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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세하루 님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26. (수필) : 면장과 교장

 

 

면장과 교장 : 사부곡 思父曲

 

삼일 이재영

 

내가 어릴 적 국민(초등)학교에 다닐 때, 국민학교 교장이던 아버지는 방학이 되면 나를 데리고 고향에 다녀오셨다.

내 본적지인 고향은 경남 하동군 화개장터 근처의 가파른 산자락에 20여 가호가 숨어있다 싶은 산골 마을이다.

큰길에서 올려다보면 집들이 잘 보이지 않아서 임진왜란 때도 무사했다는 얘기가 전해질 정도로 아주 외진 곳이다.

 

4학년 여름방학 때던가, 완행 시외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두 시간 넘게 달려 화개장터에 내려서 고향 마을까지 10여 리 되는 자갈길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때 저만치서 삼베옷을 입고 지게에 똥장군을 지고 오던 어떤 촌부가 아버지를 보더니, 얼른 길가에 지게를 내리고 지겟작대기로 바쳐 세우는 게 아닌가.

그리고 가까이 가자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는

아이구, 면장님 오셨습니까?”하며 굽신 절을 했다.

 

나는, ‘면장님이라니? 아버지는 교장인데. 정말 무식한 시골 사람이고만.’하고 속으로 비웃었다.

아버지는 반가워하며 하댓말로 그 사람 가족들에 대한 안부를 묻고 몇 마디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헤어져 다시 걷다가 내가 그 사람이 면장과 교장도 구분 못 하는 무식한 사람 같다고 했더니,

내가 예전에 여기서 면장을 해서 그런다.”고 하셨다.

지금껏 그런 얘기를 들어보지 못한 나는 깜짝 놀라서 어리둥절했다.

 

그 후에 기회가 있을 때 몇 번에 걸쳐 아버지 어린 시절부터 교장이 될 때까지의 옛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 시대인 1908년에 가난한 집안의 3 2녀 중 둘째로 태어난 아버지는 20리 길의 화개 국민학교에 4학년까지 다녔고, 5, 6학년은 하동 읍내의 하동 국민학교에 다녀서 졸업했다.

가난했어도 전주 이가 李家 효령대군 후손의 자부심으로 공부를 시켰지 싶다.

 

그리고 말단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하동 읍내 경작조합에서 서기로 근무했다.

자전거를 타고 인근 산청군까지 지리산자락을 누비며 다녔고, 나중에 화개면으로 옮겨 근무하면서 직위가 올라갔다.

해방되기 전인 1941년에 아버지는 화개면장이 되었고, 그때 나이가 33세였다.

 

그런데 그해에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하동 군수로 부임한 분이 있었는데, 이름은 이항녕이고 나이는 26세였다.

아버지가 인사차 갔더니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군수는 젊어도 되는데, 면장은 좀...” 하더라는 것이다.

 

이항녕 씨는 나중에 해방이 되자, 일제하에 고위 공무원을 지내며 친일 親日한 것을 자책하여 스스로 사퇴하고 교직의 길을 걷게 된다.

청룡 국민학교와 양산 중학교 교장을 시작으로 나중에 문교부 차관과 홍익대 총장을 지냈고, 학자로도 유명한 분이다.

 

아버지도 그분의 뜻을 따라 해방 후에 하동 흥룡 국민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교직에 몸담았고, 내가 태어난 1952년에는 김으로 유명한 갈사리의 갈육 국민학교 교장으로 계셨다.

 

내가 철이 들어 기억하는 다섯 살 때는 진정 국교, 입학하던 일곱 살 때는 소설 토지의 배경인 최 참판 댁이 있는 악양 국교 교장이었다.

내가 3학년이 되던 해에 셋째 누나가 교육대학교 전신인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진주 시내로 이사를 했고, 아버지는 진양군으로 전근해서 나중에 진양호에 수몰된 귀곡 국교 교장에 부임했다.

