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낙찰
< 86화. 낙찰 >
“입찰을 마감합니다. 오늘의 경매 개찰을 시작하겠습니다.”
경매의 개찰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집행관은 입찰함을 개봉해 입찰 봉투를 각 사건별로 분류하고 입찰 금액에 맞춰 순서대로 정리를 시작했다.
순위가 정해지자 사건 순서별로 빠르게 발표가 이루어졌다.
“사건번호 2024타경17166···”
서류를 살피던 집행관이 책상 위 카메라를 조정해 입찰 금액을 좌·우측 모니터로 출력해 보여준다.
“119억 4천만 원. 법인 헌터 길드 ‘혈마’ 최고가 매수자로 낙찰합니다. 차순위는 118억 7천만 원···”
그 뒤로 순위에 따라 쭈욱 입찰자와 금액을 나열한 후.
차순위매수신고인 결정을 위해 1위와 2위 입찰자를 불러 정리한 후에는 다른 입찰자들의 서류를 반납해준다.
낙찰자에겐 조용한 환호가, 낙방자에겐 깊은 한숨이···
“사건번호 2024타경···”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아쉬워하고.
저 뒤 홀로 온 젊은 헌터는 걸려든 마수에 아직까지도 침을 흘리며 자고 있다.
세상의 희로애락이 작게 뭉쳐 펼쳐지는 이곳에 태훈이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우리 차례.
“359억 원 법인 헌터 길드 ‘어쩌다’를 최고가 매수자로 낙찰합니다.”
그때,
하얗게 백지가 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 명의 헌터들.
태훈은 그들을 향해 아공간 창고에서 바꿔치기했던 입찰 봉투를 꺼내어 흔들어 보였다.
그들의 얼굴이 시시각각 똥 씹은 표정으로 바뀐다.
“나가시죠.”
“네!”
집행관에게 나가 보증금 영수증과 서류 확인을 마무리하고 법정을 빠져나왔다.
법정을 나오면서 정대진 지부장에게 태훈이 물었다.
“바로 낙찰 대금 납부하고 등기치는 게 아닙니까?”
“그건 아닙니다. 낙찰 허가 결정이 나와야 합니다. 낙찰 허가 결정하고 7일 정도 항고가 없어야 확정이 되죠. 대금 지급기일 소환장 받아야 최종적으로는 정리가 가능합니다. 한두 주 정도 걸릴 겁니다.”
“흠···. 그러면 아직 끝난 게 아니네요?”
“왜···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
“저 뒤를 좀 보시죠.”
정대진이 뒤쪽을 슬쩍 바라보자.
그곳엔 아까 법정에서 봤던 헌터들이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가 점점 많아진다.
“허험. 법원 안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겠습니까?”
“저 주차장을 지키는 경찰이 각성자로 보이지는 않는데요?”
“그럼···.”
“무슨 이야길 하는지 한번 들어나 보죠.”
“그러시겠습니까? 혹 충돌할 상황이라면··· 다른 안면이 있는 헌터를 부를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법원에서 대거리를 할 정도의 강심장이었다면 진즉 길드로 찾아왔겠죠. 여긴 장소가 그러니 저쪽 등나무 밑에서 커피나 한잔하시죠.”
태훈은 느긋하게 자판기로 가 커피 음료 캔 두 개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등나무 밑에 앉아 그들이 오길 기다렸다.
어수선했던 분위기도 잠시, 스포츠카들이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다른 길드 헌터들이 사라졌을 때쯤, 이쪽을 주시하며 대기하고 있던 십여 명의 헌터들이 태훈이 있는 등나무 휴게소를 감싸듯 다가왔다.
그 가운데, 40대로 보이는 헌터가 태훈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저, 어쩌다 길드의 강태훈 대표 맞으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아까 법정에서 얼굴 뵈었죠? 저는 광천 길드 마스터 구광천입니다.”
【능력 전이】 각성자 구광천.
그가 지금 열 개가 넘는 각성 능력을 자신의 몸에 전이한 후 태훈의 앞에 서 있었다.
***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열 개의 각성 능력을 덕지덕지 바른 그가 위압적인 표정으로 태훈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그의 각성 능력이라면 거의 S급.
