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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세하루 님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4. (수필) : 대추 서리

         대추 서리

 

 

                                                                               맘세하루

 

내가 사는 작은 아파트단지에는 넓은 평수가 아니어서 그런지, 단출한 젊은 부부가족이나 나처럼 은퇴한 노부부만 사는 집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대로변에서 벗어난 아파트단지들 사이 도로의 가로수는 거의 은행나무인데, 암수를 고려해서 심었는지 가을이면 잘 익은 노란 은행이 낙엽과 함께 잔뜩 떨어져 길바닥에 나뒹군다. 도로에서 아파트단지로 들어서면 가로수는 느티나무와 벚나무가 대종을 이루고 봄에는 화사한 벚꽃이 만개해서 꽃 터널을 만들어, 달리 봄나들이를 하지 않아도 새봄의 정취를 흠뻑 맛볼 수가 있어 참 좋다.

걷는 길 화단에는 새봄의 전령사인 하얀 목련과 성탄절트리로 사용하면 예쁠 것 같은 잘 다듬어진 주목이 적당한 간격으로 늘어서서 앞줄의 키 작은 회양목, 철쭉, 영산홍과 함께 새싹을 움틔워 나날이 변하는 생명의 부활을 지켜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그런데 우리 동 출입문 주변과 몇 개 동 화단에는 대추나무 여러 그루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심은 시기는 같을 것 같은데 키가 작은 나무는 종류가 다른지, 대추열매도 보통의 절반 크기이고 빨갛게 익는 시기도 훨씬 빠르다. 큰 대추나무는 우리 집 3층에서 내려다보면 바로 손에 닿을 높이로 자라서 가을에는 엄지 손마디보다 큰 토실한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한 눈요기를 제공해준다.

 

여보, 대추 따러 안 갈래요? 사람들이 따가 길래 물으니까, 아무나 따도 된대요.”

이곳으로 이사 온 작년 첫 가을에 외출했던 아내가 들어와 숨을 헐떡이며 졸랐다. 아파트 공유물이니까 낙과는 모르겠지만 달려있는 것은 어떻게 처리하는지 몰라서 구경만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먼저 따버린 모양이다. 갑작스레 길쭉한 막대기를 찾느라 한참 후에야 긴 우산을 들고 가보니까, 대추나무 마다 낮은 부분은 거의 다 따가고 높은 꼭대기에만 몇 알 안 되는 열매가 남아있다.

아직 붉은색이 절반도 물들지 않았던데 풋것을 급하게도 따갔나 보네? 허허.”

하는 수 없이 단지 내를 돌아다니며 오르기도 쉽지 않은 나무를 바동바동 억지로 올라가서 나뭇가지 끝자락에 달린 열매를 겨우 털어서 한바가지 쯤 주워왔다.

연두색 대추는 먹어보지 않았었는데 아삭하게 깨물어 씹어보니 그런대로 단맛도 나는 것이 예상외로 먹을 만 했다. 어린 시절에 수박이나 참외서리는 몇 번 해봤지만 길가의 은행나무 열매를 털어 가면 공유재산 무단취득죄로 벌금을 내는 세태이다 보니, 아파트단지내의 대추라도 서리를 해오면 범죄가 아닌지 걱정되었다. 아내는 처음 서리해본 대추라서 더 맛있다며 혼자서 열 개도 넘게 오물오물 먹어치웠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 무렵에 허리가 결리고 허벅지도 뻐근해져서 내년에는 일찍 따러가자고 웃으며 약속했었다.

 

제사나 명절 차례 상 맨 앞줄에 놓이는 조(대추), (), (), ()의 한가지인 대추는 원산지가 한국이고 중국과 일본, 남유럽에 분포되어 있으며 경남 밀양과 충북 보은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다. 잘 익은 대추열매 말린 것은 자양, 강장, 진해, 진통, 해독 등의 효능이 있어 한방에서는 기력부족, 불면증, 약물중독, 만성기관지염 등에 쓰인다. 대추는 열매가 많이 열려 다산과 풍요의 의미로 혼례식 때 신부에게 던져주는 폐백용 과일이 되었으며, 재목이 단단하여 떡메나 달구지의 재료로 쓰이고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물에 가라앉는 특색이 있어 값 비싼 도장을 파는 재료로 사용된다.

