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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하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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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비축] 무제[1]

 내 아내는 살인자다.

 정확하게 말하면 두번째 아내이다.

 첫 아내가 사고로 세상을 뜬지 3년 후에 나는 재혼을 했다. 직장 동료의 소개로 만난 여자였다.크게 마음이 가는 상대가 아니여서 망설이던 시기는 길지 않았다.

 심장이 횃불처럼 타오르는 연애 감정이라면 죽은 아내와 충분히 나누었다. 38세는 그런 감정이 결혼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게 아니라는 걸 충분히 알 나이였다. 몇 가지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나는 재혼을 결심했다. 그녀도 이번이 두 번째 결혼이었다,

 소박한 행복이 숨쉬는 공기에 슬며시 배어있는 생활이  

 

고해성사같은 자백은 아니었다. 심지어 진지하지도 않았다. 침실에서 티비로 영화를 감상하다가 무심코 그녀가 내뱉은 말이었다.
 "개성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고?"
 티비 영화가 발단이었다. 그저그런 연애물이었는데 내가 보기엔 그 연애가 도무지 공감이


소녀는 지루했다. 지루하고 가볍게 짜증이 났다.
 바다 위의 하늘은 비를 품은 먹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평소보다 더 무겁게 지면으로 내려와 백사장에 앉은 사람들의 드러난 몸 위에 들러붙었다. 그 공기를 뜯어내기라도 할 것처럼 그녀는 두 손으로 맨 다리를 박박 문질렀다.
 옆에 앉은  소녀의 엄마도 표정이 밝지는 않았다. 캔 맥주를 몇 모금씩 나누어 들이키면서 바다를 보는 엄마의 눈에 화가 어려 있었다. 그 화가 아빠의 부재 때문인지 일광욕을 방해한 날씨 때문인지 소녀는 분간이 어려웠다.
 소녀는 엄마를 향해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가 얼른 고개를 숙여 손으로 모래를  파헤치는 척했다. 엄마가 자신에 대한 딸의 속내를 눈치채게 할 만큼 소녀는 어리석지 않았다. 엄마의 앞에는 빈 맥주캔이 세 개나 너불러져 있었다.

소녀가 생각하기에 슬픔은 쉽사리 쫓아내기가 힘든 깊은 감정이지만, 단순히 화가 난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아빠가 차를 몰아 이 해안 도시로 오면 풀릴 것이다.

