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여우의 기억
< 110화. 여우의 기억 >
손을 타고 여우 구슬의 마나와 함께 구슬의 기억이 몰려들었다.
태훈은 그 기억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여자아이는 멀뚱하게 선 채 병원의 침대에 앉아있었다.
자신의 앞에는 수없이 많은 침대에 아이들이 누워있었고.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 그녀의 주위에서 뭔가를 조사했다.
-이 아이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아이가 유일하게 여우의 혼을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다 죽이세요. 이 아이 하나면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장면이 바뀐다.
검은 옷의 사내.
사내는 40은 넘었을 중년, 중후한 얼굴에 다부진 체격의 미남자였다.
그가 자상하게 웃자 소녀는 말했다.
-현랑(玄狼).
-아니, 이제부터는 흑사(黑蛇)라 부르거라.
-흑사. 저는 어찌해야 하나요?
-내 너의 길을 뚫을 것이다. 사매는 구슬을 품어 키우는 일에만 집중하거라.
배를 바라보자 작은 구슬이 느껴졌다.
엉덩이 뒤에는 꼬리가 둘.
여인은 흑사라 불린 사내에게 안기려 몸을 움직였지만, 사내는 한 발 뒤로 물러나 고개를 저었다.
-항상 어디에서도 누군가가 널 보고 있다고 생각하거라.
-그게 중요한가요?
-네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있어도 널 지켜보는 자가 있을 것이다. 만약 그자가 나와 같은 힘이 있다면 그를 가장 멀리하거라.
-알겠어요. 흑사.
소녀는 어느덧 성숙한 여인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났다.
옆은 그 ‘흑사’라 불린 사내.
반라의 여인은 심각한 얼굴로 사내에게 말했다.
-여의보주(如意寶珠)를 품은 여인을 봤어요.
-그래? 그녀가 누구더냐?
-몰라요. 어떤 노인이 그녀를 키우고 있어요.
사내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
-혹, 꿈에서 본 이들의 눈이 황금색으로 빛나더냐?
-예, 그랬어요.
-잘 되었군.
-네?
-내 너를 위해 그 여의보주를 얻어오겠다.
-어찌하시려고요?
-용기를 품은 자와 여우의 힘을 품은 이는 같은 하늘에서 함께 살 수는 없으니.
사내가 기운을 일으키자 온몸에서 검은 마기가 흘러나왔다.
-내 이 몸을 키워낼 수 있는 이도 너뿐이니라.
-알겠습니다. 그 여의보주를 저에게 주세요. 그럼 제가 여우 구슬을 키워 당신께 바치겠나이다.
사내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리고 어딘가로 사라진다.
그 후 여인은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린다.
여인의 모습이 중년이 될 때까지
그녀는 기다렸다.
***
태훈은 그 여우 구슬의 기억을 다시 되짚어 돌아갔다.
그리고 그 여의보주(如意寶珠)를 품은 여인의 기억을 찾아 들어갔다.
꿈속에서 보았을 그녀.
그녀의 기억을 찾아냈을 때
태훈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엔 엄마의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져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다섯 살이나 먹었을까 싶은 작은 사내아이가 똘망똘망한 얼굴로 그녀의 품에 안겨있었다.
***
“하아.”
한숨과 함께 느껴지는 충만한 기운.
네 번째 서클엔 여우 구슬에서 담아낸 마력이 단단하게 꽉 차 있었다.
“그런 거였군.”
실마리도 대충 찾아낼 수 있었다.
흑사회의 전대 회주는 엄마를 찾아 여의보주를 빼앗으려 한 것이다.
미셸 박사가 말했던 그 사고의 상황은 그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일 터.
그걸 막아낸 할아버지와 엄마는 아공간의 미아가 되어 저 깊은 공간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추가로 알아낸 사실.
흑사라 불린 전대 흑사회주의 ‘암흑기’는 바로 마령의 힘.
그 힘은 흑사회에 아직 남아 7명의 회주 중 하나인 마령술사 나위천(羅宇辰)이 그 기술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정보는 지금 황무지 평원의 던전에서 나무를 심고 있던 왕슈란이 내놓았던 정보.
만약 나위천이 완숙한 여우 구슬을 취했다면 전대 흑사회주였던 ‘흑사’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구미호인 장렌이 흑사회를 차지하고 세력을 키우는 동안 계속 조용히 그녀만을 보필했다.
도광양회(韜光養晦)
‘그 빛을 숨기고 때를 기다린다라···.’
태훈은 마지막 마력의 힘을 다 흡수하기 전에 여우 구슬에서 손을 떼고 그 힘을 풀었다.
