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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ition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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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나
작품등록일 :
2020.01.21 15:23
최근연재일 :
2024.04.17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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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03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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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1화 : 폭풍(Storm) (1-3)

DUMMY

* * * *


다음날, 1988년 5월 2일 월요일 11시 25분.

서울 모처(某處), 국가안전기획부 「제9국」 국장실.


“팀장님. 정은정입니다.”

“그래. 들어오게.”


국장실 문이 열리고 정은정의 모습이 나타났다. 평상시의 헐렁한 모습과는 다르게 단정한 외출복 차림이었다. 흡사 학부모의 모습과도 비슷했다. 그녀를 보고 조금 놀란 한강진을 향해, 정은정이 자신의 복장을 살피면서 물었다.


“이상해요?”

“아니. 정말 잘 어울려. 출발하지.”


한강진 역시 말끔한 양복 상의를 챙겨 입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 다림질 된 것 같은, 빳빳한 결이 살아있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했다. 도착한 곳은 채휘가 다니는 학교였다. 둘은 교문 앞에 차를 세우고 기다렸다. 12시가 되자 수업이 끝난 저학년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오후반을 위해 들어가는 아이들까지 섞이면서 운동장은 금세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한강진은 고만고만한 아이들 사이에서 채휘를 찾다가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이때였다. 정은정이 운동장 한 쪽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이제 나오네요.”

“보여?”


한강진이 화들짝 놀라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정은정은 대답 없이 손을 들어 무리 한 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멀리서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미리 알지 않고서는, 눈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을 수준이었다. 놀란 한강진이 입을 벌렸다.


“저게 보였어?”

“어... 그게... 나중에 말씀 드릴게요.”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아이들 사이에서 정은정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잠시 뒤 교문 앞에 선 두 명의 어른을 본 채휘가, 걸음에 속도를 붙여 다가왔다. 채휘가 차분한 움직임으로 인사했다. 정은정이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갈까?”


채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를 탄 세 사람은 서울 시내의 한 레스토랑으로 이동했다. 미리 예약한 자리로 안내받은 그들이 자리에 앉았다. 호화스러운 장소에 채휘가 안절부절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정은정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아.”


익숙하게 주문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왔다. 정은정은 채휘에게 고기 자르는 법을 알려 주었다. 채휘는 어색하고 느리지만 절제된 동작으로 고기를 잘라 먹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부드럽게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한강진이 물었다.


“맛있니?”

“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부모를 모두 잃어버린 아이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픈 마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같이 함께 하며, 아주 약간이라도 빈자리를 채워주고픈 마음이었다. 그러나 매일 같이 생사를 오가는 상황에서, 마음의 여유를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그나마 겨우 시간을 낸 것이 오늘이었다.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백화점을 들렸다. 그곳에서 채휘의 옷과 장난감, 학용품 등을 샀다. 곧 어린이날을 겸한 선물이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보는 채휘의 미소에 두 사람의 마음도 눈 녹듯 녹아내렸다. 그러면서도 간간이 드러나는 「그릇」으로서의 영향력에 놀라고 있었다. 피부를 간질이는 것 같은, 그러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의 점으로 만들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돌아보는 것으로 대화를 대신했다. 돌아오는 차 안은 조용했다. 커다란 인형을 안은 채휘는 뒷좌석에서 잠들어 있었다. 조용히 내려앉은 태양이 부드러운 그림자를 차 안에 그리고 있었다. 운전 중이던 한강진이 조수석의 정은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채휘는 자?”

“네. 잘 자요.”

“피곤했나. 그리고... 이번 작전 끝나면 같이 놀러나 갈까?”

“어디로요?”

“과천에 놀이공원이 새로 문을 연다더라고. 11일 개장이라는데, 주말이 좋을 것 같아. 채휘랑 같이.”


그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처음이었다. 정은정이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시간 낼게요.”


