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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몽객 님의 서재입니다.

아이작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취몽객
작품등록일 :
2012.10.09 07:48
최근연재일 :
2013.07.15 09:11
연재수 :
17 회
조회수 :
1,058,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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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17,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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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28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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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글자
260쪽

잡설

DUMMY

본문 내용은 아니고 본문 내용이 될뻔했던 이야기입니다.

원래 까페 삼도천이란 제목의 글을 전작의 창공의 기사 이전부터 써 왔는데

중간에 삼도천이란 이름의 책이 출판된걸 알고난뒤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져있다가 노트북 도난이란 이중 크리티컬을 맞아버린뒤 포기하고 새로 쓴 글이 이

가제:아이작 입니다. 이 아이작도 참 여러번 원고가 백지로 변하는. 기적을

행하시어 썻던글 또 쓰고 쓰다보니 과감하게 자를부분은 자르고

스토리를 변경할 부분은 변경하고 수정하고 삭제한 책으론 나오지 않을

이야기지만 그래도 지우기엔 미련이 납아 이렇게 인터넷 상으로나마 남겨보려 합니다.


p.s. 당연히 쓰다가 삭제해 남겨둔 부분이라 이야기가 중간에 끊기는게 당연합니다. 그냥 아 이렇게 진행될뻔 했구나 싶은 이야기로 봐 주세요.

오타는 물론 중복되는 부분도 좀 있을거에요. 어차피 지워질 이야기니 오타나 맞춤법으로 너무 그러지 말아 주세요.






“아이작군. 조금 있으면 호송단이 도착한다는 구나.”

“아! 감사합니다.”

아이작은 그간 자신을 돌봐준 신관에게 미소지으며 감사의 뜻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죽다 살아났고 조사까지 받았으니 남작가에선 어쩔수 없이 형식적으로나마 호송단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병원 밖으로 나와 얼마 기다리지 않아 정말 형식만 갖춘 조촐한 호송단이 도착했다.

말을 탄 기사 하나와 대여섯명의 병사들. 정말 어쩔수없이 보낸다는 티가 팍팍나는 구성이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헐 작정을 했군.’

아이작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건성으로 인사하는 기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루퍼드라는 이름의 기사는 남작가 소속이 아닌 백작가문에서부터 정실 부인을 따라 남작가로온 정실부인의 측근이다. 남작가문의 기사라고 해서 별거 있겠냐마는 전대 영주를 생각해 약간이나마 신경써줬다.

수도로 올라가는 길이 꽤 험난할꺼 같다 생각하며 아이작은 루퍼트를 맞이했고 루퍼트는 뭐가 그리 바쁜지 아이작을 재촉하며 신전을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전을 벗어나자 반듯이 포장된 도로와 인도를 걸어다니는 행인들이 보였다. 거리는 깨끗했고 가로등과 보도블럭이 인도와 도로를 구분해 놨으며 이차선 도로엔 마차와 마력차가 서로 마주보며 지나갔다. 보면 볼수록 웃긴 세상이었다.

이곳 로라시아 대륙에 나라라고는 단 하나의 제국만이 존재했는데 판타지의 정석대로 마법사와 기사, 신관이 존재하고 엘프와 드워프등의 이종족들과 마물들은 물론 드래곤이라는 먼치킨급도 떡하니 버티고 있다.

제국은 언터처블. 절대 건드릴수 없는 황가가 제1계급이었고 신전의 인물들이나 귀족들, 부유한 상인들 같은 형편이 좋은 상민들이 제2계급. 그리고 절대다수를 이루는 평민들이 제3계급이었다.

처음 준영을 혼란스럽게 한건 철저한 신분제가 아닌 누구라도 노력하면 상위 계급으로 올라갈수 있다는 점이었다. 노예제가 없는 이 세상에서 시민들은 공을 세우면 귀족이 될 수 있고 귀족도 죄를 지으면 시민으로 지위가 내려간다. 다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건 비일비재해도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건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려웠지만 가능성과 실 사례가 있다는건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점이었다. 그런 계급제 사회에서 준영이 지내오며 불편을 느끼지 않을정도로 사회적 인프라가 완벽히 구축되어 있었다.

‘이전 세상과는 발전의 방향이 틀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문명 또한 전쟁을 통과하며 비약적으로 발달해왔다. 그런데 신기한게 기간시설은 감탄할 정도로 발달했으면서 전투병과와 기술은 중세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거였다. 간단하게 보병과 기사, 궁수등이 있고 대량살상이 가능한 결전병기급인 마법사와 게임에 등장하는 힐러급인 성법사까지 존재하는, 문명은 근대급이면서 군사수준만은 중세 판타지를 벗어나지 못한 신기한 세상이었다.

거리를 구경하며 걸음을 옮기던 아이작 때문에 속도자 지체되자 루퍼트가 눈살을 찌푸리며 아이작의 멱살을 잡아 끌더니 조용하지만 살기가 섞인 어조로 노려보며 말했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너 때문에 고생하는것도 짜증나는데 촌뜨기처럼 여기저기 구경할 정신이 남아있냐?”

“……”

아이작은 루퍼트의 행동에 어떻게 대응할까 고민했다. 겉으로 보기에 무리의 장은 아이작이었다. 그러니 아이 특유의 땡깡을 부리며 지랄 난리를 쳐도 루퍼트는 주위의 시선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도까진 아직 갈길이 멀었기에 아이작은 일단 기억에 있는 대로 행동했다.

“자 잘못했어요.”

살짝 울먹이는 말투에 겁먹은듯한 아이작의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루퍼트는 흡족한 눈빛으로 아이작의 멱살을 풀고는 주변의 시선을 살피곤 아이작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말했다.

“닥치고 조용히 따라와라. 좀 편하게 가자.”



‘이 미친새끼 이 나이에 행군이라니. 아주 작정을 했구만.’

숨이 턱까지 차오른 아이작은 헉헉 거리면서 속으로 이를 갈았다. 편한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가는것들을 이해못하는 성격인 아이작은 마력차라는. 이전 세상의 자동차와 비슷한 아주 훌륭한 교통수단을 마다한채 것는다는 것은 오직 아이작을 괴롭히기 위한 심통일 뿐이었다. 아니 마력차의 이용요금조차 아깝다는 뜻이겠지. 그게 아니면 받은 돈 삥땅치려고 걷는것일수도.

어린 아이작의 발걸음이 늦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호송단의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었고 아이작과 같은 심정인지 졸지에 때 아닌 행군을 하게 된 병사들의 눈초리가 고울리 없었다.

그래도 지네 땅의 주인인 남작가의 장남이건만 개는 주인을 따라 한다는걸 보여주듯 귀족 취급은커녕 귀찮은 짐짝처럼 아이작이 처질 때 마다 발로 엉덩이를 차거나 거칠게 등짝을 밀어 붙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력차들이 걸어가는 일행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지나쳤다. 도시와 도시.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광범위한 교통망의 형성은 걸어서 이동하는 사람들을 희귀한 구경꺼리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한나절을 걸었을까? 점심때가 지났는데도 휴식은커녕 지들끼리 육포를 뜯어먹으며 아이작에겐 신경도 쓰지않는 병사들과 너무 느린 속도에 답답한지 연신 짜증스런 표정으로 아이작을 노려보기만 하는 루퍼트의 태도에 아이작은 완줜히 지치고 말았다.

‘이것들이 진짜……’

아이의 연약한 피부는 이내 발바닥에 물집을 만들어 터트렸고 그 고통이 아이작을 점점 성질나게 만들었다.

오직 꺼리낄 것 하나 없는 도로에서 성질을 내 봤자 돌아오는건 매타작 뿐일꺼라는 당연한 사실만이 아이작의 끓어오르는 성질을 꾹꾹 참아내게 만들었다.

그때 일행의 등 뒤에서 마력차 특유의 엔진소리와 함께 약한 경보음이 울렸고 일행은 도로 한복판에서 한켠으로 길을 비켜 주었다. 아이작은 절뚝이는 걸음걸이 때문에 반응이 늦었고 하마터면 마력차에 부딪힐뻔 했다.

다행히 마력차가 속도를 늦추며 방향을 틀어 접촉을 피했지만 하마터면 판타지 세상에서 교통사고로 죽을뻔 했다.

‘교통사고도 이세계 진입의 정석중 하난데 혹시 본래 세상으로 돌아갈려나?’

아이작이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 사고가 날뻔한 마력차가 완전히 멈춰서더니 황급히 운전자가 뛰쳐 나왔다.

“큰일날뻔 했구나! 혹시 다치지는 않았니?”

운전자가 아이작을 향해 다가오려 하자 루퍼트가 말머리를 돌려 길을 막아섰다.

“됐다. 멀쩡하니까 가던 길이나 계속가라.”

루퍼트가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채 오만한 말투와 깔보는듯한 시선으로 말하자 운전자는 루퍼드를 올려다 보다가 어처구니 없다는 투로 말했다.

“넌 뭐하는 병신인데 말투가 고 따위냐?”

“……”

예상밖의 대꾸인 듯 루퍼트는 잠시 할말을 잃고 멍하니 운전자를 바라보다 눈에 살기를 띄며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네놈이 죽고 싶은가 보구나.”

“누가? 니가? 나를? 너 지금 내가 마력차 운전이나 한다고 만만하게 보이냐? 너 이새끼 기사는 맞지? 어디 학교 출신이야? 너네 학교에선 그렇게 가르치든?”

운전자의 당당한 태도에 루퍼트는 자신이 사람을 잘못 건드렸나 싶어 움찔했다. 기사임을 알고도 당당하게 나올정도면 뒷배경이 상당하거나 그 스스로가 기사라는 소리였다.

“이새끼가 아직도 위에서 꼴아보네? 안내려와?”

루퍼트가 자신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운전자가 하도 당당하게 나오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할 때 마력차 뒷좌석의 문이 열리더니 한 고령의 노인이 나타났다.

“그만해라 샌더스. 그놈의 성질 때문에 혼쭐이 났으면서 또 그러는거냐?”

“하지만 공작님! 저 놈이……”

“시끄럽다 이놈아!”

딱! 노인이 든 지팡이가 샌더스의 머리를 때리자 샌더스는 머리를 부여 잡고는 투덜거렸다. 그때 루퍼트는 샌더스가 공작이라는 소리를 꺼내자 마자 냅다 말에서 내려와 노인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제국에 번영을. 론다트 남작령의 2급기사 루퍼트 로덱이라고 합니다.”

“고작 2급밖에 안되는 새끼가 그렇게 까분거였냐?”

딱!

“끄응 코듀로이 공작각하시다.”

헉! 루퍼트와 병사들은 동시에 헛숨을 들이켰다. 제국에 단 셋밖에 없는 공작령의 주인이었다.

“모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루퍼트와 병사들은 사색이 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독립국과 마찬가지인 권리를 가진 공작령의 주인이라면 남작령의 기사와 병사들 따우니 감히 쳐다도 볼 수 없는 신분이었다.

“론다트 남작령이라면 들어본적이 있군. 그럼 이 아이가 그 생존자인가?”

코듀로이 공작의 시선이 아이작에게로 향하자 아이작은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이작 론다트라고 합니다.”

“흐음?”

아이작의 간단한 소개에 코듀로이 공작의 눈이 이채를 띄었고 루퍼트와 병사들은 죽일 듯한 시선으로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코듀로이 공작의 말 한마디면 영지 자체가 뒤집어 지는것도 간단한 일이었다. 극진하게 대해도 모자랄 판에 담담한 소개라니. 루퍼트는 귀족의 예법조차 가르치지 않은 남작가의 결정이 뼈아픈 실수였다고 생각할 때 아이작이 이어서 꺼낸 말은 루퍼트를 혼비백산 하게 만들었다.

“초면에 죄송하지만 혹시 수도까지 가는 길이면 좀 태워주실수 있습니까?”

당돌한 아이작의 요구에 루퍼트의 안색이 푸르죽죽하게 변했고 코듀로이 공작은 재미있다는 듯 껄껄 웃었다.

“하하하 꽤 당돌한 꼬마구나. 소문에 듣기론 저능아라고 하던데 멱시 소문은 믿을게 못되는군.”

“뭐 소문을 들으셨다니 아시겠지만 살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저능아 소리를 듣게 되더라고요.”

“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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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사람 빡 돌게 만드네?”

한달째 되는 아침날 아이작은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들었다. 어차피 돈 쓸데도 없지만 캠퍼스의 모든 것은 무료였다. 아이작이 거주하는 대기소는 열흘에 한번 오는 정기 보급선이 기상악화로 출항을 못할때를 대비해 보급선의 장교들이 거주하는 숙소였고 규정상 만들어 놓은 곳일뿐 항상 비어있는 장소였다.

무단 점거도 아니고 들어가 살라고 해놓고는 이제와서 사용료를 내라고 하니 성질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학생에겐 모든 것이 무료 아니냐는 물음에 대기소는 예외라는 대꾸만 돌아왔다.

항의를 해보려고 해도 마땅한 곳이 없다. 정해진 학교라도 있으면 학교 행정부에다 민원이라도 넣을텐데 아이작은 캠퍼스에서 반쯤 붕 떠있는 존재다 보니 서로 책임 떠넘기기 식의 서류 돌리기에 진이 빠졌다.

“어린것들이 벌써부터 관료주의에 물들다니! 신성한 교육의도가 사라졌어!”

교수와 학생들로만 이루어진 캠퍼스다 보니 캠퍼스를 운영하는 행정부 현장업무를 배우는 실습의 일환으로 학생회 소속의 행정학을 배우는 학생들로 채워져 있었다. 아이작은 한탄아닌 한탄을 하다가 오기가 생겼는지 눈을 희번득 거렸다.

“그래…… 날 내쫒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이거지? 크크크 누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 역시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챙겨야지. 남한테 기대선 죽도 밥도 안된다니까.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어 주지.”



캠퍼스의 식사는 훌륭하다 못해 최고급이었다. 거기에 간간히 나오는 간식 또한 귀족가문에서도 흔희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먹어도 먹어도 돌아서면 배고픈 학생들에겐 언제나 부족한게 먹거리였다.



각 학교별로 분산되어 있는 학생들은 평소엔 만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휴일날엔 한자리에 만날 기회가 있었으니 도서관은 공부를 위해 모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인맥을 싾을수 있는 충실한 사교의 장이기도 했다.

특히나 일부러 의도했는지 캠퍼스 내에는 도서관이 단 한곳밖에 없었고 컬리지의 학생들 또한 이곳에서 공부를 할 수밖에 없다보니 캠퍼스의 학생들은 평소 보기힘든 존재인 컬리지의 학생들과 안면을 익힐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서 도서관의 휴일은 언제나 북적거렸다.

그런 도서관에 이질적인 존재인 아이작이 등장하자 학생들의 시선이 쏠리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창 놀고 싶은 나이에 학업에 치여살던 아이들에게 아이작이란 존재는 하나의 활력소였고 아이작은 안주삼아 키득거리는게 큰 위안거리였다.

컬리지의 학생들도 소문으로만 듣던 아이작이 모습을 나타내자 짙은 호기심을 주시할 때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온 아이작은 책을 가져다 볼수 있는 1층의 열람대를 죽 둘러보다 한쪽 구석의 빈자리에 가서 앉더니 가방에서 손바닥 만한 크기의 간판을 꺼내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무심결에 간판을 바라본 아이들의 눈이 호기심 가득 담겼다.

하나에 1기가. 5개 4기가, 10개 8기가에 팜.

학색들의 호기심이 커져갈 때 아이작은 태연하게 가방에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내더니 살짝 향기를 맡고는 입으로 가져갔다.

콰직!

순간 도서관은 종이 넘기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 졌고 누군가 꿀꺽 침 넘기는 소리만이 학생들의 심정을 대변해 줬다.

“젠장! 못참겠군!”

한 학생이 투덜거리며 벌떡 일어나더니 아이작을 향해 다가갔다.

“이봐 이 간판은 무슨 뜻이지?”

아이작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첫 고객을 맞이했다.

“보는데로. 쿠키 하나에 1기가. 많이 사면 좀 깍아준다는 거지.”

“쿠키 하나에 1기가라고? 1기가면 쿠키를 다섯 주머니는 살수 있는데?”

한주머니에 쿠키는 열 개가량 들어있다. 그런 쿠키가 다섯 주머니 즉 50개가량이면 1기가 정도 한다. 그런데 딱 한 개를 가지고 1기가를 받아 먹는다는건 폭리도 그런 폭리가 없었지만 아이작은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그건 본토에 있을 때 얘기고. 여기선 하나에 1기가야.”

“그래도 말도 안되게 비싸잖아!”

학생의 항의에 아이작은 어깨를 으슥거리며 말했다.

“이래서 독점사업은 나쁘다는 거야. 버는 놈은 좋아 죽지만 어쩔수 없이 사는 놈들은 어쩔수 없이 쓸 수밖에 없거든.”

“흥! 그런 말도 안되게 비싼 쿠키를 대체 누가 사먹는단 거야?”

“뭐 먹고 싶은 사람은 사 먹겠지. 안 살꺼면 저리가. 뭐 그래도 처음으로 말을 걸어온 소중한 고객이니까 서비스를 제공하지.”

“서비스?”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 묻는 학생에게 아이작은 가방에서 쿠키를 한주머니 꺼내 안겨주었다.

“자. 첫 손님이라 이건 공짜로 주는거야. 먹어 보고 맛있으면 또 이용해 달라고.”

엉겁결에 아이작이 건넨 쿠키 주머니를 받아 쥔 학생은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손에 들린 쿠키에서 베어나오는 고소한 냄새는 거부할수 없는 유혹이었다.

머뭇거리다 제자리로 돌아간 학생에게 먹이를 향해 몰려드는 물고기처럼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순식간에 열 개의 쿠키가 사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이작은 작게 중얼거렸다.

“낚시 성공.”

마약상이 마약을 판매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처음엔 거저다 시피 마약을 안겨준다. 그러다 점차 중독이 되면 가격을 올려 받는다. 이미 마약에 중독된 자들은 거격이 얼마가 됐든 마약을 구입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독이 무서운 거고 파탄을 피하려면 처음부터 칼같이 잘라 거절해야만 했다.

아이작의 수법은 마약상과 비슷했다. 처음엔 고가의 가격과 현실적인 가격의 괴리에 망설이지만 한번 맛을 보게되면 다시 찾을 수밖에 없다. 아니다 다를까 순식간에 몰려든 동료들 때문에 고작 쿠키 부스러기만 맛을 본 학생은 억울했는지 망설이다가 다시 아이작을 향해 다가갔다.

“요! 다시 왔군.”

“지금 가진 돈이 2기가 밖에 없는데……”

캠퍼스의 학생들은 돈 쓸데가 전혀 없다. 그 말은 가지고 다녀봤자 거추장 스럽다 보니 숙소에 놔두고 다닌다는 소리였다. 애초에 돈따윈 들고올 이유가 없지만 캠퍼스에 자식을 보내는 부모 마음이란게 다 거기서 거기다. 혹시 모르니까, 필요할수도 있으니까 용돈을 듬뿍 안겨준다.

“2기가면 쿠키 두 개를 살수있군. 뭐 첫 개시니까 특별히 4개를 주니. 앞으로도 많이 이용해 달라는 뜻에서 말이야.”

“고 고마워!”

2개 가격으로 4개를 가진다. 사람 심리란게 오묘해서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임에도 금전감각이 사라지고 오직 2개 값으로 4개를 구했다는 사실만이 남는다. 희희낙락하며 자리로 돌아오는 학생에게 다른 학생들이 다시 들러붙었고 이번에는 안 뺏기겠다고 다짐했는지 학생은 쿠키를 소중히 감싸며 버럭 소리 질렀다.

“먹고 싶으면 너네도 사서 먹으라고!”

학생의 외침에 잠시 침묵이 돌다가 이내 너도 나도 할거없이 아이작을 향해 달려들었고 아이작이 가지고온 과자는 순식간에 다 팔려 나갔다.




“재미있는 세상이군.”

준영은 짤막한 감상을 중얼거리며 콸콸콸 더운 물이 쏟아지는 세면대를 노려보았다. 과학과 함께 문명이 발전했다면 이 세상은 마법과 함께 발전한 세상이었다. 뭐 마법도구가 현대문명과 비슷한 수준으로 발달한 설정은 흔하다 보니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하지는 읽는것과 직접 체험하는건 역시 틀린거였다.

간단한 세면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방을 둘러보았다. 병원의 1인실 치고는 호화롭기 그지 없었다. 의자에 앉은 준영은 몸의 긴장을 푼채 의식적으로 정신을 멍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곧 아이작의 기억이 찔끔찔끔 들어왔다. 이유같은건 알리 없지만 어쨌건 아이작의 몸에 준영의 정신이 자리를 잡고 공백을 메우듯 아이작의 기억이 끼어든다. 덕분에 준영은 언어의 어려움도 문화적 충격도 죽음이후에 달라진 갑작스런 일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도 줄일수 있었다. 다만 정신을 흐리멍텅하게 만들어야지만 꽉 잠근 수도꼭지에서 한방울 한방울 떨어지는 물방울 처럼 아이작의 기억이 랜덤하게 자리를 잡아서 아이작은 틈만 나면 정신줄을 놓은것 처럼 멍하게 있기 일쑤였다. 다행히 주위에선 전장의 충격으로 인한 외상후 스트레스라고 판단해준 덕분에 준영은 빠른속도로 아이작의 기억을 흡수할수 있었다.

“……쩝. 이게 행운이야 불운이야?”

막 흡수한 아이작의 어릴적 기억을 떠올리며 준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미묘한 팔자. 어찌보면 행운아고 어찌보면 불쌍한 놈이었다.

론다트 남작가의 장남. 이것 하나만으론 귀족으로 한 평생 편하게 살다 갈수 있는 복받은 인생이다. 하지만 첩의 자식이라면 얘기가 틀려진다. 귀족답게 수준에 맞는 베필을 만나 알콩달콩 살면 될걸 우연히 놀러 나갔다다 아이작의 어머니와 눈이 맞아 버리는 바람에 문제가 커졌다.

하룻밤 불장난이라면 어떻게든 무마 시키겠는데 죽고 못사네 고집 피우는 아버지 때문에 정실은 무리고 첩으로라도 들일 수밖에 없었고 아이작이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꽤 금슬이 좋았다. 하지만 가문의 원로들과 가신들의 압박에 어쩔수 없이 아이작이 태어난지 1년도 되지 않아 정실을 들였다. 그것도 백작가의 여식과.

당연한 이야기 대로 정실부인은 첩인 어머니와 아이작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고 줄줄이 아들 둘을 싸지른 뒤에는 아예 없는 사람취급했다. 뭐 거기까지라면 흔하디 흔한 집안사정으로 장남인 아이작 대신 정실에서 나온 핏줄이 가문의 후계를 이어받는 서로에게 좋은 결과로 끝날 수 있었으나 현 황제가 제위하면서 아이작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현 황제의 출생은 황후가 아닌 비빈중 한사람에게서 태어난 아이작과 똑같은 장남이었다. 그리고 황후에게서 나온 아들도 있지만 전 황제가 붕어한뒤 아이작과는 다르게 우애좋은 형제애로 장남이 당연히 후계를 승계해야 한다며 제위를 포기했고 비빈출신의 장남이 즉위를 하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만인지상의 황제도 장남이라고 제위를 승계했는데 일개 남작가에서 장남의 모가 천한 출신이라고 둘째가 후계를 계승하는건 구설수를 넘어 황제에 대한 공개적인 모독에 해당했다. 그때부터 정실 부인의 괴롭힘이 시작 되었고 아들내미들 또한 지 어미의 싸가지를 닮아 아이작을 괴롭혔다.

