을 깬 이유는 간단하거나 갑작스러움이 분명 아니었다.


그들은 살기를 띄운 전투를 할 것이다. 대련이라는 명목 안에서 감정을 쏟을 거라는 건 자신이 아니어도 이 학교에 있는 눈뜬장님이라 할지라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관점에서 그 묵은 때를 벗기기에는 상처 없이는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 뭐··· 난 어디까지나 부탁을 한 것이니 결정은 너희들 몫이다. 그만 가도 좋다.”


강요를 할 수는 없었다. 아까의 말마따나 이건 그들에게 다시없을 기회이기도 했기에 그가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도 할지 말이다.


꾸벅 고개를 숙이며 멀어지는 아이들을 보니 문득 언제 이렇게 땀이 났는지 머리칼을 다 적셨다. 바람도 어느 순간 멎어버린 채 남은 건 뜨거운 열기뿐이었다. 그래 열기··· 결국 그것만 남아있겠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그로서는 이제 지켜볼 일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자신의 말로 묵히고 묵혀진 그 앙숙의 관계는 풀리지 않을 것이다. 검술을 잘 가르치면 뭘 하나. 가장 중요한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는데···. 씁쓸한 자괴감이 그를 짓눌렀다.


점점 점이 되어가는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결국 그는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다. 이제 자신의 손을 떠나버린 것들을 지켜볼 도리밖에 없었다.


길을 돌아서 가야 했지만 발레르는 리비오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 방향을 꺾었다.


“야.”


발레르는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걸어갔다.


“잘 가라.”


무슨 뜻일까. 마지막에 묻는 듯한 말투는 여전히 그를 기분 나쁘게 하면서 어떤 의미로 그 말을 던졌는지 궁금하게 했다. 결코 좋은 의미의 안녕이 아닐 거라는 걸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


대부분의 아이들은 가족과의 이별 분위기를 내거나 친구들과 만나 오랜만의 휴식을 즐겼다. 아니면 안정을 찾기 위해 자기만의 장소에 가거나 혼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발레르는 후자에 속했다. 가족과의 시간도, 친구들과 노는 것은 그러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기에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식탁 뒤로 큰 창문이 햇빛을 내리쬐어 포근함을 가져다주었다. 밝혀진 거실은 둘이 쓰기에는 조금 커 보이는 식탁이 있었다. 바닥부터 전체적으로 밝은 갈색으로 되어있는 집 안은 빛을 받으니 고풍스러움을 자아냈다.


거실 의자에 앉아 있노라니 잔잔한 소리들이 스쳐 갔다. 아주머니들의 수다와 멀리서 들려오는 가게마다의 홍보 소리와 꼬마 아이들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 소리가 멎을 때면 햇빛이 내리쬐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 그가 외로워하지 않게 해주었다.


그의 앞에는 편지가 하나 놓여있다. 며칠째 열어보지 않았던 어머니의 편지였다. 어머니가 마지막에 무슨 말을 하고 싶으셨을까. 그는 괜히 봉투 모서리만 만지작거릴 뿐 꺼내 읽지 않고 있었다.


톡, 톡.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던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꺼내 펼쳤다.


내 아들 발레르에게.

이 편지를 보고 있다는 건 아마 이제 우리 서로 볼 수 없을 때겠구나.

이렇게나마 얘기하지만 한평생 너희 아버지를 그리워했단다. 그것에 참 미안하구나.

그래도 섭섭해하지 마렴. 나는 너를 뱄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행복했단다.

아들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나는 네가 내 아들이어서 너무 자랑스럽게 좋단다. 이렇게 혼자 잘 자라줘 고맙구나.


고맙고 또 너무 고맙구나.

다음 생에도 네가 내 아들이었으면 바랄 게 없다.


아들아··· 더는 미련이 남을 것 같아 쓰질 못하겠구나.

내 걱정은 말고 네 행복을 찾아가렴.

그게 이 어미에게 하는 효도란다.



편지는 물이 스며든 뒤 마른 듯 약간 눅눅해져 있었다. 아마도···.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을지 상상하니 그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맨 아래에는 추신이 쓰여 있었다.



졸업식 따라가지 못해 미안해.

듣지는 못했지만 발레르도 엄마 많이 사랑하지? 그렇게 믿을게.


뒷장을 보렴.


그는 묘한 좌절감을 느끼며 편지를 뒤집었다. 뒷장에는 짤막한 글이 적혀 있었다.


몬토야 마을 옆에 있는 피레네 산맥 안에서 서쪽으로 들어가면 한 집이 있을 거야. 거기를 찾아가렴. 그리고 다락방 안에 들어가면 구석에 오래된 상자가 있을 거야.

졸업 선물이란다. 축하해.


발레르는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앞의 내용과 뒤집으며 비교해 보았다. 앞뒤 내용 없이 주소만 적어 놓은 그것에 그는 당혹스러웠다. 딱히 갈 데가 없는 아들을 위해 배려한 듯 써 놓은 듯싶지만, 그는 강요받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건 어머니가 의도하지 않은 강요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문장을 읽으며 그는 분명히 그렇게 느껴졌다. 발레르는 뭔가 중요한 걸 제쳐둔 기분이 들었다.


“왜···?”


어머니는 그 자신을 잘 알았다. 적적한 어머니를 위해 그는 학교에서 좋았던 일들을 알려드리곤 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는 발레르 자신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와 가능성에 대해서도 말했었다.


그렇다는 건 그의 어머니는 알고 있다는 얘기다. 그가 웬만한 가문에 눈도장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말이다. 물론 그건 그녀의 아들이 어렸기에 조금 부풀려진 걸 생각을 안 하지는 안 했을 것이다. 그리고 심각한 우울증으로 인하여 서서히 기억력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발레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추신에 보면 어머니는 그 자신에게 졸업식에 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날에조차 발레르에게 그 날을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추신은 돌아가시기 전날에 쓰신 것이 분명했다. 발레르는 머리가 아파왔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그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자리에 일어나 냉수 한 컵을 들이켰다.


맑아지는 정신과 함께 심장이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거지? 왜 아무런 설명도 없이···.


“몬토야···.”


그는 확신했다. 어머니는 기억을 가지고 있으신 채 적은 것이다. 그리고 편지에 적혀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 그건 강요가 아닌 마지막 부탁인 셈이었다. 발레르로서는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는 편지를 든 채 마지막 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졸업선물···. 그는 편지지를 접어 품 안에 넣은 뒤 곧바로 다락방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 글 설정에 의해 댓글을 쓸 수 없습니다.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엑시타투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7 7화. 17.06.12 390 3 16쪽
6 6화. 17.06.11 326 1 18쪽
5 5화. 17.06.11 314 2 11쪽
4 4화. +2 17.06.11 357 5 14쪽
» 3화. 17.06.10 368 3 12쪽
2 2화. 17.06.09 394 3 13쪽
1 1화. 17.06.08 989 5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