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라는 복마전
마계의 독보적인 지배자가 되었어야 할 마왕이 조물주의 실수로 인간 세상에 그것도 힘없는 존재로 내던져진 지 어느 덧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마왕은 유치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인간들과 우주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에미와 애비는 마왕이 꿈에 나와 한 마디만 하면 그 말을 냉큼 따랐기 때문에 마왕의 뜻대로 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인간 세상에 대한 정보를 상당히 축적했다 판단한 마왕은 학교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유치원은 건너 뛰었지만, 인간 아이들이 어느 정도의 지능을 가진 상태로 모여 집단 생활을 하게 되는 학교는 인간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관리자가 준 기기를 통한 정보 수집만으로는 한계가 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유였다.
어미의 손을 잡고 가 본 학교는 언젠가 마왕이 생각했던 마수들의 훈련소와 닮아 있었다.
-역시 인간들도 이런 환경에서 전사를 키우고 있군.
모아 놔야 제대로 된 놈을 찾아낼 수 있지.
-오호홋, 마왕님 괜찮으시겠어요?
이제부터는 사방에 눈이 있는 곳에서 생활하시겠네요.
-인간 세상에 대한 적응은 거의 끝났다.
문제 될 건 없어.
-지금도 충분히 문제가 되어 보이는데용...
아무리 잘 봐줘도 초딩의 말투가 아니라구요.
- 이 곳의 새끼들에게는 중 2병이라는 게 있다.
주변의 동료들과는 다른 말투를 주로 사용하고 사회 통념에 반하는 행동을 보인다 들었는데,
내 말투와 꽤나 비슷하더군.
난 중 2 병 행세를 하면서 지내면 될 것이다.
-그건 말 그대로 중학교 2학년 정도는 되야 생기는 증세 아닌가용...
-인간 세상은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구성원 중 나 같은 인간이 하나 있다 하여 신경 쓰는 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많이 이상한데...일반적인 중 2병은 절대 아닌...
-조용히 해라.
교무실에서 만난 마왕의 담임 정 수경은 시큰둥한 표정의 마왕을 보며 초등교사 5년 경력의 육감 기관을 가동시켰고 결론을 내렸다.
싸가지 없거나 병신.
조금 덜 떨어진 아이들은 보통 저런 표정으로 왔다가 며칠 지나면 같은 반의 더 센 아이들에게 기가 눌려 조용해진다.
문제는 싸가지 없는 애들인데 여기 저기서 문제를 일으키고 어른의 말은 일부러라도 더 듣지를 않는다.
99.99%는 부모가 원인이지만 부모들은 교육 기관의 무관심과 담당 교사의 능력 부족으로 떠넘기려 하니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어른스러워요?
집에서 교육을 너무 잘 받았나보다. 어머니한테 비결을 듣고 싶네요."
온갖 과장된 리액션을 첨가한 아첨에도 아이 엄마의 표정은 방금 산 립스틱을 하수구에 떨어뜨린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어른스럽다는 얘기는 자주 들어요.."
"그러니까요. 오래 앉아 있어도 미동도 안 하는게 교수가 될 건가 보네요.
어머 어쩜 이래? 이름이 뭐니?"
"김 마왕이다."
뭐가 어째? 이 씨 발라먹을 말투는 뭐지?
첫 만남에 이 정도의 분노를 일으키는 아이는 처음이었기에 정 수경은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도록 지난 달 클럽에서 만났던 괜찮은 연하남 얼굴을 떠올리며 화를 가라앉혔다.
정 수경은 아이의 이름이 정말로 마왕이었다는 것에 한번 놀라고 어린이집을 잠시 다닌 것 이외엔 보육 시설에 간 적이 없다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랐다.
"홈 스쿨링을 하셨나 봐요. 어쩐지 아이한테 제대로 교육받은 자세가 나오더라구요."
아이 엄마는 거듭되는 아첨에도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정 수경은 내일이라도 세계 정복에 나설 것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의 뒷 모습을 보며 갑자기 편두통이 생기는 것 같았다.
원래는 올해부터 학교에 다녔어야 할 나이지만 몸이 아파 입학을 미루다가 이제서야 입학하게 되었다는 김 마왕은 집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은 듯 정 수경이 던지는 질문에 귀찮은 듯 무심하게 하지만 정확하게 답변했다.
모자라 보이는 구석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병신은 분명히 아니다.
역시 싸가지인가...
올해 직업운이 안 좋다는 타로점 청년의 점괘가 생각난 정 수경이 두통약과 물을 들이켰다.
다음 날 시간에 맞춰 등교한 마왕은 같은 반 아이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복잡 미묘한 시선들을 살피며 자리에 앉았다.
-경계, 불안, 호기심... 다양한 감정들을 보여주는군.
분노는 뭐지..?
마왕이 급우들과 정겨운 첫 인사를 하기도 전에 그의 책상 위에 커다란 종이가 펼쳐 졌다.
"이게 뭐지?"
"너 진짜 이름이 마왕이야?"
옆 자리에 앉은 금 미나는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소녀였다.