그녀는 무사귀환을 다짐하듯 힘을 줘 대답했다. 그리고 입술을 옮겨 한강진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살짝 놀란 그였지만 이내 웃음과 함께 표정을 풀었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난 듯, 조금 놀란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아까 말인데. 채휘를 어떻게 찾은 거야?”

“그건...”


잠깐 고민하던 정은정이었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느껴졌어요.”

“역시 그런 건가.”


의외로 쉽게 수긍하는 한강진이었다. 최근 아주 조금씩이긴 하지만, 채휘의 심리상태가 안정되어 가고 있음을 느끼는 그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채휘와 정은정과의 관계가 있었다. 사실상 정은정은 채휘와 함께 살면서 보호자가 된 상태였다. 부모를 잃은 상실감이 함께 있는 사람에게로 옮겨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정은정이 작전으로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많았지만, 그리 큰 걸림돌이 되지는 못했다.


“예비자 교리라고 했나?”

“네. 한 달 정도 됐어요.”


성당을 가는 일은 채휘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원래 볼리셔니스트에게 종교란 그리 큰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세상과 육체의 두려움이 적기에, 신이라는 존재에 매달릴 필요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채휘의 등장과 함께 열린 세상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끝을 알 수 없는 그 크기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정은정이 뒷좌석에서 곤히 잠에 떨어진 채휘를 한 번 돌아보며 말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아마 제가 무신론자였어도 성당은 나갔을 거예요. 채휘를 위해서.“


그렇게 매 주말을 함께하는 것도 어느덧 한 달이 넘었다. 동시에 함께 기도를 하면서 심리적, 정신적인 일체감은 점점 형태를 갖춰갔다. 가끔 정은정의 집을 들리던 한강진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끈 같은 것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뒷좌석을 한 번 돌아본 한강진이 핸들을 돌리며 물었다.


“훈련은 어때?”

“잘 따라오고 있어요.”


정은정의 답변에는 조금 어색함이 담겨 있었다. 채휘의 「전투 훈련」을 시작한 것은 삼 주 전부터였다. 솔직히 누구보다도 채휘의 행복을 빌기에, 이번 일을 채휘에게서 떨어트리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여건은 여의치 않았다. 만약 채휘가 없었다면 발바토스에게 9국 자체가 사라졌을 테니까. 놈들이 호시탐탐 채휘를 노리는 상황에서, 다음에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었다. 결국 최소한의 호신을 위한 훈련을 시작했다. 의외로 채휘는 훈련에 진지하게 임했다. 마치 당연한 것을 배워야 하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녀는 볼리셔니스트로서, 그리고 「그릇」으로서의 기본 소양을 배워가고 있었다. 훈련 시간을 떠올리던 정은정이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좀 이상하긴 해요. 가르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그럼 어떤 느낌이지?”

“원래 알고 있던 걸 상기시키는 것과 비슷해요. 그냥... 모든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죠.”


어제였다. 채휘는 의지도달공간 속에서 법칙을 발현했다. 강도 높은 피지컬 베리어가 그녀의 앞에 펼쳐졌다. 어지간히 배운 볼리셔니스트들도 쉽게 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삼 주만의 성과가 보통 볼리셔니스트의 삼 년에 필적했다. 한강진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고민이에요. 너무 상징성이 강해서...”


정은정이 도리질을 치며 대답했다. 「칼」을 쥔다는 건 한 명의 볼리셔니스트로서 인정받는다는 뜻이었다. 입문 단계를 마친 볼리셔니스트에게 칼을 수여하는 행위는, 국가와 커뮤니티와 시대를 막론하고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어쩌면 자신만의 칼을 쥐어야만 볼리셔니스트가 불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따라서 채휘에게 칼을 수여하는 행위는 정은정에게 많은 고민을 안겼다. 능력만 놓고 보면 당장이라도 칼을 주어도 괜찮겠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채휘가 이번 일에 점점 깊숙이 관여할수록 불행은 더욱 커질 테니까.


“그래. 그건 좀 더 고민해보자고.”


