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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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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차.
작품등록일 :
2017.06.08 23:03
최근연재일 :
2017.06.24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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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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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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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DUMMY

잠시 기다리자 문이 열렸고 아까의 그 곱슬머리의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옆에는 또 다른 사내가 같이 서 있었는데 발레르는 그도 활을 든 것으로 보아 곱슬머리 남자와 같이 보초를 서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곱슬머리의 남자가 입을 열면서 사실이 되었다.


“환영한다. 아, 여기 이 사람은 나랑 같은 경계조다.”


급격하게 바뀐 대우에 발레르는 그에게 이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기에 발레르는 얼떨떨해 하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자 마을은 생각보다 돌벽 뒤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곱슬머리의 남자는 그곳 근처 자신들의 쉼터로 그들은 데리고 갔다.


작은 건물에 들어서자 초라한 겉과는 다르게 내부는 아늑했다. 주방 겸 방이 전부였지만, 네 명이 들어가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을 만큼의 공간은 되었다. 발레르와 애런을 벽 쪽 의자에 앉게 하고는 잠시 뒤 곱슬머리의 남자와 그의 동료는 차를 가져와 맞은편에 앉았다.


곱슬머리의 남자는 그들보다 네다섯 살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쌍꺼풀 없는 작은 눈에 까무잡잡한 피부, 짙은 눈썹에 비해 옆에 있는 동료는 백팔십 센티의 키인 애런보다 키가 조금 더 컸고, 역시 쌍꺼풀은 없었지만, 큰 눈을 가졌고, 흰 피부였지만, 오랜 바깥 생활을 해서인지 피부는 푸석했다. 서른 초반쯤 되어 보인다고 생각하며 바라보던 발레르의 시선에 그 남자는 컵을 주시하던 시선을 올려 발레르를 바라봤다.


“통성명이 없었군. 여기 이 친구는 리엄 카스탄, 내 부사수다. 그리고 나는 카르탈 베레라고 한다.”


말투는 분명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딱딱한, 그들에게 정을 주지 않는 말투에 발레르는 카르탈이 겉과는 다르게 아직 자신들을 경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옆에 제 친구는 애런 벨로테라고 하고 저는 발레르 칼로프입니다.”


“마시지 마!”


어색한 분위기에 차를 마시려던 발레르는 갑작스런운 카르탈의 외침에 자칫하면 차를 쏟을 뻔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 옆을 돌아보니 애런은 입에 차를 머금고 있었다. 애런은 당혹스러움에 머금었던 차를 다시 자신의 컵에 뱉어버리고는 약간 벌어진 입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먹으라고 준 거 아니었어요?”


카르탈은 애런의 물음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발레르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옆에 있던 리엄마저도 돌발적인 그의 행동에 적잖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카르탈?”


“다시 말해 봐.”


발레르는 낯설지 않은 기분을 느꼈는데, 그는 그게 카르탈이 무엇을 다시 말하라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익숙함에 발레르는 분위기에 동화되지 않았다.


“발레르 칼로프입니다.”


카르탈은 설마 하는 말투로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음을 던졌다.


“혹시 아버지 성함이...?”


“유스터스 칼로프 입니다. 애런의 아버지인 티보 벨로테께서 여기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카르탈, 저 아이가 뭔데 왜 이렇게 흥분하는 거야?”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던 카르탈에게서 리엄은 난생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당혹을 넘어 공포감까지 생겨났다. 답을 묻는 그를 외면한 채 카르탈은 여전히 발레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기 있을 게 아니다. 일단 마을로 들어가자.”


카르탈은 황급히 그들의 컵을 뺏다시피 가져오고는 애런에게 물 한 컵을 줘 입안을 헹구라고 말했다. 물로 입을 헹구며 애런은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게 뭔데 입까지 헹구라는 거에요? 설마 독이라도 탄 겁니까?”


“그래.”


“뭐요?”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모습에 애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남은 물을 전부 입에 털어 넣어 구석구석 입안을 헹구었다. 울상이 돼버린 애런은 카르탈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아까 조금 마신 것 같은데 어떡하죠? 나, 나 죽는 거에요?”


“극소량은 괜찮아. 그리고 죽는 독이 아니라 기억을 잃게 하는 독이다.”


애런은 잘못 들었는가 싶어 그의 말을 되물었다.


“기억을 잃게 하는 독이라고요?”