후회하지 않냐고?
 무슨 질문이 그래? 너무 진부하잖아? 그래도 당신 입에서 나온 질문이니까 생각 좀 해볼께.
 그 일을 후회한다는 건,내가 그 일이 있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뜻이겠지?살인자가 아니라 그냥 보통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다시 가지고 싶어한다는 뜻?
 당연히 아니지! 생각해보니까 진부한 게 아니라 너무 무례한 질문이네.내가 그렇게 나약한 사람으로 보여?당신에게 살짝 실망했어. 당신이라면 알아줄 것 같았는데. 그래서 지금 이렇게 당신에게 털어놓는 거고. 내가 잘못 생각한거야?
 그 날 일을 다 기억하냐고? 말을 돌리는 거야? 아, 됐어. 아부하는 표정짓지마. 토할 것 같으니까. 물론 기억하지. 세세하게 다.
 그날 이후 그일을 누구에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무척 힘들었어.맘에 꼭 드는 옷을 발견했다고, 맛집을 순방한다고, 그런 걸로도 온라인에 떠벌리는 세상이잖아?
그 따위로 자랑하는 짓거리를 보면
매일 밤 난 그날 일을 되새기는 걸.그 기억은 전리품이야. 잃어버리면 안되지.
 실제로 땅에 발붙이고 있는 인구로만 따지자면 일년중 최고치를 기록했을지도 모를 휴양지에 우리는 있었어..
 지루했어. 정말 지루했어. 종일 지겹고 따분해서 죽을 지경이었어.
 늦잠을 자서 건너 뛰는 바람에 평생 알 수 없게 된 아침 메뉴도 지루했고, 이른 점심인 냉면조차 공복인데도 지루했어. 육수는 밋밋하고 고명으로 올라온 돼지고기는 퍽퍽했지.원래 레시피가 그런 건지 휴가철 장사라 신경을 덜 쓴건지 알 수 없었어.
 "왜 맛없어?"
 맞은 편에서 심드렁하게 냉면을 먹던 엄마가 내 안색을 살피며 물었어. 정말 궁금한 것은 아니고 본인이 고른 메뉴라 예의상 물어보는 것이었지.모성애가 없지는 않겠지만 차고 넘치는 사람은 아니었거든.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어. 맛없는 건 아니라는 뜻인지 신경쓰지 말라는 몸짓인지 나도 몰랐어. 엄마는 나를 노려보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눈길로 잠시 바라보았어. 물론 실제로 노려보는 건 아니었겠지.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항상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닥 다정하고 따뜻한 편은 아니었으니까.그냥 평소보다 조금 더 냉랭했을거야.
 "호텔 식당으로 갈 걸 그랬나?"
  고개를 돌리면서 혼자말처럼 낮게 내뱉고는 엄마가 한숨을 쉬었어.
 휴양지에서 그 정도 사치를 부릴 정도의 여유는 있는 살림이었어. 조금 무리하면 호텔 룸에 숙박해도 상관없을 만큼. 하지만 이미 여름 시즌 예약이 끝난 상태였어.어쩔 수 없이 우리는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모텔에 2박치 선불을 주고 머무는 중이었어.
 휴양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해변 도시라 아무리 모텔이라도 예약을 하지 않으면 방이 없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다행히 제법 괜찮은 시설을 갖춘 방을 잡을 수 있었어. 비록 방에 들어서자마자 완전히 바가지야, 하고 엄마가 성마른 목소리로투털대긴 했지만.
 그러니까 아빠가 예약해둔 곳으로 가면 됐잖아, 싶었지만 그 생각을 입밖으로 말하지 않았다.나는 조용한 소녀였어.평소에도 의견을 입밖으로 밀어내 주장하는 성격이 아니고 엄마 앞에서는 더더욱 그랬지.
 내려오는 내내 엄마 역시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어. 누가 물으면 운전에 집중하느라 그랬다고 핑계를 대겠지만 사실은 나와 나눌 대화거리가 없기 때문이었지. 우리는 공통된 관심사가 별로 없는 모녀였어.
 아니다. 엄마가 입을 앙다문 이유는 사실 아빠 때문이었을 거야. 딸에게 살가운 엄마는못되도 네 시간 가까이 침묵으로 차안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 만큼 심성이 뒤틀린 여자는 아니었거든.
 예기치 못한 일로 휴가 여행에 빠지게 된 아빠 때문에 화가난 엄마는 며칠이 지났는데도 그 화를 삭이지 못했어.분노를 재빨리 소화해서 밖으로 배설헐 기관이 없는 채로 태어난 게 엄마 잘못은 아니잖아.
 "그럼 어떡해요?"
 갑작스런 통보에 엄마는 울 듯한 표정으로 소리질렀어. 그 표정과 목소리의 불협화음이 신기했어. 울 것 같은 표정이라면 소리지를 게 아니라 칭얼거려야 하지. 유리창까지 뚫고 나갈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를 낼거면 표정도 얼음처럼 차야 하잖아?
 내 생각엔 그래. 그래야 그녀의 마음을 내가 쉽게 짐작할 수 있잖아. 나는 아빠랑 함께하지 못해서 실망을 한 건지 나랑 단 둘이 여행을 한다는 사실에 울화가 치민 건지 갈피를 잡지 못했어.
 흥. 마땅찮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어. 엄마랑 단 둘이 가는 휴가 여행이라는 게 생각만 해도 숨막혔거든. 자기 과시욕이 바람이 조금만 더 들어가면 터지고 말 풍선처럼 팽창해있는 여자랑 단 둘이 2박 3일을 붙어 지내야 하다니 끔찍하잖아? 더구나 멍청하면서 자신이 멍청한것을 모르는 여자랑 함께.
 
 "두 사람이라도 다녀와.방은 내가 예약해뒀으니까.일이 잘 풀리면 내일이라도 내려갈께."
 이번 휴가 계획을 짜느라,아니다. 매년 그랬었지만, 한껏 들떠 있던 엄마의 기분을 아는지라 아빠가 달래듯 말했어. 바보. 병신,하고 속으로 말했지만 밖으로 내가 뱉은 말은 달랐어.
 "난 꼭 피서 안가도 돼요. 그렇게 덥지도 않은걸 뭐. 가봤자 사람에 치이기만 할 걸.오히려 스트레스야. 그냥 집에서 에어컨 바람이나 쐬는 게 더 좋아요."
 아빠 앞에서는 가끔 나답지 않게 길게 말하는 때가 있는데 바로 그 때가 그랬어. 사실  물론 그런 내심은 꼭꼭 감추어 두고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말했지. 엄마의 눈에 안도하는 듯한 빛이 서린 것 같았어. 엄마도 필경 나랑 같은 생각이었나봐.그런데 그게 내 착각이었을까? 갑자기 안도의 표정이 싹 사라지면서 엄마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어.
 "그래. 우리끼리 가지 뭐.
갑자기 엄마의 표정이 
 


 .
 엄마가 고른 메뉴였다.
 금방 비를 뿌릴 것 같으면서도 이를 악물면서 참고 있는 날씨도 지루했다.

