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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사 님의 서재입니다.

어쨌거나 나는 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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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사
작품등록일 :
2018.08.20 12:44
최근연재일 :
2019.03.10 06:00
연재수 :
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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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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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7,914

작성
18.10.0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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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용사 키우기

DUMMY

이제 3세가 된 마왕의 집은 이사를 꽤나 자주 다녔다.

보통 이사를 자주 다니는 집이라고 하면 집 평수 한 평이라도 늘려보고자 엄마들이 용을 쓰며 절약하고 온 가족이 먹을 거, 입을 거 아끼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마왕의 집은 분위기가 약간 달랐다.

마왕이 부모의 꿈에 나타나 투자처를 알려준 이후 처음 이사는 서울 근교의 25평 정도 되는 주택 한 층에서 30평 아파트로 그로부터 6개월 후엔 서울 중심부의 38평 아파트, 이번엔 새로 지은 한강 둔치의 고급 빌라 최고층으로 다시 집을 옮기게 되었다.

오죽하면 마왕이 저녁 식사 시간에 어미와 아비를 불러 앉혀놓고 정신이 없으니 이사를 그만 가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을 할 정도였다.


마왕이 가진 지혜와 예지력으로 보기엔 인간들의 경제란 우습기 짝이 없었다.

굳이 마음 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앞으로 주식 시장이 어떻게 될 지, 정부가 어디에 재개발을 대규모로 할 지, 또 올해 금값이 오를 지 내릴 지 같은 경제 이슈들이 마왕의 눈에 훤히 보였다.

이런 뻔한 것들을 어떻게든 미리 알아내고자 아둥바둥하는 인간들이 한심해 보일 정도였다.

마왕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자신의 방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며 인간 세상의 정보를 얻고 분석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마왕의 에미와 애비는 심각한 얼굴로 책장의 책들을 정독하고 있는 마왕을 보며 역시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에 확신을 더해갔다.

집에서는 한글이나 숫자를 전혀 가르친 적이 없는데도 인문학이나 경제학 책의 책장을 조그만 손으로 침 발라가며 넘기고 있는 마왕을 보며 그저 어린이집에서 잘 가르치고 있나보다 하고 넘어가는 낙천적이고 심하게 긍정적인 두 사람이었다.


-가끔은 외부에서 또래 인간들과 접촉을 가지시는 게 어떠세용?


-전혀 그럴 필요를 못 느끼겠다.


-그래도 인간들과 부대끼면서 익숙해지시는 게 인간들을 이해하는 데 더 좋지 않겠어용?


-새끼들의 행동 패턴은 충분히 파악했다.

그리고 이제 에미, 애비의 눈치를 더 이상 볼 필요가 없으니 빨리 성장하기만 하면 된다.


-신체의 성장에 비해 너무 조숙해지신 것 아닐라나, 우리 마왕님~.


-네 주둥이를 꼬매버릴 정도로 성숙하지 못 한 것이 아쉽군.


-어머어머, 진정하세용.

마왕님께 드릴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으니까~.


마왕은 일부러 관리자의 말을 무시하며 공갈 젖꼭지를 오물거렸다.


-제가 앞으로 마왕님을 즐겁게 해 줄 용사 한 명을 찾아냈답니다, 호호홋.


-그래? 어디 있는 놈이냐?


-그것도 대한민국, 동네도 요 근처에 있지 뭐에용?

궁금하시면 한번 보여드릴까요?


-크게 궁금하진 않다만 솔직히 궁금하긴 하군.


-뭐래... 잠깐만 기다리세용.


관리자의 손에서 나온 빛이 곧 모니터의 화면처럼 마왕의 눈 앞에 펼쳐졌다.

양재동과 내곡동 사이의 비닐하우스 촌은 마왕이 접해본 적 없는 장소였기 때문에 마왕의 눈에 호기심이 비쳤다.


-보온성과 통풍이 좋지 않은 구조의 거처로군.

저 용사는 혹시 보호자의 경제력이 안 좋은가?


-안 좋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죠.

인간 세상에서는 흔히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표현을 쓴답니다.


-마계에서나 쓸 표현이군.

용사는 어디에 있지?


-곧 나올 거에용.