“그래, 여기에만 있는 약초 중 하나지.”


카르탈은 리엄을 남겨두고 그들과 함께 마을로 들어갔다. 가끔씩 의식적으로 땅에 침을 뱉는 애런을 보던 발레르는 카르탈에게 물었다.


“저희 아버지를 아시는군요.”


“아마 내 세대부터는 다 알고 있을 거다. 그만큼 그때 일이 컸거든.”


마을 입구에 다다르면서 발레르는 카르탈의 말에 사람들이 호의적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의 생각과는 반대로 심장이 떨려왔다. 장난기가 서렸던 애런도 입구에 발을 딛자 서서히 웃음기를 빼버렸다.


애런은 현실적으로 생각했다. 환대를 받는 건 자신의 아버지와 발레르의 아버지인 것이지 결코 자신은 아니었다. 뚜껑을 열어보면 막상 다르겠지만, 그는 적어도 이방인을 보자마자 기억을 잃게 하고 내쫓으려 하는 것에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마을의 길을 걸어가면서 지나치던 사람들은 그들을 보자마자 일제히 제자리에 멈춰 서서는 뚫어지라 쳐다봤다. 어떠한 말도,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거부감이 드는 그 시선들에 공포감을 느끼며 발레르는 고개를 숙여버렸고 애런마저도 부담스러움에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건 좀 심하잖아.”


발레르에게 작게 웅얼거리는 애런은 소름이 끼친다는 듯 짧게 몸을 떨었다. 마을의 중심부까지 들어간 카르탈은 그중에서도 가운데에 있는 건물 앞으로 간 뒤 문을 두드렸다.


“클레망 촌장님 계십니까?”


“카르탈?”


안쪽에서는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는지 설마 하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의심 담긴 목소리와는 다르게 발자국 사이의 시간은 꽤 길었다. 발레르는 연륜이 느껴지는 걸걸한 목소리로 보아 그것이 평상시의 걷는 속도임을 짐작했다.


문이 열리자 등이 조금 굽은 노인이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작은 키는 굽은 허리 때문에 더 작아 보이게 만들었고, 옷 밖으로 나온 팔과 다리는 앙상해 그를 더 기운이 없어 보이게 만들었다. 반 쯤 벗겨진 머리와 깊게 패인 주름들로 보아 환갑은 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눈을 마주친 발레르는 노인의 눈에서 분위기와 다르게 옳고 곧음을 보았다. 어떤 것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노인의 눈빛에 그는 클레망이 그저 그런 노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클레망은 문을 연 순간부터 카르탈 너머 애런과 발레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르탈은 고개를 돌려 발레르를 바라보며 소개를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발레르 칼로프입니다.”


클레망은 이름을 듣자 형형하게 눈빛을 빛나더니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존재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던 것을 본 사람처럼 클레망은 말을 더듬었다.


“혹시 자네 부모님... 성함이 어떻게 되는가.”


“아버지는 유스터스 칼로프 이시고 어머니는 에스테르 세레나 이십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거라. 카르탈 자네는 그만 돌아가게.”


카르탈을 황급히 보내며 클레망은 그들을 안으로 들였다. 내부로 들어오자 노인 혼자 사는 특유의 냄새가 그들의 코를 감돌았다. 처음 맡는 냄새에 애런은 눈살을 찌푸리며 문 옆에 있는 창문을 열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은 창문 앞 원형의 작은 책상을 내리쬐어 주었다. 빛 사이로 보이는 먼지를 바라보는 그들에게 클레망은 시원한 물이 담긴 컵을 건네주며 애런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네 이름은 어떻게 되느냐.”


“애런 벨로테요.”


클레망은 추억에 젖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성함은 티보 벨로테 겠구나.”


“우리 아빠도 아세요?”


“그럼, 잘 알다마다.”


“뭐야, 생각보다 잘 나갔나 보네.”


허허, 웃으며 클레망은 그들에게 소파에 앉기를 권하며 그는 커튼을 반쯤 쳐 의자에 비추는 햇살을 가리고는 그 자리에 앉았다.


“유스터스와 함께 우리 마을에서 가장 유명했단다. 마을에 온 첫 이방인이기도 했고, 제일 뛰어난 전사들이기도 했지.”


시선을 멀리 던지며 추억에 젖던 클레망은 문득 생각난 듯 발레르를 바라봤다.


“에스테르는 어쩌고 둘이서만 온 것이냐.”