 비를 품은 바다 위의 먹구름은 만삭의 임산부 배처럼 보였는데 마치 겨울까지 참았다가 하얀 눈송이로 출산하고 싶어서 고집을 부리는 것 같았다.
 그 먹구름아래에서 듯 그래도 간간이 수영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몸짓이 마치,비가 내릴 것 같지만 어때? 지금 내리는 것도 아닌데? 휴가를 왔으면 그래도 바닷물에 몸은 담궈야 하잖아? 여기에 오는 비용도 만만찮았는데 날씨 때문에 휴가를 즐기지 못하면 아깝잖아, 라고 본전을 다 뽑겠다는  공복이라 허겁지겁 먹었던 이른 점심가볍게 짜증이 났다.
 바다 위의 하늘은 비를 품은 먹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평소보다 더 무겁게 지면으로 내려와 백사장에 앉은 사람들의 드러난 몸 위에 들러붙었다. 그 공기를 뜯어내기라도 할 것처럼 그녀는 두 손으로 모래를 집어 맨 다리에 갖다 대고선 박박 문질렀다.
 옆에 앉은  소녀의 엄마도 표정이 밝지는 않았다. 캔 맥주를 몇 모금씩 나누어 들이키면서 바다를 보는 엄마의 눈에 화가 어려 있었다. 그 화가 아빠의 부재 때문인지 일광욕을 방해한 날씨 때문인지 소녀는 분간이 어려웠다.
 소녀는 엄마를 향해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가 얼른 고개를 숙여 손으로 모래를  파헤치는 척했다. 엄마가 자신에 대한 딸의 속내를 눈치채게 할 만큼 소녀는 어리석지 않았다. 엄마의 앞에는 빈 맥주캔이 세 개나 너불러져 있었다.
 가벼워.
 소녀는 그 빈 깡통을 고개를 숙인 채 옆눈으로 노려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무 가벼운 여자야.
 신중하지 못하게 두 다리를 벌린 채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옆의 여자가  자신의 엄마라는 게 끔찍하게 싫었다. 비키니를 입는 그 자신감도 역겨웠다.
 물론 녹색의 비키니를 입은 엄마의 몸매가 십대인 자신보다 더 탄탄하고 아름답다는 걸 소녀도 인정했다. 살짝 나온 아랫배도 굴곡이 예뻐서 그 매력을 반감시키지 못했다. 실내 수영과 테니스로 단련된 몸이었다.
 한해를 투자하여 만든 몸을 여름 짧은 휴가기간에 휴양지에서 맘껏 뽐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그런데 어제 도착한 이 후로 날씨는 계속 궂었고 찬탄하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봐줄 남편이 옆에 없으니 화가 난 것이다.
 소녀는 무늬나 장식이 전혀 없는 소박한 검정 원피스 수영복으로 최대한 몸을 가리고 있었다.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소녀는 운동을 싫어하고 식욕은 십대의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두리뭉실한 인상이었다.
 그닥 날씬한 몸매에 선망 따위 없었지만 엄마가 딸이 자기를 닮지 않았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내게서 저런 딸이 나온거지, 하고 늘 속 깊은 곳에 숨기고 있었을 생각이 그대로 눈길에 드러날 때가 없지 않았다. 두뇌도  성격도 운동신경도 소녀는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자기 기준에 훨씬 미달인 딸에게 잔소리나 간섭을 하는 편은 아니었다. 반 중간쯤에서 헤매는 학업 성적에 실망하긴 했겠지만 공부를 채근하지도 않았고 냉장고에 칼로리가 넘치는 음식을 비축해두지는 않았지만 딸이 치킨이나 피자 같은 음식을 탐닉해도 별다른 제제를 가하지 않았다.
 딸에게 무관심해서가 아님을 소녀는 알고 있었다. 단지 관심을 무게로 따졌을 때 딸에게 나누어줄 여유분이 크게 없었을 뿐이었다. 엄마의 관심은 대부분 아빠에게 쏠려 있었다.
 

 소녀가 생각하기에 슬픔은 쉽사리 쫓아내기가 힘든 깊은 감정이지만, 단순히 화가 난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아빠가 차를 몰아 이 해안 도시로 오면 풀릴 것이다.
사실 엄마는 멍청한 게 아니었어. 그 사실을 나는 훗날에 알게 되었어. 그 여자는 내가 생각 한것 보다 훨씬 똑똑했어. 똑똑하기보다 통찰력이 있었다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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