앗, 저기 있다.


마왕의 눈에 보인 건 정의감과 불굴의 의지로 자신을 끝까지 괴롭힐 용사의 얼굴이 아니라 가난에 찌들어 삶의 의욕마저 상실한 7살 짜리 애늙은이의 고통에 초연해진 얼굴이었다.

마왕은 미래의 용사가 한 솥 가득 물을 넣고 끓인 라면을 가지고 비닐 하우스에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되면 곤란한데...


-원래 영웅들은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장하도록 계획되어 있답니다.


-갖은 고난을 너무 심하게 잘 버무려 놓은 것 같다.

성장하기도 전에 삶의 의욕을 잃으면 어떡 하나.


-지겹도록 마주 하실 영웅들인데 뭘 그런 걱정까지 해주세용.


-지금의 인간 세상도 이미 너무 타락해서 내가 할 일이 없을 까봐 걱정인데 여흥거리를 제공해 줄 놈들까지 저러면 무슨 재미로 정복 전쟁을 하겠나.


마왕은 결심한 듯 굳은 표정으로 관리자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내가 손을 좀 써야겠다.

저 놈이 저리 살다 남은 생을 포기하기 전에 날 상대할 정도의 기본은 갖추게 해 줘야겠어.


-오지랖이 좀 넓으세용...


-네 의견을 물은 적 없다.

이 곳에서 통용되는 화폐를 저 인간에게 가져다 줘라.


-엥?


-관리자가 그 정도 물리력은 있겠지. 영웅이 될 때까지 생존을 걱정하지는 않을 정도로 여유있게 준비해서 주고 와라.


-히잉... 이런 식으로 세상에 개입하고 싶진 않은데...


-설마 이 우주 전체의 시스템을 관리하는 관리자가 이 정도도 못 한다는 건 아니겠지?

이건 내게 집적적으로 영향이 있는 일도 아니니 별 상관없다는 걸 알고 있다.

또 그 몇조 몇 항의 규칙을 떠들 거라면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것이다.


-마왕님 도발도 할 줄 아시네요...

할 수 없는게 아니라 하기 싫은 거에요.


-오늘 중에 해라.

안 그러면 내일부터 기저귀 벗고 나가서 정복 전쟁을 바로 시작할 테니..


-무슨 그런 협박을...눼~ 명령대로 합지요.


마왕은 관리자의 입이 댓발로 나와있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마왕님...


-뭐냐.


-보통 마왕님 정도의 연차면 똥, 오줌을 가려야 정상인데 혹시 일부러 안 하고 계시는 건가요?


-... 이런 일까지 직접 하기 번거롭다.


-.....


마왕은 뒤로 벌러덩 드러눕다가 마루바닥에 뒷통수를 세게 강타한 충격으로 한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 했다.

아직 팔이 짧아 뒷통수에 손이 닿지 않는 마왕은 상처 부위를 문지를 수도 없었다.


-더럽게 아프군.

용사들아, 성장해라.

강력한 존재가 되서 날 즐겁게 해 다오.


마왕의 애비가 친구를 만나고 집에 돌아왔다가 음흉하게 웃고 있는 마왕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서 다시 밖으로 나갔다.

마왕의 애비는 이제 직장도 그만 두고 골프를 치거나 친구를 만나러 다녔고, 애미 또한 쇼핑을 하거나 맛집을 찾아다니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집에는 마왕을 전담 보좌하는 가사 도우미가 두 사람 있었는데 식사 담당과 육아 담당이 있었다.

마왕도 그들 앞에서는 튀는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왕의 존재가 외부에 드러날 일은 없었다.

가끔 천장을 보며 혼잣말을 하거나, 종이에 이상한 문자를 쓰는 게 목격되긴 했지만, 그 나이의 아기들이 할 수 있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 편 미래의 용사가 될 한 성준이 살고 있는 비닐 하우스에서는 한 남자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불어 터진 라면을 흡입하고 있었다.

한 성준의 아버지 한 규연은 서른이 넘도록 특별한 직업 없이 그냥 저냥 사는 한량으로 스무 살 초반에 클럽에서 만난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 이후로 인생 행로가 많이 바뀌게 되었다.