동공의 크기가 쉴새 없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자신을 위 아래로 훑어 보는 미나의 시선을 느낀 마왕은 '피해야 할 인물' 리스트 1호에 이 여학생의 이름을 올렸다.
"이게 뭐냐고 물었다."
"너 날 잘 잡아서 왔어. 오늘부터 시험이거든."
"거기 두 사람, 조용히 해라!!
바로 풀기 시작해!!!"
속알이 훤히 드러난 정수리를 옆머리로 정성스레 덮은 중년 남성이 소리를 질러댔다.
-하긴 훈련기관에 왔으면 전투력 평가를 해야지.
그런데 이 문제는...
1. 35 + 21 =
-현재 내 주변 새끼들의 수준은 이 정도란 말인가?
-7에서 8살 인간 아이들에게 뭘 바라신 거에용.
관리자가 마왕의 시험지를 보며 깔깔 웃어댔다.
-몇 년 더 있다 올 걸 그랬다...
-인간들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건 인간 세상의 효율적인 지배를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 될 수 있답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면 강점과 약점이 보이거든요.
-그 말은 맞지만...
마왕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마를 긁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분위기를 맞춰보기 위해 문제지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척이라도 하려 했지만, 보면 볼 수록 자신이 퇴화되어가는 기분에 그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16. 영희가 크레파스를 빌려달라고 합니다. 올바른 대답은 무엇일까요?
(꺼져라. 이 ()&)(하고 *$@^&)$한 &*)(!@&*$야.)
몇 번씩 답을 썼다 지우는 마왕을 곁눈질로 보던 금 미나가 마왕을 툭툭 건드렸다.
슬쩍 옆을 보니 미나는 자신의 시험지를 마왕 쪽으로 들이밀고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인간들의 협동심인가. 독특한 행동이군.
-안쓰러움이 아닐까요... 애잔함이라던가.
마왕은 미나가 쓴 삐뚤빼뚤한 글씨의 답안을 슬쩍 보고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러면 나는 답례로 저 암컷 새끼의 오답을 고쳐줘야 하나?
마왕이 여러 가지 이유로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마왕 인생 처음으로 치러진 시험이 스피커의 종 소리와 함께 끝이 났다.
아이들은 방금 태어난 고블린 새끼들 마냥 이러저리 뛰어다니며 뒤늦게 답을 맞춰 보거나 근처의 동료와 함께 피씨방으로 향했다.
한 아이가 가방을 들고 뛰쳐 나가려다 뭔가 생각난 듯 뒤를 돌아보았다.
"야, 마왕! 너도 피씨방 갈래?"
"그게 뭐하는 곳이냐?"
"돈 있으면 따라오고. 쫄리면 뒈지시던지."
-인간들은 새로 들어온 조직원에게 신고식이라는 걸 한다던데 이게 그건가?
마왕은 아무 말 없이 가방을 들고 아이를 따라 나섰다.
피씨방은 아이들이 컴퓨터가 있는 책상에 삼삼 오오 앉아서 쉴새 없이 떠드는 밀폐된 공간이었는데, 어른 인간들의 감시가 덜 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마왕도 아이들과 어울려 이런 저런 게임을 해 보았는데, 평소에 손을 많이 쓰지 않던 마왕은 게임의 컨트롤이 익숙치 않아 급우들에게 민폐가 되었다.
덕분에 최근 유행하는 욕설의 대부분을 알게 된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상대방의 부모 안부를 걱정해 주는 그들의 찰진 욕설은 마왕의 멘탈에 큰 타격을 주진 못 했지만, 마왕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두 시간 정도 있다 집에 돌아온 마왕은 골프장에 다녀온 애비를 불러 세웠다.
"우리 마왕이가 왠일로 나를 다 찾냐?"
"컴퓨터를 하나 사야 겠다."
"어 그래? 이제 학교도 가니까 컴퓨터가 있어야지.
학교는 어땠어, 재미 있었니?"
"많은 공부가 되었다."
"그래.. 첫날부터 많은 걸 배운 모양이구나."
더 물어봐야 아이다운 답을 듣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는 마왕의 아비는 허허 웃으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학교 생활은 집에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호기심에 한 두번 마왕에게 말을 걸었던 아이들은 마왕의 얼음장 같은 반응에 혀를 내두르며 자진해서 거리를 두었고, 아랑곳하지 않고 마왕의 옆에서 떠드는 금 미나와 마왕의 자존심을 건드린 게임 고수 고 용한만이 가끔 마왕에게 말을 걸었다.
"김 마왕, 피씨방 안 가냐?"
"피씨방에 가기 위한 훈련 중이다."
"피씨방 가는데 훈련은 왜 해..."
"준비 없이 전투에 뛰어들면 죽음 뿐이지."
"오, 김 마왕~. 겁나 멋있는 말 했어!
게임은 졸라 못 하면서!!"
마왕은 고 용한의 도발을 무시하며 가방을 멨다.
그 때 담임인 정 수경이 교실을 나서려는 마왕을 불러세웠다.
