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맘세하루 님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12. (수필) : 불혹

                       불혹(不惑)

 

                                                                                                  맘세하루

 

설날, 거실에서 차례를 지내고 가족들과 담소를 나눈 장남이 제사상을 제자리에 두려고 내 방에 들어왔다.

네가 이제 마흔 살이 되는구나.”

, 벌써 그리되었네요.”

장남은 오랜만에 건네는 아비의 질문이 어색한지 쑥스럽게 대답했다.

마흔이면 불혹이라는데, 미혹에서는 벗어난 게냐?”

마흔에 내 사업을 하겠다며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던 내 과거를 떠올리며 약간 민망해서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때 장남은 중학교 1학년이었다.

. , 할 일이 바빠서 다른 일에는 별로 신경 쓸 여유가 없네요.”

자기 직책에 만족하며 열심히 근무하느라 딴생각은 해본 적도 없는지 장남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대기업 연구소에서 부장으로 근무하며 이사 발령을 목전에 두고 있던 나는 마흔 살이 되던 해에 회사를 박차고 나와 아주 작은 내 회사를 차렸다.

인생은 40부터인데, 환갑까지 남은 20년 한 세대는 내 뜻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니 태어나서 스무 살까지는 부모님 뜻에 순종한 인생이었고, 이삼십 대의 사회생활도 내 의지보다는 주변의 권유에 따른 진로와 직장 선택에 의한 인생이었다.

 

그 당시 나는 셀룰러폰이라고 불리던 무선전화기 개발 책임자였는데, 미국 회사에 거금을 주고 기술제휴를 맺어 연구원들과 함께 몇 개월씩 출장도 나가면서 거의 3년 만에 완료하여 시중에 차량 탑재형과 휴대형, 두 모델을 출시했다.

출력이 높아 통화 거리가 먼 차량형의 본체는 너무 커서 트렁크에 장착하고 핸드셋만 운전석 거치대에 얹어 사용하였고, 휴대형도 크기가 거의 벽돌만 해서 가죽 케이스에 넣어 혁대에 차고 다닐 정도였다.

그러자 미국의 교포 바이어가 찾아와 보트에 들고 다닐 수 있는 트랜스포터블 폰을 럭비공 형태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그때 이미 15년 이내에 포켓에 넣고 다니는, 소비자 가격 수십만 원대의, 폴더 폰이 유행할 것으로 전망하던 나는 휴대폰 소형화에 주력할 계획이어서 무척 난감해졌다.

 

그보다 10년쯤 전에 수출용 코드리스폰 전화기 개발을 제안했다가 보류됐는데, 1년 후에 느닷없이 그룹 회장님 지시라는 국내 최초 출시에 맞추느라 내 부서 직원 두 명이 몇 개월간 코피 흘려가며 밤낮없이 고생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5년 후에 이 셀룰러폰 개발도 제안했지만, 당시 사업부제로 운영되던 회사 조직상 수출사업부의 동의를 얻지 못하여 보류되고 말았었다.

그래서 나는 전철을 밟을까 봐 차량형 셀룰러폰을 OEM 생산하고 있는 다른 그룹의 계열사로 이직했었는데, 2년 만에 다시 불려와 새 팀을 꾸려 늦게 착수하느라 기회손실 비용을 엄청나게 들이고 말았다.

 

이번에도 바이어를 앞세운 수출부서의 사업계획에 장단을 맞추다가는 또 세월만 낭비하고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겠다 싶어, ‘소형 셀룰러폰 사업계획서를 작성하여 그룹 외부에서 투자자 물색에 나섰다.

다행히 거금의 투자 의향을 가진 분을 만났고, 나는 원대한 꿈에 부풀어 오랜 기간 몸담았던 친정집을 떠나 미래의 블루오션을 향해 당당히 출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창업이라는 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었다.

사업을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그 투자자는 사정이 생겨 더는 약속된 자금을 송금할 수 없게 되었고, 갑자기 기름이 떨어진 내 배는 항해의 목표를 잃고 거친 바다를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공과대학을 나온 엔지니어가 기술적인 자만심에 가득 차서, 자금의 확보가 영업 매출에 앞서 실제로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도 제대로 파악 못 한 채, 덜컥 사업에 착수한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아쉬운 대로 전에 다니던 회사에 손을 내밀어 외주생산 같은 도움을 요청해 봤지만, 개인의 위상은 조직 내에 있을 때만 자기 능력 이상으로 높게 평가된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뼈저리게 깨달았을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여기저기 다니며 소소한 개발 프로젝트를 외주 받아 근근이 유지하다가 집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아가며 겨우 지탱하면서 십수 년 동안 굴곡진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신제품 개발에 몰두한 결과, 다행히 유효기간 15년짜리 특허를 받은 무전기 중계기를 제조 판매하며 환갑 지나서까지 수십 명을 먹여 살릴 수는 있었다.

그러는 바람에 고3인 장남이 아내에 의해 문과(文科) 지망생이 된 줄을 대학 입학 원서 쓸 때나 알았던 나는, 자식들이 필요로 할 때 곁에 없었던 못난 아비가 되어, 애들이 어른이 된 지금도 자격지심에 늘 미안한 마음을 갖는다.

 

그래? 별다른 생각이 없다니 다행이구나. 낼모레 차장으로 승진은 되는 거지?”

장남이 마흔 살이라 혹시나 했는데, 딴생각이 없는 것 같아 안심된 나는 당연한 듯 확인 차 물어봤다. 아들은 브랜드 인지도가 꽤 높은 중견 기업체에 다니고 있다.

, 아마 될 겁니다. 된다 해도 별로 기쁘지만은 않아요.”

차장이 되는데 기쁘지 않다니? 회장 비서실 일이 힘든가 보구나?”