그러다 아이작의 열 살 생일날. 아이작의 인생은 변했다

흔히들 말하는 불행한 사고였다. 신분제를 거부하고 만민이 평등하다는 정치사상에 입각한 국민에 의한 정치체제를 추종하는 프리덤이라는 조직이 자신들의 의견표명을 위해 제국 행정청에 폭탄 테러를 가하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순간 쌀나라의 NSA와CIA, FBI등, 유명한 정보기관을 몽땅 합쳐놓은듯한 역할을 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는 정보기관인 센트럴이 사전에 그 계획을 입수해 일망타진에 들어갔고 프리덤 테러조직과 수도 가벨린의 시장 한복판에서 충돌했다.

마지막에 프리덤의 주요 간부가 투항하길 거부한채 지니고 있던 마력탄을 가지고 폭사. 폭팔의 여파에 아이작의 부모가 사망하고 어린 나이의 아이작 홀로 살아남았다.

천애고아가 된 아이작에게 신문사의 기자라는 양반들이 몰려들었다. 비극의 주인공, 안타까운 희생자,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며 자식만큼은 실린 가슴아픈 미담의 주인공등등 온갖 미사여구를 다 사용해 연일 신문의 일면을 장식했다.

‘신문? 언론이 있단 말이야?’

아이작의 기억을 더듬으며 새로 얻은 정보에 아이작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창밖에 보이는 건물들은 중세는 아니고 영화에서 보던 근대적 건물들이었지만 검과 창칼을 들고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대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종이의 대량보급과 신문사, 그리고 언론의 힘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기억에 놀라는건 당연했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신문이 보급된게 언제부터지? 얼추 시대가 맞는거 같기도 하고…… 끄응. 역시 넓고도 얇은 지식은 한계가 있구만.’

대부분의 지식을 만화와 소설 영화를 통해 습득해온 준영의 머리론 깊게 파고들어가면 답이 안나오는건 당연했다. 학창시절 공부라도 좀 해둘걸 하고 살짝 후회한 준영은 다시 기억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센트럴은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작에게 유감이라는 말 한마디로 끝내려 했으나 기다렸다는 듯 쪼아대는 여론에 입장이 난처해졌고 센트럴을 견제하는 제국의 다른 권력조직들간의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비롯한 권력싸움과 여론의 공격에 견디지 못한 센트럴이 결국 항복했는지 보여주기식 전시행정의 극치를 선보이며 열살에 불과한 아이작에게 보상금으로 이십만 기가라는 거금을 떡 하니 지급한다고 팔표했다.

“미쳤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계급주의 사회의 최 고위층 권력기관이 여론의 압박을 받는 모습도 기가 차지만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건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인거 같아 씁쓸했다. 그보다 열 살 어린아이한테 이십만 기가라니. 그건 죽으란 소리와 똑같았다.

아이작의 기억을 더듬어 이동네의 화폐체계를 떠올려 보니. 제국의 화폐는 현대문명과 비슷한 수준으로 동전인 비트와 지폐인 메가, 기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흠. 대충 비교해 보면 1비트는 백원 1메가는 천원, 1기가는 만원정도군. 거참 간단하구만. 환율은 어떻게 되는거지? 아니 환율 따지는 내가 미친건가? 그런데 이놈은 용케도 살았구만.”

이십만 기가면 이십억원정도의 거금이란 소리였다. 그걸 어린아이 손에 쥐어준다? 아니다 다를까 당장에 이웃사촌과 한방울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친척이라는 사람들이 몰려와 후견인을 자처했다.

거기나 여기나 사람들이 돈에 미치는건 똑같구나 하는 생각에 혀를 찰 때 다시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한다는 여론의 비아냥에 열이 받았는지 센트럴은 아이작의 의사 따위는 단 한마디도 묻지 않은채 정식 명칭 제국 황립 중앙 기사학교 일명 컬리지에 입학시켜 버렸다.

“컬리지라……”

컬리지. 귀족들도 엄격한 시험을 거쳐 합격해야지만 입학할 수 있는 최고의 엘리트 양성소다.

이 세상의 인간이 성공하거나 권력을 얻기위해 거쳐야 하는 첫 번째 관문이 바로 기사학교의 졸업이었고 대륙에 산재한 무수한 기사학교의 정점에 있는게 바로 컬리지 였다.

15년이란 엄청나게 긴 교육기간을 가지며 한학기 등록금만 1만기가. 일년이 두학기로 이루어져 있으니 매년 2만기가란 거금을 15년동안 내야하는 무지막지한 곳으로 평균 연수입이 천이백기가 정도인 일반 평민들로선 꿈도 꾸지못할 교육기관이다. 대신 월반 제도가 있어 시재능만 받혀주면 일년에 몇개 학년을 월반하는것도 가능해 15년의 교육 기간을 다 채우는 자는 아무도 없었고 제국 최고의 엘리트 양성소에 들어온 인재들 답게 쭉쭉 월반하며 조기 졸업해 나가는게 일반적이었지만 그래도 평균 교육기간은 10년정도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컬리지에 못 들어가서 안달인 이유는 일단 컬리지 출신 기사라는 명함만 얻으면 그 뒤의 인생은 탄탄대로라 할수있었다.

컬리지만의 특전이자 수많은 기사 지망생들이 다른 기사학교를 제쳐두고 컬리지를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막강한 인맥에 있었다. 이 제국을 구성하는 중추조직의 수뇌부는 전원 컬리지 출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그런 컬리지들만의 단단한 인맥은 숨겨진 귀족세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쯧. 기억을 안 떠올려도 뻔하게 보이는 구나.”

준영은 아직 기억나지 않는 학교생활이 예상되었다. 최고의 엘리트라는 프라이드로 꽉찬 청소년,소녀들 틈바구니로 운좋게 뒷배를 탄 아이작이 밥숟가락을 얹는다? 고3수능과 사법고시를 동시에 치르는것과 같은 난이도의 시험을 통과하고 입학한 놈들에게 아이작이 어떻게 비칠지는 뻔한 일이었다.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나고 열불이 터지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맺힌게 많았는지 준영의 머릿속으로 아이작의 학교생활 기억이 두통이 날정도로 급작스럽게 떠올랐다. 그래도 컬리지에 들어왔다고 처음엔 죽을동 살동 노력했던 일. 공부, 훈련 또 공부. 하지만 이미 출발부터가 같은 선상에 있지 않은 아이작으로선 다른 아이들을 따라잡기 힘들었고 결국 정체되어 남들은 늦으면 9개월 빠르면 3개월만에 월반해 나가는 반면 유급걱정에 시달리며 겨우 겨우 1년에 한 학년위로 올라가기를 반복하며 자신보다 늦게 들어와 일찍 올라서는 이들을 매일매일 바라보다 보니 결국 자포자기의 상태에 까지 오게 됐다.

그렇게 컬리지에서 10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중급반의 졸업시험이라 할수있는 최종평가의 학점이 모자라 아이작은 조그마한 시골영지의 견습 행정관으로 부임하게 돼었다. 영주가 부재중인 영지는 제국정부에서 영지를 관리하기 위한 행정관을 파견했는데 견습 행정관은 행정관을 보좌하고 실무 경험을 싾기위한 자리였다.

“…… 정말 재수없는 놈이구만.”

그러나 부임한 영지에서 업무에 관한 경험을 싾기도 전에 영지전이 터져버렸다. 행정관은 영지의 모든 것을 관리하는 제국에서 임명한 영주나 마찬가지였고 10년의 근속기간을 채운뒤 신청하면 해당 영지의 영주로 임명하는것이 관례일 정도로 행정관과 영주는 동급이었다. 즉. 부재중인 영지라면 인접한 영지의 영주들이 건드릴 방법이 없으나 행정관이 부임한 상태라면 사정이 틀려진다. 그리고 아이작이 견습 행정관으로 도착한 그날 영지전이 선포되었다.

아이작으로선 갑자기 날벼락이 떨어진 일인데 행정관이 영지의 권한을 포기하고 철수하면 평화롭게 끝날수도 있었으나 하필이면 아이작이 부임한 영지의 행정관은 컬리지가 아닌 다른 기사학교 출신으로 그 영지의 영주가될 야망에 불타 오르고 있었으니 결사항전을 선포. 컬리지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이작을 전장으로 끌고갔고 뭔가 손 써보기도 전에 군영을 설치한 당일날 전격적인 기습작전을 펼친 상대편 영지군들이 군영을 습격해 죽을동 살동 저항해 싸우다 머리에 강한 충격을 입고 쓰러졌다.

“그리고 튀어 나온게 나란 말이군……”

대충 기억을 더듬어본 준영. 아니 아이작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살짝 미흡한 파란만장한 생애였다. 자신이 차지한 이몸의 주인에 대한 기억은 대충 알겠는데 앞으로가 문제였다. 사람의 성격은 다 제각각이다. 기억을 더듬어본 아이작의 성격은 음침,암울 그 자체였다. 하긴 잘난놈들 틈바구니서 10년간 부대끼며 주눅든채 살아왔으니 쾌활한 성격이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 내가 정말 준영이 맞는건가? 그저 준영의 기억을 가진 아이작이 아닐까?”

정체성의 혼란. 자신이 준영인지 아니면 아이작인지 고민하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결국 결론은 또 살아가야 한다는거군.”

죽기를 바라는건 아니었다. 정말 죽으려고 하면 방법은 수만가지였다. 그러나 죽을수는 없었다. 준영이 숨쉬고 살아가는 행동 하나 하나엔 준영보다 먼저 죽어간 이들이 족쇄처럼 매달려 있으니까. 그렇다고 열심히 살고싶은 생각도 없었다.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고 전장을 격어온 준영의 정신은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들었고 말 그대로 죽지못해 사는 수준이었다.

“새로운 삶이라…… 내가 어쩌다 이런 곳에 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살아주지.”

준영. 아니 아이작은 공허한 눈초치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며 중얼거렸다. 신이나 악마나 아니면 그 어떤 존재가 자신을 이런 곳에 떨어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살아갈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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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으로 후송된뒤 가진 한달가량의 회복기간은 정말이지 천금같은 기회였다. 그 기간동안 아이작으로서의 기억을 대부분 흡수한 준영은 이 사회에 무리없이 녹아들 수 있었다.

“퇴원을 축하하네.”

“그동안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작의 치료를 맡았던 신관에게 감사의 뜻으로 고개 숙여 인사하자 신관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허허 내가 한게 뭐가 있겠나. 자네가 강한 정신력으로 충격을 이겨냈을 뿐이지.”

신관의 대단하단 눈빛에 아이작은 살짝 어깨를 으슥였다. 전쟁을 처음 경험한 자들은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뒤에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많은 문제를 양산하는데 아이작은 그런 정신적인 문제를 쉽해 극복해 내었다.

물론 신관의 관점에서야 그렇지만 아이작으로선 정말 별거아닌 일이었다. 이미 수많은 전장을 굴러다니며 어딘가가 비틀린 준영의 정신이었다. 문화적 충격이 아이작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했을뿐 이정도 전쟁의 충격쯤이야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심리학과 정신병에 관한 학문이 발달하고 1,2차 대전을 거치고 현대 베트남전을 치루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연구에 들어갔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동네는 겉보기에는 중세를 넘어선 근대문명에 가까우면서 벌써부터 인간의 정신에 대한 연구가 이미 활용단계에 들어섰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마중나온 신관에게 꾸벅 인사를 한 아이작은 미련없이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병원 정면을 벗어나자 반듯이 포장된 도로와 인도를 걸어다니는 행인들이 보였다. 거리는 깨끗했고 가로등과 보도블럭이 인도와 도로를 구분해 놨으며 이차선 도로엔 마차와 마력차가 서로 마주보며 지나갔다. 보면 볼수록 웃긴 세상이었다.

이곳 로라시아 대륙에 나라라고는 단 하나의 제국만이 존재했는데 판타지의 정석대로 마법사와 기사, 신관이 존재하고 엘프와 드워프등의 이종족들과 마물들은 물론 드래곤이라는 먼치킨급도 떡하니 버티고 있다.

제국은 언터처블. 절대 건드릴수 없는 황가가 제1계급이었고 신전의 인물들이나 귀족들, 부유한 상인들 같은 형편이 좋은 상민들이 제2계급. 그리고 절대다수를 이루는 평민들이 제3계급이었다.

처음 준영을 혼란스럽게 한건 철저한 신분제가 아닌 누구라도 노력하면 상위 계급으로 올라갈수 있다는 점이었다. 노예제가 없는 이 세상에서 시민들은 공을 세우면 귀족이 될 수 있고 귀족도 죄를 지으면 시민으로 지위가 내려간다. 다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건 비일비재해도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건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려웠지만 가능성과 실 사례가 있다는건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점이었다. 그런 계급제 사회에서 준영이 지내오며 불편을 느끼지 않을정도로 사회적 인프라가 완벽히 구축되어 있었다.

‘이전 세상과는 발전의 방향이 틀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문명 또한 전쟁을 통과하며 비약적으로 발달해왔다. 그런데 신기한게 기간시설은 감탄할 정도로 발달했으면서 전투병과와 기술은 중세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거였다. 간단하게 보병과 기사, 궁수등이 있고 대량살상이 가능한 결전병기급인 마법사와 게임에 등장하는 힐러급인 성법사까지 존재하는, 문명은 근대급이면서 군사수준만은 중세 판타지를 벗어나지 못한 신기한 세상이었다.

거리를 구경하며 걸음을 옮기던 아이작은 문득 행인들이 자신을 힐끔힐끔 곁눈질 하며 지나가는걸 눈치챘다. 복장이 뭔가 이상한가 싶어 옷매무새를 가다듬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아이작이 입고있는 옷은 컬리지의 정식 제복이었다. 독일 장교복을 연상시키는 밀리터리룩에 검은색 망토를 둘렀다. 컬리지의 학생만이 입을수 있는 옷으로 사람들에겐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고 주목받는게 당연했다.

“이런…… 구경꺼리가 되는건 질색인데……”

남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렸지만 딱히 답이 없었다. 옷을 갈아입으면 그뿐이나 교칙에 위배된다. 컬리지는 제국을 이끌어갈 엘리트들의 교육기관. 그런 교육기관의 학생은 앞으로 사람들을 부리는 위치에 서게 되는데 부끄럽다고 하는건 말이 안된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자신을 내보여라! 라고 적혀있었고 컬리지에 다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문의 영광이자 명예였고 부러움과 동경 가득한 시선을 받았다. 실제로도 컬리지의 제복 하나만 입고 있으면 모든 공공시설 사용이 무료였고 유료 시설또한 무료에 가까운 금액으로 이용할수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10분정도 걸어가자 커다란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광장 한 가운데는 우뚝 선 남자의 동상이 세워진 분수가 물을 뿜고 있었고 분수 주변에 마련된 벤치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작은 노점상에서 파는 군것질거리들을 먹는 아이들과 산책나온 연인과 가족들의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정말 웃기는 세상이야.”

바로 옆 동네에서 벌어진 전투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는데 평화롭기만 하다. 영지전이라지만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지고 약탈과 학살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영지전은 말 그대로 영지들 끼리의 전투. 제국군은 개입하지도 않으며 영지의 치안을 담당하며 돈을 받는 영지병들끼리의 싸움이었다. 당연히 민가에 대한 약탈같은건 허용되지 않았고 지금에 와서는 사람들이 돈을 걸고 승패에 대해 도박을 할 정도로 스포츠화되었으니 준영의 정신을 가진 아이작으로선 기가 찰 노릇이었다.

아이작이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긴건 컬리지로 가기위한 이동수단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도시와 도시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광범위한 교통망의 형성은 이동수단의 발달을 불러왔다. 아이작이 이용하려는건 열차와 비슷하게 생긴 공용 마력차였다.

열차의 차량처럼 마차를 죽 이어붙이고 선두의 마력차가 동력역활을 해 방향을 이끄는 형식의 공용 마력차는 가장 대표적인 이동 수단이었다. 한번에 많은 사람들을 수송할수 있는 이런 공용 마력차 사업은 돈벌이가 쏠쏠한지 수많은 노선이 생겨났고 원하는 장소까지 직행이 아니더라도 경유를 통해 충분히 편하게 이동할수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컬리지까지 가는 차편을 구하신는거죠? 음…… 죄송합니다만 컬리지까지의 직행편은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네요. 여러번 경유 노선을 타셔야 할꺼 같은데 일단 가장 빠른 노선표랑 시간표를 드릴께요.”

“……예. 그렇게 해주세요.”

컬리지의 간판이라 할수있는 제복을 입고있어서인지 접수계의 여인은 호의가득한 태도로 아이작이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컬리지로 향하는 차편을 마련해주었다.

“저희 레스터 운송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실히 컬리지의 제복이 좋은점은 있었다. 사람들이 알아서 챙겨주니깐 말이다. 하지만 안 좋은점은 훨씬 많다. 어릴때부터 이렇게 떠받들어지는데 익숙해진 놈들은 천성적으로 오만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놈들일수록 독선과 아집에 가득차 물만 흐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놈들로 우글우글 한곳에 기어 들어갈 생각을 하니 한숨만 나왔다.

차표를 받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각각의 플랫폼을 표시한 구획, 배웅나온 사람과 이별하는 광경, 시간을 보며 빨리 탈것을 재촉하는 차장들, 간단한 먹거리와 읽을거리를 파는 가판대,

“……버스 터미널이냐.”

실소가 흘러나왔다. 휴가나왔다 복귀할 때 지겹도록 보아온 버스 터미널과 비슷한 모습에 역시 사람 사는데는 어디든 다 똑같다는 진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가판대에서 신문을 한부 구입한 아이작은 증기기관차를 연상시키는 원통형의 선두부분을 지나 자신이 가진 차표와 차량의 번호를 맞춰보던 아이작은 곧 차량의 끄트머리 부분에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곤 안으로 들어갔다.

마력차의 내부는 다른 객차와의 이동이 불가능 할뿐. 열차 내부와 놀랄 정도로 비슷했다. 서로 마주보며 앉을수 있는 긴 의자가 네쌍이 배치되어 있고 천장에는 짐을 올릴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무데나 앉는 방식인지 좌석번호는 적혀있지 않아 아이작은 대충 창가근처 의자에 자리잡아 앉고는 신문을 만지작 거렸다.

“……별 차이를 못 느끼겠군.”

신문이라는건 오늘의 정보가 내일의 휴지가 되는 일회용품. 중세시대에 종이란 귀한 물건이다. 그런 종이가 신문처럼 대량 보급되기 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함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신문에 사용되는 종이와 잉크의 질 또한 그렇게 발전해 왔다. 그런데 별 다른 위화감도 느낄수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종이라니. 아이작의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종이제작은 엘프들의 독점사업이라는 단편적인 기억만 떠올랐다.

웃긴 세상이었다. 문명발전의 절차가 뒤죽박죽이었다. 대충 살펴본 신문의 헤드라인엔 루벤지방에서 벌어진 영지전의 결과와 사상자, 피해결과등과 영지전을 벌린 영주를 비판하는 칼럼등이 눈에 들어왔다. 심각한 논조의 문장이었지만 아이작으로선 실소만 터져나왔다.

언론이 귀족을 사정없이 까대다니? 신분제 사회에서 언론자유화? 가능이나 한 소리인가?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권력유지를 위해선 우민화 정책이 가장 간편하다는건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권력자들이 그걸 모를리 없다. 그런데 신문이 발행될 정도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읽고 쓸줄을 안다는 뜻이니 자신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민중의 힘을 강화시킬 문맹퇴치와 언론의 자유를 그냥 보고 넘겼다? 알면 알수록 아리쏭한 세상이다.

아이작이 신문을 노려보며 마력차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릴때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차장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객차 안으로 들어오더니 아이작을 보자마나 넙죽 업드릴 기세로 굽신거리며 말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여기 계셨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쪽 직원이 들어온지 얼마 안된 신참이라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

차장의 갑작스런 사과에 당혹해 하면서 아이작은 자신에게 표를 끊어준 여자가 설마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차표를 줬나 싶었다.

“이럴게 아니라 1등석으로 가시지요. 컬리지에 계신분을 3등석으로 모시다니. 저희 회사측에서 단단히 혼쭐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예? 아니요 여기도 별 상관은 없는데……”

아이작의 거절에 차장의 안색이 흙색으로 변하더니 쩔쩔매며 아이작을 향해 통 사정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제발 화를 푸십시오. 컬리지에 계신분에게 3등석 차표를 끊어줬다는 사실 만으로도 저희는 징계받기 충분한 일입니다. 부디 자비를 배푸시어 제발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이런일이 없도록 직원 교육을 철저히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에? 아니 그러니까……”

난감한 표정으로 차장을 바라보던 아이작은 문득 창밖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가 사람들이 차량에 탑승하지도 못한채 우물쭈물 거리며 머뭇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곧 깨달았다. 출발시간이 다 됐는데도 객차안에 혼자 있는 원인이 바로 자신이라는걸.

“후…… 알겠습니다.”

아이작이 별 미련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나자 차장은 얼굴에 화색을 띄며 아이작을 안내했다.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이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아이작을 못본척 했다.

‘흠…… 딴 세상 사람이라 이거군.’

확실히 이런면을 봤을땐 계급주의 사회라는게 실감이 갔다. 컬리지의 학생들 대부분은 귀족들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귀족작위를 받을게 확실한 예비 귀족들. 아이작의 성적과 인맥으로 봤을땐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아이작도 똑같은 귀족일 뿐이었다.

차장의 안내에 1등석으로 자리를 옮긴 아이작은 호화로운 1등석의 모습에 할말을 잊었다. 안락하게 꾸며진 차량은 오랜 여행을 대비한 침대칸인듯 소파겸 침대가 한쪽 벽에 마련되어 있었고 창가엔 밖을 감상하며 식사가 가능하도록 작은 티테이블과 의자가 고정되어 있었다.

“……개인실인거야? 퍼트스 클래스라고?”

어쩐지 1등석이라면서 다른 객차보다 크기가 좀 작다 싶었더니 혼자 사용할수 있는 크기였던거 같았다. 확실히 조금 전에 들어갔던 객차와 비교하자면 빈부의 격차를 뚜렸이 느낄수 있었다.

소파에 앉아 뭔가 새로운 정보가 없나 싶어 들고온 신문을 뒤적거렸다. 신문은 사회, 경제 문화등등 각각의 파트로 나뉘어 그 지역의 소식과 사건 사고등이 적혀져 있었고 광고와 칼럼등도 게제되어 있었다.

한참 신문을 뒤적거릴때 덜커덩 하는 진동과 함께 마력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선을 돌려 멍하니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을 바라보던 아이작은 문득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꽤 지루한 시간이 돼겠는데?”




파견나갔던 아이작이 컬리지로 복귀하기 위해 걸리는 시간은 대략 삼개월 정도였다. 컬리지로 가기 위해선 일단 수도 가벨린으로 가야만했다. 오직 가벨린에서만 컬리지로 향하는 배편을 탈수가 있었다.

교육기관인 컬리지가 하나의 영지를 가지고 있다는것도 웃긴 일이었지만 컬리지의 힘은 그럴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 냈다. 컬리지가 배출해낸 인재들은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층으로 자리잡았다. 당연히 미래의 지배계층을 배출해내는 컬리지의 위상또한 높아질수밖에 없었고 그런 컬리지를 자신의 영지에 유치시킬수 있다면 자연히 막강한 영향력을 손에 넣게 된다.

