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승자
안녕하세요.
궁 밖에서 벌어진 소란에 궁금해진 상청궁의 제자 몇 명은 수비병들이 넋을 잃고 있는 틈을 타 궁 밖을 슬쩍 내다 보았다.
그 곳은 왠 청년이 눈에 익숙한 초식으로 기를 모으고 있었다.
백수의 물 흐르듯 부드러운 초식을 보던 제자 온 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주 오래 전, 선대 장문인의 시범으로 한 번 보았던 초식을 눈 앞의 청년이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청년은 누구냐. 어떻게 저 아이가 진룡보전(眞龍寶傳)을 알고 있는 거지?"
진룡보전은 선대 장문인에게 단 한 명의 수제자만 전수받을 수 있는 청성파의 절대 비급이었다.
선대 장문인이 급사한 탓에 최고수인 진 가민 조차 전수받지 못한 문파의 절대 비급을 눈 앞의 처음 보는 청년이 보여주고 있었다.
"틀림없다. 저것은 진룡보전이 분명해!"
"하지만 저 청년이 어째서..."
그 때 좌두곤의 용병들이 뛰쳐 나와 백수에게 창검을 겨누었다.
진 가민은 자신의 싸움과는 상관없는 청년이 목숨을 잃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기에 검을 들고 앞으로 뛰쳐나왔다.
"공자는 어서 몸을 피하시게! 어떻게 진룡보전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나 여기는 자네가 목숨을 버릴 곳이 아니네."
그 때 상청궁 내부에서 큰 소란이 일어나면서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사방에서 진동하기 시작했다.
상청궁 내부에 있던 제자들이 백수를 보기 위해 좌두곤 측 군사의 포위망을 뚫기 시작한 것이었다.
"진룡보전을 알고 있다면 청성파의 사람이네. 어서 저 청년을 지키러 가세!"
"좌두곤은 왜 이런 상황에서도 우릴 가둬두려 하는 것이냐, 좌가 놈에게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다!"
대부분이 중년을 넘어선 나이 지긋한 무사들이었으나 그들의 무공은 기울어져 가던 청성파를 아무도 넘보지 못하게 해준 강력한 방패였다.
노고수들이 한 마음이 되어 검막을 치고 나오니 진형을 잘 갖춘 군사들이라 해도 쉽게 막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궁 밖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년이 처음 보는 극강의 무공을 시연하고 있으니 병사들의 신경이 분산될 수 밖에 없었다.
"포위망을 뚫어라!!" "벽력탄을 든 놈을 먼저 제압해라!!"
상청궁 후문에는 순식간에 무사들의 비명과 고함 소리가 산을 뒤흔들었고, 수많은 전투를 겪어온 노검사들은 상대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포위망을 뚫어냈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듣게 된 좌두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진룡보전을 시전하는 청년이 나타났다고?"
"네, 그 곳에서 일대 소란이 일어나 제자들이 포위망을 뚫어냈습니다. 후방이 뚫렸으니 병사들의 혼란이 극심할 겁니다. 진 가민도 그 청년과 함께 있습니다."
"일봉은 어디 있느냐?"
"사형은 지금 주 사형을 해친 자들을 쫓고 있습니다."
"포위망을 흐트러뜨리지 말라 하였거늘! 포위망이 뚫렸으니 상청궁을 지키는 건 이제 의미가 없다."
좌두곤은 병사들을 물려 한 곳에 모으라 지시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진룡보전을 알고있다면 표풍보록(飄風寶錄) 또한 알고 있을 수 있었다.
두 비급은 모두 청성파의 절세 비급으로 둘 모두를 연성한 자는 천하에 쓰러뜨리지 못할 자가 없다 전해지고 있었다.
자신의 형세가 위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좌두곤은 왠지 그 청년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선대 장문인께서는 이런 때를 대비해 후계를 남기신 건가.
어째서 진 가민을 선택하지 않고 청성파의 제자도 아닌 외부인을 택해 비급을 전수하신 거지? 역시 진 가민의 패악함을 꿰뚫고 계셨던 것인가?'
자신을 습격했던 것이 진 가민이 아니라 제자들의 독단이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좌두곤은 자신이 어떻게 되더라도 진 가민만은 처단하리라 마음 먹었다.
'무림의 협객이라 자처하는 자가 죄 없는 가족을 노려 늦은 밤 기습 공격을 해 놓고도 살아남기를 바랬느냐. 내가 죽더라도 진 가민 네 놈 만큼은 저승 길 동무로 데려가겠다.'
좌두곤은 청성파의 보물인 청운검(靑雲劍)을 손에 쥐고 상청궁의 후문으로 향했다.
포위망이 뚫려 혼란에 빠진 좌두곤의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다가 급히 들려온 후퇴 신호를 듣고 동료의 시체를 밟으며 도망쳤다.
자신들보다 몇 배나 많은 병사들을 물리친 청성파 제자들은 백수와 진 가민을 둘러쌌다.
제자 중 나이가 많은 공손 길이 앞으로 나와 진 가민과 백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어째서 자네가 진룡보전을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네. 진룡보전은 대대로 청성파의 선대 장문인께 제자 중 단 한 명만 전수받을 수 있는 절세 비급인데, 자네는 청성파의 제자인가?"
