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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풋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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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탈혼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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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풋
작품등록일 :
2019.10.12 01:47
최근연재일 :
2020.01.18 00:02
연재수 :
7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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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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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글자수 :
502,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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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0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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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프롤로그 & 1화. 무명(無名)

DUMMY

[프롤로그. 1]




깊은 동굴 속에 위치한 작은 정자.


동굴의 천장에 솟아있는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마치 비처럼 정자의 기와를 적셨다.


은사로 수 놓은 봉황 문양의 도포를 입은 백발의 선인과 이제 갓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귀여운 얼굴의 무녀. 그녀도 눈처럼 하얀 백발. 서글서글한 얼굴의 선인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저승의 명부록에서 이름을 지우면 어찌 되는지는 아느냐?”


무녀가 답했다.


“명을 잃었으니 죽질 못하겠지요.”

“그렇지. 저승사자가 잡으러 올 수가 없으니 죽음은 만나지도 못하겠지.”

“멋지네요.”


무녀는 싱긋 웃으며 선인을 바라봤다.


“허어! 멋지다니? 윤회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환생의 길 밖으로 내팽개쳐진 게지. 그게 무어가 멋지다는 게냐?”


“안 죽잖아요.”


선인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울화를 섞어 말로 뱉었다.


“죽어야 산다. 어찌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축복임을 모르느냐?”

“흠! 전 뭐 그닥.”


귀여운 얼굴의 무녀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입만 삐죽 내놓더니 말했다.


“늙지도 않으려나?”

“정말 모를 일이구나. 넌 그것이 어찌 궁금하느냐?”

“좀 억울해서요.”

“억울하다니?”

“명부에서 제 명을 정하는 거. 흥! 지들이 뭐라고.”

“윤회가 축복임을 너는 모르느냐? 생과 사는 계속 반복되며 네 혼의 업을 벗긴다. 그게 정화다. 그 끝에 신이 있고!”

“아니요. 저는 신이 되기 싫어요. 그리고 단지 누군가가 제 운명을 저울질하고 정하는 것이 역겨울 뿐이에요.”

“하면 어찌하려고?”

“뭐든. 제가 할 수 있는 걸 해보려고요.”


무녀가 선인을 향해 방긋 웃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서는 따듯한 온기라곤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명부에 있는 네 이름을 지우기라도 하겠다는 말이냐?”

“명부에 적힌 이름을 지울 수야 없겠지만, 지금 있는 제 이름을 아무도 모르게 바꿀 수는 있겠죠.”

“혼명(魂名)을 어찌 바꾼단 말이냐? 저승사자의 눈을 피할 수 있겠느냐?”

“혼의 각인을 모두 지우면 가능해요.”

“네가 너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우겠다?”

“그래서 작별 인사를 하려고요.”

“뭐라?”

“전 이제 절 지우고 사라지겠어요.”

“여길 떠나겠다고?”

“네!”

“어리석기는! 네년 생의 열 곱절이 걸려도 각인을 다 지우지는 못할 게다. 내또한 널 기억하는데 어찌 그걸 다 지운단 말이냐.”

“천년이 걸린다 해도 다 지워내겠어요.”

“그래 좋다. 그리되면 뭘 하고 싶어 그러느냐?”

“그 엿 같은 명부를 전부 없애버리려고요.”

“네년이 진정 미친 게냐?”


무녀 제자의 밝은 웃음에 이제 막 산신의 반열에 오른 선인은 자신이 제자 하나를 제대로 잘못 골랐음을 깨달았다.

그가 부채를 들어 그녀의 머릴 내려쳐 깨부수려 하자 마치 안개가 흩어지듯 푹 하며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30장쯤 멀리 다시 나타난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왈칵!


하얀 두루마리 위로 번지는 피.


“각인을 지운다 하더니 이게 그 뜻이더냐? 날 잡아먹고서도 액운을 피할 성 싶으냐?”


그가 입에서 붉은 피를 쏟았다.


“환생의··· 끝은··· 아직···”


정자의 끝에서 계단을 내려서던 그가 무너지듯 쓰러졌다.





* * *




[천 년 후]




/콰장창!/


갑자기 들리는 날 선 파공음.


“각자 대기!”

“옙!”


괴인의 앞에 선 백발의 무녀와 세 청년.