실제로 최초 컬리지가 자리 잡고 있었던 윔블던 지역의 주인인 크레듀스 공작가는 컬리지에서 배출해낸 인재들이 세상의 지배계층으로 자리를 잡아가자 컬리지를 입맛대로 손에 쥐고 흔들었다.

크레듀스 공작가와 정적관계에 있는 가문의 영재들은 입학을 배제시켜 버리고 재능이 떨어지더라도 자신들의 세력에 속해있는 가문의 자제들만 입학시켰다. 거기에 평민들은 아예 입학 자체를 막아버렸다.

그런 크레듀스 공작가의 결정을 거부한 컬리지의 학장과 교수들을 해고하고 반발하는 학생들을 진압하기 위해 영지군이 출동하는 사태에 이르자 분노한 컬리지 출신들이 폭팔했다.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해서 정계, 군부, 상계, 관부등 제국을 움직이는 모든 조직의 정점에 서있던 컬리지 출신들이 하나로 뭉치자 불가능이 가능으로 나타났다.

상계에 투신한 자들이 자금을 움직이고 관부에 투신한 자들이 필요한 정책을 만들어내고 정계에 투신한 자들이 귀족들의 반발을 견제했다. 군부야 함부로 움직일수는 없었지만 각 영지에 대한 무언의 압박만으로도 충분했다.

결국 버티다 못한 크레듀스 공작가의 항복과 함께 황실의 중재결과 그 어떠한 영지의 간섭도 받지않는 적당한 크기에 수도와 도 가까운 이제는 컬리지 섬이라고 불리는 가벨린에서 배편으로 두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는 섬이 새로운 컬리지의 고향으로 정해졌다.

“후우 피곤하구만.”

마력차는 질주하는 기마와 비슷한 속도였지만 연료의 보급과 휴식, 피로도를 고려해 장기간의 이동이 불가능해 도시와 도시, 마을과 마을사이의 짧은 구간만을 운행했다.

마력차를 타고 이동하고 날이 저물면 여관에 투숙하고 다시 이동하는 지겨운 일정이 계속됐는데 마을이나 도시에서야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에 시간가는줄 몰랐지만 마력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은 지루하기 그지 없었다.

그나마 좋은점은 컬리지를 상징하는 제복을 입고 있어서인지 어딜 가든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는 거였다. 차편은 항상 1등석이었고 숙박은 가장 좋은 방에서, 식사는 최고급 음식만 제공되었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게 무료에 가까웠다.

아이작은 마력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한번 쭉 피고는 중얼거렸다. 아무리 편하고 취침이 가능한 1등석이라도 여행의 지루함은 무거운 피로를 동반했다. 누구 하나 말을 나눌만한 대화 상대도 없이 하루종일 1등석 객차 안에서 뒹굴거리다 보면 더 이상 잠도 오지 않는다.

허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굳어진 근육을 토닥거리던 아이작은 목이 뻐근한지 한 손으로 연신 뒷목을 주무르며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도시. 영화에서만 봐 왔던 언덕위의 고풍찬란한 성을 직접 눈으로 보니 흥미가 생겼다. 언덕위의 성을 중심으로 동심원이 퍼져나가듯 원형으로 둘러싼 성벽이 양파껍질처럼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이작이 서 있는 곳은 가장 끄트머리의 외성벽에 위치한 마력차 하차장소였다. 지평선 너머에는 햇살이 부서져 반짝이는 바다가 어렴풋이 보였다.

“확실히 수도는 다르다는건가?”

여지껏 마을단위나 소규모 도시는 물론 커다란 대도시도 방문했지만 수도의 방대함은 차원이 달랐다. 일부러 만들었나 싶을정도로 가벨린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한눈에 제국의 수도를 볼수있는 위치에 자리잡은 터미널은 수도를 관광하려는 관광객은 물론 이제 막 도착해 하루를 쉬려는 사람들과 그들을 끌어들이려 호객행위에 열중인 호객꾼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품에서 손바닥 크기로 돌돌 말린 잎을 꺼내 입에문 아이작은 끝을 잘라내곤 불을 붙인뒤 길게 한모금 머금었다. 폐부 가득히 청량한 연기가 가득 차오르고 천천히 내뱉자 뿌연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나마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구만.”

아이작은 다시 한차례 연기를 내 뿜은뒤 중얼거렸다. 담배와 비슷한 물건을 피는 사람들을 발견했을 때 아이작은 경악하기 보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에서의 담배는 약초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전 세상에서도 옜날엔 담배가 약초로 사용 됐었다는걸 떠올리곤 아직 담배의 해로움을 발견하지 못했구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청연초라고도 불리는 담배의 원료는 비싼 신관들의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반 평민들중 폐와 호흡기에 질환을 가진 이들이 치료 목적으로 주로 사용했다.

아이작도 피워 보니 처음 담배를 피울때처럼 니코틴 성분에 어질어질 하지 않았고 맨솔 담배와 비슷한 맛이 났다. 다른점은 맨솔처럼 박하를 넣어 시원한 맛만 느끼는게 아니라 실제로 청량한 느낌이 폐부를 가득 메웠다.

거기다 몸에도 좋다고 하니 기피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폐나 기관지를 다친 사람들만이 피는 담배를 멀쩡한 아이작이 피워대니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이 세상에서 담배를 기호품으로 사용하는건 아이작이 유일했다.

“그럼 가볼까나……”

컬리지로 향하는 배편은 하루에 세 번 운행한다. 아이작이 도착한 시간은 운행시간이 다 끝나 어쩔수 없이 내일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수많은 호객꾼들이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들었지만 막상 아이작을 향해선 잠시 눈길을 주다가 외면하기 일쑤였다.

평민들이면 트러블이 생겨도 무난하게 해결할수 있지만 상위 계급, 큭히 컬리지의 학생을 손님으로 모시면 트러블이 없어도 은근히 신경쓰이고 피곤해질꺼라는건 누구나 다 예상할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이작은 항상 깨끗하고 친절해 보이는 숙박업소를 직접 찾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가벨린에서 만큼은 숙소를 찾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아이작의 기억에 따르면 가벨린엔 아이작과 아이작의 부모들이 살던 집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이작이야 아픈 기억 때문에 일부러 외면하고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지만 그 건물의 주인은 아이작 본인이었다.



끼이익! 낡은 경첩이 지르는 비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안으로 들어선 아이작이 문 옆에 있는 버튼을 누르자 마력등이 깜빡거리다 곧 환한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마치 폭동의 직격을 맞아 약탈당한 상점처럼 아무런 물건도 없이 황량한 매장은 빈 진열대만이 소복히 싾인 먼지와 함께 아이작을 맞이했다.

“이거 참…… 예상은 했다만 너무 심하구만……”

주인없는 상점의 운명이야 뻔 하다.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고 아이작도 뒤처리를 하지 못한채 컬리지로 들어가 버렸으니 부랑자 소굴이 안된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아이작의 집은 가벨린에 위치한 평민 거주구역중 하나인 서브 스토리가의 중심부로 작은 광장과 분수가 위치한 소위 말하는 노른자 땅이었다. 아이작의 아버지는 꽤 자수성가한 타입이었는지 건물 하나를 통째로 소유할 정도였고 지금은 고스란이 아이작의 재산이었다.

“확실히 유동인구가 많은 노른자 땅인데…… 이런 곳을 십년이상 놀려뒀다고?”

아이작이 컬리리지 소속만 아니었으면 수많은 상인들이 몰려와 아이작에게 건물을 팔라고 압박을 가했을테지만 아이작이 컬리지에서 거의 나오지를 않다보니 군침만 삼킬뿐 그림의 떡으로 지켜만 봤을게 분명했다. 아무리 운 좋게 들어간 컬리지라지만 상인들이 함부로 대하기엔 컬리지의 이름이 너무 높았다.

“움직이지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부서질듯 활짝 제껴지더니 경비대원 복장을 한 청년들이 우르르 들어와 아이작을 빙 둘러 포위했다.

비어있어야할 건물에 불이 들어와서일까? 어두워진 거리를 순찰하던 경비대원들이 건물에 인기척이 있자 도둑인줄 알고 체포하러 들어온듯 했다.

‘잠깐만? 이미 훔쳐갈 물건도 없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의아한 표정으로 멀뚱히 경비대원들을 바라볼때 열려진 문에서 험상궃게 생긴 중년남성이 씩씨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어떤 잡것이 감히 이 바스토뉴님이 특별히 관리하는 구역에 기어들어온건지는 모르겠다만 잘 걸렸다! 뼈와 살이 분리되는 느낌이 뭔지 체험하게 해주마! 음?”

아이작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고함치던 바스토뉴는 문득 아이작이 입고있는 옷차림이 어디서 많이 본듯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다 컬리지의 교복임을 알아보곤 입을 다물더니 아이작을 위 아래로 재빨리 훝어보았다.

“컬리지? 호 혹시 아이작이냐?”

자신을 아는듯 하자 아이작의 기억을 뒤지다 바스토뉴가 누군지 알아냈다. 아버지의 친구로 가게에 자주 놀러오던 남자. 아이작의 부모가 죽은뒤 장례와 뒤처리 대부분을 맡아주었던 자였다.

“바스토뉴 아저씨?”

아이작의 중얼거림에 바스토뉴가 환하게 미소지으며 아이작에게 다가가더니 두팔을 활짝 벌려 아이작을 끌어앉았다.

“와하하! 아이작 맞구나! 이 녀석아 오랜만이다!”

등을 팡팡 두들기며 기뻐하는 바스토뉴의 모습에 아이작은 얼떨떨해 하면서도 일단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이작이라면 두말 할것없이 바로 반가워 했겠지만 준영의 정신이 차지하고 있는 이상 처음 보는 남자가 반갑다고 끌어안고 있는 셈이어서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눈물마저 글썽거리는 바스토뉴의 모습에 아이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스토뉴를 훝어보았다.

“……출세 하셨네요.”

십인장을 뜻하는 녹색 견장과 경비대를 뜻하는 밧줄에 휘감긴 검의 문장을 보고 말하자 바스토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출세라니 고작 십인장이다. 어디보자! 이놈아! 왜 이렇게 늦게 온거냐!”

“그건……”

“아아 말 안해도 다 이해한다. 컬리지에서 공부하느라 힘들었겠지.”

감회가 새롭다는듯 아이작을 위 아래로 훝어보며 대견하다는 표정을 짖는 바스토뉴의 모습에 난감해 할때 귓가에 경비대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쟤가 조장님이 술만 마시면 늘어놓던 그 애야?”

“그런거 같은데?”

“부러워 해야 되는건가?”

그럴 리가…… 아이작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경비대원들의 부러움반 질시반 섞인 시선을 받아냈다.

“뭘봐 이자식들아! 구경났냐!”

경비대원들의 수근거림에 바스토뉴가 버럭 소리지르자 경비대우너들은 찔금하며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할 얘기도 많은데 다른곳으로 가자. 여기는 좀……”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얼버무리는 바스토뉴의 모습에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장판에 가까운 곳에서 대화를 나누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이작도 가게꼴을 보아하니 이층의 거주지도 엉망인건 마찬가지일꺼 같아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려던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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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토뉴의 어깨에 장식된 녹색 휘장을 보며

안으로 들어오다 아이작을 보곤 흠칫 놀란표정을 지었다.

“컬리지? 컬리지에 계신분이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경비대 조장으로 보이는 자가 아이작의 신분을 드러내는 컬리지의 교복을 보곤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이작이라고 합니다. 이 건물의 주인이지요.”

“예? 하지만 여긴 아! 혹시 십년전의 그?”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당황한 표정을 짓던 조장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작을 위 아래로 훝어보더니 조심스럽던 태도를 버린채 긴장이 완연히 풀린 기색으로 말했다.

“그러시구나…… 뭐 알겠수다. 집에는 오랜만에 온거 같은데 편히 쉬다 가슈.”

“하아?”

비릿한 미소마저 지으며 얕잡아 본듯 말투마저 반 하대로 변한 남자의 말에 아이작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조장급정도 되면 이곳에서 오랜시간 근무햇을거 같은데 그 정도면 아이작의 과거를 알고 있어도 이상한건 아니었다. 그 당시 아이작이 컬리지에 들어간건 상당한 화제였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운 좋게 들어간 컬리지라고 할지라도 컬리지였다.

일개 경비대 조장이 이렇게 건들거릴정도의 위치는 아니었다. 거기다 살짝 경명과 조롱이 섞인 시선이 아이작의 심기를 건드렸다.

“어이.”

“음?”

의외의 반응에 놀랐는지 경비조장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여기에 붙어있는게 뭐지?”

아이작의 말에 경비대원들의 시선이 아이작의 왼쪽 가슴 상단부분에 수놓아진 휘장으로 향했다. 작은 원속에 들어있는 열 개의 노란색 별, 별의 개수는 컬리지에서 배운 년수를 뜻한다. 그리고 노란색은 컬리지의 졸업반이란 뜻이었다.

“컬리지의 졸업반은 수습기사자격을 가진다는걸 모르는 건가?”

“……알고 있습니다만?”

“알고있으면서 귀관은 상급자에게 그 따구로 대하는가? 자신의 신분도 밝히지 않고?”

아이작의 말에 경비조장의 표정이 못마땅하게 변했다. 하지만 규율은 규율이었다. 곧 자세를 바로잡은 경비조장이 경례를 올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가벨린 제 17경비대 소속 서브 스토리 순찰대 분견대장 바스토뉴라고 합니다.”

바스토뉴의 경례를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받은 아이작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집안꼴이 엉망이지?”

“……”

입을 꾹 다문채 불만 가득한 눈초리로 노려보는 바스토뉴를 향해 아이작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말이야. 분명 내가 컬리지로 떠나기 전만 하더라도 가게가 멀쩡했는데?”

“그야 10년이나 방치되어 있으니까……”

“그러니까! 절도 사건이 10년이나 지나도록 미해결 사건으로 남아 있었다는 거군.”

“예? 절도라뇨 이건……”

“절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건가? 분명 이 건물의 소유주는 나고 그 말은 이 가게안에 있던 물건의 주인도 나라는 말인데. 나는 내 물건을 누구에게 선물하거나 양도한 기억이 없다. 나로선 경비대의 무능을 주장할수밖에 없는 일이군.”

“억측입니다!”

“억측이라? 가게의 물건이 도난당하는데 경비대도 가담한건가?”

“무슨!”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10년이 넘는 시간도록 절도사건 하나 해결하지 못한거지? 아니 그보다 어째서 주인에게 물건이 도난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통보하지 않은거지?”

아이작의 말이 계속될수록 바스토뉴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며 똥 밟았다는 기색이 역력해졌다.

“뭐 소유주의 관리 소홀도 있으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하지만 명심하도록. 더럽고 치사해도 이 세상은 신분제로 유지되고 있다는걸. 내가 아무리 운좋게 컬리지에 들어 갔다고 해도 컬리지의 학생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부럽고 질투도 나겠지만 그걸 겉으로 표현하는 어리석은짓은 저지르기엔 지 말도록. 컬리지의 학생이 도난사고를 당했는데 무시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직무 유기에 해당한다는걸. 나야 가만있어도 컬리지 출신들이 가만있지 않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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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만 저희 업소는 이미 꽉 차버려서 제공해드릴 방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정중한 태도로 거부하는 모습에 할말을 잃었던 아이작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에 정신을 차리곤 말했다.

“바스토뉴씨의 소개로 왔습니다만?”

“바스토뉴가요? 흐음…… 알겠습니다. 바스토뉴씨의 소개로 왔다니 일단 방은 드리겠습니다만 컬리지를 다니시는 분을 모시기에는 많이 모자라는 곳입니다.”

싫은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바스토뉴의 이름에 주인은 아이작에게 방 번호가 적인 열쇠를 내밀었다. 여지껏 지내왔던 방에 비하면 상당히 단촐하고 초라한 방이었지만 어차피 내일이면 컬리지로 갈 예정이니 그저 잠만 잘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일단 술이나 한잔 하고 있을까?”

바스토뉴에게 여관의 이름을 들었을땐 예전에 보았던 만화책의 재목과 똑같은 신의 물방울이란 이름에 피식 웃음이 나왔었다. 이름 대로 1층은 주점을 겸하고 있었는데 아이작이 주점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조용한 적막감과 함께 자신을 향해 일제히 시선이 쏟아졌다.

“맥주한잔.”

“아! 예 알겠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채 아이작이 바에 앉아 짤막하게 내뱉자 바텐더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맥주를 팔뚝만한 높이의 잔에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나이 지긋한 노년의 바텐더. 영화속에서나 나오던 완숙한 바텐더와 흡사하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군.”

바텐더가 조심스레 건넨 맥주를 받으며 아이작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만 해도 두배이상 차이가 나는 상대였지만 공대를 하는게 오히려 상대방을 더 곤혹스럽게 만든다는건 그간의 경험으로 충분했다. 지금 감사의 뜻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인것만 해도 바텐더는 황송해 몸둘바를 모르겠다는듯 어찌할줄을 모르고 있었다.

아이작은 등뒤에 콕콕 날아와 박히는 시선을 무시한채 묵직한 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맥주를 몇모금 마시던 아이작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잔은 입에서 떼지도 않은채 목울대만 계속해서 꿀럭거렸고 고개는 점점 뒤로 젖혀졌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입도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후아!”

탕! 개운한 숨소리와 함께 주석으로 만든 잔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큰 진동을 만들었다.

‘이거 물건인데?’

술을 딱히 좋아하는건 아니었지만 방금 마신 맥주는 그동안 마셔봤던 그 어떤 맥주보다도 더 깊은맛과 개운함을 가져왔다. 시원하고 알싸한 느낌이 부드럽게 목을 넘어가고 진한 맥주의 향기가 개운함과 동시에 감질맛을 나게 만들었다.

“와하하! 맥주 한번 시원하게 마시는구나!”

근무 교대 하고 바로 왔는지 경비대원 복장을 한 채 가게안으로 들어선 바스토뉴가 껄껄웃으며 다가와 아이작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그 모습에 손님들과 바텐더가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바스토뉴는 자랑하듯 사람들에게 외쳤다.

“이봐! 내가 늘 얘기했었지? 얘가 바로 그 아이작이라고!”

바스토뉴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변했다. 부러움과 질시, 측윽함과 경멸까지. 자신이 가지지 못하고 넘볼수도 없는걸 운 좋게 얻은자에게 보내는 다양한 시선들.

“맥주 한잔 더.”

“……”

대꾸도 없이 고개만 끄덕이곤 맥주잔을 휙 내꿔채 가는 바텐더의 모습에 킥! 웃음이 터져나왔다. 평소 올려다 볼수도 없는 위치에 있는자에게 반항하고 무례하게 굴어도 무사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을 누리지 않을자는 없다.

둔감한건지 들떠서 그런건지 바스토뉴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은 눈치채지 못하고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컬리지는 생활은 어떠냐? 아시모프랑 헬레나가 살아 있었다면 정말 자랑스러워 했을텐데……”

‘두 사람이 살아 있었으면 컬리지에 갈 일도 없었는데……’

눈물을 글썽이며 아이작의 부모를 회상하는 바스토뉴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그럭저럭 할만 합니다.”

“다행이구나 이런말 하긴 그렇다만 열심히 하렴.”

격어보지도 않고 책을 읽는듯 떠오르는 기억만 가지곤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컬리지에 관한 얘기가 계속 나오면 뭔가 이상함을 눈치챌까 싶어 아이작은 화제를 돌렸다.

“그동안 집을 관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작의 말에 바스토뉴의 표정이 급격히 우울해지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안하다. 신경 쓴다고 노력은 했다만 한손이 열손을 막기는 힘들더구나.”

“오히려 잘 됐죠. 이 참에 싹 정리하고 세라도 놓으면 용돈벌이는 할수 있을꺼 같으니까요.”

아이작의 말에 바스토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응? 세라니?”

“건물 말이에요. 위치도 좋은데 놀리는 것도 아까운 일이잖아요.”

“뭐야 모르고 있었던거야?”

“예? 뭐를요?”

“이런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 건물은 아직까지 아이작 네께 아니란다.”

“하아?”

“현행법상 유산 상속은 상속자가 성인식을 치른 후에야 상속이 가능하다는 구나. 만약 상속자가 아직 성인식을 치른 나이가 아닐 경우 소유주가 명시한 후견인이 성인식을 치룰 연령이 될 때까지 상속인의 재산을 관리하게 되어 있고.”

“……”

“여기서 몇가지 문제가 생겼는데 네 아버지 아시모프가 정한 후견인은 칼로소라고 나와 같이 네 아비와 함께 젊은 시절을 같이 한 친구였는데 그…… 사고당시 같이 있었단다. 그래서 후견인 마저 사망한 터라 그 건물은 그냥 공중에 붕 떠버리게 되었지. 나도 처음 가게에 도둑이 들었을때 도난 사건을 조사하려는데 범죄가 성립이 안된다는 소리에 알아보니까 법이 그렇게 되어 있더구나. 나도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노력했다만 주인이 도난신고를 해야 수사가 가능한데 주인 자체가 없으니……”

말을 얼버무리는 바스토뉴의 모습에 일이 어떻게 진행이 된건지 짐작이 갔다. 대놓고 훔쳐가도 잡혀가지 않는다. 즉 먼저 줍는사람이 임자라는 뜻이었다. 순간 사탕을 향해 몰려있는 개미떼를 떠올린 아이작이 쓴 웃음을 짖자 바스토뉴는 더욱 더 미안해 하며 아이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말이죠……”

“응?”

“바스토뉴 아저씨가 말한 그 법. 그건 분명 귀족법일 텐데요? 일반 평민에게 적용되는 법률이 아닌데 어째서 그렇게 된거죠?”

아이작의 말에 바스토뉴는 이걸 기뻐애햐 할지 뭐라 해야할지 난감하다는듯 뒷머리를 긁적거리더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일단 컬리지 소속이면 일반 평민이 아닌 준 귀족으로 평민법이 아니라 귀족법의 적용을 받는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아이작 네 재산에 관한 문제도 귀족법이 적용된다고……”

“그래도 지금 내 나이가 스무살입니다. 성년식을 치룰 나이는 훌쩍 지난지 오래인데요?”

“쩝. 나도 알아봤는데 컬리지의 학칙에 따르면 컬리지에 소속되어 있는 이상 성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빌어먹을 세상…… 여기나 거기나 관료조직이 융통성 없기는 매한가지인거 같았다. 그냥 좀 유도리 있게 처리하면 되는걸 굳이 원리원칙을 따져야 하는지 원…… 답답해진 마음에 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려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바스토뉴의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아. 한 대 피워도 되죠?”

슬쩍 담배를 들어 보이는 아이작을 향해 바스토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그거 청연초지? 언제부터 몸이 안좋아진거냐?”

“몸이 안좋다기 보다는 부상의 휴유증이라고 할수있죠.”

몸이야 멀쩡하지만 일일이 설명하기도 귀찮은 일이고 부상의 휴유증이라고 하면 간단한 일이었다.

“부상? 설마 컬리지에서 다친거야?”

“아뇨. 중급반의 실습수업의 일환으로 남부의 한 영지에 수습 행정관으로 갔었습니다. 재수없게도 부임하자마자 영지전이 터져서 전쟁터에 끌려갔죠. 운좋게 살아 남기는 했는데 폐를 다쳐서요. 고위 성법사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지만 완치가 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려서 그냥 청연초나 피우는 겁니다.”

