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러시아 로보캅 부대 3
러시아 로보캅 부대 3
잠시 후에 미란추크 소위가 오른손에 장갑을 끼고 다시 부대장실로 들어왔다.
그냥 평범해 보이는 가죽장갑인데 손가락 끝마디만 절단한 것으로, 남창선도 그런 장갑을 예측 못 할 전투에 대비해서 늘 갖고 다닌다.
주먹을 쥐면 힘도 세어지는 느낌이 들고, 가격했을 때 주먹의 정권 부위에 상처를 입지도 않는다.
“아, 전투용 장갑이군요. 나도 항상 갖고 다닙니다.”
혹시나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일어날까 봐 걱정하던 창선이 안심이 되는지, 괜히 주머니에서 자기 장갑을 꺼내어 데킨 대장에게 보이며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다.
“좋소. 좀 두꺼워 보이기는 하지만, 그거 끼고 주먹질할 것도 아닌데 뭐 어때요? 미란추크 소위님 하자는 대로 하는 거니까 팔씨름에 져도 불만 없기요!”
데킨이 웃으며 우람한 팔뚝을 내밀어 탁자 위에 팔꿈치를 턱, 올렸다.
자리에 앉은 미란추크 소위가 장갑 손목 부분의 훅 hook 단추를 딸깍, 채웠다.
유심히 쳐다보니 장갑이 길어서 중세의 기사들이 끼는 수갑처럼 손목이 다 들어가 보이지 않을 정도다.
날씨가 혹독하게 추운 러시아에서 끼는 장갑이라 그런가보다 싶다.
팔씨름 준비가 된 미란추크 소위가 약간 긴장된 얼굴로 팔을 내밀고 데킨의 손을 잡았다.
장갑을 낀 손인데도 워낙 큰 데킨의 솥뚜껑 손보다 훨씬 작아 보인다.
그런데 탁자의 폭이 넓어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보니 팔이 V자를 만들지 못하고 L자로 벌려져 버린다.
앞가슴이 탁자 끝에 닿아서 왼손으로 탁자 모서리를 붙잡고 버텨야 할 정도다.
바짝 붙어 앉아서 손을 잡으면 팔이 V자가 되어 손목과 함께 어깨의 힘을 쓸 수 있는데, L자가 되면 어깨 힘은 거의 못 쓰고 손목의 힘만 사용하게 된다.
통상 손목의 힘이 약한 사람은 이런 자세로는 더 불리하기 마련이라 누가 봐도 미란추크가 이길 가능성은 더욱더 없어 보인다.
“준비됐소? 미란추크 소위님이 먼저 힘주시오.”
데킨이 자신감을 보였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미란추크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손목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창선은 몇 초 만에 미란추크의 손등이 바닥에 닿을지 속으로 재미 삼아 하나, 둘, 카운트를 세어본다.
미란추크가 힘을 주는 게 역력히 보이는데도 데킨의 손목은 꿈쩍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다.
“이거, 힘주는 거요, 마는 거요?”
데킨이 웃으며 제대로 힘 써보라고 여유를 부렸다.
“그럼, 제대로 들어갑니다.”
미란추크의 손목이 안으로 꺾이고 데킨의 손목도 함께 꺾여 돌아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손목이 약간 흔들거릴 뿐 데킨의 손목은 젖혀지지 않고 제 자리에 가만히 있다.
술기운으로 벌겋던 데킨의 얼굴이 더 붉어지는 걸 보면 손목에 힘을 세게 주고 있는 것 같다.
“힘 다 쓴 거요? 그럼 이제 내가 공격하오!”
데킨이 자기는 아직 힘을 덜 쓴 것처럼 말하고 겁을 주더니, 두툼한 입술을 꾹 깨물며 힘을 쏟았다.
창선이 마음속으로 ···스물아홉, 서른까지 헤아리고 그만 마치려는데, 미란추크의 손이 제자리에 가만히 있다.
‘어! 뭐야? 데킨이 힘을 다 쓰는 것 같은데?’
창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상외로 미란추크의 손목 힘이 만만치 않다는 얘기다.
약간 놀란 듯한 데킨이 옆 이마에 핏줄이 드러나도록 더 세게 힘을 가했다.