창문을 뚫고 날아온 총알은 앞에 선 괴인의 후두골 좌측 상부를 뚫고 들어갔다.


“큭!”


총알은 뇌를 한 바퀴 휘젓고는 오른쪽 눈을 찢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후두두둑!/



총탄의 회전력에 휘말려 강제로 뽑힌 머리카락과 살점들이 우수수 비산하며 바닥에 흩뿌려졌다. 하지만 튀어야 할 피는 굳은 것인지 마른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살점만 툭툭 부서져 떨어질 뿐 괴인의 얼굴 위로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무녀가 중앙에서 괴인의 상태를 살폈다.


“머리가 반이 날아가도 멀쩡하네?”


괴인은 머리에 총알이 관통당한 상태로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장승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가 아직 남아있는 한쪽 눈으로 앞에 선 이들을 천천히 바라봤다.

차디찬 비소 또한 지우지 않고.


“네놈들!”


뚫어지게 지켜보던 괴인이 입으로 거칠게 냉기를 씹어내며 말했다.


“어설프지만 준비만큼은 단단히 했구나!”


귀기에 찬 암울하면서도 거대한 울림.

그의 음성이 무슨 절간에서 울리는 범종 소리와 같다.


무녀의 좌측에서 손으로 인장을 그리던 청년이 외쳤다.


“놈이 회복합니다.”


괴인의 상처는 하얀 기염을 뿜으며 벌써 반은 회복되었다. 그의 부서진 안구도 거의 원상태로 돌아와 제자리를 찾으려 했다.


“감히 저승사자를 건들다니!”


씹을 듯 어금니 저 안쪽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분노에 찬 음성. 핏줄 선 눈알이 다시 위치를 잡으려고 희번덕거렸다.


“정녕 정신이 있긴 한 거냐?”


괴인의 얼굴의 뼈와 근육들이 서로 붙으며 우지직 소리를 냈다.

앞으로 내디딘 한 발.

/콰앙!/


“헛!”


그 발에서 튀어나온 붉은 기감에 무녀와 세 명의 청년이 주르륵 뒤로 밀려 나갔다.

무녀의 뒤에서 중앙을 지키던 퉁퉁한 청년의 코에서 피가 퍽 터졌다.


“크읍!”


저승사자가 한쪽 눈으로 뚫을 듯 붉디붉은 기광을 내뿜으며 쳐다봤다. 눈빛만으로도 꼼짝없이 제압당할 것 같은 느낌. 심장을 조여 오는 짜릿함. 마주 선 백의의 청년 세 명은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식은땀이 주르륵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그들 앞에서 그나마 여유가 있는 것은 무녀뿐. 그녀가 힘차게 외쳤다.


“거 말 참 많네. 회복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 다시 공격해!”


짧은 명령과 함께 창문이 터졌다.

새롭게 세 발의 총알이 상대 괴인의 머리로 날아들었다.


“흥!”


하지만 괴인의 모습은 희미한 잔영만 앞뒤로 흔들릴 뿐.

날아든 총알은 표적을 맞히지 못하고 맞은편 선반만을 박살 낼뿐.

비산하는 서류철과 깨진 화장대의 파편들만이 어지럽게 날렸다.


“너희가 진정 누굴 상대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느냐?”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뜨거운 기름이 피부에 튀는 느낌.

서슬 퍼런 기감이 피부를 직접 때린다.

인장을 맺고 있는 청년의 손에서 피부가 쩍쩍 갈라지며 실금에서 피가 스며 나온다.


“잘 알고 있으니 좀 닥치시지?”


“네년이!”


/콰앙/


저승사자 손을 휘젓자 자신의 발 앞의 마루판가 터져나가며 폭발했다.

하지만 세 명의 청년과 무녀에게 날아가던 폭발의 파편들은 무언가에 막힌 듯 퉁겨졌다. 살짝 놀라는 저승사자.


“방마진? 흥.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저승사자가 손을 뻗자 그의 손에서 붉은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기운은 앞에 마름모 대형을 유지하며 서 있는 네 명을 압박. 기운이 다다른 바닥이 퍼버벅 터져나갔다.


“치잇!”


괴인의 앞으로 무녀가 성큼 나섰다.


“모두 조금만 버텨!”


결연한 얼굴로 선 무녀.

중앙에서 세 청년을 보호하며 무녀는 재빠르게 품속에서 은빛 방울을 꺼냈다.


