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풀어지는 실타래.
"이곳입니다."
가마를 타고 이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궐같은 집에 도착했다. 바로 육강의 집이 틀림없었다.
"들어가시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잠깐. 호위무사들은 어떻게 하느냐?"
채현을 지키기 위해 온 호위무사들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채현은 손견 군의 군사다. 그렇게 가벼운 위치가 아닌 것이다.
"호위무사들은 이 곳에서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알았네."
아무래도 호위 무사들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인것 같았다. 채현은 하는수 없이 호위무사들을 이곳에서 기다리게 하기로 결심했다. 자신도 육강을 믿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은 당연했기 때문이다.
채현은 이 사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채현은 집 안 구석수석을 잘 관찰했다.좋든 싫든 간에 자신은 이곳에 침입하여 칼을 들고 다시 나타나야 할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채현은 들키지 않게 조심히 훔쳐보았다.
"이곳입니다."
이자가 안내한 곳은 후원이었다. 기암괴석이 있고, 화초 손질이 잘 된 후원. 역시 여강의 대호족이자 지배자인 육강의 집이었다. 채현은 아름다운 후원에 감탄하며 서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리로 오게나."
수풀 속에서 초로의 노인이 나타났다. 바로 육강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태수님."
채현이 급하게 예를 취했다. 육강은 그런 채현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처음에는 별로였지만,왠지 모르게 보면 볼수록 흥미가 가는 아이였다. 자신의 조카인 육영이 사내 하나는 잘 골랐던 것이다.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네. 이해하게나."
"별 말씀을."
사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채현과 육강 사이에 할 말이란 것은 뻔했다. 그래서 한동안 정적이 잠시간 흘렀다.
"자네와 내 조카, 영이 말이야.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채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올 것이 온 것이다.
"저도 잘은 모릅니다만...저와 혼인 소문이 나돌던 육영 소저가 납치를 당했고, 저는 단신으로 칼을 들고 소저를 구했습니다. 저는 적을 상대하다 쓰러졌고, 그 이후에는 주유를 비롯한 제 벗들이 도와주어 소저를 구출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 소저와 관계가 급하게 소원해졌지요. 그게 끝입니다."
사실 채현도 상황을 잘 모르기에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채현은 몸을 추스리는 데다 장선의 반란군을 진압하는 등의 문제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채현은 육영의 태도가 이상했다. 왠지 모르게 이상한 모습을 보이더니, 점점 자신과 멀어진 것은 바로 육영이었다.
"그게 끝인가?"
"예. 제가 알기론 이게 끝입니다."
육강은 뭔가 이상함을 알았다. 채현의 이야기라면 육영이 채현을 버린 것이 된다. 하지만 그런 것이었다면 육영이 여강에 와서 온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쌀쌀맞은 모습을 보여 주어야 당연한 것 아닌가. 육강은 채현과 육영 사이가 오해가 있음을 알았다.
"다 늙은 내가 젊은이들 사이의 연애에 끼어서 미안하긴 하네만,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군."
육강은 자신의 조카인 육영이 채현이라는 자신의 앞에 선 이 젊은이를 좋아했던 것이라고 짐작했다. 채현이라는 이 자는 자신의 조카와 정혼설이 떠돌던 자다. 그런 자가 육영이 납치되었다고 하자 잘 쓰지도 않는 칼을 뽑아들고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달려들어 육영을 구하고 쓰러진 것이었다. 그리고 육영은 아마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보았을 것이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정혼자 후보를 좋게 보지 않을 여인은 없었다. 게다가 이것은 육영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 아닌가. 처음에는 미안함으로, 동정으로 시작된 감정이 점점 커졌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채현은 지금 보니 주유보다 나을 수도 있었다. 후계 구도인 손책을 모시는 주유보다, 현재 젊은 나이인 손견을 곁에서 직접 호종하는 군사가 바로 채현 아닌가.
"오해..라니오?"
"휴우. 내가 이 곳에서 직접 말 할 것은 못 되는 것 같군.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겠네. 나는 이 혼인을 다시 하고 싶네. 어떤가?"
육강은 자신이 혼인을 밀어붙이기로 결심했다. 위기의 여강에겐 채현은 매우 좋은 사윗감이었다. 그리고 아쉬운 것은 자신이었다. 육강은 오해를 풀면 다시금 혼인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저는 그 일 이후로 소교 소저와 연모하고 있습니다.죄송합니다."
