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가 판타지에서 살아남는 방법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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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퍼Copper.
동으로 만든 동전이다. 가장 낮은 화폐 단위다.
그 가치를 따지자면, 흠, 뭔가 말하기 힘들지만 여러분의 이해를 돕고자 1쿠퍼를 한국 돈으로 환산해보면 100원정도 가치를 가진다고 보면 된다.
실버Silver
당연히 은으로 만든 동전이다. 1쿠퍼 100개가 모이면 1실버다. 100 x 100 = 10000 이니까 1실버라 함은, 역시 이해를 편하게 하자면 만원 지폐 한 장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1 골드Gold 란 얼마냐?
눈치 빠른 독자라면 (아니 솔직히 별로 빠르지 않아도) 이쯤에서 대충 사이즈가 나왔을 거라 예상된다. 그리고 여러분의 예상대로 1골드란 1실버가 100개 모여 1골드다. 1실버가 만원이라고 아까 얘기했다. 그렇다면 만원이 백장이면?
“백만, 이백만, 삼백만... 구백만, 천만...원...!”
10 골드 = 천만원. 그렇다 천만원이다. 골드를 쥐고 있는 오른손이 부르르 떨린다. 임기응변의 레벨에서 한 단계 진화한 즉흥적 협상(사기)으로 내 세치 혀는 원가 300원의 모나미펜으로 구백구십구만구천칠백원이라는 부가 가치를 창출해냈다!
“크, 크흐흐흐흐흐... 크, 크크케케케큭큭ㅋㅋㅋ...”
나는 미친 사람처럼 ㅋㅋㅋ를 남발하다가, 힌도가 진짜 미친 사람 보듯이 나를 바라보는 바람에 잠시 웃음을 멈췄다.
“크흠, 흠...”
자 진정하자 진정. 억지로 헛기침을 해본다. 해봤지만,
“...큭!”
큭, 큭큭크킄케케케...
그러나 다시 ㅋㅋㅋㅋㅋ 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물론 여기서 천만원 가지고 뭐 그리 대수를 떠느냐? 내지는 천만원도 돈이냐? 라고 말하는 현실속의 판타지에 살고 있는 엄친아엄친딸부터 시작해서 대형그룹회장아들딸, 소위말하는 재벌2세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천만원이라 하면 분명히 큰돈이다. 그 금액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아르바이트 대학생에 지나지 않는 나에게 있어서 1차적인 ‘목표액’ 이었고 꽤나 장기간에 걸친 적금 계약, 예금 계약, CMA 돈불리기, 초보개미 돈굴리기 등등 다방면에 걸친 전략을 수립해야만 모을 수 있는 돈이었다.
전역하고 1년, 그동안 정말 말그대로 뼈가 빠지게, 허리가 휘도록 아르바이트를 전전했어도 모으지 못한 금액을, 주머니 속에 있던 모나미펜 하나로 얻게 된 거다. 거기다 그토록 필요했던 지도에, 최고급 가방까지. 이거야말로 일확천금!
가까스로 웃음을 멈춘 나는 여전히 입가에는 벙글거리는 웃음을 머금은 채로 가방에서 지도를 꺼냈다.
“흐흠, 좋아. 어디 보자...”
세계 지도는 아니었고, 한 나라를 나타낸 지도다. 내가 있는 곳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반도였다. 한국과는 반대로 북쪽으로 뻗은 반도의 아주 작은 나라였다. 우리는 반도를 빠져나가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지도를 접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수월, 수월, 너무나 수월. 내 인생이 이다지도 수월하게 풀린 적이 있었던가?
“여어,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는데? 이런 곳에서 콧노래나 흥얼거리고.”
“흐흐, 상인인가? 상인은 아닌 것 같은데?”
“크크크, 그 큼지막한 가방에 뭐얼 한보따리 실은 걸까나~? 좀 보여달라고.”
그렇다.
내 인생이 그렇게 수월히 풀린 적은,
“우리는 목숨만 살려주는 강도단이다! 얌전히 가진 것 다 내놓고 목숨만 가지고 사라져라!”
없었다.
“......”
아니, 그건 둘째 치고, 목숨만 살려주는 강도단이라니. 말하고자 하는바 매우 분명하면서도 듣는 사람에게 안도감까지 주는 저런 훌륭한 작명센ㅅ... 가 아니라, 왜 하필이면 가방에 10골드가 들어있는 이 시점에서 강도를 만나야 하는 거냐고!
“흐흐흐, 다 내놓아라. 목숨은 살려준다니까?”
“우리는 목숨만 살려주는 강도단이니까 말야 쿠크크.”
정말 친절한 강도들이었지만 나에게 이 가방은 목숨보다 소중했다. 맞으면 매우 아플 것 같은 몽둥이를 들고 사방에서 접근해오는 그 숫자를 헤아려보니 대략 열댓명은 넘어보이고, 우리에게 승산은...
“...들에게...”
“응? 뭐라고?”
“하하, 그래 덜덜 떨면서 구걸하지 않아도 목숨은 살려줄테니까,”
자아 어서, 하면서 다가오는 녀석을 보며,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최대한 냉정하게 그들의 전력을 가늠했다. 그렇다, 우리에게 승산은,
“...네놈들에게 줄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네놈들의 목숨만 살려줄테니 얌전히 꺼져!”
있다!
“허어?”
“이 녀석들 봐라?”
“한번 뜨거운 맛을 볼테냐?”
그렇다. 이곳은 판타지 세계다. 이계에서 온 주인공이 강도한테 털리는 장면 따위, 어디에도 나오지 않아. 더군다나 저런 허접한 몽둥이를 들고 위협하는 녀석들 따위는!
“이 경험치 제공자 녀석들! 모두 한꺼번에 덤벼라!”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경험치 제공, 그리고 레벨업! 네놈들은 모두 레벨업의 제물일 뿐! 물론 레벨 업을 하는 건 내가 아니지만.
“가라, 문명에 때묻지 않은 바바리안 힌도!”
드디어 네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유를 밝힐 때가 왔다! 우선 적의 숫자가 많으니까 가볍게,
“휠윈드로 쓸어버려 힌도!”
매우 자신만만하게 외치며 힌도를 돌아봤는데,
“...휘, 휘, 휠윈드가... 뭐, 뭐냐...?”
아니, 바바리안이 휠윈드를 못쓴단 말이냐. 스킬을 엉망으로 찍었구만... 아니 그게 아니고!
“혹시 너... 떨고 있는 거냐”
“...저, 저, 절대 그렇지 않다. 나, 나는 바, 바바리안에 때묻지 않은 문명...”
몸을 떨다 못해 이빨까지 딱딱 부딫치고, 이상한 말까지 더듬거리는 그 모습. 그제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 덩치큰 녀석부터 쳐랏!”
이 덩치큰 녀석은 휠윈드는 커녕,
“조져!”
배쉬도 못쓴다.
“힌도...”
힌도, 아아 힌도여. 부르면 듣지 못할 슬픈 두글자여. 네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유는 정녕 무어란 말이냐.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그러나 피할수 없이 운명적인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운명적인 몽둥이라는 표현이 맞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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