그럴듯한 변명을 생각해낸 자신의 머리에 내심 흡족해 할때 바스토뉴는 크게 놀란 표정으로 아이작을 향해 외쳤다.

“뭐야! 그럼 네가 그 소문의 컬리지 학생이란 말이야?”

“……무슨 소문요?”

“근래에 일어난 영지전중 가장 격렬하고 쌍방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 생존자가 몇 안되는데 그중 한명이 컬리지의 학생이라고 들었어! 컬리지를 졸업하지도 않은 학생이 전투를 경험한건 근 오십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그거 때문에 가벨린이 얼마나 떠들썩 했는데!”

흥분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소리치는 바스토뉴의 모습에 아이작은 간단하게 반응했다.

“하아?”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루 단 삼회만 운행되는 배는 단 한척으로 킹 레이몬드호라는 이름을 지닌 화물선이었다. 주로 제국 해군에서 복무하다 은퇴한 해군 제독이 소일거리 삼아 선장으로 근무하는 황실 소유의 킹 레이몬드 호는 평일에는 컬리지에서 소모하는 물자들의 운송을 맡았고 주말에는 오락거리가 전혀 없는 컬리지를 벗어나 가벨린으로 놀러가는 컬리지 학생들을 위한 여객선으로 사용되었다. 그렇기에 평일날 컬리지로 들어가는 아이작은 꽤 관심거리였는지 선원들은 갑판에 나와있는 아이작을 호기심 섞인 눈으로 흘깃거렸다.

‘이제 어쩐다……’

아이작은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며 고민에 잠겼다. 컬리지는 세가지 학부로 분류되어 학생들은 하나를 전공으로 정해야 했다. 가장 인기가 많고 지원자가 넘쳐나는 학과가 군사학부로 공을 세워 출세하기 가장 빠른 길이기도 했고 인맥 또한 컬리지 출신들이 군벌이라 불릴정도로 군부를 주름잡고 있었다.

그 다음이 마법 학부로 육체적인 능력보단 머리쓰는쪽으로 발달한 인재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사실 군사학부와 마법학부는 육체냐 머리냐 하는 재능의 차이에 따라 갈리는 곳이라 언제나 지원자가 넘쳐났다.

컬리지에서 가장 홀대받는 학부는 행정학부였다. 제국의 재상을 비롯한 주요 요직을 컬리지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가장 공을 싾기 어렵고 책상머리에만 붙어 있으며 하는 일이라곤 서류작업밖에 없는 행정일은 꿈과 야망에 부풀어 있는 컬리지의 젊은 학생들에겐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컬리지는 한가지 방면만 잘해서는 졸업하기도 힘들어 전공 외에도 다른 두 학과에서 일정점수 이상 학점을 올려야지만 졸업이 가능했고 그 말은 전공을 제외한 다른 학과더라도 세상에서는 일가를 이룰만한 실력을 싾았단 소리였다. 컬리지가 그 명성을 이어갈수있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실제로 제국의 재상을 맡고있는 칼슈타인후작은 행정이 아닌 마법학부 출신이었다.

그 전공을 정하는 시기가 바로 졸업반이었다. 중급반까진 학과 분류 없는 통합교육 과정이라면 졸업반은 전공을 분류하여 좀더 세밀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배우는 기간이었다.

아이작의 고민은 바로 전공을 어디로 둘까 하는 문제였다. 소드 마스터나 화려한 마법을 난사하는 대 마법사도 살짝 기대해 봤지만 떠올린 아이작의 기억에 따르면 아이작은 마나를 한 톨도 모을수 없는 완벽하게 평범한 놈이었다. 그렇기에 행정학부 전공이 자동적으로 결정되어 있지만 군사학부나 마법학부를 지원한다면 길이 없는것도 아니었다. 군사나 마법이나 조직이 운영되는 곳은 행정이 필수니까.

그래서 더 고민스러웠다. 출세따윈 관심 없고 아등바등 기를 쓰며 살아갈 이유도 없으니 남는건 과연 어떤 전공이 좀더 편안하게 놀고 먹으면서 일은 별로 없고 있는 일도 간단하고 편하며 금방 끝나는 일의 취업을 선택하게 할수있는 길인지가 중요했다.

‘으음…… 군사 행정학이 그나마 해오던 가락이 있어서 편하긴 할꺼 같은데 그래도 군대를 또 가야된다는건 찝찝하고…… 이왕 판타지 세상에 떨어진거 마법쪽으로 가볼까? 그래도 편한걸로 따지면 행정쪽인데…… 그대로 판타지 세상인데 소드 마스터나 대 마도사정도는 돼야 때깔이 살지 않을려나??“

소드 마스터! 이 얼마나 설레이는 단어인가! 마법 한방에 일 군을 쓸어버리는 대 마도사는 또 어떤가! 그렇지만 아이작은 곧 그 꿈을 접었다. 이 세상에까지 와서 한다는 짓이 사람 죽이고 다니는 일이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재능이 있는것도 아니었고 노력을 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아이작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때 한 선원이 쭈빗거리며 다가왔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니 선원이 조심스레 아이작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선장님이 시간 있으면 차나 한잔 하자고 하시는데……”

“선장님이요?”

기억을 더듬어 이 배의 선장이 컬리지의 학생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제국해군의 제독 출신이라는걸 떠 올린 아이작은 선장의 초청을 거부할수 없었다.

선원의 안내를 따라 선장실로 들어가자 구리빛 피부에 수염이 덮수룩한 강인해 보이는 초로의 노인이 아이작을 반겼다.

“어서오게나. 이 평일날 외부에 나갔다 오는 학생은 오랜만이라 차나 한잔 하자고 불렀다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장은 아이작이 자리에 앉자 아이작의 찻잔에 찻물을 따르며 말했다.

“이렇게 컬리지의 학생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오랜만이군. 난 레이몬드라고 하네.”

“아이작이라고 합니다.”

통성명이 끝나고 차를 몇모금 마실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그래 전투를 격어보니 어떻던가?”

‘호오? 알고 있었나? 하긴 바스토뉴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꽤 유명한 이야기라고 했으니까.’

아이작은 어젯 밤 호들갑을 떨며 놀라던 바스토뉴의 반응을 떠 올리곤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람 죽어 나가는거 한순간이더군요.”

아이작의 말에 레이몬드는 호오? 하는 감탄과 함게 살짝 눈을 빛내며 호기심 섞인 눈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군인으로서 살아오며 경험한 첫 전투를 겪은 자들의 반응은 대부분 비슷했다. 사람을 죽일때의 광경이 끊임없이 악몽으로 나타나 술이나 약물로 현실을 외면하는자, 괴로워 하다가 점점 무덤덤해지는자, 그리고 극단적인 반응으로 미쳐버리거나 피에 취해버리는자, 하지만 아이작의 반응은 색 달랐다. 첫 전투가 아닌 수많은 전쟁을 헤쳐온 노련한 병사들이나 보이던 딱히 틀별할것도 없는 수많은 전투중 하나였을 뿐이라는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었다.

‘교수진의 평가가 잘못됐군. 상처를 많이 받았을 테니 전쟁을 경험한 선배로서 잘 다독여 주라고? 이놈이 어딜 봐서 전쟁 후유증을 격은 놈이야? 밥 잘먹고 잠도 잘 자겠구만.’

아이작이 복귀한단 소리에 자신에게 상태를 좀 봐달라는 교수진의 부탁으로 일부러 먹지도 않는 차를 대접까지 했구만 상태를 보니 헛짓거리에 불과했다.

벌떡!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몬드를 아이작의 의하하게 쳐다볼때 레이몬드는 싱긋 웃으며 선장실 한켠에 마련된 선반에서 술 한병과 잔 두 개를 들거 다시 돌아왔다.

“한잔 해야지?"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컬리지의 교칙에 따라 음주는 사양하겠습니다.“

아이작의 말에 레이몬드는 피식 웃으며 아랑곳 하지 않은채 아이작과 자신의 잔에 호박색 액체를 가득 부어 담고는 주머니에서 손바닥 만한 크기의 천 쪼가리를 꺼내 테이블에 툭 던지며 말했다.

“컬리지를 졸업한 선배가 권할때는 한잔은 허용한다는 규칙도 있지.”

“선배님이셨습니까?”

손바닥 만한 원의 중심에 닻 문양이 있고 그 주변으로 여덟 개의 금색 별이 수놓인 문양이었다. 닻은 당연히 해군을 뜻했고 별의 숫자는 컬리지에서 교육받은 연수를, 금색은 중급반부터 시작했다는걸 뜻했다. 아이작처럼 초급반부터 컬리지에서 교육받은 자들은 은색의 별을 사용했다.

“새파란 후배놈들이 깝죽거리다가 선배란걸 알면 태도를 바꿔 손바닥 비비면서 굽신거리는게 짜증나서 치워 버렸었지. 이 나이가 되면 인맥이고 뭐고 다 귀찮아 지거든.”

“팔성 골드스타는 처음보는데요?”

아이작의 신기하다는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여타 노인이 다 그렇듯 레이몬드도 자신의 경험담과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이작이 술 한잔을 홀짝이는 동안 술 한병을 다 비울정도로 떠들던 레이몬드는 술 한병을 다 비우곤 아쉬운지 새 병을 가져와 뜯으면서 말했다.

“이제 졸업반이지?”

“예.”

“그래 전공은 어디로 정했나?”

“글쎄요…… 적당히 몸 편하게 먹고 살수 있는 수준의 급여를 받을수 있는 직장선택이 가능한 전공으로 가려고 합니다.”

“하아?”

군 총사령관이나 제국 재상, 대마도사정도의 헛소리를 기대한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출세하는데 도움이 되는 직업은 선택하히라 예상했다. 그리고 적게나마 도움도 줄 작정이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밖의 소리를 들어서인지 할말을 잊고 말았다. 그런 레이몬드의 표정에 아이작은 피식 웃으며 품에서 담배를 한 대 꺼냈다.

“음? 그건 청연초? 자네 어디 다쳤나? 아! 그 전투에서 입은 부상인건가?”

레이몬드가 아이작의 손에 들린 담배를 보고 갸웃거리다 납득이 간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화살이 한쪽 폐를 관통해서 죽기만을 기다리다 겨우 살아났습니다. 절 치료하신 성법사님의 말로는 완치가 불가능 하다고 그러시더군요. 주기적으로 청연초만 사용하면 생활엔 지장이 없다고 해서 애용하고 있습니다.

“음. 그래서 인가?”

폐를 다쳤다는건 제국의 중요 직책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중대한 결격사유였다. 컬리지 출신으로 제국의 수뇌부를 꿈꾸는 이에게 있어선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아이작에겐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신경쓰실 필요 없습니다. 한번 죽음을 경험해서인지 모든게 다 부질없는 짓으로 느껴지더군요. 그저 마음 편하게 몸 편하게 사는게 최고라는걸 깨달았습니다.”

아이작이 아닌 준영의 의견이기도 했다. 죽음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사람이 얼마나 쉽고 허무하게 죽을수 있는지를 너무 많이 격어온 준영이 공이니 출세니 하는 문제에 연연하지 않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대단하군. 나도 말년에서야 깨달은걸 벌써 깨닫다니. 훗! 한잔 더 받아라.”

“하지만 교칙상 술은 딱 한잔만……”

“그건 한 병당 한잔이란 소리지.”

레이몬드의 억지에 아이작은 피식 웃으며 더 이상 사양않고 레이몬드가 건네는 술을 받았다. 아이작이 꽤 마음에 드는듯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젊었을적 무용담에서 막 음담패설로 주제가 넘어가려는 찰나 1등 항해사가 들어와 컬리지 섬의 도착을 알렸다.

레이몬드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시자 아이작은 미련없이 일어나 레이몬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쉽네요 다음에 다시 선배님의 무용담을 들을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응? 후하하! 그럼! 기꺼이 들려주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하하 공부 열심히 하게.”

얼큰하게 취했는지 붉어진 얼굴로 연신 호탕하게 웃으며 갑판 바깥까지 아이작을 배웅해 아이작이 항구에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손까지 흔들어 주던 레이몬드는 부두에서 다시한번 고개 숙여 인사하고 등을 돌린 아이작을 바라보다 선장실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통신구를 꺼낸 레이몬드가 통신구 밑에 달린 버튼을 누르자 얼마 안있어 한 노인의 모습이 뿜어져 나왔다.

“어쩐일인가? 항해중에 무슨 사고라도 난건가?”

“사고라면 사고랄수도 있지.”

“하! 천하의 레이몬드가 항해중에 사고를 냈다라 웃어야 하나?”

콧 방귀를 뀌며 놀란척도 하지 않는 컬리지의 부 학장 코듀로이 공작을 노려보며 레이몬드는 의자에 등을 깊숙이 묻었다.

“네놈이 부탁한 그 아이작이라는 놈 지금 막 배에서 내렸다.”

“호오! 이제야 돌아온건가? 그래 만나보니 어떻든? 정신상태가 계속 교육을 받을수 없을정도로 불안정 하던가?”

어찌 보면 학생을 겅적하는 교육자의 표본같은 모습이었으나 그가 얼마나 차가운 피를 가진 인간인지 잘 알고 있는 레이몬드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네놈이지? 아이작이라는 놈을 전쟁 발발 가능성이 높은 영지로 쫒아 보낸게.”

“호오? 눈치챈건가? 늙으니 내 수법도 고리타분해졌나 보군 너 같은 바다만 아는 외골수도 읽을 정도니까.”

“헛소리 하지말고 이유나 알자.”

“후훗 별거 없네. 마침 기회가 생긴 김에 골치덩이를 하나 처리해 볼까 한거지.”

“골치덩이?”

코듀로이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은듯 레이몬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작군의 과거는 알지?”

“네놈이 부탁해서 알아봤지. 불쌍한 놈이더군.”

“맞아. 당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희생양이었지.”

“그런데 그게 왜?”

“아이작군이 컬리지에 온지도 10년이 지났지. 수습 행정관으로 외부로 나간건 중급반 졸업학점이 부족해서였고.”

“그게 왜? 학점이 부족해서 실습교육 가는건 흔하지는 않지만 간간이 있어왔던……”

의아한듯 묻던 레이몬드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10년. 아무리 초급반부터 시작했다지만 10년이란 시간이면 중급반이 아닌 졸업반의 중반쯤의 시기에 해당한다. 대부분이 그랬다. 그런데 이제야 졸업반을 간다? 컬리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눈치챘나? 맞아 아이작군은 이대로 가다간 컬리지 사상 처음으로 15년 만기 교육을 다 채우고 졸업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네.”

“황당하긴 하지만 사지로 밀어넣을 정도까지의 일은 아닌거 같은데?”

“그야 몇몇 소수의 생각일 뿐이고 대부분은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지. 아니 불쾌해 한다는게 맞을꺼야.”

“하! 컬리지에 밀어 넣을땐 언제고 이제와서 투덜거리는 거야!”

“그때는 생각도 못했지만 이제와서 떠올려 보면 귀족연합의 술수였던거 같아.”

“술수?”

“응. 컬리지 깍아내리기.”

“……지독한 새끼들.”

레이몬드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아무런 재능도 없는 아이를 최고의 교육기관인 컬리지에 밀어 넣는다. 그러면 그 아이의 존재 자체가 컬리지의 명성엔 부담으로 작용하고 무능한 컬리지 졸업자의 존재는 컬리지를 동경하는 자들에겐 실망감을 안겨준다. 1,2년으로 끝나는게 아닌 지독하고 끈질긴 암계. 더 어처구니 없는건 한 사람의 인생이 달려 있는데도 이 암계 자체가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 식의 찔러나 보자는 심사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전투가 벌어질 확률이 높은 곳으로 보낸거였나?”

“맞아. 명성이 너무 좋은것도 문제라서 말이야. 퇴학이나 유급 자체가 허용되지 않으니 어떻게든 끌고는 가고 싶은데 워낙 기준점 아래라서 말이야. 하지만 정신적 충격에 의해 지속적인 학창생활이 불가능할 경우엔 에외가 적용되지.”

“미친놈! 그러다 전투에서 죽었으면 어쩌려고!”

“컬리지의 교복을 입고 있는데 죽을 리가 있나.”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확률은 확률일뿐 광기가 지배하는 전장에 절대적 안전이란 없다.

“아직 못들은 건가? 눈먼 화살에 폐를 다쳤다는군.”

“음? 그런 보고는 못 받았는데?”

“숨겼겠지. 컬리지가 다쳤다는 소리는 보고하기에도 꺼림칙 할테니까.”

“이런…… 그래서 상태는?”

“일단은 멀쩡해 보이더군. 지속적으로 청연초를 피워대야 한다는걸 봐서는 거짓말은 아닌거 같아. 그래서 그런지 몸쓰는 직업군은 피해야 한다고 하더군.”

“그래서 자네의 의견은 뭔가? 아이작군은 계속 교육을 받을수 있겟는가?”

코듀로이의 물음에 레이몬드는 아이작의 눈빛을 떠올렸다. 레이몬드의 경험상 사람을 죽인 광경을 떠올렸을때 무덤덤한 자는 단하나. 어딘가 정신이 비틀린자들 뿐이었다. 그것도 오랜 기간 전장을 굴러다니며 죽고 죽이는데 익숙한자들이나 그럴뿐 아이작 처럼 첫 살인에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 자는 처음 보았다.

“그놈 정말 실력이 꽝이야?”

“마나조차 발현시키지 못하는 실력일세, 평범 그 자체라고 할수있지. 거기에 폐까지 다쳤으면 격렬한 운동 자체가 불가능 할텐데……”

“그렇단 말이지…… 앞으로 컬리지가 꽤 시끌벅적 해지겠어.”

“응? 그건 또 무슨 소린가?”

“그건 두고보면 알 일이지. 아무튼 내 결론은 이걸세. 학업을 수행함에 있어 아무런 문제도 없다.”

“흐음? 정말인가? 괜한 동정심에 애를 망치는 걸수도 있어. 미련없이 잘라내고 새로운 길로 가도록 도와주는게 아이작군에게 더 도움이 될수도 있다네.”

“훗! 그거야 네놈 생각이고. 난 그놈이 마음에 드니까 쓰잘데기 없는 짓거리 그만하고 지켜 보라고. 한동안 컬리지가 꽤 재미있어 질꺼 같으니까.”





컬리지를 좌지우지 하는 실세는 당연히 컬리지를 총괄하는 학교장과 세명의 부 학장이었다. 교육에 평생을 매진해온 학과장과 세 부학장은 모든 컬리지 출신들의 존경을 받았고 이는 곧 그들의 강력한 영향력을 의미했다.

황족일지라도 사사로이 만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그 대단한 분들중 하나인 코듀로이 부 학장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게 된 아이작은 코듀로이가 말을 꺼내기 전까진 묵묵히 찻물이나 들이켜야 했다.

“무사해서 다행이군.”

뭔가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던 코듀로이는 차 한잔을 다 마실쯤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견습 행정관 수련 기간이 모자라서 교수진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으나 어쨌건 특수한 상황까지 겪은걸 감안해 최종평가 시험은 합격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감사합니다.”

“졸업반은 중급반과는 다를거야.”

“예?”

“졸업반은 모든게 자율적이네.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모든게 결정되지.”

‘그나마 진짜 대학과정 같구만.’

기억을 떠올려 봐도 중급반 까지는 고등학교 교육 과정과 흡사했다. 하지만 중급반에선 자신이 원하는 수업을 스스로 신청해 들어야 하고 신청한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와 일대일로 수업을 진행 받으며 교수의 최종 합격판정을 받아야 학점을 얻을수 있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세상엔 노력으로 어찌 할수없는 재능이란게 존재한다네.”

“그건 그렇죠.”

쉽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작의 태도에 코튜로이의 눈썹이 꿉틀거리며 마음에 안든다는 눈빛으로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젊은놈이 능력이 없으면 패기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건 뭐 맥빠진 미역줄기마냥 흐리멍텅하기만 했다. 그 모습이 마음에 안드는지 코듀로이는 축객령을 내렸다.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핵심 과목만 고르도록. 총무원에 가면 자네가 거주할 기숙사와 교수진이 추천한 수업목록이 있으니 그 중에서 고르는게 좋을꺼야.”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듀로이의 말에 냉큼 일어서서 나가는 아이작의 등을 노려보는 코듀로이는 대체 레이몬드가 무슨 좋은점을 봤길레 기대된다고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기가 아이작군이 졸업할때까지 거주하게 될 곳입니다.”

“……”

“오랜시간 소용하지 않던 곳이지만 수리와 청소는 다 끝탰으니 사용하는데 불편함은 없을겁니다. 식사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준수해 주시고 식사 시간외엔 식사가 불가능하니까 굶고싶지 않으면 유념해 주세요. 그리고 여기 리스트를 보시면 각 학과 교수님들이 추천해주신 과목이 있으니까 여기서 원하시는 과목을 골라 총무원에 신청해 주시면 시간표를 짜 드리겠습니다.”

“……예. 감사드립니다.”

아이작은 볼일이 끝났다는듯 냉정하게 사라지는 총무원 직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 대체 전엔 무슨 용도로 썼는지 짐작이 안갈정도로 낡고 황폐했다.

졸업반 학생들이 거주하는 기숙사가 아닌 외딴 구석진곳의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었지만 아이작은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다른 학생들과 부대끼는 것 보다는 혼자 있는게 정신건강에 훨씬 좋을테니까.

살짝 문을 열고 안을 살펴본 아이작은 겉보기완 달리 깨끗한 내부의 모습에 살짝 놀랬다. 원룸처럼 침대와 책상, 테이블등이 구비되어 있었다.

털석 침대에 누운 아이작은 피곤한듯 잠시 누운채로 있다가 총무원 직원이 건네준 리스트를 살피기 시작했다.

“행정보조학, 조직운영역학, 영지 경영보좌학, 마도장비보수,유지공학, 군사참모보좌학, 산업경제연구학, 법무보조학, 외교관계역학, 무역유통학, 마법제어학,…… 미친! 이게 인간이 다 배울수 있는거냐!”

리스트를 죽 읽어나가던 아이작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리스트를 집어던졌다. 한편으론 왜 컬리지가 그 명성을 이어오는지 이해가 가기도 했다. 하나만 전문으로 배워도 모자랄 공부를 적게는 네 다섯 개에서 많게는 열댓개까지 배우는 놈들이 보통놈들일리 없었다.

“응?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아이작은 리스트를 노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졸업반 학생들이 전공을 나눠 한 우물만 파야 할 정도로 배워야할 학문은 많았다. 그런제 아이작이 받은 리스트는 군사, 마법, 행정이 전부 포함돼있었다. 게다가 주 전공에서 곁가지로 배우는 보조, 보좌등이 대부분이었다.

“나름대로 배려해준건가?”





“아이작 군이라고 했지? 어쩐일인가?”

피끓는 청춘인 한창때의 젊은이들이 우글거리는 컬리지는 학풍은 자유로우나 그 외의 부분에선 군대 저리가라 할만큼 엄격한 기강을 자랑했다. 그래서 모든 소모품이나 생활용품, 학용품등은 전원 보급제로 상단에서 만든 대량생산용품을 사용해 왔다. 귀하게 자란 물건 아까운줄 모르고 살아온 컬리지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오로지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면만 고려해 만든 보급품이 성에 찰리 없었지만 컬리지의 전통과 규칙은 드래곤의 힘줄 보다도 더 질겼다. 그런 컬리지의 모든 보급품 관리는 물론 학생들의 규율과 기강을 책임지는 법학과 학과장 져스틴 교수는 사전 약속없이 들이닥친 아이작을 못마땅한듯 노려보았다.