나이트 클럽의 웨이터를 하면서 살고 있던 그의 앞에 아이를 안고 나타난 여자는 다짜고짜 아이를 맡기고 가 버렸고, 얼떨결에 애 아빠가 된 그는 웨이터 일도 관두고 닥치는 대로 허드렛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천성을 버리기는 쉽지가 않은 지라 몇 달 정신차리고 돈을 벌다가도 도박과 인터넷 게임으로 며칠 사이 모두 날려버리고 아기 기저귀 값도 마련 못하기 일쑤였다.

그 덕에 한 성준은 마왕 만큼이나 철이 빨리 든 애늙은이가 되어 한국의 보통 아이들이 받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같은 곳은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하고서도 나름 총기가 있어 한글도 어느 정도 할 줄 알았고 집에 돈이 있는 꼴을 못 보는 아버지 대신 돈 관리까지 맡아서 하게 되었다.

그러나 돈이 집에 있는 꼴을 못 보는 아버지 때문에 매일 쎄 끼 먹는 것이 쉽지 않은 생활이 계속 되었고, 며칠 전에는 온 몸에 골병이 든 생모까지 나타나 그들의 비닐 하우스는 폭풍 치는 바다 한 가운데의 돛단배 같은 분위기였다.


"시발, 애 버리고 갈 때는 언제고 지 몸 안 좋으니까 집에 기어들어와?

아 진짜 어디 내다 버릴 수도 없고..."


한 규연은 입만 거칠 뿐 행동력이 전혀 없는 우유부단한 성격이라 막무가내로 찾아 온 애 엄마를 쫓아내지도 못 하고 하우스 밖에서 신세한탄만 하고 있었다.


그 때, 한 규연의 눈 앞에 색기가 넘치는 젊은 여자가 순간이동을 한 것 처럼 몸에 착 달라붙는 정장을 차려입고 나타났다.


"아우 씨 뭐야 깜짝 놀랐잖아.

당신 뭐야?"


한 규연은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인간 형상을 하고 나타난 관리자의 쓰리 사이즈를 쓰윽 훑었다.


'36- 23- 36

키야 몸매 죽이네.'


"내가 봐도 몸매가 죽이긴 하는데 이걸 보여주려고 온 게 아니니까 내 얼굴에 집중 좀 해줄래, 죽여버리기 전에?"


"헉, 이 여자 주둥이가 아주 걸레짝이네?

왜 남의 집에 와서 입을 놀려?"


"나도 오래 있고 싶진 않으니까 용건만 끝내면 갈 거야."


관리자가 뒤에 있던 가죽 가방을 들어 규연의 앞에 턱 내려 놓았다.


"이 안에는 돈이 들어 있어.

아마 네 수준으로는 3대가 풀뿌리만 먹고 모아도 보기 힘든 액수일 거야.

그런데 그냥 주는 건 아니고 조건이 있거든."


"도, 돈이라고?"


"그래, 돈이라고.

너는 이 돈을 가지고 네 아들 한 성준을 아주 잘 키워야 돼.

다쳐서도 안 되고 아파서도 안 돼.

체력도 강하고 공부도 잘 시켜서 머리도 적당히 좋아야 돼.

아, 그리고 중요한 게 인성교육을 잘 시켜야 될 거야.

아주 정의롭고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사람으로 키워야 돼.

그러면 아이가 너를 보고 못 참을 지도 모르겠네...

아무튼 이 돈으로 무조건 아이를 잘 키워, 알았니?"


한 규연은 관리자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가죽 가방에 손을 댔다.

묵직한 가방 안에 들어있는 지폐뭉치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 하고 있는 규연에게 관리자가 새하얀 손을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내가 말한 일을 제대로 안 하면 너는 이 돈에 맞아 죽을 거야, 알아들었어?"


불행히도 규연은 관리자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듯 지폐뭉치를 손에 들고 침까지 흘리고 있었다.


"에이, 모르겠다. 난 분명히 전했다.

나중에 딴 소리는 하지말고~."


규연은 관리자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모습조차도 보지 못한 채 가죽 가방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비닐 하우스 안에서는 성준이 조그만 손으로 생모인 주 영미의 이마에 올려놓았던 물수건을 갈고 있었다.