/떠렁!/


신기(神機)를 흔들자 괴인이 쏟아낸 기운이 주춤했다.


“이번만 막으면 곧 귀환명부(鬼還名簿)가 소멸할 거야. 그때까지만 버티면 저 저승차사도 힘을 잃어!”


“차사귀혼방마진은 더는 못 버텨요! 곧 깨집니다.”


무녀의 바로 뒤에선 붉은 머리의 청년이

죽을 둥 살 둥 손가락으로 인장을 이으며 힘겹게 괴인의 기운을 버티고 있었다.


벌컥.


청년의 입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온다.

결연한 눈빛으로 청년이 인장을 마무리하고 씹어뱉듯 꺼낸 대답.


“가세요!”


“타앗!”


무녀는 빙글 돌아 중앙에서 방어를 주도하던 청년의 어깨를 의지해 백발을 휘날리며 높이 뛰어올랐다.


“도결(圖闋)!”


도문의 외침을 시작으로 부적을 흩뿌리자 갑자기 바닥에서 금빛으로 빛이 쏟아져 올라왔다.


/크르릉!/


바닥이 울리자 수없이 많은 문(門)이라고 쓰인 글자의 금빛 형(形)들이 천천히 일어서며 괴인을 겹겹이 감싼다.


청년들이 뒤에서 보고 있으니 마치 금빛 연꽃이 피는 형상.


“흡착(翖着)!”


거대하게 일어선 금빛의 올가미가 무녀의 외침에 맞춰 괴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건?”


들러붙은 글귀들이 저승사자의 몸을 파고들었다. 그 글귀는 금빛 기광을 발하며 그의 몸을 태웠다. 저승사자는 놀란 눈으로 외쳤다.


“폐광방문진(閉光防刎陣)?”


이번에도 실패면 무녀에게 더는 패가 없다. 그녀가 결연한 표정으로 외쳤다.


“합(合)”


“크아아아아”


“지금이야!”


무녀의 좌측에 있던 청년이 재빠르게 밑으로 치고 들어와 칠성검으로 저승사자의 하복부를 찔러 일자로 그어 올렸다.


“크흡!”


가슴이 반으로 갈라지며 저승사자의 몸에서 자광 빛이 피처럼 뿜어져 나왔다.

창문에서도 파공음과 함께 재차 날아온 총알이 퍽퍽 소리를 내며 괴인의 측두엽에 적중했다.


“크어어!”


털썩.


이제야 저승사자의 무릎이 꺾였다.


/치이이이익!/


저승사자는 옆머리의 살점과 함께 하관의 턱까지 반쯤 날아갔지만, 그도 잠시⋯ 얼굴에서 하얀 기운을 내뿜으며 새살이 돋고 날아갔던 이빨들이 쑥쑥 새로 자라났다.

저승사자의 서릿발 같은 분노를 뿜어내던 눈이 청년을 잡아먹을 듯 응시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상처 때문인지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


그의 앞으로 달려든 무녀가 저승사자의 벌어진 가슴에 손을 얹고 소리친다.


“멸시(滅屍)!”


뛰룩뛰룩 눈알을 돌리는 저승사자의 입에서 핏빛 괴성이 내뿜어져 나왔다. 마치 쇠 갈리는 소리.


“크아아아!! 어찌⋯⋯ 어찌하여 네놈들이 이 술법을 아느냐?!”

“시끄럽고, 그만 꺼져!”


가슴에서 화르르 불이 번지며 자광의 기운이 붉게 타 올라왔다. 무녀와 청년들은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너⋯⋯ 너희가 천명을 거역하려 하는 것이냐⋯! 염라께서 너희를 가만둘 성 싶으냐? 네놈들은 영혼이 사멸할 때까지 팔열팔할의 지옥에서 영생토록 지⋯⋯.”


저승사자는 더는 말을 잊지 못하고 자색광을 몸속에서 내뿜으며 천천히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화르륵/


그의 온 몸에 불꽃이 올라왔다.




* * *




저승사자가 쓰러진 자리.


불꽃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해골만 남도록 자작자작 타고 있었지만, 저승사자의 눈만큼은 아직 분노에 싸여서 그들을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앙상한 손이 불꽃 속에서 튀어나와 그들을 향해 휘둘렀지만 남았던 힘줄이 타 끊어지자 흐무러지듯 그의 손이 바닥을 뒹굴었다.