컬리지의 명예를 책임진다 자부해온 져스틴에겐 아이작의 존재 자체가 못마땅하다 보니 좋은 시선을 보낼리 없었다.

“한가지 상담드릴게 잇어서 무례를 법하게 됐습니다.”

“흠. 뭔가 궁금하다는게?”

“이번에 제가 졸업반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들이 추천해준 학과목 리스트가 있는데……”

“왜? 양이 너무 많나?”

“아닙니다. 다만 궁금한건 이 과목들을 일년에 전부 다 배워야 하는지……”

“흥! 벌써부터 죽는소리 하는건가?”

“……”

“졸업반의 학생이 컬리지를 졸업하기 위해선 총 46학점이 필요하네. 그중 실습이나 현장수업으로 적용되는 10학점을 제외한 36학점은 해당 과목 교수의 인정이 있어야지만 학점을 인정받을수 있지. 한 과목당 인정되는 학점은 1~2학점. 즉 컬리지를 졸업하고 싶으면 네놈같은 경우엔 36과목을 들어야 한다는 거다. 그래도 교수진이 신경써서 그나마 가장 쉽고 이수가 빠른 과목들로만 챙겼으니까 좀 빼달라는 소리는 하지 말게.”

행여나 아이작이 수업 과목좀 빼달라고 징징거릴까봐 져스틴은 아이작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못 박았다. 그 모습에 아이작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그러니까 일년에 배우는 양이 아닌 졸업하는데 필요한 학점을 채우기 위해 배워야할 과목들이란 거군요.”

“그렇지.”

한가지 더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빨리 끝내게. 자네한테 허비하는 시간도 아까우니까.”

꽤 모멸찬 소리를 내뱉는 져스틴의 모습에 아이작은 살짝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컬리지의 교육 기간은 15년이죠?”

“그렇지. 자네는 벌써 10년이나 여기 있었군. 부끄러운줄 알게나. 자네와 함께 들어왔던 학생들은 벌써 졸업하거나 졸업하기 직전일세.”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흠!”

“그리고 한가지 더……”

“또 뭔가?”

짜증까기 섞인 져스틴의 목소리에도 아이작은 침착을 유지하며 말했다.

“제가 실습을 나갔다 올때 불미스런 일로 인하여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건 나도 들었네. 최대한 편의를 봐주라는 부학장님의 지시가 있었지.”

“예.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가 청연초를 주기적으로 피워야 하는데 청연초가 보관의 어려움 때문에 대량으로 구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열흘에 한번 가벨린에 청연초를 구입하러 나갔다 와야 할거 같습니다.”

“그런건 총무원에 신청하면 되는일 아닌가?”

“아시다 시피 청연초가 보급품으로 지정돼 있는것도 아니고 공금으로 구입할수도 없는노릇 아닙니까? 결국 제 사비를 들여야 하는데 그럴려면 나가서 구입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정기 운항편에 부탁해도 될텐데?”

“그게…… 저도 레이몬드님께 부탁드려 봤는데 자기가 심부름꾼이냐며 필요하면 직접 구하라고 욕만 먹었습니다. 그래서 규칙상 걸리는것만 없으면 제가 직접 나갔다 와야 할거 같아 말씀드린 겁니다.”

“흥! 공부할 시간도 빠듯할텐데 놀러 다니겠다고?”

“……”

“……알겠네 그 건은 알아서 처리 해 줄테니까 가서 일 보게.”

꼴도 보기 싫다는듯 나가라고 서류를 살피며 파리를 쫒듯 손짓으로 아이작을 내 쫒느라 자리에서 일어선 아이작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반짝이는걸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아이작도 처음엔 이왕 이렇게 된거 배운다는 생각으로 공부나 한번 해볼까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뭘 알아야 해먹을 텐데 이전 세상에서도 고등학교까지만 교육받고 군대온게 교육의 전부였다. 그래서 수준이나 좀 살필까 하고 컬리지 중앙 도서관에 비치된 책들을 살펴 봤으나 이해가 가는 책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해오던 가락이 있다고 군 전략,전술이나 조직,행정쪽은 약간 이해라고 가지만 나머지 부분은 까막눈이나 다름없었고 특히 마법과 관련된 학문은 이게 뭔 소린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을정도였다.

그렇게 도서관에서 한숨만 푹푹 내쉬며 이걸 어쩌나 걱정할 때 책장 구석진 곳에서 먼지가 뽀얗게 싾인 책을 하나 발견했다. 무협지에서 흔히 등장하는 기연인가 싶어 훝어봤지만 내용은 컬리지의 법률에 관련된 내용 뿐이었다.

그래도 기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훝어 보던중 문득 하나의 항목이 눈에 띄었다.

[컬리지에서 교육기간은 절대 15년을 넘길수 없다.]

월반에 월반을 거듭하며 일찍 졸업해대는 통에 아무도 모른채 잊혀진 법률. 이 항목을 본 순간 떠오른 생각.

‘뭐야? 그럼 그냥 5년동안 놀고 먹다 졸업해도 되는거 아냐?’

그래도 혹시나 싶어 학생들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고 판결하는 져스틴한테 찾아가 넌지시 운을 띄어 봤으나 져스틴도 모르는 조항인거 같았다. 아니 인식 자체를 못하는거였다. 설마 컬리지에서 놀고먹으려는 놈이 있을거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테니까.





일단 공부를 안해도 된다는 생각에 한시름 놓은 아이작은 막상 공부를 안하니 별로 할게 없다는걸 깨달았다. 참 불쌍한 인생답게 아이작의 기억을 더듬어 봐도 친구라고 부를수 있는 인간은 단 한명도 없었다. 겨우 얼굴이나 좀 익은 자들 몇 명이 다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게 아이작이 바둥거리며 노력할 때 차원이 다른 재능으로 쑥쑥 월반을 해 나가니 제대로 친구를 사귈 시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거기다 오직 학업을 위한 편의시설만 존재하는 컬리지 섬에 유흥거리라곤 단 하나도 없었다. 만날 사람도 없고 놀 거리도 없다보니 아이작은 그저 식사시간에 밥 먹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거나 뒹굴거리며 낮잠이나 자는게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었다.

“아아 천국이로다.”

아이작은 도서관 의자에 몸을 파 묻고는 담대를 한 대 피워 물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점은 언제 어디서고 담배를 필수 있다는 거였다. 실제 담배처럼 독한 연기라면 민폐인줄 알고 조심하겠지만 청연초를 태울때 나는 연기는 머리를 맑게 해주는 효능까지 있어서 아이작은 눈치 안보고 마음껏 피워댈수가 있었다.

“쩝. 이것만 가져다 팔면 한재산 만드는건 금방일텐데?”

문득 청연초를 이전 세상에서 판매하면 대박을 치는건 순식간이란 생각이 떠오르자 아쉬워 하던 아이작은 피식 웃으며 담배를 직접 만든 휴대용 재떨이에 집어 넣으며 비벼 껐다. 어쩌다 이 세상 떨어졌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어떻게 해야 도로 돌아갈수 있는지 조차 모르니 아쉬워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음?”

아이작이 도로 책을 펴든채 멍하니 보고 있을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보니 세 청년이 아이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계속되는 공부의 압박에 스트레스도 풀겸 해꼬지 하러 왔나 싶어 경계하는데 머뭇거리며 우물쭈물 거리는 폼이 그건 아닌것 같았다.

“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아이작의 말에 청년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는데 그중 가운데 있던 청년이 한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안녕. 아이작이지? 난 마젤란이라고해. 이쪽은 칼스버그와 호든이라고 한다.”

마젤란의 소개에 아이작은 재빨리 청년들의 면면을 살폈다. 앞으로 나서 소개한 마젤란은 부드러운 금발의 잘생긴 미남으로 딱 봐도 주인공감이었다. 칼스버그란자는 약간 창백하고 초췌한 모습이었으나 날카로운 눈빛이 주변을 앞도하고 있었다. 호든은 곰같은 덩치에 걸맞지 않은 순한 인상과 부끄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한 순둥이 같았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신지?”

아이작은 컬리지 내에서 유령과도 같은 존재였다. 컬리지의 학생들은 아이작을 대놓고 없는사람 취급했다. 기를 쓰고 바둥거리며 들어온 컬리지를 아이작은 운좋게 들어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다행이 과중한 학업에 짖눌려 아이작에게 해꼬지할 시간조차 아까워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괴롭힘 당한일은 별로 없었다.

아이작의 물음에 마젤란은 머뭇거리며 말을 어떻게 꺼낼까 고민하다 아이작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저기…… 지금 네가 피운게 청연초지?”

“그렇습니다만?”

“혹시 그거 남은거 있으면 좀 얻을수 있을까?”

‘음?’

그러고 보니 청연초는 머리를 맑게 하는 효능 덕분에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꽤 좋았다. 다만 그딴 약물의 도움을 얻으려는자는 필요없다는 컬리지의 교칙상 청연초를 보급하지 않았다. 다만 약간의 융통성을 발휘해 학생이 외부에 나갔다가 들여오는 개인 소지품에 한해선 나눠 주거나 사용하는데 딱히 제제를 가하지 않았으나 그것도 졸업반 학생에 한해서일 뿐이었다.

어차피 한사람이 가져오는 양이래봤자 뻔한 분량이었고 외부에 나갈수 있는 학생 수 자체가 적다보니 사용하는 분량도, 사용하는 인원도 한정되어 있었다.

“필요하다면 드릴수는 있습니다만……”

“정말?”

아이작의 말에 화색이 도는 세사람은 다행이란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청연초를 필요로 하는거 보니 학점이 꽤 급한 모양이었다.

“한까치에 1기가입니다.”

“뭐!”

아이작의 말에 다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돌돌 만 청연초는 20개피가 1메가밖에 하지 않는다. 그걸 한 가치를 1기가에 판다는건 폭리도 그런 폭리가 없었다.

“혹시 소문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부상을 입어서 주기적으로 청연초를 피워야 합니다.”

“그…… 그건 알지.”

아이작이 외부에 나갔다고 다쳐서 돌아왔단 소리는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만큼 퍼져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샘통이라는 태도를 취했지만 마젤란 일행은 그나마 동정적이 태도를 취하던 이들중 하나였다.

“아시다 시피 청연초는 보관의 어려워 개봉후 삼일안에 소모를 해야 합니다. 제가 가지고 들어온 물건도 몇갑 되지 않고요 즉 여러분들에게 청연초를 드린다는건 제 생명을 깍아먹는다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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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팔자 사나운 놈이구만. 그건 나도 마찬가진가?”

준영은 목에서 뜨거운 피를 벌컥벌컥 쏟아내는 한 남자의 배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짤막한 감상을 토해냈다. 분명 마지막 기억으론 새하얀 빛에 휘감기는것으로 끝이 났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바닥에 주저 앉아있고 처음 보는 양키놈이 영화에서나 보던 검을 양손에 잡고 내려치려고 했다. 본능적으로 몸을 굴려 양키놈의 틈을 파고들어 남자의 옆구리에 차고있던 단검을 뽑아 왼쪽 발목의 아킬레스건을 끊어버리고 자세가 무너지는 남자의 경동맥을 그어버렸다.

아이작이 왜 숲 한복판에서 양키놈에게 죽을뻔한건지는 이유가 뻔해 기억을 안 떠올려도 될 정도지만 꽤 분했는지 격렬한 속도로 기억이 스며들어 지끈거리는 두통마저 느껴졌다. 껄끄러워서 보내버린 가문의 장자가 장성해서 기사학교를 졸업하고 영지로 돌아온다고 하니 영지를 빼앗길까봐 불안한건 당연했다. 정해진 수순대로 자연스런 사고사를 위장하려 했다.

“그나저나 이제 어쩐다”

준영은 중얼거리며 자신의 상태를 살펴봤다. 열두살 꼬맹이의 몸, 그래도 대외적인 체면을 생각해서인지 먹는거 가지고 치사하게 장난은 안쳤지만 그렇다고 풍족하게 주지도 않났는지 적당히 깡마른 몸매는 부족한 영양의 보충을 계속해서 호소했고 입은 옷은 귀족가의 자식이라고 보기엔 꽤 미흡했지만 그런대로 봐줄만은 했다. 물론 지금은 피와 흙으로 범벅이된 더러움 꼴이었지만.

일단 집으로 다시 돌아갈까? 생각해 봤지만 한번 칼을 빼든이상 계속해서 아이작을 노릴게 뻔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턴 쉬워지는게 세상일이니까. 계속 도로를 따라 이동한다? 어림없는 소리였다. 이미 론다트 자작령은 정실부인측의 세력에게 완벽히 장악당했다. 영지를 벗어나기 전에 붙잡힐게 뻔했다. 안전한 보금자리를 찾아야 했고 아이작은 그런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컬리지인지 뭔지 까진 추적자를 피해 혼자서 가야된단 소리군.”

아이작의 기억을 떠올려 보니 컬리지로 가기 위해선 정실부인측의 추적을 피해 가벨린으로 가야만 한단 소리였다.

“이건 뭐 오자마자 고생이냐.”

자신이 어째서 이런 판타지 세상에 떨어졌는지. 한가하게 그 이유를 따지고 있을 시간이없었다. 일단 살아 남아야 고민할 여유도 있는거니까. 그리고 아이작은 살아남는덴 꽤 자신이 있었다.

“어디보자……”

아이작은 자리에서 툭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쓸만한 장비를 수거해 재활용 하는건 전쟁의 기본이었다. 이미 한두사람 죽여온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쓸데없는 감상에 빠질리도 없고 이미 죽어머린 시체 따윈 일용할 보금품일 뿐이었다. 남자가 쓰던 검은 너무커서 맞지않는다. 죽이는게 썼던 단검이 딱 적당했다. 남자의 허리춤에서 단검집을 빼내 옆구리에 차고 망토를 벗겨내 둘둘 말아 보퉁이를 매듯 한쪽 어깨를 둘러 묶고 품속을 뒤지자 육포가 가득 들어있는 건량 주머니와 신분패, 지갑등이 전부였다.

“먼 거리를 간다는 놈이 배낭도 안가지고 있으면 뻔한거 아닌가? 영리하긴 했지만 아직은 애였군. 그나저나 이 동네는 설마 동서남북이 다른건 아니겠지?”

아이작은 육포를 한웅큼 입에 털어넣고 질겅거리며 중얼거렸다. 아이작의 영지가 위치한곳은 남부, 그렇기에 황도 가벨린은 북쪽이었다. 나침반 없이도 방향을 잡는 방법은 꽤 많다. 다만 이전세계의 독도법이 이쪽 세계에서도 통할까 하는게 문제였다. 방향을 가늠한 아이작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뭐야! 한슨이 죽었다고?”

론다트 가문을 장악한 에밀리아 남작부인의 사촌오빠이자 에거슨 백작가의 방계혈족인 새뮤얼은 부하가 가져온 소식에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제길! 멍청한 자식. 그딴 꼬맹이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뒤통수를 맞다니!”

뿌드득 이빨을 갈며 중얼거리던 새뮤얼은 기사를 보내지 못한걸 후회했다. 아이작이 컬리지에 합격했단 소문이 퍼진후 영지의 호족들과 기사들은 아무리 출신이 비천하다지만 이전 주군의 자식인 아이작을 향해 손을 쓰는걸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신경써야 했기에 달랑 병사 한명만을 붙였고 외부에는 아이작이 컬리지로 출발한 사실조차 숨겼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으면 그대로 행방불명 처리가 될텐데 맡겼던 병사는 뒈지고 아이작은 사라지면서 일이 꼬이게 생겼다.

출세에 눈이 먼 한슨이라면 아이작을 죽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줄 여겼다. 그 음흉한 꼬맹이 새끼한테 숨겨둔 한수가 있다는걸 예상못한 자신의 실책이었다.

“쯧! 벌써 두 번째로 뒤통수를 얻어맞은건가?”

겁먹고 벌벌 떨며 눈치만 살피는 기죽은 모습만 보여주던 꼬맹이의 겉모습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아 넘어갔다. 그러다 컬리지의 시험 감독관이 영지에 들어와 두 조카의 입학시헙을 치룰때 슬그머니 끼어들더니 사랑스런 두 조카를 제치고 덜컥 컬리지의 입학을 인정받았다. 컬리지란 이름은 출신의 비천함을 뛰어 넘는 정당성을 부여해 준다. 장자승계 원칙에 컬리지의 뒷 배경까지 있으면 론다트 가문을 장악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까지 동원했는데 아이작은 보란듯이 빠져나갔다.

“아직 얼마 가지는 못했을거다! 추적대를 편성하고 경계의 검문검색을 강화하라고 지시해! 놈을 찾아라! 영지를 벗어나기 전에 죽여야한다!”

놈이 컬리지로 들어가 자신의 사연을 호소하고 컬리지의 입학생을 죽이려고 했다는게 밝혀지면 사방에서 감당못할 압력이 들어온다. 컬리지에는 그럴 힘이 차고도 넘치게 있었다. 아이작이 컬리지로 들어가기전에 죽여야만 했다.





“젠장 이렇게 어두 컴컴 한데서 사람을 어떻게 찾으란 거야?”

“대체 우리가 찾는놈이 누군지 알아야 찾던가 말던가 하지.”

“듣자하니 웬 꼬맹이라는데?”

숲의 밤은 위험하고 공포의 대상이었다. 새까만 어둠속에 병사들이 들고있는 횃불만이 유일하게 주변의 사물을 인식하게 만들어 주었다.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공포심을 횃불에 의지한채 이 밤에 고생하게 만든 아이작을 향한 불평으로 해소하며 병사들은 주위의 덤불을 헤치며 건성으로 수색을 계속했다.

횃불이 점점 멀어지자 병사들이 지나간 길의 수풀 한가운데서 불쑥 머리를 들어낸 아이작은 횃불의 무리를 바라모며 황당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뭐지 저 병신들은?”

수색의 기본조차 안되어 있는 놈들이었다. 열 살 꼬맹이의 몸으로 성인의 추적을 피하는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기동력과 체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거기다 곧 찾아온 밤의 어둠은 이동을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어둠속에서 아무런 광원도 없이 이동한다는건 미친짓이었고 불을 피우는건 나 잡아 달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별수없이 주변의 나뭇가지를 꺽어 위장을 하고 콕 처박혀 있으니 횃불을 든 병사들이 투덜거리며 건성건성으로 수색을 하며 지나갔다. 넓게 퍼지기는 커녕 똘똘 뭉쳐 횃불을 들고 이동하는 모습에 찾을 의지나 있는건지 의아할 정도였다. 바짝 긴장한채 몸을 낮추고 있던 자신이 한심할 정도였다.

“이제 어쩐다……”

숲을 통과할순 없었다. 이전 세계의 안전한 숲이 아니었다. 온갖 맹수가 도사리고 있는 성인남성들 조차 아차 하다간 목숨을 잃을수 있는곳이 바로 숲이었다. 열두살 꼬맹이의 몸으론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죽어나갈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그 전에 이 몸뚱이가 버텨줄수있냐하는건데……”

제대로 먹지 못해 비쩍 마른 육체는 약간만 움직여도 피곤함을 호소했다. 아무리 고열량 식품이라지만 육포조각만 가지곤 필요한 영양분을 보충할수 없었다. 일단 먼 거리를 가기전에 체력을 비축하는것이 급선무였다.





아이작의 부모는 선선대의 조상이 남작위를 가졌다가 단 2대만에 영지를 말아먹으며 몰락한 몰락귀족신분으로 수도 가벨린에서 잡화점을 하며 살아가는 평민보단 약간 처지가 좋은 수준의 가정이었다.

“이봐! 어디가는거야?”

“볼일좀 보고 갈께!”

“조심하라고. 그 꼬맹이가 잡아먹을지도 모르니까.”

“흥! 잡히기만 하면 살려달라고 질질 짜게 만들어 줄꺼다!”

바지춤을 내리는 브렌든을 내버려 둔채 점점 횃불이 멀어져 가자 브랜든은 볼일을 보기위해 서둘렀다. 아무리 횃불을 들고 있다지만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숲에 남겨진다는건 원초적인 두려움을 자극했다.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떤 브렌든이 바지춤을 추슬린뒤 횃불을 들고 이동하려는데 부스럭 거리며 나뭇가지가 부러지듯 딱딱 거리는 소리가 들여왔다.

“뭐지?”

숲에는 늑대와 곰을 비롯해 인간 혼자 감당하지 못하는 맹수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꼬맹이일수도 있었다. 단독으로 그 꼬맹일 잡는다면 꽤 짭짤한 포상을 기대 할수 있었고 욕망이 공포를 누르는 순간 브렌든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바짝 긴장한채 오른손엔 검을 쪽 잡고 왼손에든 횃불을 쭉 내밀어 시야 앞쪽을 휘휘 저으며 움직였지만 별다른 이상은 발견할수 없었고 혹시나 싶은 맹수들 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숲에 사는 겁많은 동물들이 낸 소리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브렌든은 긴장을 푼채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횃불을 팔 아래로 내렸고 순간 뭔가 덮쳐 온다는 느낌이 든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운이 좋다고 해야하나?”

수풀을 헤치며 기어나온 아이작은 목에 커다란 나뭇가지가 박힌채 꺽꺽거리며 발버둥 치는 남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열 살 꼬맹이의 몸으로 성인의 추적을 피하는건 사실상 붕가능했다. 거기다 곧 찾아온 밤의 어둠은 이동을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숲의 어둠에서 아무런 광원도 없이 이동한다는건 미친짓이었고 불을 피우는건 나 잡아 달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별수없이 주변의 나뭇가지를 꺽어 위장을 하고 콕 처박혀 있으니 횃불을 든 병사들이 투덜거리며 건성건성으로 수색을 하며 지나갔다. 수색의 기본조차 안되어 있어 넓게 퍼지기는 커녕 똘똘 뭉쳐 횃불을 들고 이동하는 모습에 찾을 의지나 있는건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래도 재수없이 걸리면 끝이라 바짝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는데 감사하게도 무리에서 한놈이 똑 떨어져 나왔다. 어떻게 하면 잘 죽였다 소문날까 고민해 봤지만 아무리 단검을 들고 기습을 가한다 할지라고 꼬맹이의 힘으로 건장한 청년을 단번에 죽이자니 체급차이가 너무났다. 단번에 죽이지 못한다면 비명소리에 일행들이 몰려들테고


“앗! 조심해!”

“아악! 내 발!”

“멍청한놈! 그토록 조심할 일렀건만!”

새뮤얼은 왼쪽 발목을 붙잡고 비명을 지르는 동료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벌써 여섯명째였다. 아무런 성과없이 밤을 보내고 피곤해 하는 병사들을 윽박질러 넓게 포위망을 완성했다. 아무리 조력자가 있다해도 그 꼬맹이를 데리고 이동할수 있는 거리는 한정되어 있었다. 갈만한 방향또한 한 방향 뿐이니 운 좋게 숨었다 하더라도 넓게 퍼져 샅샅이 훝으며 지나가다 보면 걸리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넓게 퍼진 상태에서 왔던 길을 되 짚어 가던중 한 병사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앞으로 철푸덕 넘어졌다.