 

부임 인사와 관련한 웃지 못할 일화가 있다.

겨울방학 중이라 아버지는 정장 위에 코트까지 입고 진양군 교육청에 들렀다.

체격이 꼿꼿하고 풍채가 좋은 사람이 들어와 주저함도 없이 교육장을 찾으니, 교육장은 혹시 도 교육청이나 문교부에서 나온 높은 분으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되레 저자세로 아버지를 맞이했던 교육장은 나중에 친구가 되어 여러 번 관용 지프를 타고 진양호에 놀러 가자며 우리 집에 오곤 했다.

 

그래서 나도 서너 번 인사한 적이 있는데, 그분의 아들이 내 고교 한 해 후배였고 나중에 높이뛰기 국가대표를 지냈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주 중, 고등학교를 마치는 동안 귀곡 국교에 계시다가 부산대학교에 입학할 무렵 진양군 내의 집현 국교로 전근하셨다.

 

1970년 대학에 입학할 때 적어내는 설문지 같은 게 있었는데,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난이 있었다.

그 당시 친구들 대부분은 F. 케네디라고 전 미국 대통령을 적었을 텐데, 나는 주저 없이 아버지라고 적었다.

 

알뜰하게 살면서, 큰 집 장조카에게는 제수답 祭需畓 세 마지기를 사주고, 나머지 두 명의 조카들이 결혼할 때도 논마지기씩을 사주신 걸 알고 있었다.

일가친척들 거주지인 화개면의 면장을 지냈으니, 집안의 어른으로서 정신적으로 든든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사범학교 출신도 아니고 최종 학력이 고작 국졸이면서 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이 되어 반평생을 후학 양성에 정진하셨다.

교육장 앞에서도 굽신거리지 않고 당당하게 처신하여, 오히려 교육장이 친구가 되었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 건강하고 성실하게 살아오신 아버지가 내 눈엔 그 누구보다 가장 존경스러운 분으로 보였다.

 

그리고 지금 집안의 시사를 지내는 백여 평 제당 祭堂 터도 생전에 마련해서, 온 집안사람들이 매년 십시일반 기부금을 내어 건축비를 마련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몇 년 후에야 짓게 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새천년인 2000년에 92수로 이승을 하직한 아버님 모습을 문득 거울 속에 비친 내 허연 대머리에서 발견하며 놀라곤 한다.

 

입학 전 여섯 살 때 악양 국교 관사에 살 무렵,

점심시간에 어머니가

아부지 점심 잡수러 오시라 해라 하면,

 

마지못해 교장실에 가서는

아부지, 점심...” 하며,

잡수러 오시래요

왠지 존댓말 쓰는 게 부끄러워 말 못 하고 생략하면,

 

오냐, 가자.”

하고 웃으며 일어서 내 손을 잡던 아버지 모습이

엊그제처럼 선하게 떠오른다.

 

생전에 좀 더 잘해드리지 못한 아쉬움에 가슴이 저린다.

효도는커녕, 사업한답시고 잘 다니던 회사를 뛰쳐나와 밤늦게 귀가하고 돈에 쪼들려 허덕이는 못난 자식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가슴 아파하셨을지.

이제야 철이 들어 안타까운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회한으로 피멍이 든다.

 

 

 

 

 

 

 

[ 종합문예지 문예 감성 2020년 가을호 등재 ]

 



댓글 2

  • 001. Personacon 이웃별

    20.10.15 21:33

    이번 글은 교과서나 옛날 문예지에 나올 법한 귀한 이야기네요.
    아버님께서 여러 모로 정말 멋진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분의 모습을 거울 속에서 매일매일 볼 수 있으니 맘세하루님은 복 받으신 거~~^ㅁ^

  • 002. Lv.55 맘세하루

    20.10.16 09:35

    아하, 이렇게나 극찬을 하시니 몸 둘 바를...
    네, 아버지는 지금도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아버지의 반도 못 닮은 제가 부끄럽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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