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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상


[내 일상] 29. (수필) : 호박죽

 

 

호박죽

 

이재영

 

집 근처 종합병원에서 대장암 3기 수술을 받고 퇴원한 지 열흘 만에 인천의 모 대학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게 되었다.

항암치료는 수술 부위에 남아있는 암세포가 간이나 폐 등의 다른 장기로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항암제를 주사기로 주입하는 치료 방법이다.

항암제를 50시간 연속하여 주사하므로 최소한 2 3일간은 입원해야 하며, 이런 치료를 2주마다 총 12(24주간, 6개월)를 받은 후에 전이가 없으면 완치 판정이 내려진다.

 

인터넷에서 항암치료 체험기를 살펴봤더니, 항암제 주사를 맞게 되면 손발이 저리고 구토가 나며 식욕이 떨어지는 등 부작용이 생기는데, 그럴수록 음식을 제대로 먹어야 버텨낼 수 있다고 했다.

항암 치료차 대학병원에 입원한 둘째 날 식욕이 떨어져서 환자복 차림으로 매점이 있는 지하층을 둘러보다가 죽 전문점에서 소고기 야채죽을 시켜 먹었다.

 

환자 외에도 병문안하러 온 가족 여러 명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 어떤 환자복 차림의 80대 할머니 옆에 아들로 보이는 50대의 신사가 앉고, 맞은편에 수수한 옷차림새의 딸 같은 두 여인이 내게 뒷모습을 보인 채 앉아 있다.

아들과 딸들은 각자 죽을 먹고 있고, 할머니는 죽 그릇 없이 피곤한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다.

엄마, 이것도 못 먹어? 안 넘어가?”

딸 중에 나이 많아 보이는 여인이 자기가 먹는 죽 숟가락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관심 없다는 듯 멀뚱히 바라만 본다.

병원에서 나오는 음식은 먹을 만해? 괜찮아?”

둘째 딸도 물어보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만 짓고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아들은 말없이 할머니를 힐끔거려 보면서 자기 죽만 부지런히 먹는다.

혹시 자식들도 몰라보는 치매 노인인가?’ 나는 속으로 그래서 아무런 대답을 안 하는 거로 생각했다.

 

입원이 치매 때문은 아닐 테고, 무슨 다른 병에 걸려서 입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족들이 참 답답하겠다 싶어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왕 문병을 왔으면 할머니가 드실만한 음식부터 챙기고 나서 자기들 식사를 하는 게 옳지 않겠나 싶어 관심을 두고 눈여겨봤다.

 

그런데 잠시 후에 어떤 양장 차림의 아주머니가 들어오자 아들이 일어나서 늦었네?” 하면서 죽그릇을 들고 옆자리로 옮겼다.

그 여인은 선 채로 할머니에게 어머니,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 알아보겠어요?”하고 웃으며 말했지만, 할머니는 잠깐 쳐다만 보고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치매임이 분명하고 여인은 며느리인 것 같다.

며느리가 자리에 앉더니 시누이들의 죽그릇을 훑어보고는 어머니 좀 드셨어요?” 하고 물었다.

시누이들이 안 드셔요.” 하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가 먹을 단팥죽을 주문하고는 할머니에게 살갑게 굴면서 시누이들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누었다.

분위기로 짐작건대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살림 형편이 덜한 딸들은 평소에 어머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듯싶다.

역시 어머니를 직접 모시고 사는 당당한 며느리의 발언권이 관계상 일반적으로 어렵게 대해야 할 시누이들보다 더 세어 보인다.

 

잠시 후 단팥죽이 나오자 며느리가 숟가락으로 조금 떠서 입으로 후후 불더니 어머니, 단팥죽 좀 잡숴보세요.” 하며 왼손으로 할머니 머리를 받치고 입에 갖다 대었다.

며느리 딴엔 시누이들이 먹는 죽이 할머니 입에 안 맞아서 못 잡순 거로 보고, 일부러 단팥죽을 시킨 것 같다.

할머니는 도리질하다 며느리가 억지로 입에 넣자 멈췄고, 입술로 조금 핥아서 먹더니 도로 입을 뗐다.

며느리가 다시 시도했지만, 할머니는 계속 거부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속으로 아무래도 할머니가 병환 때문에 식욕을 완전히 잃은 게 아닌가 싶어 안타까웠다.

아무리 달착지근한 단팥죽이라도 식욕이 없으면 쓴 소태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때, 죽집 주인아주머니가

이걸 한번 권해보세요. 호박죽이에요.”

하며 죽그릇을 들고 와서 식탁에 놓고 갔다.