이어진 채현의 정중한 거절에 육강은 매우 놀랐다. 소교는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시상성을 기점으로 한 상단주 교방의 막내딸 아닌가. 자신이 자신의 조카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어 몇 번 초대해 만남을 가져 주게 하곤 했다. 육강은 소교를 잘 알고 있었다. 작고, 활발하고, 어여쁜 아이였다. 그 누구라도 사랑을 주고 싶은 아이가 바로 소교였다. 육강은 소교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매력이 있는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그 격이 떨어지는 상인인 교방보다 못하다는 사실에 살짝 화가 나긴 했다. 어찌 되었건 간에 자신이 한 발 늦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억지로 혼인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조카를 첩으로 들일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몰랐군, 어쩔 수 없지....사위로 삼고 싶었건만."
육강은 한숨을 쉬었다. 어찌 되었건 자신이 교방에게 진 것이다.하는수없이 육강은 뒤를 돌아 사라짐으로써 이 만남의 종결을 알렸다.
채현은 십년감수 하는 줄만 알았다. 육강은 자신에게 어려운 사람이었다. 설마 속내를 들킨 것인가 조마조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영과의 일을 말하는 것은 자신도 껄그러웠다. 자신도 한때는 화사한 매력의 육영을 연모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육강에게 자신도 육영을 연모했음을 밝힐 수도 없는 까닭이었다. 채현은 떨린 마음을 붙잡고 헐레벌떡 후원의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아까처럼 안내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오십시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채현은 하루빨리 이 곳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안내인은 자신을 출구가 아닌 다른 이상한 곳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입장할 때 길을 대강 외워놨기 때문이다. 채현은 점점 구석진 곳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두려워졌다. 채현은 마음이 쿵쾅쿵쾅 뛰는 듯 했다.
'설마 혼인을 거절했다고 죽이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나의 계획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어쩌지?'
채현은 자신도 모르게 칼집으로 손이 갔다. 자신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는 것으로 보아,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한 방의 문 앞에서 멈췄다.
"이곳입니다. 들어가십시오."
채현은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갔다. 매복이 있을까 염려해서 그 움직임이 더욱 신중했다. 하지만 안에는 매복은 커녕, 어여쁜 여인이 하나 앉아 있었다.
"아니, 육영 소저!"
그 여인은 육영이었다. 육영은 이 방에서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채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이곳은 응접실이 분명했다. 자신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채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쉴 때가 아니었다. 자신의 눈앞에는 아름다운 육영이 앉아 있었으니까.
"오랜만에 뵙군요. 많이 긴장하셨나요? 우리 백부님께서 준비한 것입니다. 앉아서 차를 드세요."
"예에.."
육영의 목소리는 기억하는 대로 똘망똘망했다. 채현이 자리에 앉으니, 시녀가 졸졸 따라오더니 차를 한 잔 가져다 주었다. 채현은 차를 홀짝였다. 차는 썼다. 이것이 육강이 준비한 것이었다니, 채현은 기분이 나빴다. 육강은 처음부터 육영과 자신의 만남을 계획하고 자신을 부른 것이었다. 장기판의 말이 된 느낌은 매우 기분이 안 좋았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용서하세요."
"아, 예에.."
채현은 육영이 어색했다.자신을 병문안 온 이후로 육영의 모습은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았고,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담담한 모습의 채현은 그때와 다르게 너무도 멋있어 보였다.둘 사이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육영이 가만히 있다 용기를 내서 첫 마디를 꺼냈다.
"몸은.. 좀 어떠신가요."
"예에.. 잘 있습니다. 덕분에."
"장사는 어떤지요? 흉수는 잡혔나요?"
"아아.. 반란군 장선은 참살당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닌데. 육영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야기는 점점 가식적이고 형식적으로 흘러갔다. 육영은 자신과 채현이 오해관계라는 것을 백부님께 들은 상황이었다. 그녀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오해를 풀려고 마음먹었다.
"그때의 일은.. 오해였어요."
"뭘...말입니까?"
"병문안 말이에요. 제가 그때 먼저 자리를 박차고 떳었지요."
육영이 용기를 내서 말했다. 그러자 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육영의 그때 행동은 수상했다. 뭐 지금도 수상하긴 하지만 말이다. 육영은 좀 더 다른 말을 하고 싶은데, 이놈의 몹쓸 입이 자신의 생각대로 말해 주지 않았다. 육영은 속이 탔다. 어차피 이곳은 채현과 육영, 단 둘이서만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채현이 담담하게 있으니, 자신이 이야기를 주도해야 했다. 자신은 할 말이 많았다.
"사..사실..."
"사실?"