그러나 미란추크의 손목은 젖혀지지 않고 뒤로 약간 밀리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이 부르르 떨리며 좌우로 약간씩 흔들거린다.
두 사람의 힘이 균형을 이루고 백중지세를 유지한다는 의미다.
“우우우우욱!”
힘을 주는 데킨의 입에서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울려 나왔다.
그러나 입술을 꾹 다문 미란추크의 표정은 변함이 없고, 손목의 위치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예기치 못한 사태를 맞은 데킨이 용을 있는 대로 다 쓰는데, 이마에 작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러시아 부대 아킨페프 중위와 샤힌 원사는 두 사람의 맞잡은 손목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그들의 표정은 마치 미란추크가 이기기라도 할 거라는 듯 묘한 미소마저 배어있다.
“두 사람 팔 힘이 백중세구먼! 이러다가는 해가 져도 안 끝나겠는데? 허허.”
부대장 골로빈이 당연한 것처럼 웃으며 창선을 힐끔 쳐다봤다.
두 사람의 팔씨름을 시킬 때부터 이런 결과는 이미 예상했다는 표정이다.
그 표정 속에는 우리 러시아부대는 네까짓 용병부대 같은 어중이떠중이가 함부로 넘볼 수 없다는 엄한 경고가 들어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 어어어, 헉!”
그때, 미란추크가 갑자기 힘을 썼는지, 데킨의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팔이 기울더니 손등이 탁자 위에 철썩, 붙어버렸다.
이럴 수가?
망연자실한 데킨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떡, 벌리고 미란추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아이구, 이런! 축하드립니다, 미란추크 소위님”
-짝짝짝짝
눈치 빠른 창선이 립서비스와 함께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살렸다.
-짝짝짝
“역시 데킨 대장님 팔 힘이 대단하군요. 독한 칭기즈칸 보드카를 스트레이트로 많이 드셔서 진 것 같네요. 다음에 다시 한번 더 하도록 합시다. 허허.”
부대장 골로빈이 입에 발린 소리로 능청을 떨며 손뼉을 쳤다.
-짝짝짝
아킨페프 중위와 샤힌 원사는 당연하다는 표정은 지우고, 미소와 박수로 데킨을 위로했다.
“다음에요? 이거.. 한 10분만 쉬었다가 다시 하면 안 될까요?”
데킨은 그제야 제정신이 드는지 한 번 더 하자며 억울한 표정을 짓고 씩씩거렸다.
“아이구, 이거 벌써 다섯 시가 넘었네요! 자자, 데킨 대장님, 이제 우리는 얼른 일어납시다. 군대 막사에 들어와서 두 시간 넘게 술 마시고 있으면 어쩝니까?”
뭔가 감을 잡은 창선이 데킨을 말리고 먼저 일어섰다.
“그러세요, 데킨 대장님. 다음에 술 드시기 전에 한 번 더 하시지요.”
미란추크 소위가 애써 공손한 자세를 취하며 데킨을 달랬다.
“아, 그럴까요? 우리도 애들 칠면조 병아리 제대로 싣고 왔는지 얼른 가봐야 되겠네요. 허허.”
무안하고 민망해진 데킨도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어서 창선을 따라 일어났다.
**
“제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시기는 했지요?”
창선의 레인지로버 뒷좌석에 앉은 데킨이 엄청난 술 냄새를 풍기며 미안한 듯 물었다.
골로빈 캡틴의 러시아부대 병영 정문을 나온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았다.
팔씨름에 자신 있다고 큰소리 뻥뻥 쳤다가 새파란 러시아 젊은 장교한테 보기 좋게 당했으니 창선이 보기에도 민망해 죽을 지경이다.
“예. 그런데, 많이 드시기는 했지만, 꼭 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 술 때문이 아니라고요? 무슨 말씀인가요?”
“혹시 미란추크 소위의 장갑 낀 손을 잡았을 때 무슨 이상한 느낌 같은 거 없던가요?”
“이상한 느낌이요? 글쎄, 장갑이 좀 두껍다는 느낌은 들었지요. 손바닥 쪽은 아닌데, 막상 손가락으로 손등을 거머쥐니까 가죽장갑치고는 너무 딱딱하다는 느낌은 들었습니다.”