근처에 있던 병사들은 낄낄거렸고 새뮤얼은 당장 일어나라고 호통쳤으나 묵묵부답, 가뜩이나 짜증이 날때로 난 새뮤얼이 씩씩거리며 다가가 누워있던 병사의 목덜미를 잡아 올리며 호통치려 했으나 아이 팔뚝만한 나뭇가지에 목과 가슴이 꿰뚫여 있는 모습에 눈살을 찌푸릴수밖에 없었다. 보나마나 아이작을 도와준 정체모를 조력자가 만들어 놓은 함정이 분명했다.

병사들에게 주의하라 경고한뒤 수색을 속행했다. 하지만 발을 헛뒤뎌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데 본능적으로 붙잡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며 팔과 다리가 부러진놈, 수풀을 헤치며 길을 만드는데 장검으로 쳐낸 잔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튕겨 나오며 얼굴을 덮쳐 한쪽눈이 실명된놈 나뭇가지를 한껏 휘게만든뒤 뾰족하게 깍은 나뭇조각을 묶어놓은 함정에 걸려 허적지가 꿰뚫린놈 등등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자 한껏 움츠러든 병사들은 아무리 윽박질러도 미적미적 움직일 뿐이었다.

사망자야 내버려뒀다가 나중에 시신을 찾으러 오면 그만이지만 부상자는 다르다. 가벼운 상처를 입은자는 알아서 복귀하면 그만이지만 거동이 불편한 병사가 생기면 한명을 돌보기 위해 두 세사람이 대열에서 이탈해야만 했다. 그렇게 점점 수가 줄어들어 어느새 절반이 넘는 인원이 빠져 포위망에 구멍이 생긴건 물론이고 사기마저 뚝 떨어졌다. 이대로는 죽도밥도 안된다는걸 알고 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좀더 많은 인원을 데려오지 않은게 아쉬웠지만 이런 일이 벌어질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새뮤얼은 일단 야영지로 돌아가 전력을 재정비 한뒤 한바탕 욕은 먹겠지만 어쩔수 없이 증원을 한뒤 다시 수색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영지를 벗어나는 모든 길목은 차단되어 있으니 영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이 페란트 숲을 통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아이작과 정체를 알수없는 조력자가 함께 이동하는 거리와 시간, 증원이 도착할 시간을 계산해본 새뮤얼은 충분히 놈들을 쫒아갈수 있단 결론을 내렸다.

“뿌득! 모두 집합! 일단 철수한다.”

새뮤얼은 군 기사를 단 한명도 데려오지 않은걸 후회했다. 군 기사라면 이따위 저급한 함정 따위엔 걸리지도 않았고 설령 걸린다 하더라도 쉽사리 벗어날 수 있었다. 함정을 경계하는듯 꾸물거리며 다가오는 병사들의 모습에 새뮤얼은 대뜸 호통치고 싶었지만 그러면 상황을 악화시킬뿐이란걸 잘 알기에 치솟아 오르는 분기를 꾹 눌러 참았다. 아직 영지를 완벽하게 장악한건 아니었다. 기사들 뿐만 아니라 영지민들 중에서도 전 남작을 잊지못하는 자들이 많았다.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해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하지 못한다는 말이있다. 그런 의미로 따져볼때 론다트 영지군은 전원 사형에 처해져도 할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우리 영지군만 이런거야 아니면 모든 군대가 다 이따구인거야?”

아이작은 씁쓸히 중얼거리며 어두운 그림자 사이로 살금살금 기어갔다. 소부대 단위로 출동해 수색에 전념하는 영지군은 군 기본교육을 받기나 한건지 의아할 정도였다. 야간에 불침번과 경계를 서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구색은 맞춘다고 경계를 서기는 하는데 경계라는게 모닥불가에 옹기종기 모여 몰래 가져온 술을 깨작거리고 잡담이나 나누며 시간만 때우는 수준이었다. 아이작은 일이 편해지긴 했는데 이걸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할찌 복잡미묘한 기분이었다.

모닥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영은 어둠을 더욱 짙게 만들었고 아이작은 그림자에 스며든채

경계수준이 형편없긴 하지만 방심해선 안된다. 사방을 경계하며 살금살금 병사들이 잠들어 있는 천막으로 기어들어간 아이작은 옆으로 메는 가방 하나를 슬쩍한뒤 내용물을 조용히



“반타작이면 꽤 성공적인가?”

아이작은 넓게 퍼져 수색하다 한데 모여 새뮤얼을 선두로 줄줄이 뒤를 따르는 새끼 병아리 같은 병사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한 두 개의 함정이 더 있었지만 새뮤얼은 간단하게 함정을 분쇄하며 돌파하는 모습에 더 이상의 부비트랩은 소용이 없다는걸 느꼈다. 아이작의 기억만으로 가늠해봤을땐 도저히 이해가 안갔지만 실제 기사의 위력을 확인해 보니 이런 원시적인 수법의 부비트랩으론 생채기 하나 낼수 없을거 같았다. 병사들의 수를 절반으로 줄인걸로 만족 해야만 했다.

“그나저나 지원을 부르면 곤란한데?”

지금 당장 냅다 튀는 방법도 있었으나 아이작의 체력상 얼마 못갈게 뻔했다. 지금도 부비트랩을 만드느라 무리했는지 온몸이 달달 떨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어서 더 이상의 부비트랩을 만들여력도 없었다. 최대한 빨리 몸을 완전하게 회복 시킬수 있는 안전한 곳을 마련해야만 했다.




“평가를 수정해야겠는데?”

아이작은 눈앞에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중얼거렸다. 등잔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아이작은 숲속에서 추위와 싸우며 하룻밤을 보낸뒤 병사들이 쫙 깔려있을게 뻔한 길목으로 가기보단 반대 방향인 론다트시로 방향을 바꿨다. 그나마 거리가 멀지않아 부지런히 걷다보니 저녁무렵엔 도착할수 있었다. 론다트시는 아이작이 상상했던 중세기대의 성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건물들은 콘크리트와 벽돌을 사용해 튼튼하게 지어졌고 반듯이 포장된 도로와 인도를 걸어다니는 행인들이 보였다. 거리는 깨끗했고 가로등과 보도블럭이 인도와 도로를 구분해 놨으며 포장된 이차선 도로엔 마차가 지나다녔다. 보면 볼수록 알수없는 웃긴 세상이었다.

아이작의 기억에 따르면 이곳 로라시아 대륙에 나라라고는 단 하나의 제국만이 존재했는데 판타지의 정석대로 마법사와 기사, 신관이 존재하고 엘프와 드워프등의 이종족들과 마물들은 물론 드래곤이라는 먼치킨급도 떡하니 버티고 있다.

제국은 언터처블. 절대 건드릴수 없는 황가가 제1계급이었고 신전의 인물들이나 귀족들, 부유한 상인들 같은 형편이 좋은 상민들이 제2계급. 그리고 절대다수를 이루는 평민들이 제3계급이었다.

처음 준영을 혼란스럽게 한건 철저한 신분제가 아닌 누구라도 노력하면 상위 계급으로 올라갈수 있다는 점이었다. 노예제가 없는 이 세상에서 시민들은 공을 세우면 귀족이 될 수 있고 귀족도 죄를 지으면 시민으로 지위가 내려간다. 다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건 비일비재해도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건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려웠지만 가능성과 실 사례가 있다는건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점이었다. 그런 계급제 사회에 사회적 인프라가 완벽히 구축되어 있었다.

‘이전 세상과는 발전의 방향이 틀려……’

아이작은 가죽갑옷을 입고 옆구리엔 검을차고 길다란 창을 어깨에 걸친에 어디론가 바삐 달려가는 한무리의 병사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문명 또한 전쟁을 통과하며 비약적으로 발달해왔다. 그런데 이 동네는 신기한게 기간시설은 감탄할 정도로 발달했으면서 전투병과와 병기는 중세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거였다. 간단하게 보병과 기사, 궁수등이 있고 대량살상이 가능한 결전병기급인 마법사와 게임에 등장하는 힐러급인 성법사까지 존재하는, 문명은 근대급이면서 군사수준만은 중세 판타지를 벗어나지 못한 신기한 세상이었다.

허나 신기한건 신기한거고 일단은 몸하나 건사하는게 중요했다.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려는지 사람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걸 어두운 골목길에서 유심히 바라보던 아이작은 신문 가판대를 발견하곤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문? 언론이 있단 말이야?’

근대적 건물들로 건설된 도시였지만 검과 창칼을 들고다니는 병사들의 모습에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대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니 종이의 대량보급과 그에 따른 신문사, 그리고 언론이라는 계급주의 시대에선 나올수 없는 문화에 놀라는건 당연했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신문이 보급된게 언제부터지? 얼추 시대가 맞는거 같기도 하고…… 끄응. 역시 넓고도 얇은 지식은 한계가 있구만.’

대부분의 지식을 만화와 소설 영화를 통해 습득해온 준영의 머리론 깊게 파고들어가면 답이 안나오는건 당연했다. 아이작이 신문을 본일 자체가 몇 번 없어 신문이라는것 자체가 있는지도 몰랐다. 아직 아이작의 기억을 완벽하게 흡수한게 아니라 인터넷에서 검색하는것처럼 뭔가를 떠올리면 기에 따른 기억이 연상되는 형식이라 아직 이 세상에 대해 모르는게 많았다. 그리고 어린 아이작이 보고 들은것과 책으로 배운 지식또한 한정되어 있고 성에서 감금되다시피 살아온 아이작이다 보니 유용한 지식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저씨 이거 얼마에요?”

“응? 처음보는 얼굴인데?”

“아버지가 사오래요.”

“그래?”

천역덕스럽게 어린아이 연기를 하며 신문 가판대 판매상에게 다가간 아이작은 열댓가지 종류의 신문과 잡지를 훔쳐보며 가벨린 타임즈라는 신문을 골랐다.

“삼백비트란다.”

상인의 말을 듣자 이 세상의 화폐체계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제국의 화폐는 현대문명과 비슷한 수준으로 동전인 비트와 지폐인 메가, 기가로 이루어져 10비트는 1메가, 10메가는 1기가의 단위를 가졌다.

‘흠. 대충 비교해 보면 1비트는 백원 1메가는 천원, 1기가는 만원정도군. 거참 간단하구만. 환율은 어떻게 되는거지? 아니 환율 따지는 내가 미친건가?’

아이작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신이 죽인 놈의 품에서 가져온 지갑을 열곤 1메가짜리 지폐를 한 장 꺼내 상인에게 건네줬다. 신문과 거스름돈을 받으며 문득 지갑이 두툼할정도로 꽉차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돈이지? 하긴. 보나마나 나 처리하는 대가로 받은 돈이겠지.’

어린아이가 길 한복판에서 신문을 펼쳐들고 읽는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딱 좋은 행동이었다. 신문을 들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아이작은 건물과 건물 틈새의 사람들의 시선과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곡목길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살핀후 들고있던 신문을 만지작 거렸다.

“……별 차이를 못 느끼겠군.”

신문이라는건 오늘의 정보가 내일의 휴지가 되는 일회용품. 중세시대에 종이란 귀한 물건이다. 그런 종이가 신문처럼 대량 보급되기 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함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신문에 사용되는 종이와 잉크의 질 또한 그렇게 발전해 왔다. 그런데 이전 세상의 종이와 비교했을때 별 다른 위화감도 느낄수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졌다.

대충 훝어보니 웃긴 세상이라는 말밖에 안나왔다. 문명발전의 절차가 뒤죽박죽이었다. 헤드라인엔 루벤지방에서 벌어진 영지전의 결과와 사상자, 피해결과등과 영지전을 벌린 영주를 비판하는 칼럼등이 눈에 들어왔다. 심각한 논조의 문장이었지만 아이작으로선 실소만 터져나왔다.

언론이 귀족을 사정없이 까대다니? 신분제 사회에서 언론자유화? 가능이나 한 소리인가?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권력유지를 위해선 우민화 정책이 가장 간편하다는건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권력자들이 그걸 모를리 없다. 그런데 신문이 발행될 정도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읽고 쓸줄을 안다는 뜻이니 자신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민중의 힘을 강화시킬 문맹퇴치와 언론의 자유를 그냥 보고 넘겼다? 알면 알수록 아리쏭한 세상이다.

신문을 대충 훝어본 아이작은 허기를 자극하는 냄새를 풀풀 풍기는 빵집에 들어가 빵과 우유를 사 신문을 읽었던 뒷골목으로 다시 들어가 빵을 꼭꼭 씹어먹었다. 가뜩이나 몸 상태도 안 좋은대 탈이나면 골치아팠다. 최대한 영양분을 흡수하는 쪽으로 소화를 시키며 체력을 회복시켜야 했다.

“음?”

간단하게 요기를 하는동안 떠올린 생각들을 절리할 때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들자 좁은 골목길 안쪽과 바깥쪽에서 아이작 또래의 험악한 인상의 아이들이 다가오고 있는걸 발견했다.

“훗! 이벤트 발생인가? 잘 됐군”

피식 웃은 아이작이 앚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자 아이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야! 너 돈좀 있더라?”

어린나이에 벌써부터 얼굴에 칼자국을 그려넣은 대장으로 보이는 아이가 건들거리며 다가오려 하자 아이작은 품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고. 시퍼런 예기를 뿜어내는 단검을 본 아이들이 잠시 머뭇거렸지만 칼자국 꼬맹이는 가소롭다는듯이 똑같은 단검을 꺼내들었다.

“이 근처에선 못보던 얼굴인걸 보니 어디서 한탕 하고 도망쳐 온 모양인데 잘못 걸렷어. 그딴 단검 하나에 겁먹을거……”

“옛다.”

툭! 칼자국 꼬맹이의 발치에 지갑을 던지자 살짝 당황하던 칼자국이 피식 웃으며 거만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크크 그래 잘 생각했다. 우리 구역에서 장사 하려면 허가를 받아야지. 앞으로 한건 하면 상납금을 먼저……”

“됐고. 물어볼게 있는데?”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말이 상당이 짧다? 혓바닥좀 늘려주랴?”

앳된 음성으로 딴에는 거칠게 욕한다는 투의 말에 피식 웃고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서라 꼬맹아. 형이 지금 힘이 없어서 니들이랑 싸우면 죽을거 같거든? 근데 한놈은 불구로 만들고 두놈은 같이 죽을 자신 있단다. 그돈 가지고 평화로운 세상 살아갈레? 아니면 나랑 같이 피좀볼레?”

“……”

그그극! 단검을 단단한 돌벽에 긁으면서 내는 거슬리는 소음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딱 봐도 애들이나 쥐어패며 살아왔을 꼬맹이들이 사람을 죽인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자연스런 살기를 감당할순 없었다. 그나마 칼자국 꼬맹이는 깡다구가 있는지 버티기는 했지만 창백해진 안색을 감출수는 없었다.

“좋은게 좋은거라고 넌 돈을 갖고 난 알고싶은걸 알고 얼마나 좋아? 저 돈은 정보료라고 생각하라고.”

그래도 막무가네에 저돌적인 성격은 아닌지 칼자국 꼬맹이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호구로 보이던 놈의 눈이 차갑게 번득이는걸 보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저 새끼는 진짜 적어도 혼자죽진 않을놈이라는게 딱 감이 왔다. 괜히 피보는 것보단 제안대로 하는게 이익이라는 생각에 단검을 집어넣었다.

“뭐가 알고 싶은데?





“영지군에 갑자기 비상이 떨어졌는데 무슨 일인지 모른다는게 말이 되는 소리야!”

“그게 어찌 된 일인지 전부 입을 꾹 닫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밝히는게 기자가 할 일이잖아! 그동안 판공비로 받아 처먹은게 얼만데 제대로된 정보원 하나 못 박아넣었다는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당장 나가서 파헤쳐 오란 말이다! 나가! 안나가? 확!”

가벨린 타임즈의 론다트 지부 편집장인 데스크는 일갈에 기자들이 어마 뜨거라 놀라며 후다닥 도망쳤다. 데스크는 허겁지겁 달리는 기자들의 뒤통수를 노려보다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석 주저앉았다. 제국 전역에 발행되는 일간지인 가벨린 타임즈의 지부장급인 편집장은 나름 명망있는 지역유지의 신분이었지만 론다트 자작령 같은 촌구석 시골영지의 편집장은 좌천이라고 보는게 맞았다.

실제로 데스크는 수도 가벨린에서 귀족들이 관련된 비리를 파헤쳐 특종으로 보도했고 그 해의 이슈가 되어 보도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관련 귀족중 하나가 결백을 주장하며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자살하며 실제로 그 귀족의 결백이 밝혀지자 출세가도를 달리던 데스크는 이런 시골영지의 편집장으로 오게되었다.

그저 본사에서 송신해주는 기사와 론다트 영지에서 취급하는 자잘한 기사거리를 제외하곤 제국 전역으로 보도될 중앙지에 내보낼 기사 자체가 없다보니 특종에 목이마른 데스크에게 갑작스런 영지군의 비상과 부산한 움직임은 마른하늘에 단비가 떨어지는 격이었다. 하지만 그런 데스크의 절박함과는 달리 안락한 생활에 젖어있던 기자들의 움직임은 답답하기 짝이없었다.

“저…… 편집장님 웬 아이가 전해줄게 있다면서 찾아왔는데요?”

“내가 지금 꼬맹이를 만나게 생겼어! 알아서 돌려보내!”

어디서 본건 있어가지고 잃어버린 애완동물을 찾아 달라거나 자기를 괴롭힌 친구를 고발한다고 찾아와 생떼를 부리는 아이들을 몇 번 격어본 데스크는 인상을 있는데로 찌푸리며 소식을 가져온 여직원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 모습에 여직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우물쭈물 하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게…… 영지군의 이번 움직임과 관련된 일이라고……”

여직원의 말에 데스크의 눈이 반짝였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어른 못지않은 영악한 아이들을 많이 보아온 데스크는 대번에 뭔가를 알고 정보를 팔러온 아이라고 짐작했다.

“데려와.”

데스크의 말에 여직원은 다행이라는듯 안도의 한숨을 내 쉬곤 서둘러 아이를 데리러 갔고 곧 한 아이를 엉거주춤한 태도로 데리고 나타났다. 데스크는 여직원이 데려온 아이를 재빨리 훝어보았다. 군데군데 찢어지고 흙이 묻은 옷차림에 얼마나 안씻었는지 떡지고 헝클어진 머리의 지저분한 꼬맹이는 여직원이 거리를 두고 움직일만 했다.

“……정보가 있다고? 꼬맹아 알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푼돈이나 벌어보겠다고 헛소릴 지껄이면 혼난다.”

데스크는 일단 들어보고 쓸데없는 소식이면 당장 경비원을 불러 혼구멍을 내줄 작정이었다. 그런 데스크의 기세등등한 협박에도 아이는 겁먹은 기색없이 씨익 웃더니 여직원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보안을 좀 지키고 싶은데요?”

“음?”

아이의 말에 데스크는 희한하다는듯 아이를 바라보았다. 보안을 언급하는건 그만큼 가진 정보에 자신이 있다는 소리였고 어린 나이답지않게 이런 일을 많이 해 봤다는 뜻이었다.

“너 혹시 그림자 소속이냐?”

대륙의 정보를 다루는 정보길드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두 갈래로 양분되었는데 음지에서 밝혀져선 안될 정보와 개인적인 의뢰들을 수행하는 전통의 정보길드를 그림자라 불렀고 양지로 나와 활동하는 조직들이 바로 지금의 신문사였다. 크게 봤을땐 전혀 상관없을 두 조직이었지만 정보를 다룬다는 공통점과 한갈래에서 나왔다는 특성상 서로 상부상조 하는게 보통이었다.

“그림자가 뭐죠?”

“모르면 됐다.”

아이작의 반문에 데스크는 고개를 저으며 여직원을 향해 눈짓을 보냈고 여직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이작을 힐끔 쳐다보며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래 얼마나 대단한 정보인지 들어볼까?”

“그 전에 묻고 싶은게 있습니다.”

“정보료는 걱정하지 마라. 들어보고 중요하다고 판단되면 후하게 살테니까.”

“흠. 정보료따윈 필요없습니다.”

“흐음?”

데스크는 의외란 눈으로 꼬맹이를 바라보았다. 비루한 체격에 너저분한 행색으로 당연히 돈을 바라고 온거라 여겼다.

“묻고싶은게 뭐지?”

“가벨린 타임즈는 대륙 전역에 발간되는 일간신문으로 알고있습니다만?”

“맞아. 본사에서 전해오는 주요 기사와 그 지방의 기사들로 신문지면을 채워넣지. 그런데 그건 왜?”

“론다트 지방의 소식이 실린적은 있나요?”

“이따위 촌구석에 무슨 중요한 정보가 있다고 중앙지면에 실리겠냐.”

데스크가 뚱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아이작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특종하나 드리지요.”

“후…… 꼬맹아 특종이란 말은 아무 때나 쓰는 말이 아니란다. 그건 기자들 중에서도 운과 실력이 따르는 몇 명만이…… 응?”

데스크가 아이작을 향해 나무라듯 말하는데 아이작은 말없이 품에서 곱게 접힌 서류봉투하나를 데스크에게 건넸다.

“뭐지 이건? 이 인장은 어디서 많이 본…… 헉! 이건 컬리지의 문장이잖아!”

문장을 확인한 데스크는 황급히 봉투를 열어 꺼낸 한 장의 종이를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아이작 론다트의 컬리지 입학을 허가한다.”

간결하면서도 짤막한 문장. 하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아이작 론다트!”

론다트가의 장남으로 본래는 후계자 자리에 올라야 하지만 출신성분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쉬쉬하는 비운의 후계자. 그나마 뒷 배경이 되어주던 남작과 친모가 사망하여 끈 떨어진 연 신세로 이대로 가다간 정실부인측의 음모에 희생될게 뻔하게 보이는 불쌍한 인생이 데스크가 알고있는 정보의 전부였다. 성에서 감금되다시피해 밖으로 나온적이 단 한번도 없어 얼굴을 아는이가 드문 유령과도 같은 존재였다.

데스크는 그제서야 눈앞의 아이가 누구인지 어째서 영지군과 기사들이 그렇게 소란스러운지 눈치챌수 있었다. 지금은 섭정이라는 이유로 공식 후계자 선언도 미룬채 어영부영 시간끌며 정실부인측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지만 아이작이 컬리지에 입학하고 졸업한 순간 아무리 백작가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찍 소리도 못한채 남작령을 넘겨줘야만 했다.

그러니 정실부인측에선 어떻게든 아이작에게 손을 쓰려 할테고 컬리지에 입학할정도로 영특한 아이작이 그 사실을 눈치 못 챌리 없으니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실부인측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고 영지군과 기사들은 아이작을 잡으려고 난리법석을 떨고있는 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데스크는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절로 어깨가 움츠러 들며 목소리도 조심스러워졌다. 아무리 어린 아이일지라도 컬리지의 입학생이면 밉보여서 좋을건 없었다.

“제게 바라는게 있으십니까?”

“호오? 역시 기자답게 눈치는 빨라서 좋군. 시골영지의 출신도 나쁜 남작가의 장남이 컬리지에 합격했단 소식은 중앙에서도 꽤 좋은 기사거리겠지?”

데스크가 몸을 낮추자 아이작은 당연하다는듯 자연스레 하대를 하며 데스크의 존중을 받아들였다. 어린 나이지만 준영의 정신을 가지고 있으니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데스크에게 공대를 하는것도 껄끄러웠고 출신이 비천하다 해도 평민보단 높은 신분이니 어린 아이작이 데스크에게 하대를 하는게 더 자연스러웠다.