유심히 지켜보던 50대 주인아주머니가 경험상 내린 방안인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할머니는 며느리가 떠서 주는 호박죽을 받아먹더니, 조금 있다가 숟가락을 뺏어 직접 든 채 조금씩 떠서 잡숫는 게 아닌가?

할머니가 호박죽을 먹도록 움직인 놀라운 힘은 도대체 뭘까?

 

나는 아직도 그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설명할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다만 나름대로 내린 어설픈 추론은 한 가지 있다.

옛날 할머니의 가난하고 배고팠던 젊은 새색시 시절에 제일 많이 해 먹었던 죽이 호박죽이었고, 그때 물리도록 먹었던 호박죽 맛이 기억세포 깊숙한 곳에 남아있다가 아련한 추억으로 되살아나 오히려 입맛을 돋우었을 거란 생각이다.

 

팔순인 할머니의 새색시 무렵이면,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이고 1960년대 초반인데, 6·25전쟁을 3년간이나 겪고 난 몇 년 후라 먹을 것도 구하기 어려운 피폐한 나라가 되었던 시절이다.

그 당시 시골의 가난한 집 여식들은 초등학교만 겨우 나와서 힘쓰는 농사일 대신 빨래, 청소, 밥 짓기 등 집안일이나 거들며 시집갈 때까지 밥이나 축내는 식충이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입 한술이라도 덜기 위해 딸자식을 도시의 부잣집에 식모라 불리던 가정부로 내보냈다. 딸년은 삼시 세끼 배곯지 않아 좋고, 부모는 약간의 월급도 받을 수 있어서 일석이조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그러던 시절이니 시골에서 가난한 집에 태어나 역시 가난한 시댁에 시집이라도 가게 되면, 새색시는 하루 세끼 챙겨 먹어야 할, 끼니 걱정에 빈 쌀통을 한숨으로 채웠을 것이다.

여름철에는 보리밥 한 덩어리를 물에 꾹꾹 말아 풋고추와 된장만으로 후루룩 비워 먹었고, 초가지붕과 담장 위에서 큼직하고 누렇게 익은 호박을 따서 고방에 넣어두고, 긴긴 겨울철 여러 끼니를 밥 대신 호박죽으로 연명했을지도 모른다.

그 알싸하고 지겨웠을 새색시 시절의 음식 맛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던 것일까?

 

생활이 풍족해진 요즘엔 모르긴 해도 직접 밥 짓고 반찬 만들어 밥상 차리는 새색시가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반찬도 여러 가지 골고루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국거리도 포장된 채로 사다 끓이기만 하면 되고, 쌀만 씻어서 전기밥솥에 넣고 버튼만 누르면 되는 세상이다.

남아도는 시간을 되레 살 빼는 다이어트 걱정이나 하며 보내지 않으려나?

 

어쩌면 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대부분이 먹을 거 제대로 못 먹어 영양실조에 의한 병으로 온 사람보다 건강에 해로운 것까지 이것저것 너무 많이 먹고 탈이 나서 온 사람이 더 많지 싶다.

대장암 수술을 받은 나도 음식을 함부로 섭취한 대가로 병을 얻은 게 분명하지 않은가.

이제라도 병이 다 나으면 배고팠던 옛 시절의 음식 차림으로 되돌아가야 하겠다.

 

 

 

< 종합문예지 [문예감성] 2020년 겨울호 등재 >



댓글 2

  • 001. Personacon 이웃별

    21.01.14 16:19

    호박죽!
    저도 어렸을 때 할머니가 해주시던 호박죽,
    늙은 호박을 썰어넣고 찐 백설기 등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래서인지 늙은 청둥호박을 떡호박이라고도 했어요.
    요즘 마트에서 파는 건 단호박죽이라 고급호박죽 맛을 아는 제 입엔 너무 달게 느껴지더라고요. ㅎㅎ
    치매에 걸린 어르신들 이야기는 언제나 마음이 무겁네요.
    20년을 키워주셨는데 자식의 20년과 부모의 20년은 왜 이렇게 달라야 할까 생각하게 됩니다.

  • 002. Lv.53 맘세하루

    21.01.14 19:40

    네, 이웃별님 감사합니다.
    별님도 늙은 호박죽 맛을 아시는군요.
    인생 20년 금방 가는데, 항상 건강에 신경써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대장암 완치되니까 당뇨가 생겨서 닷새 입원하고 월요일에 퇴원했습니다.
    지금은 잡곡 좀 섞어 먹는데, 좋은 시절 다 갔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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