“그랬어요? 음··· 역시 그 장갑이 보통 장갑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예? 그 장갑이 무슨 특수한 물건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혹시 웨어러블 슈트라고 들어보셨어요?”
“웨어··· 뭔 슈트요?”
데킨이 생소한 말에 눈만 끔벅거린다.
“입는 옷인데, 그런 옷을 입으면 힘이 몇 배로 세어져서 무거운 물건도 들 수 있습니다.”
“아, 그런 옷이 다 있어요? 그럼 그 미란추크 소위가 끼었던 장갑이 그 웨어란 말인가요?”
“제 짐작에 그런 것 같습니다. 장갑이 상당히 두껍게 느껴졌다고 하셨죠? 장갑 안에 특수한 소재를 넣어서 그럴 겁니다. 장갑의 손목이 길었지 않습니까? 분명히 손목 부분에 웨어러블 특수장치를 넣어서 손목 힘이 강화된 게 틀림없지 싶습니다.”
“아, 그렇군요! 어쩐지 내가 분명히 이길 수 있는 놈인데, 그런 요상한 장갑을 끼고 덤빈 거군요. 이런, 전갈 꼬리 같은 놈의 새키!”
데킨이 화가 나서 두꺼운 입술을 씰룩거리며 욕설을 쏟아냈다.
“복수하고 싶으세요?”
“그럼요! 당장 차 돌려가서 맨손으로 한 판 더 붙자고 할까요?”
“그런다고 한 판 더 붙어줄까요? 나보고 너도 네 가죽장갑 끼고 권투시합 한판 붙자고 덤비면 어쩌라고요? 하하.”
“그, 그건 그러네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열불 터져서 못 참겠는데, 어쩌면 좋지요?”
“데킨 대장님을 속여먹은 완전 사기꾼들인데, 그냥 두면 안 되겠죠? 만약에 팔씨름에 돈이라도 크게 걸었더라면 어쩔 뻔했습니까?”
“돈이야 내가 없으니까 그런 도박 팔씨름은 안 했겠지요. 돈 대신에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을 등에 태우고 말처럼 방바닥을 한 바퀴 도는 내기는 했을지 모르지만요. 음, 흠.”
데킨 동네에서는 그런 팔씨름 내기를 하는 모양이다.
“그랬으면 오늘 데킨 대장님은 완전 미란추크 소위의 말이 될 뻔한 거 아닙니까? 이랴~ 따그닥 따그닥, 하하하.”
창선이 일부러 데킨을 놀리며 약을 올렸다.
“아이, 참. 웃지만 말고 복수할 꾀라도 좀 내 보시오, 창 대장! 어~흐 열 받어. 헛 험.”
데킨이 분통이 터져 죽으려고 한다.
“그렇게 화나시면, 아예 저 부대를 통째로 날려버리면 어떻습니까?”
“예? 선전포고하고 전면전으로 한판 붙자는 말입니까?”
“그래서는 아무래도 우리가 승산이 없지요. 저런 특수 복장을 착용할 정도의 부대라면 무슨 신무기가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그건 그러네요. 그럼 뭘 어떻게 해서 통째로 날리자는 말씀입니까?
“옛날 중국 병법 전서에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지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아, 거참 맞는 말이네요. 우리는 서로 잘 아는데, 저놈들 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저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먼저 자세히 알아보고 쳐부수든지 말든지 하자는 말입니다.”
“아, 그렇지요. 저 막사에 몰래 들어가서 어떤 무기를 가졌는지 염탐부터 하자는 말씀이지요?”
“맞습니다. 당장 오늘 밤에 함께 가보는 건 어떻습니까?”
“오늘 밤에요? 좋습니다! 당장 쳐들어갑시다!”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그럼 좀 있다 칠면조 싣고 오는 대원들 만나서 본부로 돌아갔다가, 밤 12시에 여기서 다시 만날까요? 그동안에 술 충분히 깰 수 있겠지요?”
“아, 그럼요. 저는 이 정도 술로는 지금도 쳐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하.”
기분이 되살아난 쿠르드족 민병대 YPG 대장 데킨이 객쩍게 웃었다.
**
새벽 1시가 다 돼가는 시각.