의외의 대답에 걱정되어 다시 물었다. 오너 경영 체제의 회사에서 비서실 과장으로 근무한다는 게 쉽지 않을 줄 짐작은 하고 있다.

요즘은 한비자 이야기가 자꾸 와닿아요. 하하.”

 

한비자를 읽는다고? 한비자(韓非子)는 중국 전국시대 말기 한()나라 왕의 서자인 한비(韓非)가 법가(法家) 사상을 집대성해서 저술한 책이다.

전국 칠웅으로 불리던 한나라는 진(), , , , , 조 등 주변국보다 국력이 크게 뒤떨어졌다.

한비는 공자였지만 선천적인 말더듬이인 탓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는데, 한나라가 위태로워지자 부친인 왕 안()에게 난세에는 공자(孔子)의 인()에 의한 덕치(德治)를 베풀어서는 안 되고, 통치의 근간을 법과 처벌에 두어야 한다.’며 법치(法治)를 주장하는 부국강병책을 지어 올렸지만 무시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강력한 군주 국가를 지향했던 진()나라의 왕() (후에 시황제) ()을 앞세운 신상필벌의 권세로 임금이 신하와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한비의 이론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를 불러 전국 시대를 통일하여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을 세운 후에 법치를 정치원리로 삼았다.

그러나 한비는 그의 출세를 시기한 친구인 진나라 승상 이사의 모함으로 투옥되어 결국 독약을 마시고 죽게 된다.

그리고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용하는 온갖 모략과 술책이 수용된 한비자를 따른 진시황제의 진나라는 불과 15년 만에 멸망하였고, 공자의 인에 의한 덕치 정치는 항우의 초()나라를 누르고 중국의 통일 왕조인 한()을 세운 유방에 의해 다시 숭앙 되어 현대에 이르렀다.

 

한정된 시장을 두고 유사한 제품의 점유율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회사 간에 피 튀기는 전략과 전술이 펼쳐지는 현대 기업체들의 형세도 2천 수백 년 전의 전국시대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마흔 살이 된 내 아들이 전국시대 제자백가 중의 한 사람인 권모술수 사상가 한비의 책 한비자를 읽는다니? 줄서기를 잘 해야 하는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여러 가지 일로 고민이 많은가 보다.

 

유능한 사람은 적이 많은 법이다. 윗선의 질문에 대답할 자료만 잘 준비하고 두루뭉술하게 티 나지 않도록 처신하는 게 최선일 거야. 허허.”

나는 예전의 대기업 시절을 회상하며 충언이랍시고 한마디 하고는 실없이 웃었다.

아비는 미혹(迷惑)하여 인생의 황금기를 어렵게 보냈지만, 아들은 제발 불혹(不惑)하여 현재 다니는 회사에서 정년으로 퇴임하기를 간곡히 바라는 마음에서다.

 

 

 

 

[계간지 ㅁㅇㄱㅅ’ 2019년 봄호 게재]

 



댓글 4

  • 001. Personacon 고스테일

    20.01.04 15:52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002. Lv.55 맘세하루

    20.04.13 09:24

    네, 고스테일님 댓글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그 존재만으로도 항상 자식에게 든든한 기둥이 되시는 분이지요.
    그래도 늙고 병들면 그 당당함이 예전만 못하니, 자주 연락드리며 효도하는 것이 제일 일 겁니다.

  • 003. Lv.32 마카포

    20.06.26 09:37

    벽돌만 한 전화기! 생각해보니 저 어릴때 아저씨들이 대각선으로 메는 가방같이 생긴 곳에 넣어 자랑삼아 들고 다니는 것을 본 기억이 나네요. 어린 마음에 저렇게 무거운 걸 들고다니느니 그냥 공중전화 쓰면 편할텐데...라는 생각을 했더랬죠.ㅎㅎㅎ

  • 004. Lv.55 맘세하루

    20.07.02 14:51

    네 마카포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랬었죠. 가격도 아마 100만원 넘어서 귀중품이라 곱게 보관했던 것 같습니다. ㅎ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글목록
번호 제목 작성일
34 내 일상 | 34. (수필) : 편하게 살자 *2 21-04-16
33 내 일상 | 33. (수필) : 소라게의 교훈 *2 21-04-03
32 내 일상 | 32. (소설) : 육군 이등병 *2 21-03-24
31 내 일상 | 31. (시) : 창 *2 21-03-23
30 내 일상 | 30. (수필) : 지하도 무뢰배 *2 21-03-12
29 내 일상 | 29. (수필) : 호박죽 *2 21-01-12
28 내 일상 | 28. (수필) : 보호자 *2 21-01-12
27 내 일상 | 27. (수필) : 손녀딸 *2 20-12-04
26 내 일상 | 26. (수필) : 면장과 교장 *2 20-10-12
25 내 일상 | 25. (꽁트) : 바닷가에서 - (60년 결실) *2 20-10-06
24 내 일상 | 24. (사진) : 흑백에서 컬러로 (유수와 같은 56년 세월) *2 20-10-05
23 내 일상 | 23. (수필) : 전면 주차 20-09-17
22 내 일상 | 22. (수필) : 셋째 누나 *2 20-09-09
21 내 일상 | 21. (수필) : 히포크라테스는 죽었다 *2 20-09-06
20 내 일상 | 20. (수필) : 황혼길 20-08-30
19 내 일상 | 19. (수필) : 땅속 워킹 다이어트 20-08-23
18 내 일상 | 18. (수필) : 천장 천공 20-08-23
17 내 일상 | 17. (수필) : 해마 아빠 *2 20-06-25
16 내 일상 | 16. (수필) : 애연 40년 *2 20-06-25
15 내 일상 | 15. (수필) : 노부부 *6 20-06-23

비밀번호 입력
@genre @title
> @subject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