일순간 방 안의 분위기가 급격히 어색해졌다. 애런은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렸고, 발레르는 클레망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거렸다. 그들의 행동을 본 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듣지 않겠다는 듯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 그리됐구나.”


그녀에 대한 추억을 되짚는 것인지, 떠난 이에 대해 묵념을 하는 것인지 클레망은 잠시 눈을 감은 채로 있었다. 그 상태로 그의 입만이 움직였다.


“혹시 더글라스 때문이냐.”


“아니요, 저희 어머니는···.”


마음 속이 복잡해졌는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클레망은 눈을 뜨며 감정을 절제하는 발레르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한평생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끝내 우울증을 이겨내지 못하셨습니다.”


애런은 상당히 충격받은 모습으로 돌렸던 고개를 발레르에게 옮겼다. 떨리는 그의 동공에는 쉽게 풀어낼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가여운 것.”


앓는 소리로 한탄을 뱉은 클레망은 기운이 빠졌는지 몸이 늘어지며 상체가 앞으로 조금 숙여졌다.


“설마 티보도...”


“아저씨는 몸을 피하셨습니다.”


“몸을 피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 게냐.”


“더글라스가 저희를 쫓기 시작했습니다.”


클레망은 쌍심지를 켜서 씹어뱉듯이 말했다.


“고얀 놈. 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한숨과 함께 털어내며 일어난 클레망은 분위기를 바꿔볼 겸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할 텐데 쉬고 있으려무나. 나는 너희가 지낼만한 곳 좀 찾아보려 나갔다 와야겠구나.”


문은 닫혔지만 발레르는 그 자리에 꽤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어머니의 향수에 젖은 그의 눈은 방금 이별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허공을 바라보는 애런도 분위기에 묶여 발레르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멍하니 탁자를 바라보던 애런은 어느새 햇빛이 아닌 그늘이 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참 불공평해, 그치?”


어딘가에, 딱히 어디를 보는 게 아닌 허공에 시선을 던지며 애런은 공감된다는 말투와 함께 어깨를 움츠렸다.


“누구는 좋은 것만 보고,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고 말이야. 힘없는 사람은 그냥 꼭두각시인 것 같아. 가만히 앉아서 움직임을 당해도 저항조차 못하는 꼭두각시.”


힐끗 쳐다본 애런은 깊게 빠져있는 모습에 조용히 자리에 일어나서는 자기 때문에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않게 빙 돌아 나왔다. 그리고는 어떤 방에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던 그는 사람의 손때가 제일 적게 묻은 방으로 들어갔다.


깍지끼며 고개 숙인 채로 발레르는 기억을 헤집고, 또 헤집으며 저릿해지는 가슴을 더 후벼 팠다. 그의 다리 사이의 마루에 한 방울의 물이 떨어져 땅을 적셨다. 작게 번지던 자리 옆으로 다시 한 방울이 떨어졌다.


헐떡이려는 숨을 참으며 인상을 구긴 그는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는 꾹 참아내며 저 밑을 눌러버렸다. 해가 가라앉으며 점점 노을빛이 퍼질 때까지 그는 그리움을 흘렸다. 아픔을 억지로 흘려보냈지만, 더 큰 아픔이 찾아와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는 힘겹게 일어섰다. 소리를 죽인 한숨을 내뱉으며 그는 천천히 걸음을 떼어 아무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거실에는 이제 탁자에 스며든 노을빛만이 전부였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애런은 머리 뒤로 깍지 낀 손을 풀었다.


그는 보지도, 듣지도 않았지만,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괴로움에 아파하는 것을 보았고, 소리 없는 눈물을 들을 수 있었다. 졸음은 이미 그를 떠난지 오래였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억지로 견뎌내는 발레르의 마음이 애런에게 직접 닿았다. 그래서 그는 문을 닫지 않을 것을 후회했다. 견디지 못할 아픔이었기에 진작에 문을 닫아버리고 귀를 막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발레르가 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천천히 늦게나마 집게손가락으로 귀를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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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23화. 17.06.18 195 1 19쪽
22 22화. 17.06.17 222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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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5화. 17.06.14 212 2 14쪽
14 14화. 17.06.14 247 2 14쪽
13 13화. 17.06.14 245 2 14쪽
12 12화. 17.06.13 277 2 13쪽
11 11화. 17.06.13 307 3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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