쓰러져 불에 타고 있는 저승사자 앞에 온몸의 기운이 빠져 주저앉는 무녀와 청년들.


“헉헉⋯⋯.”


오른쪽의 청년이 흘러나오는 코피를 소매로 쓱쓱 닦았다.


“괜찮느냐?”

“뭘요. 끝났는데요.”


다른 청년이 타다 남은 저승사자를 살펴보더니 급하게 말했다.


“이놈 회복하고 있어요! 아직 안 죽었어요.”

“차사가 죽을 일이 있겠니? 잠시 차사의 혼을 담은 그릇을 깨버린 정도란다. 곧 음기를 회복하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올 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땀을 훔치는 무녀가 끼고 있던 인이어 폰에 말한다.


“잘했다. 살균아. 네 총이 우릴 살렸다.”


인이어 폰으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


[금방 부활할 거예요! 빠지세요.]


보름달을 등진 옥탑에서 ‘살균’이라고 불리는 미녀가 스코프로 그들을 관찰하며 말했다. 저격용 총을 고쳐 들고 아직 긴장을 풀지 않은 미녀.


주위를 훓어본 스코프는 붉은 실선의 가이드 초점을 쓰러져 있는 저승사자의 두개골 중앙에 언제든지 날려버릴 요량으로 순간순간 돌아와 멈췄다.

약하지 않은 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를 깃발처럼 흔들었다.




* * *




“고생하셨습니다. 가시죠?”


“겨우 한 시진쯤 벌었을 게다. 이젠 명계의 생사부가 새로 발급될 거야. 그러면 저자의 힘도 다시 회복될 거고⋯⋯ 최대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검게 타버린 해골의 눈이 그들을 쫓으며 뻐금뻐금 뭐라 말을 하려 하지만 부서진 하관 덕에서 소리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무녀가 부적 한 장을 꺼낸 후 거기에 씨앗 하나를 넣고 접었다.

그 부적을 해골의 왼쪽 안와(눈구멍)에 넣자 해골이 괴성을 지르며 몸을 흔들었다.


“크아아아악”


그의 눈이 있던 구멍에서 금세 버드나무 가지와 뿌리가 뻗어 나와 얼굴과 입 전체를 감싸며 쑥쑥 자라났다.

뼈만 남은 괴인은 고통에 발버둥 치더니 부들부들 떨던 몸이 축 늘어졌다.


“미안, 이 술법은 안 쓰려고 했는데⋯ 우리 아이들이 너무 상했어. 그리고 넌 우리를 기억하면 안 되거든.”


무녀가 돌아서며 세 청년을 보고 말했다.


“이곳이 귀문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다. 가자! 저 아이부터 챙기렴.”


세 명의 청년은 뒤쪽에 곤하게 잠자고 있는 꼬마 아이를 둘러업고 나왔다.


“서둘러요!”

“가시죠.”


무녀가 한 번 더 누워있는 해골을 살피며 말했다.


“지금 당신이 들고 온 것은 귀환명부였지만, 다음엔 또 뭘 들고 올지 몰라 내 심하게 손을 쓴 것이니 이해하시오.”


청년들과 무녀가 방을 나오자 힘겹게 서 있던 건물의 지붕이 풀썩 주저앉았다.


방금 저승차사를 제지한 이들은 이제껏 한 번도 이름 다운 이름을 가져본 적 없지만, 이들 모두를 부를 때는 탈혼명부인(脫魂名簿人)이라 불렀다.






* * *




1화. 무명(無名)






허름한 건물의 3층


어느 무속인의 신당처럼 꾸며진 내부.

싸구려 석상 하나가 중앙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조각의 얼굴은 부처의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모습을 흉내 내려 한 듯 입꼬리만 어눌하게 슬쩍 올라간 모습. 군데군데 벗겨진 칠이 더욱 석상의 표정을 우습게 만들었다.


석상을 등지고 서 있는 무녀.

무릎까지 닿을 듯 은색으로 빛나는 긴 백발에 금사로 현무가 그려진 새하얀 무복을 단아하게 입고 머리엔 은색 호건을 썼다.

귀엽고 앳된 얼굴이나 그녀의 입에선 기다란 곰방대로 연신 하얀 연기가 뿜어 나왔다.

창살로 들어오는 빛을 받은 그녀의 모습이 마냥 신비로웠다.