그를 둘러싸고 폭압적으로 흘러나오는 마나의 기운에 되레 태훈의 옆에 있던 정대진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크흐흠.”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열 명의 헌터들은 자신의 능력을 밀어주고 잠시동안 일반인이 되어버린 사람들.
하지만 그걸 티 내지 않으려는 듯 거친 인상에 가슴을 한껏 부풀리며 태훈과 정대진을 포위하듯 서 있었다.
“낙찰받은 시화호 던전 말이요.”
“네에.”
“그거 우리에게 양보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양보요?”
“아니, 우리에게 파시죠. 값은 원하는 대로 쳐서 드리겠습니다. 5백억. 아니 6백억이면 어떻습니까? 그 금액이면 오늘 경매액의 두 배입니다.”
그가 뿜어낸 기운에도 태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그쪽에서 그렇게 금액을 제시하시면··· 그건 원하는 대로가 아닌데요.”
“말해 주시죠. 최대한 맞춰 드릴 테니.”
꽤나 자신있는 표정.
돈은 원없이 있다는 자신감.
“흠.”
태훈은 잠깐 고민했다.
‘그 던전의 가치가 얼마나 될까?’
14만 제곱미터의 맹지나 던전 내부의 넓이는 의미가 없다.
단지 소환식의 제단 8개와 만들려고 했던 두 곳을 포함해 총 열 군데, 뭉쳐지는 마나의 와류가 있는 곳이다.
즉, 열 개의 차원의 링을 설치 가능한 상태라면.
‘김포 공항의 가치는 얼마나 되지?’
태훈은 핸드폰을 열어 느긋하게 검색을 돌렸다.
김포공항. 면적은 255만 평, 내발산동 평당가를 2천만 원만 쳐도 대충 계산해도 5조가 넘는다.
이어진 검색에 논문이 하나 튀어나왔다.
『여객 실적을 바탕으로 한 김포공항의 경제적 가치 분석』
검색엔진이 찾아낸 요약 문서엔 저비용항공사가 취항한다는 가정하에 김포 공항의 경제적 가치는 2,682억 원이란다.
그 논문의 작성 연도는 2005년.
그럼 지금은 못 해도 경제적 가치는 최소 5천억?
그렇다면···
“5천 억이면 넘겨드리죠.”
“뭐요?”
그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전 그 던전의 가치를 그 정도로 보고 있거든요.”
태훈이 천천히 일어났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구광천의 눈이 붉다.
처음 시간차 던전을 발견했을 때 찾아왔던 그 설인.
강남 길드의 강호섭 마스터가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웃어?”
태훈이 구광천을 바라봤다.
지금은 저렇게 타인의 능력을 뽑아 거드름을 피우고 있지만, 아공간에 한 시간만 방치해도 눈물 콧물 쏟으며 엉엉 울 거 같은 인물.
다른 헌터의 각성 능력을 끌어당겨 천지 사방으로 마력을 뿜어내고 있지만, 그의 몸은 어딘지 과부하가 걸린 듯 기이하게 삐걱거렸다.
태훈이 보기엔 그 한 곳만 잘못 건드려도 마력 폭주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겁 없이 다른 사람 능력을 당겨 붙였다가는 온몸이 뒤틀려 터져버립니다.”
“뭐?”
태훈은 다른 것을 한 건 아니다.
그냥 가닥가닥 뿜어나오는 마력의 한 줄기를 잡아
손가락으로
딱!
그러자 엉켜있던 마력이 풀어지며 뭔가가 끊어졌다.
마력이 질질 흘러내리는 느낌.
자신의 앞에 서 있던 구광천의 몸이 덜컥하더니 사시나무 떨리듯 떨기 시작했다.
“과식하면 탈이 나는 법이죠.”
“······.”
주룩.
놈의 코에서 코피가 흘러나왔다.
“커헙!”
“대표님!!”
뒤쪽에 서 있던 헌터들이 다급히 그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가 손사래를 치며 부하들을 밀어낸다.
“방금 오천억이라고 했나?”
말이 짧다.
