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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세하루 님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47. (수필) : 기타리스트

 

기타리스트

 

 

삼일 이재영

 

가끔 티브이에 통기타가 나오면 반가워서 눈여겨보게 된다.

70년대 초에 대학을 다닌 세대라서, 손가락으로 코드를 짚고 퉁기며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같은 노래를 부르던 추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함께 떠오르는 어떤 기억은 늘 쓴웃음을 짓고 도리질하게 만든다.

내 큰아들과 관련된 고3 때의 가슴 아픈 사연이다.

 

장남이 고등학교에 진학해 가져온 첫 성적표 등위가 학급 1위였다.

중학교까지는 몰라도 고등학교부터는 상위권이 쉽지 않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에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래서 특별 선물로 꽤 비싼 통기타를 하나 사다 줬다.

내가 고등학생 때 그렇게 갖고 싶었는데, 대학에 가서야 겨우 가졌기 때문에 아들에게 큰 선심을 쓴 거다.

열심히 공부하다 피곤하면 기타라도 치면서 머리를 좀 식히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무렵 나는 대기업에 다니다 나와 내 사업체를 꾸린 지 4년쯤 되어, 회사 일로 무척 바빴고 매일 퇴근이 늦었다.

초등학교 교장 출신인 아버님이 집에 계시는 데다 아내가 보건 교사라, 두 아들의 교육 문제에는 자연히 소홀하게 되었다.

그렇게 바쁜 세월이 훌쩍 지나 장남이 고3이 되어 대학 진학을 바라보게 되었다.

가끔 확인해 본 아들의 성적은 점점 떨어지더니 중위권을 맴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모처럼 일찍 귀가했더니 아들이 머뭇거리며 진로에 관해 의논할 일이 있다고 했다.

한창 자라는 나이에 너무 오랫동안 대화 나눌 기회가 없었던 터라, 막상 다 큰 녀석과 마주 앉으니 다소 서먹한 느낌마저 들었다.

, 그래. 무슨 일이냐? 학과 선택?”

... 대학 진학 대신, 다른 길을 갔으면 해서요.”

깜짝 놀란 나는 잠시 흥분된 가슴을 쓸어내리고 아들에게 자세히 설명하라고 일렀다.

 

들어본 내용인즉, 수원 시내에 팬 코리아라는 나이트클럽이 있는데,

아는 선배 기타리스트가 군에 입대하게 되어, 내 아들에게 대신 들어오라는 제안이 왔다는 것이다.

연주 무대와 춤추는 플로어도 있고 객석이 수백 석에 이르는 꽤 큰 무도장인 것 같았다.

그런 곳에서 요청이 있었다니 내 아들 기타 실력이 보통이 아니구나 싶어 기분은 좋았다.

그러나 가당키나 한 말인가? 내 장남이 나이트클럽 기타 연주자라니!

 

잠시 뜸을 들이며 생각을 가다듬고 호흡을 조절한 나는 차분하게,

기타 실력은 좋은가 보구나. 근데, 너도 두어 해 있으면 군에 가야 하는데, 제대하고 오면 그 자리가 비어있겠나? 깊이 생각해보고 다시 얘기하자.”

라고 타이르며 상담을 일방적으로 끝냈다.

그리고 두어 해 만에 아들 방에 들어가 봤다.

벽에 온통 히피 같은 헤비메탈 그룹의 포스터 사진이 붙어있고, 책꽂이에도 무슨 코드집 등 기타 관련 서적만 잔뜩 꽂혀있는 게 아닌가.

한심한 녀석, 머리 식히라고 기타 사줬더니 기타리스트 되라는 줄 알았나?

그 후로 아들은 두 번 다시 그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수능시험을 치르기 며칠 전, 지원 학과에 대해 조언하려고 일찍 귀가했다.

학교는 좀 후진 데 가더라도, 학과는 전자과를 지원해야겠지? 커트라인 점수가 높을 텐데, 수능점수 잘 따도록 해라.”

나는 장남이 응당 나와 같은 전공을 선택하길 바랐다. 그래야 나중에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니까.

? ... 저는 문과라서 공대는 지원이 안 되는데요.”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기절초풍해서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아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알고 보니, 내가 회사 일이 바빠 애들 교육에 무관심한 사이에, 공과대학 출신인 내게 실망한 제 어미가 상과대학에 보내기로 하고, 아예 학년 초에 문과로 지망시켜버린 것이었다.

화는 났지만, 그즈음 내가 차린 개인회사가 어려움을 겪으며 아내의 마음고생이 컸던 터라, 크게 야단칠 수도 없어, 허허로운 가슴을 안고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수능점수는 기대 이하를 받았고, 아들은 재수 대신 내 뜻을 따라, 먼 데 있는 야간 대학교 상대 무역과에 입학했다.

하숙비와 겨우 지낼 잡비만 보내줬는데, 장남은 나와의 약속을 잘 지켜, 다음 해 집에서 통학할 거리의 주간 대학교 무역과 2학년에 편입했다.

 

지금은 결혼하여 마흔 중반이고 딸이 벌써 중학생이 됐으며, 지명도 높은 중견 기업체의 비서실에서 팀장으로 잘 근무하고 있다.

그래서 항상 바쁘게 사느라 한 달에 한 번 가족 모임 때나 얼굴을 본다.

세 살 아래 둘째는 당연히 전자과를 나왔고, 대기업체의 부장급 연구원으로 결혼 5년 차 맞벌이 부부다.

 

그런데, 한 달쯤 전에 내 컴퓨터가 갑자기 고장이 났다.

몇 년 전에 고장 나서 컴퓨터 119’에 의뢰해 저장된 데이터를 복원했는데, 수리 비용이 54만 원이나 들었다.

수리 뒤에도 몇 번 이상하다가 며칠 지나면 괜찮아진 적이 있어 한 달을 기다렸는데, 결국 복귀가 안 됐다.

할 수 없이 수리 의뢰하려고 아내에게 털어놨더니, 장남에게 슬쩍 연락했는지 내게 전화가 왔다.

그리고 퇴근 후에 두 시간 거리를 달려와서 한 시간 넘게 컴퓨터를 점검하더니, 계속 사나흘 왔다 갔다 하면서 수리했다.

모니터를 신품으로 대체하고, 키보드와 마우스는 선이 없는 무선 모델로 바꿨다.

 

며칠 후 추석날에는 새로 사서 조립한 컴퓨터 본체도 들고 와, 함께 놀지도 못하고 힘들여 교체했다.

공대 출신 차남은 컴퓨터는 형아가 나보다 더 잘 고쳐요.”라며 구경만 하고 웃었다.

장남이 야간대학 1학년 다닐 때 미팅은커녕, 하교하는 주간 학생들 눈치 보며 등교했던 심정이 어땠을지, 지금도 안쓰럽다.

 

기특한 장남을 지켜보던 내 마음이 착잡하면서도 흐뭇하여, 아내에게 수리비 50만 원 주라고 명했다.

녀석, 가끔 기타는 치는지 모르겠다.

 

  

 

[ 계간지 문예감성 2021년 겨울호(27) 등재 ]

 





1. (등재용) 아이유 기타 - 흑백사진.jpg


2. (등재용) 진주중 악대부 사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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