규연이 혼자 들기도 힘든 가방을 철제 캐비닛에 넣는 걸 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아빠, 밖에 있는 거 아무거나 주워오지 말랬잖아.

재수 옴 붙은 물건이면 어쩌려고..."


"어린 놈이 애늙은이 같은 소릴 하고 있어.

넌 이 캐비닛에 손도 대지 마, 알겠냐?"


"거기에 내 속옷이랑 숟가락이 다 있는데 어떻게 손을 안 대?

아빠 또 나쁜 짓 하고 온 거야?"


"임마, 너 이제 아빠가 새 집도 사 주고 유치원도 보내 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흐흐흐."


"됐고 오늘 밤에는 꼭 들어와.

요즘 밤에 이상한 아저씨들이 술 취해서 막 들어온단 말야.

무서워 죽겠어.."


"야, 이제 이런 집도 끝이라니까!

나깠다 올 거니까 저 여자나 빨리 내보내."


"엄마를 왜 내보내..."


"젖먹이를 버리고 간 게 엄마는 무슨...쌍년..."


규연은 침을 퉤 뱉고는 하우스를 나갔다.

성준이 한숨을 쉬면서 새 물수건을 주 영미의 이마에 올려놓았다.

주 영미의 감은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성준아... 엄마가 너 놓고 가서 미안해..

엄마도 너무 무서웠어..미안해, 성준아. 흑흑.."


"아, 됐어..

이제부터 어디 안 가면 용서해 줄게.

절대 어디로든 가면 안 돼, 알았지?"


주 영미는 성준의 손을 잡고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규연은 가방에서 꺼내 온 지폐뭉치 몇 개를 들고 자주 가는 하우스를 향해 걷고 있었다.


"시발 지금까지 내 돈 빼먹은 거 오늘 다 뱉어낼 준비해라 새끼들아.

내가 자본이 없어서 지금까지 털렸는데 이젠 상황이 다르지롱, 히히"


규연의 목적지는 그가 집보다 더 자주 들르고 오래 머무르고 있는 도박장이었다.

규연의 발걸음은 가벼웠으나 오늘따라 10분이면 가던 도박장까지의 길이 아무리 가도 줄어들지가 않았다.

규연은 걸음을 더 빨리 했으나 그럴 수록 눈 앞에 보이는 도박장 건물은 점점 규연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규연의 뒷덜미가 서늘해지면서 미친듯이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눈 앞에 관리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멋진 몸매의 오피스우먼이 아닌 스무 개의 팔이 달린 괴물의 모습이었다.

머리는 늑대와 독수리를 합쳐놓은 것 같은 흉측한 모습에 입을 쩌억 벌리니 벌어진 크기가 규연을 통째로 삼킬 수 있을 정도였다.

규연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아이 씨, 왜 인간들은 좋게 이야기하면 못 알아먹는 거야?

야, 너 내가 돈 주면서 뭐라고 했냐?"


"어...어.. 잘 쓰라고 하셨..."


"이 새끼야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냐!!

네 아들놈 잘 키우는 댓가로 주는 거라고 했어 안 했어!!"


"아 넵,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받자마자 애는 팽개쳐두고 도박을 하러 가?"


"그게.. 돈이 좀 더 필요한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한번만 봐주십시오.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돈이 더 필요하면 더 줄 수도 있어.

하지만 이제부터 너는 네 아들한테서 한시도 눈을 떼면 안돼.

네 아들 잘 키우는 데 네 인생을 다 바쳐야 한다고.

마지막으로 얘기해주는 거다, 알겠냐?"


"아.. 알겠습니다!"


"좋아,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거 명심해라."


관리자는 입에서 김을 쉭쉭 뿜으며 다시 연기처럼 사라졌다.

규연은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시발 뭐지?

라면만 먹어서 헛것이 보인 건가..."


그는 먼저 속주머니에 있는 지폐부터 확인했다.

빳빳한 지폐의 촉감이 손에 느껴졌다.

규연은 눈 앞에 보이는 도박장의 철문을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이 갈 방향을 정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세 좋게 도박장의 문을 열고 들어선 규연을 보며 먼저 판을 벌린 남자들이 비웃음 섞인 인사를 건넸다.