한강진도 그런 그녀의 마음에 동의했다. 더구나 정치적인 문제도 있었다. 채휘의 칼을 9국이 수여하게 된다면, 그것은 채휘에 대한 「소유권」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는 9국을 제외한 세력들 - 국내 커뮤니티와 SOSS를 비롯한 전 세계의 볼리셔니스트 조직들 - 을 자극할 것이 분명했다. 지금 그녀의 존재에 대해 각 세력들이 아무런 말이 없는 건, 눈앞의 「검은색 나무」가 더 급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9국이 채휘에게 칼을 주는 행위는 자칫 오해를 살 가능성이 높았다.


“......”


최근 연이은 작전에 피곤했던 탓일까. 한강진의 눈에 고개를 살짝 떨군 채로 잠에 든 정은정이 들어왔다. 그는 빙긋 웃으면서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바라본 앞으로는 노랗게 떨어지는 해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조수석과 운전석의 선바이저를 내렸다.


‘과연... 우리에게 앞은 있는 걸까.’


무당이 작두를 타듯 이어지는 작전에 피로도는 한계에 달해 있었다. 이번 「해왕성Neptune」 작전이 마지막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끝인지도 알 수 없었다. 성공하더라도 기반 시설을 잃은 검은색 나무가 어떻게 나올 지도 알 수 없었다. 만약 실패 할 경우 그 뒷감당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채휘는 그 존재 자체로도 커다란 불안요소였다. 탈출 전략을 고민해도 답 따위는 없었다.


‘......’


이번 주 안기부장의 교체가 예정되어 있었다. 토요일 업무를 시작하고 월요일 취임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모두들 업무보고에 바쁠 시기였지만, 9국은 눈앞에 일에 정신이 없었다. 업무보고는 언감생심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시간을 내어 저번 주, 신임 부장 내정자에게 현 상황을 보고하고 이해를 받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은정아. 이번 일 끝나면...”


그는 그녀가 듣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혼잣말을 하듯이 작게 말했다.


“결혼할까.”


모든 미래는 불확실했다. 자신도, 9국도, 옆의 연인도, 뒤의 아이도, 이 세상도, 볼리셔니스트도, 모두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도 희망만은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작은 희망을, 조금은 부끄럽게 내비치는 그였다. 하지만 잠에 빠진 정은정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럼에도 한강진은 만족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차를 몰았다. 더 낮아진 해가 석양을 뿌렸다. 차량이 9국 HQ 인근 정은정의 아파트에 도착한 것은, 거리 위로 어스름에 내려앉은 후였다.


-2-


다음날, 1988년 5월 3일 화요일 07시 12분.

서울 모처(某處), 국가안전기획부 「제9국」 2층 회의실.


작가의말

읽어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행복하세요.

From PlasmaK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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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11화 : 폭풍(Storm) (2-4) 23.03.12 17 0 13쪽
231 11화 : 폭풍(Storm) (2-3) 22.08.27 32 0 12쪽
230 11화 : 폭풍(Storm) (2-2) 22.07.30 25 0 14쪽
229 11화 : 폭풍(Storm) (2-1) 22.07.17 24 0 16쪽
» 11화 : 폭풍(Storm) (1-3) 22.07.03 37 0 11쪽
227 11화 : 폭풍(Storm) (1-2) 22.06.26 35 0 15쪽
226 11화 : 폭풍(Storm) (1-1) 22.06.18 44 0 12쪽
225 10화 : 폭격(Bombardment) (6-5) 22.06.06 42 0 19쪽
224 10화 : 폭격(Bombardment) (6-4) 22.06.04 38 0 11쪽
223 10화 : 폭격(Bombardment) (6-3) 22.05.29 38 0 11쪽
222 10화 : 폭격(Bombardment) (6-2) 22.05.15 41 0 12쪽
221 10화 : 폭격(Bombardment) (6-1) 22.05.01 35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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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10화 : 폭격(Bombardment) (5-6) 22.04.10 41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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