 

가로수로 심어진 은행나무는 차량의 매연으로 인해 열매에서 발암물질이 추출된다는 보도가 나간 이후로 털어가는 사람도 드물지만, 길바닥에 떨어진 열매도 주워가기는커녕 마구 짓밟고 다녀서 노랗게 쌓인 은행잎을 사각사각 밟으며 걷는 가을정취마저 경감시키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대추나무도 길가에 심어지면 마찬가지가 될지는 모르지만, 아파트단지내의 대추는 오며가는 사람들 누구나 한번쯤은 털어서 따보고 싶은 마음이 들만큼 탐스럽고 귀해 보인다.

수 억 년을 살아남은 은행나무나 수 만년을 견뎌온 대추나무처럼 사람도 제가 설 자리에 배치되어야 비로소 자기의 고유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선 취직자리가 급하다고 본인의 적성과 자질에 맞지도 않는 일자리를 찾았다가는, 괜한 시간만 낭비하고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 쓸모없는 사람으로 전락하여, 돌이킬 수 없는 후회나 남기게 될 잘못을 범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화려한 대로변의 가로수가 되었다가 말년에 무시당하고 짓밟히는 은행나무보다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의 눈에만 뜨이지만 제자리에서 묵묵히 할 일에만 종사하다가 늘그막에 여러 사람으로부터 칭송받는, 대추나무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처신이 아닐지 모르겠다.

 

추석을 일주일쯤 남겼을 때 햇볕에 반짝이던 연두색 대추열매가 붉은색을 조금씩 띄기 시작했다. 아내와 나는 우리 집 앞의 대추나무를 추석전날 털기로 하고 빨래건조대의 긴 막대를 뽑아내어 현관입구에 세워두었다. 추석날 찾아올 금년에 입학한 손녀와 며느리들에게도 맛을 보일 수 있고 직접 수확한 과실을 차례 상에도 올릴 수 있겠다고 좋아하며 들락거릴 때마다 대추열매를 올려다보고 흐뭇해했다.

 

여보, 큰일 났어요. 대추를 누가 다 따버렸어요!”

외출 갔던 아내가 들어서며 기함을 하였다. 화들짝 놀라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니 우리 대추나무에 소담스레 달려있던 볼그레하던 대추가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아니, 이런! 어떤 사람이 우리대추를 서리해간거야?”

나는 놀라고 화가 나서 고함을 질렀다. 일 년 동안이나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느 몰상식하고 무례한 화적보따리 같은 사람이 우리대추를 말도 없이 몰래 다 털어갔는지 도대체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집안에 있으면서 그것도 제대로 감시 못하고 뭐했냐는 아내의 핀잔을 들으며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양손으로 얼굴만 문질러대었다.

그냥두면 안되겠고, 내년에는 아무나 따지 못하게 하고 일정한 날을 잡아서 함께 털어 나누는 방안을 관리사무소에 건의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아내와 나는 다소 안심하며 씁쓰레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대추? 그런데 한참 후에 갑자기, 왜 내가 우리대추를 몹쓸 사람한테 서리 맞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다면 우리도 누군가가 따려고 마음먹고 기다리던, 남의 대추를 서리하려고 계획했던 게 아닌가?

나이가 들면 동심으로 돌아간다지만, 내 것, 남의 것, 우리 것도 구분 못할 정도로 아둔해지면 안 되는데 생각하며, 잠시 동안이나마 아파트의 공동소유인 대추나무 열매를 내 집 앞에 있다고 마치 내 것 인양 착각했던 게 부끄러워 혼자서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2015 9



댓글 4

  • 001. Personacon 고스테일

    16.10.31 08:45

    일년을 기다리고 준비까지 마쳤는데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다면 누구나 당황스러웠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사유물은 아니지만 자주 볼수록 정든다고 그래도 집앞에서 오랜 시간 지켜봐왔었으니까요..?
    올해는 어떠셨을지 살짝 궁금함이 들곤 하는 글이었습니다..!

  • 002. Lv.55 맘세하루

    16.10.31 14:06

    네, 고스테일님 댓글 감사합니다.
    아파트 관리실에서는 아무나 따먹어도 된다고 했는데, 금년에는 이상하게 아무도 안 따가서 우리 집앞 대추는 두 차례에 걸쳐서 전부 다 땄습니다.
    거의 한 양동이가 넘는 걸 추석차례상에도 올리고 자식들한테도 나눠주고 남은 건 말려뒀어요.ㅎㅎ

  • 003. Personacon 이웃별

    16.11.11 00:25

    ㅎㅎㅎ 역시 낭만소년 맘세하루 작가님이십니다 ^-^*

  • 004. Lv.55 맘세하루

    16.11.11 08:48

    ㅋㅋㅋ 삼계탕에 대추를 듬뿍 넣었더니 너무 달아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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