“당연합니다. 컬리지에 입학하는 학생수 자체가 극소수인데 남다른 스토리 까지 가지고 있으면 모두의 흥미를 끌수가 있습니다.”

“그걸 좀 부탁하고 싶군. 영지민은 물론이고 제국의 모든 사람이 나란놈의 존재를 알수 있도록 말이야.”

“알겠습니다. 공자님의 사연은 물론이고 정실부인측의 횡포에 대해서도 낱낱이 기사로 올리겠습니다.”

“아아. 집안일에 관해서는 함구해 줬으면 좋겠는데.”

“예? 하지만 여론의 힘을 공자님께로 모으면 그자들을 축출해낼수도……”

“복수는 직접해야 제맛이지.”

씨익 웃는 아이작의 미소가 데스크에겐 섬뜩하게 느껴졌다.






쾅! 새뮤얼은 읽고 있던 신문을 찢어 발기며 책상을 내려쳤다. 으드득! 분노에 이가 갈려왔다. 꼬맹이를 찾기위해 전 병력을 풀고 길목을 틀어막은지 단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다. 대외적으론 비밀리에 처리해야 하는 일이라 정보를 사고 파는 조직에 특별히 입단속을 부탁까지 했다. 그들에게 의뢰하면 한시간도 되지 않아 꼬맹이의 위치를 알수 있을테지만 고작 꼬맹이 하나일 뿐이었다. 일반 귀족가 일원의 신상에 대한 정보라면 기꺼이 지불하고 시간낭비를 막을테지만 컬리지와 연관된 인물에 대한 정보료는 열배이상 뛰어 올랐기에 고작 꼬맹이 하나 찾는데 그런 큰 돈을 들일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일공자에 대한 일은 알만한 사람만 알고있는 쉬쉬거리는 상태였기에 공개적으로 찾아다닐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영지를 벗어나기 전까진 잡을 자신이 있었다. 제국에서 영향력이 크고 자신도 즐겨 읽는 가벨린 타임즈의 조간신문이 도착하기 전 까지는말이다.

새뮤얼이 대책을 고민할 때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중년부인이 들어와 짜증스레 외쳤다.

“오라버니!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시는 거에요!”

뾰족한 고성에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소리칠순 없었다. 론다트 가문의 실권을 장악한 여주인이자 자신의 사촌동생인 에밀리아를 향해 새뮤얼은 분기를 참으며 말했다.

“일이 복잡하게 됐다.”

“복잡할게 뭐가 있죠? 당장 그 악마같은 쥐새끼를 잡아 죽이면 되는거 아닌가요? 어떻게든 죽여버리세요! 뒷수습은 제가 알아서 할테니까요!”

무슨 절대 권력을 쥐고 있는듯 막무가네로 졸라대는 에밀리아의 모습에 새뮤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미 아이작이 컬리지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제국 전역으로 퍼졌다.”

“예? 그게 무슨 말이죠?”

놀라 반문하는 에밀리아에게 찢어발긴 신분의 한쪽을 건네주가 갑자기 신문 쪼가리를 왜 주나 싶어 의아해 하며 받아든 에밀리아의 얼굴이 기사를 읽어 갈수록 창백하게 변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새뮤얼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그 놈의 신상에 일이 생기면 의심받는곳은 우리뿐이다.”

“그게 무슨 상관이죠? 의심을 하든 말든 일단 죽은자는 말이 없는법 아닌가요? 아무리 컬리지의 입학생이라도 아버지라면 어떻게든 수습해주실 거에요.”

“백작님은 신경쓰지도 않으실 거다. 아니 오히려 후원을 자처하실테지.”

에밀리아의 말에 새뮤얼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부의 대 귀족중 하나인 에거슨 백작가라지만 컬리지의 힘에 비하면 우물안 개구리일뿐이었다. 어린시절 컬리지를 꿈꾸며 공부하다 좌절했던 새뮤얼이기에 컬리지의 힘은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에밀리아가 든든한 뒷배로 생각하는 에거슨 백작가는 사실 론다트 남작가의 일에 전혀 신경쓸 가치를 못느끼고 있었다. 백작가에선 푸대접 받는 새뮤얼을 비롯한 몇몇 방계혈족들이 일을 벌리겠다니까 그저 이름만 빌려주는 것일뿐 실질적인 재정적 지원이나 군사적 지원따윈 꿈도 못꾸는 실정에 정치적 지원을 기대한다는건 어림없는 일이었다.

거기다 이미 제국 전역에 발간되는 일간지에 론다트 가문의 장남이 컬리지에 합격했단 기사가 쭉 퍼져버렸다. 귀족가문중에서도 컬리지에 입학하는 인재를 배출하는건 가문의 영광이었다. 론다트 가문의 집안사정만 복잡하지 않았어도 영지 전체에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축제를 벌리는게 당연할정도의 큰일이었다. 영지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일공자가 컬리지에 합격을 했으니 영지민들이 동요하는건 당연한 일이었고 인접영지에선 축하사절이 올테고 취재를 하기위해 각 신문사에서 특파원을 보내 소란스럽게 할테니 이런 상황에서 손을 쓴다는건 불가능했다. 본가인 에거슨 백작가에서조차 배출하지 못한 컬리지였는데 아주 약간이나마 연줄이 있으니 후원을 자처하는건 당연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작이 사고라도 당한다면 모든 의혹이 자신과 에밀리아에게 쏟아질테고 그 여파가 백작가에게까지 미치면 백작가에선 자신들을 내칠게 분명했다. 이제는 아이작을 잡아 죽이기 보단 오히려 보호해야만 하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진거였다. 문제는 명목상 영지의 섭정으로 안주인 노릇을 하는 에밀리아가 그 사실을 받아드리려 하지 않는단 거였다.

“아버지가 그 악마의 자식을 후원한다니요! 어찌 그런 망발을 하실수가 있으십니까!”

“……컬리지는 그만한 힘이 있으니까.”

새뮤얼의 말에 에밀리아는 허탈한 표정으로 힘이 빠진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억장이 무너지는건 새뮤얼도 마찬가지였다. 용의 꼬리를 벗어나 뱀의 머리라도 되려고 온 론다트 가문인데 잘못 하다간 모든걸 잃고 떠돌아 다니게 생겼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건 한가지 희망이 있다는 거였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악마놈이 컬리지에 들어간다지만 듀프리도 컬리지에 합격하면 모든게 다 해결된다.”

자신의 조카이자 이공자인 듀프리는 정말이지 처음으로 아 저런놈을 바로 천재라고 하는구나 싶을정도로 인정할수밖에 없는 천재중의 천재였다. 컬리지의 시험 감독관도 잘하면 한 가문에서 동시에 두명의 인재가 컬리지에 합격할수도 있다며 감탄을 늘어놓지 않았던가! 비록 아쉽게도 떨어졌지만 시험은 한번 떨어졌다고 끝나는게 아니다. 언제든지 재 도전이 가능했고 듀프리라면 두 번 실패하진 않을터였다.

갑작스런 아이작의 컬리지 합격으로 순식간에 판도가 뒤바뀌었지만 듀프리가 컬리지에 합격만 한다면 상황은 원상태로 돌아온다. 똑같은 컬리지 출신이라면 비천한 핏줄인 아이작 보단 듀프리가 모든면에서 우월하다.

듀프리와 아이작을 비교하며 잠시 희망을 가질때 문이 벌컥 열리며 성의 집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집사의 무례에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치자 집사는 깜짝 놀라며 우물쭈물거렸고 새뮤얼의 인상이 험악해지자 황급히 소리쳤다.

“아 아이작 공자님께서 서신을 보내 오셨습니다.”

“서신?”

대번에 인상이 일그러진다. 씩씩거리며 다가간 새뮤얼은 집사의 손에 들린 봉투를 거칠게 낚아채곤 우악스럽게 뜯어내 안의 내용을 읽었다.

뚫어져라 노려보며 살기를 피워대는 새뮤얼의 모습에 집사는 후다닥 도망쳤고 망연자실에가 앉아있던 에밀리아가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채 일어나 다가왔다.

“그 창녀년의 자식이 뭐라고 썼죠?”

“딱 한마디만 썼군.”

-간다.-

“아아악! 이 죽일놈의 애새끼!”

분에 못이긴 에밀리아가 발작하듯 비명을 지르며 마치 편지가 아이작이라도 된 듯냥 갈기갈기 찢으며 히스테리를 부렸고 새뮤얼은 그 모습을 음울히 바라보았다. 신문에 발행된 당일날 이런 서신이 왔다는건 영지에서 쉬쉬하는 정보를 제공한 당사자가 바로 아이작 본인이라는 뜻이었다. 여론을 이용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수단은 도저히 열두살 먹은 어린아이가 생각했다곤 생각할수없는 계획이었다.

‘지금은 곱게 보내주지. 하지만 네놈이 무슨 수를 쓰든 듀프리가 컬리지에 합격만 하면 두 번 다시 이 땅을 밟을수 없게 만들어 주마.’



간단한 서신을 보낸 아이작은 길을 떠나기 보단 데스크가 알선해준 호텔에 머물며 몇일간 푹 쉬었다. 형편없는 체력과 영양부족도 문제지만 아직 적응하지 못한 준영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아이작으로선 정실부인측을 믿을수가 없었다. 아무리 언론을 방패막이로 사용해 안전을 보장 받았다 하더라도 미친척하고 손을 쓰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단하다는 컬리지가 제제를 가한다 할지라도 자신이 이미 죽고 난 뒤라면 사후 약방문이고 죽어버린 컬리지 입학생의 존재보단 정치적 거래를 통한 이득을 취하는게 서로에게 좋은게 당연하다는 판단을 해서였다. 즉. 아차하는 순간 방심하다 피 보는건 자신일뿐이라 알아서 조심해야만 했다.

그렇게 호텔방을 뒹굴거리며 지내다 자신을 취재 한다고 기자들이 론다트 시에 도착한날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을 보자마자 마치 귀신을 본듯한 표정을 짖는 남작부인의 모습과 약이 올라 어쩔쭐모르는 새뮤얼의 모습은 꽤 통쾌했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안전 제일주의로 기자들의 장막을 몸에 두른채 아이작은 수도 가벨린으로 향하는 마력차에 몸을 실었다.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오버 테크놀로지는 교통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마차는 그저 단거리 운송용으로 쓰일뿐이고 여객운수를 전문으로 하는 상단이 운행하는 노선이 있었다. 그리고 운송수단은 기차와 버스를 합쳐 놓은듯한 기묘한 모양의 마력차였다.

기차와 비슷하지만 철도가 아닌 도로를 따라 달리는 마력차는 식당칸과 침대칸, 닭장차같은 3등석부터 호화로운 1등석까지 완비된 기가 막히게 상업적인 물건이었다. 아이작은 당연히 운수회사의 배려로 1등석을 차지했고 가벨린으로 향하는 동안 한 일이라고는 신문을 읽으며 침대에서 뒹굴거린것밖에 없었다. 비록 자세한 사항은 알수 없지만 그래도 신문은 정보를 취득하는데 있어 아주 유용한 물건이었다.

“으갸갸갸갹! 심심하군.”

아이작은 사타구니를 벅벅 긁으며 무료한듯 중얼거렸다. 신문을 한자한자 정독해 가며 읽는다 하더라도 하루를 때우기엔 심하게 부족했다. 꽤 흥미있는 소식도 있고 읽고 있으면 궁금해 지는 소식도 있지만 대화 상대도 없고 정보를 구해볼데도 없는 차량 안에선 그저 소일거리일 뿐이었다. 그래도 소득은 있어 적당히 체력은 회복했고 남는 시간 만큼 앞으로의 대책에 대해 궁리했다. 뭐 머리 굴려가며 궁리한 결론은 그저 대책없음이었다.

이 세상에도 성인의 기준은 20세 전후였다. 아직 어린 아이작의 나이론 할수있는게 아무겄도 없었다. 이유나 원인을 찾기위해선 이 세상에서 살아갈수 있는 힘을 길러야 했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또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편하게 한재산 만들어 놀고 먹을수 있는 기회.

문명은 중세가 아닌 근대를 넘어서는 수준이라 생활하는덴 약간의 불편함만 있을뿐이고 돈을 벌기위한 기회는 무궁무진했다. 기억을 떠올려 적당히 짜깁기한 소설을 출판해 작가로 살아가도 되고 이전 세상의 문명이기중 쓸만한걸 제작해 판매해도 한 재산 장만하는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전 세상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다고 해도 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미 나라는 망해 없어졌고 준영의 몸이 아닌 아이작의 몸을 지니고 있으니 설혹 어떻게 돌아갈 방법을 찾아 돌아간다 해도 평범하게 세금에 치이며 살아가거나 재수 없으면 국가조직에 붙잡혀 해부될 수도 있었으니 돌아간다는건 아예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론다트 영지를 이어받을 생각은 없었다. 영지경영따윈 게임으로나 하면 재미있는거지 정통 후계자로 영지를 준다고 해도 싫다고 할 판에 아등바등 싸우면서 까지 영지를 차지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지금 아이작이 기대하는건 게이트의 이용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고대의 기술로 건설된 게이트는 전 대륙에 소수만 존재하는 귀한 물건으로 순식간에 인원과 물자를 이동시켜주는 그야말로 판타지 세상의 기본 설정이라 할수 있었다. 그런 게이트를 직접 눈으로 보는것은 물론 실제로 이용할수도 있다고 하니 기대되는던 당연했다.

남부에는 게이트가 단 세군데 존재했는데 그중 하나인 홀슈타인 게이트는 남부의 세력가인 홀슈타인 공작가의 본성이 위치한 홀슈타인 성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니 홀슈타인성 자체가 게이트를 중심으로 건설된거라 할수 있었다.

게이트는 그 편리성과 유용성으로 많은 이들이 이용했고 그 비용에서 나오는 수익은 중소상단의 일년 예산과 맞먹을 정도였다. 홀슈타인 공작가 역시 게이트를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올수 있었다.

고대의 유산이면서도 아직까지 멀쩡하게 가동되는 영구적인 형태의 게이트는 좀이 수신 아이작으로선 박수를 치며 환영할만한 물건이었다. 이전 세상에 비해 약간 불편할 뿐이지만 아이작에겐 큰 불편함이었다. TV,라디오,인터넷이 없는 세상은 지루하고 지루했다. 일이라도 하면 모를까 마력차에 몸을 싣고 이동할뿐인 아이작으로선 도무지 참지못할 지루함이었다.

덕지덕지 조악한 분장을 한 채 연극과 공연을 하며 가문의 어른들에게 재롱잔치를 하는 중세시대 배경의 소설이나 영화를 볼때마다 미친놈들 낯 뜨겁게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킬킬 거렸는데 실제로 격어보니 뼈져리게 이해가 갔다. 심심하고 긴긴밤을 보내기 위해선 뭐라도 해야 하니까. 어른의 놀이는 어른들이나 할뿐 아이작은 놀고 싶어도 10년이상 기다려야만 했으니 밤이 더욱 길어졌다.

“차라도 마실까?”

심심한 세상의 유일한 소일거리라곤 차를 홀짝이는것 뿐이었다. 녹차와 비슷하면서도 달달한 맛을 내는게 꽤 입맛에 맞아 즐겨 마셨다. 거기다 간단하게 티백 형태로 나와 뜨거운 물만 부으면 되니 약간의 귀찮음도 질색하는 아이작에겐 딱이었다.

“응?”

찻물을 홀짝이며 멍하니 시간을 때우는데 잘 달리던 마력차가 갑자기 정지하는 느낌이 들자 힐긋 창문을 바라보았다. 허허벌판이 쭉 펼쳐져 있는게 마력차가 정차할만한 곳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건가?”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찾아가 호기심을 풀 정도는 아니었다. 언제까지 컬리지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은 없었기에 홀슈타인 성에 도착하면 주변 구경도 좀 하고 여행하는 기분으로 이 세계의 음식이나 먹으며 몇일을 보낼 계획을 세울때 웅성웅성 거리는 소란스런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고 험상궃은 인상에 커다란 덩치의 번쩍이는 갑옷을 입는 한 남자가 들어와 대뜸 소리질렀다.

“미안하군! 신세좀 지겠다!”

밑도 끝도없이 대뜸 내뱉는 말에 아이작은 멍하니 바라보다 피식 웃고는 다시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예.”

“그…… 응?”

아이작의 반응이 예상 외였는지 덩치큰 거한은 머뭇거리다 약간 목소리를 낮춘채 말했다.

“저기 보통은 이유를 물어보지 않나?”

“신세좀 지겠다면서요?”

“그렇지.”

“그렇게 하세요.”

“그걸로 끝?”

“그럼 뭐가 더 필요한가요?”

“아니…… 필요한건 없지만……”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얼버무리는 모습이 어수룩해 보여 아이작은 다시 피식 웃을때 거한의 등 뒤에서 뾰족한 음성이 들려왔다.

“문 막고 서서 뭐하는 거야 곰탱아!”

날카로운 목소리에 거한이 화들짝 놀라 옆으로 비켜서자 거한과 똑같은 은색 갑옷을 입은 붉은머리의 미녀가 안으로 들어오다 아이작을 발견하곤 어처구니가 없는듯 피식 웃었다.

“뭐야? 일등석에 있다는 손님이 이런 꼬맹이였어?”

“……”

대뜸 내뱉는 무례한 말에도 아이작은 별다른 반응없이 남아있던 차를 한번에 다 마시고 다시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 모습에 심기가 상한듯 눈썹을 꿈틀거리며 눈에 쌍심지를 켠 여인이 독설을 내 뱉었다.

“어디 사는 귀족 꼬맹이가 세상 구경한다고 혼자 싸돌아 댕기는건지 모르겠지만 꼬마야 세상 경험은 사람들이랑 부대끼면서 겪어야 하는 거란다. 형아들 바쁜일 치르고 돌아가는 길이거든? 조용히 쉬고 싶단다. 그러니까 신경쓰이게 하지 말고 딴 차량으로 꺼져줄레?”

“에밀리! 대장은 분명 양해를 구하라고……”

“시끄러! 꼬맹이 한테까지 고개를 숙이라는 거냐?”

“그 그건 아니지만.”

덩치에 걸맞지 않게 에밀리란 여인의 일갈에 목이 움츠러드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이작은 엉뚱하게도 만화의 흔한 설정 케릭터를 보는 느낌이었다. 아이작은 사람 수에 맞춰 찻잔을 꺼내 찻물을 부으며 말했다.

“앉아서 차라도 한잔 하시죠?”

“응? 그 그럴까?”

멋쩍은듯 헤죽 웃으며 자리에 앉으려는 모습에 에밀리의 짜증이 폭팔했다.

“뭐하자는 거야! 맥시멈!”

에밀리의 외침에 맥시멈이 움찔하며 엉거주춤 어쩔줄을 몰라할 때 아이작은 맥시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 이런 그러고 보니 서로 소개도 안했네요. 맥시멈씨? 전 론다트가문의 아이작이라고 합니다.”

“응? 으응. 난 맥시멈 그란데. 잘부탁해.”

카악! 자신을 무시한채 서로 통성명하는 아이작과 맥시멈의 모습에 에밀리가 발작하듯 짜증을 부렸으나 아이작은 그 모습을 무심히 받아넘겼다. 아이작도 미인과의 썸씽을 싫어하는건 아니었지만 에밀리는 범위 밖의 인물이었다. 뭐 미인이긴 하지만 아이작과는 세대가 틀리다. 저런 완성형 미인을 공략하는 것보단 앞날이 기대되는 기대주를 공략하는게 훨신 쉽고 이득이었다. 즉. 에밀리는 그저 관상용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고 성격또한 한 성질 하니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는한 친절히 대해줄 이유 자체가 없다고 여겼다.

“뭐가 이렇게 소란 스러워?”

에밀리가 맥시멈을 잡아먹을듯이 굴때 약간 피곤한듯한 음성과 함께 한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다들 똑같은 갑옷을 입은게 한 조직이라는걸 쉽사리 눈치챌수 있었다. 거기다 대충 닦아냈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는 핏자국과 희미하게 풍겨오는 혈향은 한바탕 전투를 치루고 왔다는걸 알수 있었다.

“오지마! 아직 안나갔단 말이야! 에잇! 이런꼴 보여주기 싫어서 쫒아내려고 한건데!”

발을 동동굴리며 투덜대는 에밀리의 모습에 아이작은 에밀리가 혹시라도 험악한 일행들의 모습에 겁을 먹고 충격을 받을까봐 일부러 배려했다는걸 눈치챘고 그런 행동이 꽤 귀여워 보였다.

“양해를 구하고 잠시 동행을 요청하라 보냈더니만 왜 또 둘이서 싸우고 있는거야?”

“대장!”

마지막으로 차장과 함께 한 남자가 곤란하단 표정을 지으며 들어왔고 아이작의 눈이 재빨리 남자를 살폈다.

‘흠. 주인공 급이군.’

아이작은 세상 사람들은 딱 세부류의 기분으로 나눴다. 주인공과 조연, 그리고 엑스트라. 아이작의 기준으로 봤을때 마지막에 들어온 남자는 주인공급이었다. 잘생긴 얼굴은 물론 은연중 풍겨 나오는 위엄과 주변을 휘어잡는 장악력, 그리고 갑옷 왼쪽 심장부근에 그려진 하나의 문장까지. 아이작이 문장을 보고 눈을 반짝일때 에밀리는 항변하듯 아이작을 가르키며 외쳤다.

“이딴 꼬맹이 한테 무슨 양해를 구하라는 거에요!”

“누난 남자친구 없죠?”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그냥 그럴거 같아서요.”

“캬악!”

마치 고양이가 으르렁 거리는듯한 모습에 사람들은 낄낄거렸고 맥시멈이 대장이라 부른 남자는 억지로 웃음을 참는듯한 표정으로 두어번 헛기침을 한 뒤 아이작을 향해 말했다.

“험험. 갑자기 들이닥쳐 미안하게 됐군 소년. 난 법무부 소속 남부지방 치안순회판사대 제7부대장을 맡고있는 맥스 플레지라고 한다.”

“안녕하십니까. 아이작 론다트라고 합니다.”

맥스의 소개에 아이작은 의자에서 일어나 꾸벅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전 세상이나 이쪽 세상이나 어딜 가나 사람 살아가는덴 인맥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 의미로 봤을때 맥스는 안면을 터둘만한 상대였다.

“선배님을 뵙게되서 영광입니다.”

“흐음? 선배?”

아이작의 말에 맥스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왼쪽 가슴의 문장을 매만졌다. 손바닥만한 원안에 말과 교차하는 검이 바탕으로 다섯 개의 금색 별이 그려져 있었다. 원은 대륙을 뜻하고 말과 교차하는 검은 치안순회판사를 의미하는 문장으로 객실안에 들어온 인물들은 전부 똑같은 문장을 하고 있었는데 맥스는 특별하게도 다섯 개의 별이 덧붙여져 있었다.

아이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이 인사한 이유이기도 한 별은 컬리지를 졸업한 자만이 쓸수있는 특권으로 은색의 별은 아이작처럼 초급반부터 시작하는이가 사용하고 금색별은 중급반부터 시작하는이가 사용하는 상징으로 금색별을 가지고 있다는건 신분과 배경 자체가 남다르다는 뜻이었다.

“컬리지 입학생인가?”

“예. 이번에 입학을 허가받고 컬리지로 가는 길입니다.”