하지만 뭐.
“맞습니다.”
“우리가 낼 수 있다면!”
오! 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다.
하지만···.
“중국 놈들에게 팔진 않아요. 만약 사겠다고 한다면 세무 조사부터 받고 정당한 길드 지분으로 구매하세요.”
구광천의 얼굴에선 오만 감정이 섞여 나왔다.
“어떻게 알았나?”
“악령이나 불러내는 놈들과 붙어먹고 산다면 광마길드 꼴이 날 겁니다. 조만간 아공간을 혼자 날게 될 거고요.”
“!!”
“그리고 뒤에서 돈 밀어주던 그 친구에게 이 말도 전해주시죠. 한 번만 더 내 던전에 와서 찝쩍거리면 그땐 정말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말이죠.”
태훈이 돌아서서 정대진 지부장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 정대진과 함께 타고 온 차로 천천히 돌아왔다.
광천 길드의 헌터들은 그런 그를 말리지도 붙잡지도 못했다.
차를 막 타고 시동을 걸려고 하는 순간.
꽉 막혀있던 긴장감이 터져 나왔다.
“후아!”
뭔가 시원하면서도 통쾌한 듯
깊은 한숨이 태훈이 아닌 정대진의 입에서 먼저 튀어나왔다.
“왜요?”
“솔직히 전 조금 쫄렸거든요.”
“그래요?”
“그 길드 마스터는 S급은 훨씬 넘어 보이던데···”
“원래 자신의 실력을 갈무리할 줄 모르는 놈은 약한 법이죠. 감규석 헌터님 보시면 느낌 아시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뿜어내는 기운이···.”
“그거 다 뒤에 서 있던 놈들 거 빌려서 온 거예요.”
“예? 빌려요?”
태훈은 핸들을 돌리며 말했다.
“그 마스터, 자기가 가진 능력은 【능력 전이】 하나밖에 없는 맹탕입니다.”
“아. 그래요?”
정대진은 태훈의 방금 말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타인의 각성 능력을 감별할 수 있는 능력은 엄청난 경험이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특수한 각성 능력자밖에는 할 수 없는 기예(技藝).
‘이 친구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군.’
“낙찰 기념으로 드라이브나 함께 하시죠. 혹시 근처에 아는 맛집 있으십니까?”
태훈의 말에 정대진은 그간의 생각은 떨쳐버리고 주변에 뭐 맛있는 집이 있었나 생각했다.
그리곤 곧바로
“여기 넘어가면 오리백숙 맛있게 하는 집이 있는데 어떠세요?”
“그럼 그리 가시죠.”
태훈의 차가 부드럽게 법원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
월드컵 경기장이 내려다 보이는 마포구의 고층 빌딩.
밤늦은 시간임에도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는 중년 여성은 넷플립스 한국의 콘텐츠 총괄 VP를 맡은 박주영이었다.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노트북 화상에 올라온 사람과 화상 회의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좋아요. 그럼 중국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 부국장은 뭐라고 하던가요?”
[사석에서 개인적으로는 표절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직접 표절을 인정해 배상을 진행할 이유는 없다고 하는군요. 자국 내에서의 일이지 직접적으로 피해를 준 바가 없지 않냐고요.]
“예상했던 결과네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카드가 뭐가 있죠?”
[그들은 자국의 영화를 좀 더 다양한 채널로 서비스하길 원합니다. 합자가 되었든 판권 구매가 되었든 정식 절차를 받은 작품은 글로벌로 서비스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특히 홍콩의 영화법인들을 흡수한 뒤에는 욕심을 더 키우고 있어요.]
“그 ‘더 힐러’라는 표절작도 말이죠?”
[네. 그렇죠.]
“사후 처방이긴 하지만, 어쩌다 길드의 판권을 중국이 직접 구매하는 형식이라면 어떨까요? 그들은 이미 충분히 돈을 벌었고, 지금이라면 적절한 보상액에 맞춰 판권 구매를 위해 지불할 비용도 충분할 거로 생각되는데요.”
[표절을 용인하자는 말씀이신가요?]