빛줄기 속에서 떠돌던 먼지를 바라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무녀가 인기척이 들리자 고개를 돌려 말했다.


“어서들 오너라!”


그녀의 앞으로 정장을 입은 청년 셋과 안경을 낀 처녀 하나, 그리고 글러머스 하다고 해야 할 미녀, 이렇게 다섯 명의 젊은 남녀가 들어왔다. 그리고 다들 익숙한 듯 아무 곳이나 편한 자세로 자릴 잡았다. 안경의 처녀가 무녀에게 짧게 눈인사를 한다.


“다 모였어요.”

“먼저 이름부터 지어야 하겠지?”


모두 심드렁한 표정으로 앞의 무녀를 보고 있다.

너무나 익숙한 듯 이름이 무엇이든 뭔 상관이겠냐 싶은 표정.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그녀의 입이 어서 움직이기만을 기다린다.


“너희들도 매번 이 짓이 귀찮겠구나⋯?”

“⋯⋯.”


건조한 표정으로 키 큰 청년이 말했다.


“어서 하시죠?, 전 빨리 가 봐야 해요. 오늘은 의뢰자가 지정한 곳을 답사도 해야 하고요.”


제일 연장자인 듯 글러머의 미녀가 청년을 보며 말했다.


“너만 바쁘니? 어디서 버릇없이⋯.”


청년이 미녀를 보곤 급 무안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아! 죄송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무녀.


“바쁘다는 건 잘 알지. 그래⋯ 뭐가 좋을까?”


이리저리 눈을 돌려보던 무녀가 처음으로 외모에 걸맞은 귀엽지만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작은 손을 뻗어 석상 밑에서 과자봉지를 찾아 집어 들었다.


“이걸로 하마.”


모두 심드렁한 표정에서 조금은 관심이 있다는 표정으로 바뀌자 그녀가 사뭇 진지하게 과자의 성분표를 찬찬히 살펴본다.


툭 던지듯 나온 이름들.


“신선함이! 살아있는! 미국산! 옥수수!”


“네?”

“예에?”

“헐”

“무슨...”


안경의 처녀가 급 짜증이 묻어나는 심통 난 얼굴로 물었다.


“또 그렇게 성의 없이 지을 거예요?”


“오히려 이편이 좋단다. 흔하고, 아무 의미 없고, 잊기 쉬운, 이름 같지도 않은 이름!”


“아⋯⋯ 알겠어요. 그럼 제가 ‘옥수수’ 인 거죠?”


“아니. 넌 ‘미국산’이야.”


“아⋯ 왜⋯! 으⋯ 좋네요. ‘미국산!’ 알겠어요. 저 먼저 가볼게요.”


휙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안경의 처녀를 뒤로하고 청년 셋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야 너 오늘 되게 ‘신선해’ 보인다.”

“이 쉐끼 ‘싸롸있~’네~!”

“얌마 ‘옥수수’ 털리고 싶냐?”


청년들이 낄낄거리며 서로 농을 주고받을 때.


“네 명밖에 말씀 안 하셨어요. 저는요?”


팔짱을 낀 자세로 농밀한 분위기의 미녀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며 무녀에게 다시 물었다.


“음⋯ 어디보자⋯ 넌⋯ ‘살균제품’?”


“그냥 ‘살균’만 하시죠. 그럼 저도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간단히 묵례를 하고 ‘살균’으로 명명하기로 한 미녀가 건물을 빠져나가자 세 청년은 아쉬운 표정.

그들도 슬슬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하지만 장난기가 슬슬 발동하는지 서로 농을 주고받으며 재미있다고 난리.

“옥수수 털리고 싶냐?”

“‘살아있네’ 넌 디져!”

“신선하긴 얼굴이 완전 골았구먼.”

“진짜 죽는다~! 너!”

유치한 농담을 서로 던지며 툭탁툭탁 가벼운 격투로 놀고 있는 청년들.


‘신선한’ 청년은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큰 키, 준수한 외모에 짙은 눈썹, 훤칠한 이마가 시원한 미청년


‘살아있는’과 ‘옥수수’ 둘은 조금 작은 키지만 다부진 어깨에 살짝 근육 비만형, 헤어스타일이 한 명은 붉은색이고 다른 하나는 노란색으로 둘은 쌍둥이이다.