마력을 거의 잃었지만 구슬은 여전한 모습으로 은빛 광채를 띄고 있었다.
***
여우 구슬의 기억을 읽어내고, 여우 구슬을 앞으로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길 잠시, 태훈은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음을 상기하며 우선 36칸으로 늘어난 아공간 창고부터 살펴봤다.
그리고 그곳에서 찾아낸 아이템은 역시나
“이거지!”
<신룡 파르데나안의 망토>
신룡 파르테나안의 날개 피막으로 만든 망토입니다.
방어력과 원소 마법의 저항력을 비약적으로 올려줍니다.
용의 기운(龍氣)을 품은 자만이 망토의 착용이 가능합니다.
망토의 모습은 우습게도 무슨 판초 우의 같은 모습.
재료는 용의 날개 피막 같았다.
반투명한 가죽 위에는 자잘하게 용의 핏줄이 그대로 보이는 듯.
태훈이 그 망토를 입자 꼭 날개를 단 느낌이었다.
[신룡 파르데나안의 망토가 이제 당신을 보호합니다.]
- 신룡 파르데나안의 무구가 4세트 효과를 발동합니다.
- 세트 효과에 의해 물리 공격을 하는 대상에게 공격력의 30%만큼의 피해를 되돌려줍니다.
- 세트 네 개가 모여 신룡의 힘을 발현합니다. 이제 당신은 자신의 용기(龍氣)를 이용해 짧은 시간 자신과 자신이 지정한 상대에게 보호막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 망토가 품은 바람의 힘을 이용해 짧은 시간 비행이 가능합니다. 비행 시 용기(龍氣)가 소모됩니다.
‘음?’
날 수 있다고?
거기에 보호막도 자신 이외에 한 명을 더.
태훈은 바로 실행해 봤다.
하늘 높이 점멸로 뛰어올라 활강하듯 몸을 펴본다.
그러자 마치 윙슈트를 입은 것처럼 자유롭게 바람을 타고 날 수 있었다.
이걸 점멸과 함께 가고일 블랙까지 이용한다면 전투 시에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태훈이 땅에 내려선 순간 다른 무구들과 마찬가지로 신룡 파르데나안의 망토는 피부에 흡수되듯 투명하게 사라졌다.
“아직 할 일이 남았지?”
태훈은 4 서클이 되고 여우 구슬의 힘까지 얻어내자 손쉽게 차원의 문을 열었다.
그가 열어낸 곳은 강원도 공작산의 오우거 던전의 하늘.
그곳으로 황급히 몸을 던졌다.
***
전투는 거의 소강상태.
이미 전의를 상실한 흑사회의 빌런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어쩌다 길드의 힐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빌런이 방금 박주현의 모닝스타에 왼쪽 무릎이 아작나며 무너져내렸다.
“크아아아아!!”
“제발, 제발 우릴 살려줘.”
팔다리가 하나씩은 날아간 상태로 전의를 상실한 놈들은 무릎을 꿇고 빌며 생명을 구걸했다.
태훈은 그 상태를 살펴보며 길드의 헌터들을 향해 인사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 모습에 감규석의 눈을 반짝였다.
“어? 자네, 뭔가가 바뀌었는데?”
“그래요?”
“허어. 어찌 사람이 레벨업이라도 한 듯 분위기가 달라졌어.”
“그 구미호를 잡아서 그런지도 모르죠.”
“어째 내 실력으로도 이젠 이빨이 안 들어갈 느낌이군.”
태훈은 방긋 미소만 지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빌런들.
정확히 수를 따져보니 이곳 오우거의 던전으로 공격을 온 빌런들은 총 130여 명.
그중 50여 명은 오우거 보스를 잡는 와중에 죽었고, 나머지 80여 명도 그중 절반은 힐러들의 편전과 모닝스타에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40여 명이 지금 무릎을 꿇고 빌고 있었다.
태훈이 주머니에서 원본의 차원의 링을 꺼내 미니언 족장을 불렀다.
낑낑거리긴 했지만, 그곳에서 미니언 족장과 가고일 블루가 기어 나왔다.
“냐뇨냐?”
아직 번역기가 활성화된 상태가 아닌 듯.
귀여운 목소리로 태훈에게 묻는다.
“여기 40명을 감옥으로 보내려고.”
“알따냐”
족장이 다시 차원의 링으로 돌아가 ‘개 목걸이’를 준비하는 동안
태훈은 차원문을 열어 40명 빌런을 황무지 던전으로 보냈다.
왕슈란이 있는 곳과는 반대쪽.