투르크메니스탄의 소도시 세르다스에서 북동쪽으로 5km 거리에 있는 러시아부대 병영의 담장 밖.
짙은 어둠 속에 40여 명의 무장한 그림자가 땅바닥에 엎드린 채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다.
남창선의 사막의 여우 페넥 폭스(Fennec Fox)와 하룬 데킨의 쿠르드족 민병대 YPG 대원들이다.
페넥 폭스 대원들은 K2 소총을 들었고 YPG 대원들은 러시아제 AK-47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다.
창선과 데킨은 오늘 낮에 부대 안에 들어가 봐서 병영 내부구조는 대충 알고 있다.
그래서 숙소 막사 건물을 피해 정문 반대편, 흙 마당에 트럭이 몇 대 서있던 취약한 쪽으로 접근하고 있다.
직사각형 구조의 울타리의 귀퉁이 네 군데에 망루가 설치되어 서치라이트가 간간이 돌아가면서 먼 곳을 비추고 지나간다.
흙벽돌로 쌓은 높이 2m의 담장 울타리 가까이 근접하자 여기에도 정문 앞처럼 넓고 깊은 해자가 파여있다.
물은 없지만 폭 2m에 깊이는 1m정도 되는 구덩이를 빙 둘러 파서 3m 높이에 이르는 담장을 쉽게 넘어가지 못하게 만들어 놨다.
그런데 데킨의 YPG 대원 10여 명이 주저 없이, 해자 속으로 도마뱀처럼 미끄러져 내려갔다.
남은 창선의 페넥 폭스 대원 20여 명은 땅바닥에 납짝 엎드려 수십 미터 거리의 망루 쪽을 살피며 경계를 섰다.
담장 아래쪽으로 몰려간 대원들이 잠시 해자의 벽면을 살펴보더니 세 팀으로 나뉘어 가져간 야전삽으로 해자의 벽을 파기 시작했다.
아마 담장 아래에 땅굴을 파고 병영 안으로 침입할 작정인가 보다.
여기는 사막에 인접한 초원지대라 땅이 거의 모래 섞인 진흙 수준이라서 땅굴을 파는 데 큰 어려움은 없어 보인다.
시리아 동북부 지역에서 악명 높은 IS들과 싸우던 쿠르드족 민병대 YPG 대원들이다.
땅굴 파는데 이력이 났는지 불과 1시간도 안 지나서 세 군데에 기어들어 갈 수 있는 땅굴이 완성되었다.
“대장님, 안쪽까지 다 뚫었습니다. 안에는 보초병이 안 보입니다.”
YPG 대원 한 명이 기어 올라와 데킨에게 조용히 보고하는데, 보니까 부대장 괴뉠이다.
역시 성질 더럽고 엉뚱하면서도 용감한 데킨의 오른팔다운 사내다.
“응, 알았다. 너는 삽질한 대원들 데리고 여기서 경계 서라. 자, 창 대장, 이제 들어갑시다!”
데킨이 나머지 YPG대원 10여 명을 지휘해서 앞장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창선의 페넥 폭스 제1분대와 제2분대 대원 18명도 창선의 뒤를 따라 해자 밑으로 신속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양쪽 대원 30여 명은 삽질로 파놓은 땅굴 속으로 기어들어 가 금세 러시아 로보캅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병영 안쪽 트럭 주변 흙 마당 위로 올라왔다.
러시아부대 병사들은 모두 취침 중인지 왼쪽의 길쭉한 막사와 골로빈 부대장실은 불이 꺼져있다.
막사 맞은편, 흙 마당 오른쪽의 2층 높이 공장 같은 건물에도 아무도 없는지 불빛은 보이지 않는다.
마당 건너 멀리 100여 미터 앞에 있는 정문 위병소 안에만 불이 켜져 있고 졸고 있는 보초병의 모습도 보인다.
서치라이트가 돌아가는 네 군데 망루 외에는 사위가 캄캄하고 인기척도 없이 조용하다.
망루 안의 보초병도 졸고 있는지 모른다.
당장 가까운 망루의 서치라이트를 저격해서 깨뜨리고 “돌격 앞으로” 하면서 막사로 쳐들어가도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 작가의말
아, 두더지 작전 성공인가요?
너무 쉽게 부대 안에 들어가는 게 어째 찝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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