"저...저는..."
채현의 대응이 시원찮자, 육영은 속이 타들어갔다. 긴 말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이 준비한 말을 채현에게 하기로 결심했다. 채현은 육영의 태도에 그녀가 뭔가 고백을 하려는 것임을 눈치챘다. 이 고백을 들으면 그간의 일을 설명할 수 있겠지.
"저는 당신을 좋아했어요. 아니, 지금도 좋아해요. 꽤 많이."
육영이 벌벌 떨면서 조심스레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사내에게 연정을 품은 것은 채현이 처음이었다. 육영은 외강내유형 여인이었다. 겉보기에는 장미같지만 속은 굉장히 여리다. 그녀는 지금 말을 내뱉어 놓고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한 지 경황이 없었다. 머리는 새햐얘지고, 볼은 발그레하게 타올랐다.
채현은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한 충격을 받았다. 육영이 자신을 연모하기 때문에 그런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 때의 자신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걱정에 육영의 입장이나 생각 따위는 전혀 헤어라지 못했다. 아마 자신이 수상한 육영의 태도에 쌀쌀맣게 대했고, 그 틈에서 오해가 생겨 이렇게 소원해진 것이 분명했다. 채현은 한숨을 쉬었다. 꼬인 것이다. 그것도 제대로.
"하지만 저는..."
"말 하지 마세요! 저도 , 저도 알고 있어요."
육영은 눈물을 훔치며 뒤를 돌아 자신의 표정을 숨겼다.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까지 자신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지만, 이 남자의 마음은 이미 다른 여인을 향해 있다는 것을 육영도 방금 전에야 알았다. 거절당할 줄 알고 한 고백이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수줍은 고백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품고 용기를 내 한 고백이다.
"저는 소교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서로 좋아하고 있어요."
소교는 자신도 잘 알았다. 백부님인 육강이 소개해 준 자매 중 막내. 작고 어리지만, 당차고 예쁜 아이. 누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겠는가? 그녀의 매력은 육영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소교라니! 육영은 이 남자를 소교에게 빼앗긴 것 같아 분통이 터졌다. 하지만 자신이 화를 낸다고 진실은 바뀌지 않았다.
채현은 너무나도 아쉬웠다. 어쩌면 자신과 육영이 모두 조금씩만 용기를 냈다면 육영과 자신은 이어졌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에겐 장사에서 자신만을 바라보는 소중한 소교가 있었다. 채현은 소교를 배신할 마음이 없었다.
"미안. 미안합니다."
육영은 눈물을 흘렸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겨우 표현하니 속이라도 시원했다. 예전에 그녀는 채현의 밀서가 온다길래 귀를 기울이고 온갖 정보를 수집했다. 뭐, 그것이 가문의 안위에 위협이 드는 것 같아 급히 나서서 반대해 벌을 받긴 했지만. 이미 콩깍지가 씌인 그녀는 그것이 모두 화흠의 나쁜 계책이라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말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다가 너무 늦게서야 표현하는 법을 배운 육영은 자신이 너무나도 괴로웠다.놓치고 싶지 않았다.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채현의 곁에 있을 여인은 자신이 아니었다. 바로 소교였다.
자신이 강제로 그와 맺어진다면 소교는 매우 슬퍼할 것이었다. 육영은 그럴 것까진 생각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채현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사람 일은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첩이 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앞으로 표현하는 법을 늦게서야 알았는데, 더욱 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서 이 남자를 쟁취하고 싶었다. 그 때, 채현의 한 마디가 이 것을 더 부채질했다.
"그거 아십니까?저도.. 한때 당신을 좋아했었습니다."
채현의 이 말은 육영에게 일말의 희망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렇다면 자신에게도 아직 기회는 있었다.육영은 소교에게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 남자. 뺏어갈 것이니까. 미안해.'
채현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강동의 미녀들 중 둘이나 자신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그는 육영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육영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그녀는 지금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는 소교를 좋아했다. 소교를 배신할 마음이 없었다.소교가 슬퍼하는 모습을 자신이 본다면 아마 견디기 힘들 것이었다.그렇다고 이토록 힘들어하는 육영을 바라보는 것도 가슴이 아팠다. 채현은 하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육영을 조심히 안아 주었다. 육영은 자신의 품 안에서 펑펑 울었다. 채현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이게 전부였다. 자신의 넓은 품을 잠깐동안만이라도 빌려주는 수 밖에.
- 작가의말
다 날아갔습니다.
피곤합니다.
내일 수정하겠습니다.~_~
Comment '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