"마왕아, 선생님이랑 잠시 교무실에 좀 갈까?"
교무실에서 마왕은 등교 첫 날 만났던 머리가 훤한 남자와 마주했다.
마왕은 남자의 표정에서 적대감과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정체를 들킨 건가? 나름 신경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언제용...
-여기서 정체가 드러나면 이 인간들을 모두 없애야 하나?
-아직 몇 년 살지도 않았는데 벌써 정체를 드러내시면 곤란하지요.
뭐라고 하는 지 한번 들어보세용.
"김 마왕...."
남자는 이마에서 쉴 새없이 땀을 흘리며 젖어서 축 늘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이번 시험이 첫 시험이라 부담이 되서 그런 것 같은데 선생님이 다 용서할 테니 솔직히 말해봐라.
다른 애 시험지를 베낀 거냐?"
"무슨 소리냐."
"이 놈 말 버릇이 왜 이래.
너 학교 와서 처음 보는 시험 성적이 올 백점이면 너무 이상한 거야 그렇지 않니?"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학교 와서 처음 보는 시험인데 네가 뭘로 만점을 맞았다는 거야 이 놈아!"
"당연한 걸 왜 묻나. 기본 지식이다."
"뭐가 어째, 이 새끼야?"
얼마 안 남은 머리를 휘날리며 시뻘건 얼굴로 다가오는 중년 남성을 보며 마왕은 적잖은 불쾌감과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주변에 있는 동료 교사들의 걱정 어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교사 구 남식은 책상에 있던 30cm 자를 집어들었다.
"이 어린 새끼가 선생이랑 놀려고 들어?
이리 와, 이 놈 시끼야!"
마왕은 최근에 익힌 탐색 기술을 시험해 볼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세상에 몇 년을 머무르면서 슬슬 마왕의 응당 가졌어야 할 기본 스킬들이 하나 둘씩 돌아오기 시작했는데 초감각도 그 중 하나였다.
인간들은 상상할 수 조차 없이 발달된 마왕의 초감각은 대상 뿐 아니라 주변의 과거 현재의 상황을 볼 수 있고 가까운 미래까지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했다.
마왕이 초감각을 발동시키자 구 남식이 포식자의 살기를 느낀 초식동물처럼 멈칫 했다.
"근데 이 새끼가 이제 선생을 노려 봐?
넌 오늘 큰일 났어. 내가 옷을 벗는 한이 있어도 널 사람 만들고 가겠다."
"네 도움 없어도 나는 현재 인간이고, 내가 보니까 큰 일이 난 건 내가 아니라 너 같다."
"뭐?"
"지금 이 공간에 있는 17명의 인간 중 16명이 너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고, 한 명은 측은한 감정을 보이고 있다.
16명 중 4명은 너를 학생에게 폭력을 행사한 교사로 신고할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 중 한 명은 지금 네 모습을 촬영 중이지.
저 쪽에 있는 교감 윤 경수는 나이 먹고 사고만 치는 너를 이번 기회에 다른 학교로 보내거나 잘라낼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기 전에 네가 상습적으로 성희롱과 성추행을 일삼는 대상인 조 유미 교사가 며칠 전 너를 신고했기 때문에 교육청 감사가 나오면 너는 해직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하루를 마감하느라 북적이던 교무실에는 때 아닌 찬바람이 불면서 폐가의 지하실에라도 들어온 듯한 적막감이 흘렀다.
구 남식은 들고 있던 자를 떨어뜨리고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하... 이 쪼그만 놈이 뭔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이게 다... 아니지? 이봐요, 조 선생. 그런 거 아니지?
내가 딸 같아서, 이뻐서 그런 건데 그런 걸 가지고 그럴 리가 없잖아, 응?
그렇지. 딴 사람은 몰라도 교감 쌤이 그럴 리가 없지.
내가 교감 쌤 뒤를 봐준 게 몇 년인데...
안 그래요? 경수 형, 그렇지?"
자신의 자리에서 딴청을 피우고 있던 교감 윤 경수가 발끈 했다.
"이 사람이 큰일 날 소릴!
누가 누구 뒤를 봐 준다 그러나! 말 조심해요, 구 선생!!"
구 남식이 여기 저기를 미친 사람처럼 휘젓고 다니는 난장판을 뒤로 한 채 마왕은 교무실을 나왔다.
-나름 50년은 산 것 같은데 정신력이 형편없군.
-마왕님의 한 방이 상당히 묵직했나 보네용.
불쌍해라, 아직도 저러고 있네.
-한심한 놈이다. 인간들 중 대부분이 저렇다면 내가 힘을 다 되찾지 않아도 정복이 가능하겠군.
-마왕님은 조물주 다음으로 전능한 능력자이시니까요.
인간 몇 정도 저렇게 만드시는 거야 먼지를 불어 날리는 것보다 쉬워지실 날이 곧 올겁니다용.
-그런데 지금 난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냐...
-....조물주께서 돌아오시면 곧...
-됐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또 알려 줄 필요는 없어.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빛을 받으며 걷고 있는 마왕의 발걸음이 그다지 가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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