"규연이 너 왜 또 왔냐?

어제 다 털려서 돈도 없을 텐데..

오늘은 나도 좃털려서 개평은 없어."


"개평은 시발.

다 덤벼, 오늘 다 뒤졌으."


규연은 빈 자리를 발견하고 얼른 가서 앉았다.

그 자리는 도박장에서도 타짜들이 앉는 에이스의 자리였다.

사람들의 걱정과 어이없음이 담긴 시선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테이블의 사람들에게 묻지도 않고 카드를 섞었다.


"풀베팅에 히든 무한, 오케이?"


"오호, 좋아. 오케이.

어디서 돈 좀 구했나 보네.

이 자리에서는 무르기 같은 거 없다. 알고 있겠지?"


"닥치고 쫄리는 사람은 빠져."


규연은 첫 베팅부터 풀로 들어갔고 옆 사람들이 미묘한 시선을 교환하며 콜을 불렀다.

히든 카드를 확인도 하지 않은 규연은 뒤늦게 자신의 카드를 들어 보았다.


에이스 투 페어..

그것도 스페이드니 족보싸움도 유리하고...


그러나 말없이 콜을 부르며 따라오던 사람들이 뒤집은 카드는 가장 안 좋은 패가 스트레이트였다


"씨발 첫 판에 뻥카로 재미 좀 보고 시작할라 했더니..."


"네가 우리한테 뻥카를 쳐?

지랄 말고 돈이나 꺼내 봐.

우리한테 장난질하면 어뗗게 되는 지 알지?"


"장난질은... 오늘 네들 다 죽었다니까.

내가 돈으로 다 발라줄게!"


규연은 주변에 다 들리도록 소리를 지르며 안 주머니에 있던 두둑한 뭉치를 꺼내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테이블 바닥에는 규연이 내던진 맛사지 샾의 홍보 명함뭉치가 화려한 색감을 뽐내며 흩뿌려져 있었다.


규연의 비닐 하우스 안에서는 바닥에 스티로폼을 몇 개 깔고 그 위에서 잠이 든 성준을 보며 주 영미가 한숨을 쉬고 있었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성준을 낳고 집에서도 쫓겨나 유흥업소를 전전하던 그녀는 혹사로 인한 간 질환과 성병 때문에 업소에서도 쫓겨난 상태였다.


'내가 진작에 이런 일 때려치우고 돌아와 너라도 보살폈어야 했는데...

미안해 성준아. 나는 지옥 갈 거야..'


"갈 때 가더라도 좋은 일 한번 하고 가지 그래?"

주 영미를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하우스의 지퍼 문을 열고 관리자가 들어왔다.

이번엔 늘씬한 몸에 우월한 기럭지를 가진 금발 남자의 모습이었다.


"저기, 누구세요?

여기 가정집이에요."


"가정집은 무슨...

긴 말 할 것 없고 애 아빠는 이제 집에 못 들어오니까 네가 네 아들 잘 키워봐라."


관리자는 케비닛에 들어있던 가죽 가방을 꺼내 주 영미의 눈 앞에 던져 놓았다.


"가방 안에는 너희 두 사람이 평생 돈 걱정 안하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 들어있어.

너는 정신이 좀 박혀 있는 것 같으니 너한테 애를 맡겨볼게.

남자놈은 왠만해선 정신을 차리지 못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그냥 네 아들을 잘 키우기만 하면 된다니까.

건강하고 머리 좋고 정의감 강한 아이로 키우라고.

정의감에 밑줄 쫙!이야. 불의를 보면 못 참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불세출의 영웅으로...

이건 좀 오버네.. 아무튼 아들 잘 키워보라구."


"저희한테 왜 이런 도움을 주시는 거죠?"


"내가 주는게 아니야.

그냥 네 아들이 잘 크길 바라는 어느 독지가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돼.

에이 오늘 말을 너무 많이 했네.

나 간다~~."


관리자가 비닐 문을 열고 나가고 한참 후에야 주 미영은 가죽 가방을 열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 날, 성준의 비닐 하우스에서는 밤새도록 한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밤마다 들리던 고통을 참느라 낑낑대는 울음소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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