백수는 진지한 얼굴로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분들께는 지금 그것이 중요합니까? 노선배들을 이끌던 진 대협께서 지금 야습을 당해 식솔들을 모두 잃고 여기까지 쫓겨 왔습니다.
왜 이렇게 됐는지 궁금하지도 않으십니까?"
"어... 어흠. 물론 그것도 알아야겠지만 지금 더 중요한 건 명맥이 끊길 뻔한 청성파의 절세 비급을 자네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네.
우리는 자네가 청성파의 정통성을 갖춘 자인지 알아야 할 의무가 있어.
선대 장문인께 직접 하사받은 것이 아니라면 그건 좋지 않은 결과를 상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일세."
"제가 선대 장문인을 쓰러뜨리고 비급을 훔치기라도 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많은 사람이 모인 상청궁 후문에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사실 말을 꺼낸 공손 길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선대 장문인이 아무런 언질도 없이 세상을 떠난 마당에 누군가 청성파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다는 건 천만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청년이 선대 장문인을 해치고 비급을 훔치기라도 했다면 제자들은 그를 처단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진룡보전과 표풍보록의 명맥은 완전하게 끊어지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청성파의 제자 대부분은 문파의 비급을 구경해보지도 못한 채 살아왔고, 공손 길도 마찬가지였다.
눈 앞의 청년이 두 비급을 모두 알고 있다면 사실 겁을 줄 게 아니라 설득하여 비급을 청성파의 제자들에게 전수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문파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된 진 가민도 고민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불시에 나타나 도움의 손을 내민 것은 다행이었으나 갑자기 진룡보전을 시전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지금 어떻게 해야 할 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이 청년은 자신이 누구인지 밝힌 적이 없었다.
선대 장문인이 숨겨놓았던 청성파의 진짜 후계자라 해도 반론을 펼칠 이는 없을 것이다. 다른 모든 이유를 다 제거하더라도 청년은 진룡보전을 알고 있다.
'지금이 유일한 기회다. 일단 제자들을 이끌고 좌두곤을 쳐야 한다. 그러려면 이 청년이 나와 말을 맞춰줘야 하는데... 뭐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다들 잊고 계시는 것이 있는데...-
갑자기 백수가 내공을 이용한 전음으로 모두에게 힘이 실린 목소리를 전했다.
-진룡보전을 어떠허게 알고 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지요.
중요한 건 진룡보전을 알고 있는 자가 청성파의 진정한 후계자라는 것입니다-
상총궁 후문에 모인 제자들과 진 가민까지 모두 침도 삼키지 못할 정도의 압박감을 느꼈다.
청년은 진룡보전을 자기 것을 만들 수 있을 만한 내공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만큼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인정하느냐 불복하느냐의 문제 뿐이었다.
젊은 날에는 수많은 전투를 치렀고, 지금은 당시의 추억을 곱씹으며 말년을 보내던 노검사들에게 선대 장문인이 보여주던 절세 비급의 위력과 아름다움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구경해 본 자도 몇 안 되지만 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진룡보전의 강함과 아름다움은 '언젠가 나도?'하는 기대와 함께 모두의 염원으로 남아있었기에 전승이 끊어졌다는 실망감도 그만큼 컸다.
그런데 이제 젊고 강한 전승자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는 건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지만 청성파의 전통이 끊기지 않았다는 희소식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때 진 가민의 굵직한 목소리가 제자들의 귀에 울려 퍼졌다.
"지금 우리가 돌아가신 선대 장문인의 뜻을 모두 알 수는 없소.
하지만 그 분이 청성파의 전통을 이어가려 노력했다는 건 확인할 수 있게 되었구려.
내가 아니면 어떻소? 이제 청성파의 전통은 후세에 계속 이어질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이 중요한 것 아니겠소이까?
우린 이제 이 청년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서 오늘의 이 사태를 초래한 좌두곤과 그의 세력들을 청성파에서 모두 몰아내야 할 것입니다!"
"좌두곤이? 지금 이게 다 좌두곤이 벌인 일이란 말인가?"
"좌두곤은 자신의 집이 기습을 당해 노모가 숨졌다고 하던데 그건 거짓이었나?"
진 가민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사제들은 누구보다 날 잘 알 것이오. 내가 누굴 모함하거나 뒤에서 칼을 휘두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오.
좌두곤은 내가 선대 장문인께 비급을 전수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가지고 날 무시하고 끌어내리려 했소.
하지만 이제 진정한 전승자가 우리에게 있소.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소? 바로 하늘의 뜻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오!"
제자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백수 또한 진 가민의 열변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성파의 비급을 보여준 건 궁 내부에 있는 제자들에게 내가 적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뜻 밖에 없었는데 이들에겐 이 초식이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니...
그것보다 이 상황을 순식간에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끌어간 진 가민도 대단한 사람이군. 싸움밖에 모르는 단순한 사람이라 들었는데 역시 사람은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는 걸 배우게 되는구나.'
현 시점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감행한 건 백수였지만, 무사들을 설득시키고 자신의 편으로 이끈 건 진 가민이었다.
결국 진 가민이 최후의 승자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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