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가 판타지에서 살아남는 방법 - 11
11
“누구야, 얼른 나오지 못해!”
힌도는 별로 긴장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강도단에게 털리고 나서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상태다. 그래서 수풀 뒤에 숨어서 내 뒤통수를 따라다니는 녀석은 가만둘 수가 없어. 더군다나 저렇게 마치 들으라는 듯이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는 녀석은!
가가각,
이게 무슨 소리냐면 내 오른쪽 주머니에 잠자고 있던 커터칼이 날을 세우는 소리다. 전투용으로 쓰기엔 조금 귀엽긴 하지만 무기가 없는 내가 의지할 물건은 이것밖에 없었다. 당당하게 커터칼을 겨누자 수풀 너머에서 쿡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 들고 싸울 건가요?”
“그래. 이걸로 싸울 거다.”
“위협용으로 쓰기에는 조금 귀여운 칼이네요.”
“......”
내 큐티 커터 소드를 알아봐줘서 고마워요. 전설의 명검은 아니지만 생각보다는 날카롭답니다... 가 아니라, 이거 혹시 여자 목소린가?
“무서워서라도 모습을 보여야겠군요.”
수풀을 헤치고 나온 건 키가 큰 금발 여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큰 것은 키 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귀를 본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엘프!”
엘프가 미소 짓는다. 무릎을 살짝 굽힌다. 커헉, 이건 자체 뽀샤시 효과?
“미르라고 합니다.”
만세!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그 조각같은 이목구비와 그 늘씬한 몸매를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드디어 끝나는 것인가. 언제나 현실적이었던 나의 현실이 끝나가는 것인가. 드디어 나타났다. 이 엘프야말로 판타지에 어울리는 등장인물, 아니 판타지 그 자체였다.
“오크 분도 함께 있군요. 여행자인가요? 인간들 마을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으셔서 따라와 봤습니다. 길을 잃으셨다면 가까운 마을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얼굴도 예쁜데 친절하기까지. 아아 어떡하죠, 당신의 친절함에 내 심장이 고장 났나봐... 가 아니고, 힌도 이 자식, 네가 이 방향으로 가면 마을이 나올 것 같다고 해서 왔건만. 나는 힌도를 잠시 흘겨봤다. 그런데 힌도의 표정이 이상하다.
“이상하군. 그냥 방향만 알려줘도 될 텐데 굳이 안내까지 해준다는 건가?”
아니, 이 자식이 무슨 헛소리야 라고 말하려는데 미르가 먼저 대답했다.
“마침 저도 인간들 마을에 볼 일이 있어서요. 뭐, 안내가 필요 없다면 따라오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살짝 기분 상한 듯한 얼굴로 미르가 뒤돌아섰다. 아아 힌도, 이건 대체 무슨 개수작이란 말이냐. 내 판타지를 망칠 셈이냐 이 비현실적으로 못생긴 녀석아.
“이 자식아 방향이 같다잖아.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차려고 환장했냐?”
나는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화가 나서 힌도를 쏘아댔다.
“그런가. 괜한 참견을 한 건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전히 갸웃거리는 힌도를 내버려두고 나는 얼른 미르의 뒤를 쫓아 갔다. 힌도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내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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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입니다.”
마을은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정말로 우리를 마을까지 안내해준 미르는 이제 작별입니다. 라고 말하며 어디론가 가려고 했다. 나는 괜히 다급해지고 말았다.
“저, 저기 잠깐만”
“뭐죠?”
잠시 돌아선 그녀의 시선이 물끄러미 나를 본다. 젠장, 내 얼굴 빨개졌겠지?
“혹시 미르 씨도 여행자인가요?”
“예”
“혼자서?”
“예”
아, 이렇게 할 말 없게 만드는 단답형이라니.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혼자서 여행을 다니면... 그, 위험하지 않을까요? 저희라도 곁에서 지켜드린다면...”
사실, 우리도 답이 안나오는 파티이긴 하지만요 와하하하 라는 말은 당연히 생략했다.
큭ㅡ,
그녀가 아주 잠깐 웃었다. 웃은 것 같았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를 지켜준다구요?”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끄덕거렸다.
“주머니 속에 그 귀여운 칼로?”
“......”
커터칼에 대해서라면 할 말 없지만... 뭔가 굉장히 민망해져서 우물대는 나에게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뭐, 좋겠죠.”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계로 나를 날려 보내 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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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 없어, 힌도, 없다구!”
아아, 이토록 아름다운 세계에서의 너무나 평화로운 아침이어야 하건만.
“없어졌어. 1골드가 없어졌어. 으아아아!”
가방 깊숙이에 감춰뒀던 1골드. 10골드보다도 더 소중한 그 마지막 1골드가, 없다.
“으와와와와악!”
그리고 옆방에 자고 있던, 아니 자고 있어야 할 미르도 온데간데 없었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과 필연적인 전개, 그리고 절망적인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계속 부인하면서 우당탕탕 여관 계단을 날듯이 내려갔다.
“아저씨, 우리 옆방에 자고 있던...”
“그 엘프 아가씨, 아까 새벽에 문 열어달라고 하고 나가던데요?”
“아니야아아!”
이봐요, 대체 무슨일... 그렇지않아, 그건 그렇지않아! 아저씨의 목소리는 나의 절규에 파묻히고 말았다. 나의 판타지는 그렇지 않아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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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봐 진로크...”
끝이다.
나락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으로 나는 침대에 눕듯이 앉아있었다.
이것은 현실, 피할 수가 없는 현실. 가장 현실적인 현실.
그렇다. 나에게는 이게 어울리는 거다.
“10골드라...큭,큭”
부자보다는 거지가,
“진로크, 정신 차려...”
그리고 엘프보다는 오크가.
그렇다. 판타지 소설이 아니다. 현실이다. 이것이 내 삶이고 내 모습이다.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이 닥쳐오는 부정과 절망. 비디오를 반복 재생하는 것처럼. 햄스터가 쳇바퀴 도는 것처럼. 마치 막장에 갇혀버린 듯이.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누가 말했던가. 아아,
“큭,큭,큭큭큭큭......”
“지, 진로크?”
큭큭, 그래그래, 누군가 말했었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씨발...”
피할 수 없으면 즐겨? 뭘 즐겨? 저 울타리 밖에 나가서 그저 아주 소박하게 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면? 그럼 울타리 안에 갇혀서 꿈이나 꾸라고? 그걸 즐기라고?
“좆이나 까라 그래 씨발...”
현실이고 울타리고, 내가 다 깨부숴주겠어. 다 부수고 나가주겠어.
내가 가진 능력으로, 그것만으로 이 더러운 세상에서 살아남아 주마. 한번 알차게 살아남아 주마.
아랫입술을 아프도록 꽉 깨문다. 그래, 한번 가보자.
"어디 제대로 한번 가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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