강 건너편의 황무지였다.
상황은 왕슈란 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왕슈란이야 고블린 둥지에서 정신교육을 단단히 받은 쪽이고, 이 빌런들은 그런 절차를 건너뛴 것이니 반항심은 그대로일 터.
그래서 그 정신 교육 대신 훨씬 더 강력한 족쇄를 채웠다.
“이걸 차라뇨!”
미니언의 대장간에서 만들어진 개 목걸이는 마력을 흡수하도록 설계된 마력구속구.
40명 중 여성이 8명이었기에, 그룹을 4명씩 10개의 단위로 나누고 거기에 투기를 구속하는 쇠사슬로 4명씩을 하나로 연결한 족쇄를 채웠다.
화장실을 가던 어디를 움직일 때도 이젠 4명이 하나로 뭉쳐 움직여야 할 터.
하지만, 놈들의 분위기는 독기 품은 눈빛.
언제든 탈출만 할 수 있다면 등 뒤에서 칼을 꽂을 것 같이 으르렁거렸다.
‘뭔가 본보기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뇨!”
“그렇지?”
태훈은 우선 40명을 하나로 묶어 차원의 문을 열고 아공간에 던져넣었다.
위치 추적 장치와 다시 이들을 데려올 수 있도록 지표가 되는 물건도 하나 함께 매달아 던져버렸다.
“으아아앗!!”
“사··· 살려줘!!”
“크아아아아아! 여긴···.”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에서 며칠 고생하면 저 독기도 빠지리라.
태훈은 그들을 그렇게 떠다니도록 놔두고 다시 오우거의 던전으로 복귀했다.
***
태훈을 기다리고 있던 감규석과 30명의 헌터들.
정보팀을 제외한 가고일 라이더 정예들이다.
태훈은 이들을 위해 10마리의 가고일을 추가로 데리고 나왔다.
감규석은 새로 들어온 가고일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찌하려고?”
“중국으로 돌아가야죠.”
“거길?”
“예. 아직 극장 안에는 300명은 넘는 빌런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뿌리를 뽑아버려야죠.”
“좋지. 알겠네.”
30명의 헌터들은 잠시 쉬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곧 있을 2차전을 위해 비어버린 마력도 부지런히 충전했다.
“준비 되셨죠?”
“갑시다!”
태훈이 다시 한 번 차원의 문을 열었다.
***
중국 상하이 푸동의 극장.
관객석에 모여있던 빌런들 중 조장급 여섯이 모여 회의가 한창이다.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글쎄요.”
“몇 명이나 총회주를 따라 들어갔지?”
“마령부 소속 소환술사가 오십에 기갑병이 이십, 그리고 일반 조직원이 백삼십 정도입니다.”
“······.”
지금 상태는 최악.
처음 어쩌다 길드가 차원문을 만들고 놈들이 그 게이트로 도망쳤다.
마령의 소환사들을 필두로 공격을 들어갔고, 그들을 따라 이번에 새로 창설한 엑소슈트의 강철 기갑병 스물이 넘어갔다.
거기에 회의 총회주인 칠령의 구미호까지.
그녀를 따라 A급으로 분류되는 조직원과 간부들이 모두 넘어간 상태였다.
“씨팔! 게이트가 사라질 줄은 몰랐습니다.”
바로 따라 들어가려고 했더니 게이트가 눈 깜빡하는 순간 사라져버렸다.
여기 모인 전력들이라고 해봐야 조직원의 말단들.
그래도 B와 C급에서 가려 뽑은 정예들이었다.
“어찌해야 할까?”
“다른 지회에 연락을 넣어야 할까요?”
“그랬다가 총회주께서 돌아오시면 그 책임을 어떻게 지려고?”
흑사회의 일곱 지회는 서로 협심하면서도 경쟁 구도.
서로 견제하며 자신의 지회가 타 지회에 먹히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싸우는 관계였다.
“간부급들이 모두 사라져버렸으니···.”
그때, 무대의 정중앙.
처음 게이트가 생겼던 바로 그 위치에 다시 검은색 소용돌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게이틉니다!”
“좋아. 이번엔 우리도 모두 들어간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온 것은 가고일들.
서른 마리의 가고일이 튀어나오며 가고일과 거기에 탄 라이더들이 거대한 검과 모닝스타를 휘두르며 전투에 나서기 시작했다.
“어··· 어쩌다 길드 놈들입니다.”
“좋아! 다 죽여!!”
30 대 380
극장 안에선 또 다른 전투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선작과 좋아요는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즐겁게 보셨다면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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