“아니요. 표절을 인정하고 사과를 받아내야 맞겠죠. 생각이 많아졌네요. 모두에게 좋은 결과가 있도록 중간에서 조율을 잘해야겠습니다.”
[그들의 합의 조건은 메일로 보냈습니다. 한번 확인해보시죠. 저는 소송 상황을 계속 모니터링해서 보고하겠습니다.]
“부탁해요. 거기 음식은 입에 잘 맞나요?”
[그럭저럭 먹을 만합니다. 하지만, 공기는 영 못 참겠어요. 어서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습니다.]
“조금만 고생해줘요. 저도 최선을 다해볼 테니까.”
화상 회의를 마친 박주영은 식어버린 커피를 홀짝 마셔버리곤 사내 채팅앱을 꺼내 자신의 일정을 관리해주고 있는 직원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어쩌다 길드 대표와 미팅 일정 잡아줘요. 최대한 빠르게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뭔가 생각이 났는지 서비스 총괄 운영팀의 인적 사항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찾아낸 인물.
새롭게 서비스 총괄 매니저로 있는 이는 그녀가 아는 사람이었다.
피식 미소를 지은 그녀는 방금 찾아낸 인물에게 채팅앱으로 콜을 넣는다.
[빌. 잘 지내죠?]
[헤이. 주영,팍. 나한텐 무슨 일이죠?]
바로 화상 채팅이 열린다.
“빌. 이 시간까지 퇴근 안 했어요?”
[퇴근은 그쪽이 해야죠. 전 집이에요. 마침 확인할 사항이 있어서 잠깐 접속한 겁니다.]
“그럼 부탁할 것이 있는데 가능할까요?”
[박 VP 부탁이라니, 조금 무섭네요. 말씀하세요.]
“신규로 서비스를 준비하는 중국 영화가 몇 편이나 있나요?”
[잠깐만요. 그런데 그건 왜요?]
“표절 때문에 문제가 있어서요. 그래서 그쪽 발목을 좀 잡고 싶어서요.”
[와! 이건 덩치가 좀 큰데요?]
“제 아이디어는 이거예요. 신규 런칭 작품 전부를 표절 검증을 이유로 잠시만 묶어두자는 거죠. 일정을 굳이 묶어둘 필요는 없고 표절 검증의 절차를 하나 더 끼우겠다는 제스츄어만 취해보자는 의미예요.”
[어차피 거기 본토 놈들은 검열을 이유로라도 우리가 서비스하고 있는 영화를 자국민들에게 오픈할 생각이 없잖아요. 우리 영화는 그놈들하고는 달라요.]
“알아요. 하지만 그들도 다른 나라에서 돈을 벌고 싶어 하는 건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그런 허리우드 액션을 취하는 게 ‘더 힐러’의 표절 소송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거라는 거죠?]
“맞아요. 빌.”
[서비스 일정을 바꾸긴 힘들 거예요. 하지만, 표절 검증을 강화하겠다는 퍼포먼스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로 봅니다.]
“그럼 부탁합니다.”
[알겠어요. 미국으로는 언제 돌아와요?]
“글쎄요. 조만간 가긴 갈 거예요.”
[그래요. 그때 한잔합시다.]
“잘 지내요. 고생하고요.”
화상 챗이 끝나자마자 올라오는 메시지
[내일 오전 9:30 광명시 어쩌다 길드 회의실에서 그쪽 마스터와 미팅 잡으려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좋아요.]
[차량은 자택에서 출발하는 거로 준비해드리면 될까요?]
[네. 그렇게 부탁할게요.]
[알겠습니다.]
시계를 확인해보는 박주영.
그녀가 채팅앱을 닫자 모니터 화면엔 어쩌다 길드의 힐러가 하늘 가득 가고일을 타고 날고 있는 바탕화면의 그림이 보였다.
그 구석 한 곳에 작게 보이는 청년이 분명 어쩌다 길드의 대표 강태훈.
그녀는 툭툭 모니터를 치며 말했다.
“내일 봐요. 헌터님.”
그렇게 나온 퇴근길.
사무실의 밖에는 늦은 2월의 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었다.
선작과 좋아요는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즐겁게 보셨다면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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