정말 서로의 변별력을 끌어올리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곰방대를 고쳐 물고 무녀가 말했다.


“자~! 너희들! 아침은 든든히 먹었느냐? 오늘은 할 일이 많단다.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게다.”

“?”

“왜요?”


무녀가 곰방대에서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고는 코와 입으로 천천히 흘려 내보내며 자신의 목소리를 담배 연기에 얹어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뱉었다.


“오늘은 버텨야 하는 시간도 두 시진이고, 또 상황으로 볼 때 이번 차사는 귀환명부(鬼還名簿)를 들고 찾아올지도 모르겠구나.”


갑자기 분위기가 가라앉으며 살아있는 / 신선한 / 옥수수 이 세 청년은 긴장한 얼굴로 식은땀을 쭉 뽑았다.


“귀환명부(鬼還名簿)요?”


청년들 셋 모두는 오늘은 정말 옥수수를 싹 다 털려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릴 스쳤다.


저승사자에게 옥수수수염 뽑듯 잡혀 머리가 쑥 빠지는 느낌으로 간담을 서늘하게 해주는 ‘귀환명부’라는 단어.

오늘 받은 이름처럼 신선함이 살아있으려면 정말 죽을 둥 살 둥 버티고 덤벼야 할 판이었다.


“사고명부(事故名簿)도 아니고 귀환명부(鬼還名簿)라니⋯⋯ ”


“각오를 단단히 하되 너무 걱정은 말아라. 이번 방어엔 나도 참가할 터이니⋯⋯ 바로 부적부터 내 써줄 것이니 방마진부터 만들어 보자꾸나.”

“예!”

“아⋯ 그리고 오늘은 어떻게 불러드려요?”


훤칠한 청년 ‘신선함’이 묻자 무녀는 가만 생각하더니 버렸던 과자의 포장지를 다시 본다.


“어디 보자⋯⋯ 정제수가 좋으냐 백설탕이 좋으냐?”

“백설탕이요.”

“그럼 그리 부르거라. 가라 어서.”

“어제 온 꼬마는요?”

“정제수! 그 이름으로 부르거라.”

“알겠어요. 이따 뵈어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변한 청년들이 건물을 나서자 무녀 ‘백설탕’이 청년들을 뒤따라 나섰다.

무녀가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흘깃 바라봤다.

예의 그 싸구려 석상의 웃는 모습은 그녀의 시선이 닿자 왜인지 자신을 비웃는 표정 같다.

무녀는 그 석상의 얼굴을 지긋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비웃지만 말고 저 아이들이나⋯ 잘 좀 지켜주슈.”


무녀가 신당의 문을 닫으며 입에 문 곰방대에서 연기를 후 하고 뿜었다.

그러자 들어왔던 문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철거 전의 비어있는 교회 건물이 나타났다.

부서진 예배용의 긴 의자와 어지럽게 버려진 찬송가와 인쇄물들.

그 사이로 백발의 소녀가 사뿐사뿐 건물을 빠져나갔다.

예배당 문에는 커다랗게 붉은 스프레이로 ‘철거’라고 쓰여있다.





