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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세하루 님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44. (수필) : 코피

 

코피

 

삼일 이재영

 

사람이 맡은 일에 너무 몰두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이상한 짓거리를 하기도 한다.

내가 L그룹 내 J 사 연구소에서 무전기 개발부서 과장으로 있을 때 일어났던 일이다.

미국 유명 통신 제품 메이커인 M 사로부터 가정용 무선전화기 코드리스폰의 초기 샘플 보드를 입수하여 개발제안서를 올렸지만, ‘수출 사업부의 거부로 보류되었다.

당시는 관납, 군납, 수출 등 3개 사업부로 나뉘어 사업부장 책임제로 운영되고 있어서, 사업부의 승인을 받아야 연구소 개발 프로젝트로 채택되었다.

 

그런데 그 샘플을 대신 가져간 중소기업체 N 사에서 불과 1년 만에 한 달 수출 수십만 대의 대박을 터뜨렸고, 뉴스에 크게 도보 되었다.

그러자, 그룹 기조실에서 난리가 났고,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무선전화기니까 T 사 대신 J 사에서 맡으라는 회장님 지시가 내려졌다.

당시 내수를 독점하던 유선 전화기는 T 사에서 제조했는데, 사장이 회장님의 숙부였다.

 

그때 L그룹은 S그룹과 티브이, 냉장고, 선풍기 등 가전제품 시장에서 서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치열한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내가 한마디만 하겠어. 돈이 얼마가 들든 사람이 얼마가 들든, 6개월 만에 출시 끝내!”

본사의 긴급 생산 회의에 불려갔을 때, 사장단 회의에 다녀온, 패밀리가 아닌 우리 사장님이 하신 말씀이다.

 

개발 기간만 4개월은 잡아야 하지만 다행히 사전에 검토를 충분히 했던 터라, 베이스와 핸드셋에 각각 한 명씩 배정하고, 개발 목표 3개월로 출발했다. 케이스 제작용 금형 설계 등 기구 부품 개발 담당자는 기구 전담 과에서 따로 배치한다.

개발 담당자 두 명은 석 달 동안 매일 잔업하고 휴일에도 나와서 종일 특근했다.

목표 납기를 목전에 둔 몇 주일은 야간에 두 시간만 잠자고 일하는 철야도 하게 되었다.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핸드셋 특성에 문제가 있어, 담당자 K 기사에게 철야를 시키고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해서 불렀다. K 기사는 학군단 출신 예비역 중위로 입사 2년쯤이었다.

그런데 데이터를 보니 밤새 별로 진척된 것 없이 제자리걸음이다. 낼모레까지 부품표를 확정지어 공장에 이관해야 하는데 난감했다.

표정만 봐도 피로에 잔뜩 찌든 K에게,

좀 있다가 나도 가 볼 테니까 얼른 가서 더 시험해 보도록 하소.”라고 지시했다.

 

K는 목을 떨구고 시험실을 향해 걸어가는데, 선임 대리가 얼른 다가오더니,

, 과장님. 좀 전에 K 기사 코피 흘렸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 코피? 어이, K 기사!” 하며, 막 출입문을 열려는 K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 소리에 K가 뒤돌아서 나를 바라보자, 손가락으로 K를 가리키며 내 입에서는,

코피 흘렸어? 이리와 잠시 쉬어. 이따 함께 가 보세.’라는 말 대신,

코피 흘리면 다야? 일을 끝내고 흘리든 말든 해야지!”라는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십여 명 다른 과원들이 모두 의아하고 실망에 찬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고, 나도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인가 싶어 얼굴이 붉어졌다.

 

그 코드리스폰은 우여곡절 끝에, 체신부의 형식승인을 획득하느라 한 달쯤 지체되긴 했지만, 착수 7개월 만에 국내 최초 타이틀을 달고 시중에 출고되었다.

그러고 한 10년쯤 후에 내가 먼저 그룹을 떠나 개인 사업체를 차리며 K와 헤어졌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서울 어느 지하철 역사에서 우연히 K와 마주쳤다.

반갑게 인사한 그는 한국 전화번호부 주식회사에 다녔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쇠락하여 퇴사했고, 새 직장을 찾는다고 했다.

나는 그와 입사 동기로 연구소 다른 과에서 근무했고, 마침 당시 꽤 전망 좋은 기업체 사장으로 있는, 회사 후배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그 회사 업종과 사정을 자세히 설명해줬다.

그걸로 K 코피 사건에 대한 미안함이 다소나마 희석되었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라떼는 말이야, 상하 관계가 매우 엄격했고, 맡은 일에는 불타는 사명감으로 임했으며, 개인 사정 보다는 업무를 우선시하는 직장인의 풍토가 있었다.

밤샘하고 코피를 흘려도 업무수행을 위한 당연한 일로 여겼고, 퇴근길에 동료들과 선술집에 들러 값싼 술잔을 나누며 서로를 격려했다.

 

요즘은 조직보다 개인의 능력이 우선시 되는 시대라서 연공서열을 타파하는 추세다.

프로젝트의 기능에 맞춰 팀을 구성하고 구성원을 수평적인 조직으로 운영하다 보니, 대리나 과장 같은 직함 뒤에 자를 붙여서 부르지 못하게 하는 회사도 있단다.

그게 기술 좋은 로봇들이 모여 일만 하는 무미건조한 집합체지, 어디 감성을 지닌 사람이 함께 동고동락하는 직장인가 싶다.

 

내가 다녔던 J 사는 한때 서울 본사 및 오산 공장과 연구소를 포함한 전체 남녀 사원이 1,500여 명에 이르는 제법 큰 방위산업체였다.

그런데, 그룹 사정으로 인해, 체신부에 납품하던 관납 제품과 조달청에 납품하는 군용 통신장비가 점차 인원과 함께 다른 계열사로 이관되었다.

나머지 민수용 제품인 PCB(인쇄회로기판)만 유지하다가 결국은 그마저 다른 회사로 매각되어서 지금은 회사 이름도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금성OO 사우회라는 카페에는 회원이 150여 명이나 되고 매년 총회를 열며, 총무가 수시로 회원들의 길흉사를 문자로 보내온다.

 

돌이켜보면 모든 여건이 열악했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던 그때가 훨씬 지내기 좋았던 직장생활이었다 싶다.

사람은 다 제멋에 살겠지만, 좋은 조건에서 자유롭게 일하며 칼퇴근하는 요즘 직장인들이 되레 불쌍해 보이는 건 내가 너무 늙어서일까?




[  남강문학협회 회지 2021년  13호 등재 ]




LG 마크 코드리스폰 (등재용).jpg


댓글 2

  • 001. Personacon 이웃별

    21.12.03 20:58

    오우 저런 전화 우리집에도 있었어요! ㅎㅎ
    우리나라 기업들이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참 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하는 글입니다. 그 속에 맘세하루님이 계셨다는 사실도 기억하겠습니다^^ 코피 흘리며 연구하셨던 K 기사님도요!
    그런데 중간에 라떼는 뭔가요? (라떼는 말이야, 상하 관계가 매우 엄격했고..) ^ㅁ^

  • 002. Lv.55 맘세하루

    21.12.04 12:30

    네, 이웃별님 댓글 감사합니다.
    그렇죠. 7080 세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우리나라가 현재 세계 제 10위의 경제 대국에 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되옵니다. ㅎ
    아하, "라떼는 말이야"는 요즘 유행어로,
    "나 때는 말이야..."로 옛날 얘기 시작하는 꼰대들 흉보는 말인 줄 모르셨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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