(계속)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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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67화. 특무대와 염라명부차사(1) 20.01.13 19 0 14쪽
66 66화. 방만희와 허깨비들(9) +2 20.01.11 41 1 13쪽
65 65화. 방만희와 허깨비들(8) 20.01.10 21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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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63화. 방만희와 허깨비들(6) 20.01.08 18 0 14쪽
62 62화. 방만희와 허깨비들(5) 20.01.07 16 0 11쪽
61 61화. 방만희와 허깨비들(4) 20.01.06 18 0 14쪽
60 60화. 방만희와 허깨비들(3) 20.01.04 22 0 11쪽
59 59화. 방만희와 허깨비들(2) 20.01.03 21 0 14쪽
58 58화. 방만희와 허깨비들(1) 20.01.02 23 0 17쪽
57 57화 . 쌍둥이 아빠 주광진 (2) 19.12.31 20 0 17쪽
56 56화. 쌍둥이 아빠 주광진(1) 19.12.30 22 0 16쪽
55 55화. 택배원 김씨와 방만희(2) 19.12.28 20 0 12쪽
54 54화. 택배원 김 씨와 방만희(1) 19.12.27 27 0 18쪽
53 53화. 소방교 주권현 (5) 19.12.26 21 0 14쪽
52 52화. 소방교 주권현 (4) 19.12.24 25 0 13쪽
51 51화. 소방교 주권현 (3) 19.12.23 18 0 12쪽
50 50화. 소방교 주권현(2) 19.12.21 24 0 22쪽
49 49화. 소방교 주권현(1) 19.12.20 17 0 12쪽
48 48화. 카통고(2) 19.12.19 21 0 14쪽
47 47화. 카통고(1) 19.12.18 21 0 18쪽
46 46화. 염라명부 차사(6) 19.12.17 19 0 14쪽
45 45화. 염라명부 차사(5) 19.12.16 20 0 17쪽
44 44화. 염라명부 차사(4) 19.12.14 20 0 17쪽
43 43화. 염라명부 차사(3) 19.12.13 18 0 17쪽
42 42화. 염라명부 차사(2) 19.12.12 18 0 19쪽
41 41화. 염라명부 차사 (1) 19.12.11 23 0 17쪽
40 40화. 징계소왕과 허깨비(4) 19.12.10 23 0 14쪽
39 39화. 징계소왕과 허깨비(3) 19.12.09 20 0 16쪽
38 38화. 징계소왕과 허깨비(2) 19.12.06 22 0 19쪽
37 37화. 징계소왕과 허깨비(1) 19.12.05 22 0 12쪽
36 36화. 이야기의 시작 (5) 19.12.04 27 0 16쪽
35 35화. 이야기의 시작 (4) 19.12.03 26 0 17쪽
34 34화. 이야기의 시작 (3) 19.12.02 22 0 19쪽
33 33화. 이야기의 시작 (2) 19.12.01 21 0 18쪽
32 32화. 이야기의 시작 (1) 19.11.30 30 0 15쪽
31 31화. 사고 (6) 19.11.29 25 0 14쪽
30 30화. 사고 (5) 19.11.28 21 0 17쪽
29 29화. 사고 (4) 19.11.27 27 0 19쪽
28 28화. 사고 (3) 19.11.26 23 0 18쪽
27 27화. 사고 (2) 19.11.25 22 0 16쪽
26 26화. 사고 (1) 19.11.24 28 0 21쪽
25 25화. 특무대 (5) 19.11.23 29 0 19쪽
24 24화. 특무대 (4) 19.11.22 27 0 18쪽
23 23화. 특무대 (3) 19.11.21 28 0 20쪽
22 22화. 특무대 (2) 19.11.20 28 0 16쪽
21 21화. 특무대 (1) 19.11.19 33 0 15쪽
20 20화. 탈명자(3) - 새 이름 19.11.18 30 0 13쪽
19 19화. 탈명자(2) - 추격전 19.11.17 34 0 18쪽
18 18화. 탈명자(1) - 소녀 정제수 19.11.16 37 0 11쪽
17 17화. 프로그래머 방만희(4) 19.11.15 38 0 16쪽
16 16화. 프로그래머 방만희(3) 19.11.14 46 0 18쪽
15 15화. 프로그래머 방만희(2) 19.11.13 38 0 16쪽
14 14화. 프로그래머 방만희(1) 19.11.12 40 1 19쪽
13 13화. 택배원 김 씨(3) 19.11.11 41 1 13쪽
12 12화. 택배원 김 씨(2) 19.11.10 84 0 15쪽
11 11화. 택배원 김 씨(1) +2 19.11.09 50 2 13쪽
10 10화. 차사 신태웅(8) 탈명특무대 +2 19.11.08 53 2 18쪽
9 9화. 차사 신태웅 (7) 차출(2) +2 19.11.07 73 2 13쪽
8 8화. 차사 신태웅(6) 차출 +2 19.11.06 66 2 19쪽
7 7화. 차사 신태웅(5) 재교육(2) +2 19.11.05 71 2 16쪽
6 6화. 차사 신태웅(4) 재교육 +2 19.11.04 82 2 13쪽
5 5화. 차사 신태웅(3) 징계 +2 19.11.03 91 2 15쪽
4 4화. 차사 신태웅(2) 미로진 +2 19.11.02 98 3 13쪽
3 3화. 차사 신태웅(1) 망혼 +3 19.11.02 126 3 17쪽
2 2화. 무녀. +3 19.11.01 182 4 19쪽
» 프롤로그 & 1화. 무명(無名) +4 19.11.01 439 5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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