“헤에? 컬리지 입학생이었어?”

“어쩐지. 보통 나오던 반응과는 다르다 했어.”

“하긴. 컬리지에 들어갈정도면 그럴만 하지.”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뭔가 납득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때 에밀리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툴툴거렸다.

“이거 얘기가 편해 지려나? 미안한데 홀슈타인 성에 갈때까지 같이 동행할수 있을까? 우리가 타고온 차량이 고장나서 말이야.”

“물론입니다. 근데 보아하니 한바탕 하신 모양입니다?”

“아아. 순회판사일이 좀 거칠어서.”





제국이 지배하는 이 땅의 영지는 제국령과 귀족령으로 나누어져 있다. 말 그대로 귀족이 직접 통치하는 영지와 제국이 직집 관리하는 영지다. 대를 이을 후계자 없이 영주가 세상을 떠나거나 큰 벌을 지어 영지를 몰수당할 경우 그 영지는 제국령으로 변환되었고 제국령은 공을 세운자나 제국령의 영지를 잘 다스린 행정관에게 하사하는 형식으로 내려주는등 제국령과 귀족령의 구분은 모호하기만 했다.

귀족령이나 제국령이나 어느정도 법 집행권한이 부여되나 영지의 치안력을 넘어서는 강력사건이나 피의자가 항소한 경우, 좀더 상위의 법집행기관으로 존재하는게 바로 치안순회판사였다. 대륙에 산재한 수많은 영지에서 올라오는 사건사고들을 중앙에서 처리하는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각 지방 정해진 구역을 돌아다니며 영지를 방문해 판결을 내리고 재수사를 하며 각 지방의 비리수사와 감찰업무를 맡고 있는게 순회판사의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앙심을 품고 있는자들도 있고 판결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나 비리 사실을 덮으려고 순회판사를 습격하는 일이 빈번하다보니 어느새 강력한 무력을 지닌 무력부대로 변해버린게 지금의 치안순회판사대였다.

“지방 감찰이라는게 꽤 험한일이거든. 한 구역의 일인자로 비비적 거리다 보니 지가 왕인줄로 착각하는 놈들이 가끔씩 있어. 무슨 절대 권력을 누린다고 앙심품고 뒤통수를 치려고 하는지 원……”

“그래도 이번엔 꽤 험난했다구요 대장! 결국 마력차까지 부서졌잖아요! 다행이 정기 운행편을 만나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당할뻔 했다구요!”

“누가 영지 두 개가 연합할줄 알았나……”

“근데 우리 관용 마력차 부서진건 누가 보상해 주지?”

“글세? 보험으로 안될려나?”

“힘들껄? 완전히 산산조각 나 버렸잖아.”

“알게 뭐야. 예산 집행부에서 알아서 하겠지.”

“하긴. 대장만 혼나면 되니까 우리는 가서 좀 쉬자고.”

낄낄거리며 들으란듯이 모든 짐을 다 떠넘기는 부하들의 모습에 맥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꽤 자유로운 분위기. 거기다 아이작이 컬리지 입학생이라고 알려지자 아이작을 하나의 어린애가 아닌 자신들과 동등한 상대로 대했다. 아이작으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태도였지만 그들은 컬리지 입학생이니 당연하다는 눈치였다. 뭐 아이작도 가는 길이 심심하진 않아서 기꺼웠다. 사람들의 대화소리를 듣는것도 오랜만이었다. 그것도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겪은 전우끼리의 끈끈한 인연으로 이어진 자들의 대화.

‘큭! 그 시궁창이 그리운 기분이 들다니.’

전투 중간 가끔씩 찾아오는 달콤한 휴식의 시간. 웃는것 말곤 아무것도 할수없었던 그때의 전장과 분위기, 부하들의 웃음소리가 떠오르자 아이작은 그립고도 더러운 기분을 동시에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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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르륵! 커튼을 젖히자 부드러운 아침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참새들의 지저귐이 귓가에 시끄럽게 울려퍼졌다. 삐걱! 창문을 열자 이루 말할수 없을 정도로 상쾌한 아침공기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매연과 공해에 찌들어있던 현대인은 맛볼수 없는 맑은 공기. 폐부 가득 공기를 들이마시며 자신의 몸을 살펴봤다. 그나마 먹는건 잘 먹고 자랐는지 몸은 건강하다. 적당한 살집이 붙은 10살 꼬맹이의 몸. 소설책에서만 읽어왔던 이계진입물을 실제로 당하니 황당하기만 하다.

“아이작 일어났니?”

“……예. 어머니.”

아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이작은 잠시 망설이다 크게 소리치곤 창문을 닫고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태어나고 처음 몇 년동안은 제대로된 사고를 할수 없었다. 하긴 갓난아기가 생각을 한다는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순간 순간 준영으로서의 기억이 떠오르다가 점차 뚜렸해지다 10살 생일날인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 일어나자 모든게 확연해졌다. 준영이란 자신의 정체성이 아이작과 융합되고 짧은 혼란을 겪은뒤 아이작은 자신이 있는 이 세상이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임을 받아들였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면 미쳐버렸을수도 있지만 마치 충격에 대비하듯 야금야금 떠올라 머릿속에 정착하던 기억들이 큰 혼란없이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했다.

원인을 고민해봤지만 짐작가는 이유라고는 연구소에서 마지막 저항때 일어난 폭팔밖에 없었다. 비밀 연구소의 폭팔에 휘말려 이계로 떨어지는건 이계진입물의 정석중 하나다.

나이 서른. 3년간 치열한 전투속에 살아온 준영. 아니 아이작의 인성은 전장의 광기에 복구할길 없이 망가졌다. 그 스스로도 자신이 망가지고 어딘가 비틀려있다는걸 자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평범하게 살아가다 이계진입의 정석과도 같은 일을 당했다면야 새로운 인생과 기회에 기뻐하며 목표를 세우고 쉼없이 달려갈수 있을테지만 아직도 눈을 감으면 전장의 포성과 비명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아이작은 지쳤다. 그저 쉬고싶을 뿐이다. 살던 세상으로의 복귀? 웃기는 소리였다. 이미 나라는 망해버렸고 기다리고 있을 가족도 없다. 돌아갈곳 없는 그에게 안식처란 없었다.

“아이작? 어서 내려와서 밥 먹으렴!”

아래에서 들려오는 재촉소리가 아이작의 상념을 깨웠다.

“앉기전에 먼저 씼으렴. 그리고 신문을 가져 오려무나.”

“……예.”

아이작이 내려오자 어머니인 에드린은 식탁위에 식기들을 늘어놓으며 아이작을 재촉했다. 아이작의 새로운 어머니. 받아들일수 있을까? 아이작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완벽한 타인. 비록 유전적인 영향은 있을지라도 정신이 거부한다. 준영이면서도 아이작이기도 하지만 준영의 황폐한 정신이 이미 아이작의 신체를 점령했다. 아이작의 부모는 그저 아이작이 자라 독립할때까지 외부의 영향에서 아이작을 보호해줄 방패막이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자 아직은 쌀쌀한 아침공기가 아이작을 반겼다. 아이작이 살고 있는곳은 제국 수도 가벨린의 평민 거주구역중 상업지구의 하나인 돌반거리에서도 목 좋은 자리에 자리잡은 잡화상이었다. 1층은 가게로 쓰고 2층은 가족들이 사는 아담한 2층건물. 문을 열자 보이는건 잘 포장된 도로와 서서히 꺼져가는 가로등의 불빛, 그리고 바삐 지나가는 행인들과 마차들이었다.

“……”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아이작은 허리를 숙여 배달온 신문을 집어들었다. 종이의 매끈한 질감에 갓 찍어낸 잉크냄새가 확 풍겨왔다. 아이작이라면 아무 생각없이 종이를 바라봤겠지만 준영으로선 신문을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볼수밖에 없었다.

신문이라니…… 살짝 기억을 더듬어 이 세상에 대한 정보를 떠올려 봤다. 정보라 해봤자 열 살 꼬맹이가 동네를 쏘다니며 보고들은 수준이었지만 그 정도의 정보만으로도 이 동네가 판타지의 정석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뭔가 애매한 수준의 문명을 가진 동네라는걸 알수 있었다.

“취익! 아이작. 일찍 일어났구나. 생일 축하한다. 선물이다.”

“……감사합니다. 쿠스탄스토 아저씨.”

매일아침 신선한 우유를 배달해주는 저 인간이 아닌 오크가 그 증거였다. 인간과 오크가 싸우기는 커녕 한동네에서 같이 산다. 뭐 분란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인걸 반길만한 사실이지만 그래도 상상과 현실의 괴리감은 웬지모를 탈력감을 줬다.

아이작은 오크 우유배달부가 준 우유병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겉보기엔 중세시대처럼 보이지만 사소한 곳에서 오버 테크놀로지가 튀어나왔다. 신문 하나만 봐도 그렇다. 신문이라는건 오늘의 정보가 내일의 휴지가 되는 일회용품. 중세시대에 종이란 귀한 물건이다. 그런 종이가 신문처럼 대량 보급되기 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함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유리병 또한 마찬가지다. 약간의 상식만 가지고 있어도 중세시대에 유리 자체가 보물로 취급되었다는건 쉽게 알수있다. 그런데 우유병? 그것도 매일 배달하는? 넌지시 부모님께 물어봤지만 종이는 엘프들이 만드는거라는 대답만 들었다. 유리병은 드워프들이 만들고.

웃긴 세상이었다. 문명발전의 절차가 뒤죽박죽이었다. 얼핏 본 신문의 헤드라인엔 어딘지 알수없는 루벤지방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영지전의 결과와 사상자, 피해결과등과 영지전을 비판하는 칼럼등이 눈에 들어왔다. 심각한 논조의 문장이었지만 아이작으로선 실소만 터져나왔다.

언론이 귀족을 사정없이 까대다니? 신분제 사회에서 언론자유화? 가능이나 한 소리인가?

하긴 평민신분인 아이작이 벌써 글을 깨치고 있다는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초대 황제였던 에르카프 대제가 전 국민 기본 의무교육 법령을 선포한 이후 모든 아이들은 기본적인 읽고 쓰기와 셈법정도는 해야 된다고 법으로 정해졌단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권력유지를 위해선 우민화 정책이 가장 간편하다는건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권력자들이 그걸 모를리 없다. 그런데 자신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민중의 힘을 강화시킬 문맹퇴치와 언론의 자유를 그냥 넘겼다? 이 세상에 적응하고 스며들기 위해선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아이작 여태 뭐하고 있는거니?”

“예! 지금 들어가요!”

살짝 짜증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에 아이작은 신문을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는 우유병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식탁에는 모락모락 김이나는 스프와 갓 구운 빵, 생일이라고 특별히 준비했는지 제법 달콤해 보이는 케익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설탕마저 있는건가?’

알면 알수록 모르겠는 문명수준에 아이작은 골치가 아파왔다. 정확한 정보를 알아야 제대로 대처할수 있는데 중세시대 평민의 아침식탁이라고 보기엔 너무 풍성했다. 그렇다고 아이작의 집안이 그렇게 잘 사는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생일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무뚝뚝한 말투와는 다르게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중년남성을 향해 아이작은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을 할수 있을까? 그저 얌전히 밥이나 먹으면서 말 잘듣는 착하지만 내성적이고 말수가 없는 아이인척 연기하는게 최선이었다.

“아이작도 이제 열 살이니 내일부터 학교에 다닐수 있겠구나.”

“……”

아버지의 말을 듣자 아이작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가까스로 참았다. 국가의무교육법령에 따라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가 양질의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의무교육이란다. 의무교육. 중세시대에 의무교육이라니? 뭐 정보를 쉽게 얻으려면 지금 상태에선 교육기관에 의지하는게 최선이라는건 안다. 하지만 열 살 꼬맹이의 몸을 전장에서 굴러먹던 미친놈의 정신이 꿰차고 있는 상황에서 겉으로 보기엔 같은 또래인 10살의 꼬맹이들이 난리치는 모습을 견뎌야 할걸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거기다 이 동네에도 신분상승을 위한 학구열은 엄청나서 아이작의 가정처럼 약간이라도 살림에 여유가 있는 집안의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가기전부터 이미 문자는 깨우치고 있을 정도였다. 아이작의 어머니도 시류에 편승해 아이작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렇지! 학용품도 구입해야 하니까 학교에 입학하는 기념으로 오늘 저녁은 나가서 먹을까?”

“그럴까요?”

“……가업이 잡화점인데 학용품이 없나요?”

아이작 집안의 잡화점은 만물상이라 불려도 무방할 정도로 수많은 품목을 취급했다. 당연히 학용품도 구비되어 있다. 어제 아버지를 도와 재고물품 정리하면서 확인한 사항이니 그새 팔려 나갔을리도 없다. 아이작의 말에 어머니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머! 우리 아들이 학교에 들어가는데 먼지싾인 물품을 쓰게 할 수는 없잖아?”

“……”

이 동네도 학업의 열정은 강남 아줌마 못지 않았다. 기세를 보아하니 치마바람 꽤나 휘날릴 태세인 어머니의 표정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제법 드나드는 단골 손님들이 빠져나가고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어슴프레 황혼이 깔리기전 일찌감치 가게문을 닫은 아이작의 부모님은 오랜만의 외출에 즐거워 하며 아이작을 잡아끌고 거리로 나섰다.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양손이 꽉 잡힌채 버둥거리듯 불편하게 걸음을 옮기며 아이작의 눈은 쉴새없이 주위를 살폈다.

기억을 살펴봐도 집 근처에서 또래들과 잠시 놀았을뿐 이 거리를 벗어난 적은 처음이었다. 최대한 많이 보고 정보를 모아야 했다.

상업구역도 세분화 되어 있는지 잡화점이 위치한 돌반 거리를 벗어나자 왁자지껄한 소음과 함께 거리를 가득메운 사람들과 양 옆으로 노점상이 즐비하게 깔린 시장골목이 나타났다. 목이 터져라 호객행위를 하며 손님들을 이끄는 소리와 가격을 깍으려는 눈치전쟁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시끌시끌하면서도 밝은 분위기. 난생 처음보는 물건들이 아이작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아이작. 잃어버리면 큰일이니까 손을 꽉 잡으렴.”

어머니가 걱정 된다는듯 아이작의 손을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원 걱정도. 아이작도 이제 다 컸는데 뭐가 그리 걱정이오. 거기다 집이 어딘지는 알텐데.”

“뭐에욧?”

아버지의 핀잔에 어머니의 눈초리가 올라가자 아버지는 황급히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험험 아! 아이작 저거 먹고싶니? 나도 오랜만에 코코론 하나 먹어볼까?”

어머니의 날카로운 시선을 외면하며 아버지는 코코론이란 이름의 시꺼멓게 생긴 뭔가를 코팅한 과일을 파는 노점상으로 움직였다.

‘코코론? 초콜릿인가? 초콜릿도 있다고? 그야 카카오를 발견했으면 당연할테지만 운송은? 분명 카카오나무는 열대지방에서 자랄텐데? 이 동네는 다른건가? 아니 그보다 노점에서 팔 정도면 대량생산한다는 소리잖아? 우유배달에서 짐작은 했다만 낙농업이 이정도로 발전했음 산업시대는 뛰어넘은 수준아냐?’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군대에서 생활하다 보니 체계적인 지식은 갖추지 못했다. 알고있는 모든 지식은 영화와 만화, 소설에서 습득한 겉핥기 수준의 넓고도 얕은 지식뿐이었다.

“어때? 맛있지?”

가족이 나란히 코코론을 깨작이며 인파를 헤쳐나갈 때 아이작은 수많은 군중속에서 빛을 발하는 이를 발견했다.

‘휘유 미인인데?’

부드러운 은발의 머릿결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아름다운 미녀는 모두의 주목을 받을만 했다. 남자들은 힐긋거리며 여인을 쳐다보고 그런 남자들을 향해 여자들의 눈에서 불길이 이글이글 피어 올랐다.

‘어딜 보고 있는거지?’

아이작의 주변의 시선엔 아랑곳 하지않고 한곳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얼굴에 칼자국이 난 중년인이 있었다. 중년인도 여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돌리다 눈이 마주쳤고 곧 인상이 일그러졌다.

“큭! 정보가 샌건가? 전원 산개! 돌파하라!”

“응?”

중년인의 외침과 함께 거리 곳곳에서 숨겨둔 병장기를 꺼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퍼졌다.

“컥!”

작은 단검을 황급히 꺼내들던 한 남자의 뒤에 몰래 접근한 다른 남자가 목을 그어버렸다. 파아악! 피보라가 분수처럼 뿜어진다.

‘아…… 동맥이 잘렸군. 깔끔한데?’

갑작스레 벌어진 살인에 거리의 사람들이 놀라 얼어붙을때 아이작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사람의 죽음 따위에 놀라기엔 너무도 많은 죽음을 겪었다.

하지만 무덤덤한 아이작과는 다르게 곧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비명소리가 사방을 메우고 겁에 질려 도망치는 사람들이 아수라장을 만들어 낸다. 서로를 밀치고 먼저 도망치려는 사람들 때문에 아이작은 인파에 밀려 부모님의 손을 놓쳐버렸다.

“아이작! 아이작!”

어머니와 아버지가 애타게 아이작을 부르지만 인파의 물결을 거슬러 오르기엔 무리였다. 거기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경비대가 길목을 통제해 출입을 차단하고 있었다. 휩쓸려 내려가는 사람들을 피해 아이작은 거리 한쪽 구석으로 몸을 옮겼다. 군중심리에 휩쓸리는건 한심한 만큼 위험했다.

소란 틈에 부서져 버린 노점상 수레 사이로 몸을 숨긴 아이작은 빼꼼히 고개만 내민채 이 혼란을 발생시킨 원인을 구경했다. 그 혼돈의 중심에 두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며 격렬한 전투를 벌린다.

“뒤죽박죽이구만.”

솔직한 심정이었다. 종이나 유리를 대량공급할 정도의 과학력을 지닌 문명에서 화약을 여태껏 발견 못했다는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총기가 아닌 검을 사용한 치고박기라니?

“……저게 무협지에서만 나오던 검기라는 건가? 아니 오러라고 그래야 하나?”

포위망을 좁히는 무리와 벗어나려는 무리가 맞부닥치며 전투가 치열해 지자 그들이 들고있던 무기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검신보다 길게 뿜어져 나온 빛의 검에 단단한 돌바닥이 서걱서걱 잘려나간다.

“파이어볼!”

“어림없다!”

아이 머리통 만한 불덩이사 사방으로 날아다니고 번쩍이는 번개가 내려꽂힌다. 갑작스런 광풍이 몰아닥치고 땅이 뒤집힌다.

“마법이군. 확실히…… 판타지 세상이야.”

손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기현상을 두 눈으로 목격하자 검과 마법의 세상임이 실감이 났다.

저항하던 자들은 도망칠 길을 찾지 못한채 우왕자왕 거리다 하나 둘 쓰러졌고 결국엔 얼굴에 칼자욱이 난 중년인 혼자 남았다. 지친듯 헐떡이는 중년인을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자들이 포위하고 출동한 경비대 마저 합류했다.

“투항하세요. 도망칠길은 없습니다.”

아이작이 봤던 은발머리의 미녀가 수장인지 한발 앞으로 나서며 투항 권고를 하자 칼자욱의 중년인이 분하다는듯 이를 갈며 여인을 노려 보았다.

“센트럴…… 이 빌어먹을 제국의 개.”

“위즐라프경. 그대는 일급기사의 타이틀도 딴 제국의 엘리트이면서 어째서 프리덤에 가담한것입니까?”

“닥쳐라! 가증스런 위선자 놈들!”

여인을 향해 일갈을 터트린 중년인은 절망을 넘어 광기에 찬 표정으로 키득거렸다.

“목표엔 도달하지 못했지만 여기라도 상관없지. 자유의지는 영원하다! 크하하 제국의 개들아 같이 가자!”

외침과 동시에 중년인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고 그 모습에 여인의 안색이 창백해 지며 다급히 외쳤다.

“미친! 이런곳에서 자폭을 하다니! 모두 피해라!”

‘어라? 위험한건가?’

포위하고 있던 자들이 혼비백산 하며 뒤로 물러섰고. 군중을 통제하고 있던 병력들 마저 흩어지자 그 틈에 아이작의 부모가 아이작을 찾아 뛰어들었다.

“아이작! 어디있니 아이작!”

“음?”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당장이라도 폭팔할듯한 상황에 겂도 없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부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 이런곳에 아이가!”

당황한 음성에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중년인에게서 거리를 벌리던 여인과 아이작의 눈이 마주쳤다. 여인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고 순간 망설이는듯 하다가 몸을 돌려 아이작을 향해 방향을 바꿀때 아이작의 부모가 먼저 도착해 아이작을 감싸 앉았다.

“아아! 늦었어!”

안타까운듯한 여인의 음성이 끝나자 마자 중년인의 몸이 폭팔하며 새하얀 섬광이 커다란 폭음과 함께 아이작을 향해 덮쳐왔다.

콰과광! 천지가 뒤흔들리는 폭음에 건물의 벽이 쩌저적 금이 가고 폭팔의 여파로 후폭풍과 휩쓸린 잔해가 총탄처럼 날아들었다. 충격파에 의해 아이작과 아이작의 부모는 한덩어리가 되어 건물 벽을 향해 내동댕이 쳐졌다.

‘……아직은 살아 있는건가?’

강렬한 폭팔에 한순간 정신을 잃었던 아이작은 정신이 들자마자 일단 몸상태부터 점검했다. 고통은 없지만 충격의 여파로 느끼지 못하는것일수도 있었다.

‘손가락, 발가락, 흠 일단은 전부 감각이 느껴지는군. 그런데 몸이 무겁구만. 뭐가 짖누르고 있는거지? 눈을 못뜨겠네. 건물 잔해인가? 그런데 따뜻하군. 축축하기도 하……’

자신의 몸을 누르고 있는게 뭔지는 금새 깨달았다. 막 뿜어져 나온 인간의 더운 피. 그 피가 나올곳은 단 한곳 뿐이었다. 이를 악물고 몸을 들썩거리자 약간의 틈이 생겼고 아이작은 끙끙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한 손으로 눈가를 훔치자 끈적끈적한 덩어리가 묻어 나왔다. 간신히 눈을 뜨고 시야를 확보할수 있을 정도가 되자 아이작의 눈에 들어온건 폭팔의 여파로 좁은 골목이 한순간에 작은 광장으로 변해버린 모습과 곳곳에서 울려퍼지는 비명소리와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 그리고 피냄새였다.

툭.

몸을 움직이자 아이작의 허벅지에 놓여있던 뭔가가 땅으로 떨어졌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건물 잔해에 하반신이 깔린 어머니, 폭팔의 기세를 맨몸으로 막아섰는지 걸레처럼 너덜너널 하게 변한 등짝에 팔뚝만한 나무 쪼가리가 뒤통수에 박혀 희멀건 뇌수가 흘러내리고 있는 아버지. 두 사람다 아이작 만은 살리려 했는지 죽어서도 아이작의 몸을 꽉 붙들고 있었다.

‘……아아 죽었군.’

아이작은 자신의 몸 위에 올려져 있는 부모님의 팔을 치우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익숙한 피내음이 물씬 풍긴다. 화재라도 난듯 매케한 연기가 코를 찔렀다. 부모의 시체를 보고도 아무런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거 곤란한데? 앞으로가 문제군.’

어느 세상이나 어린 나이에 보호자가 없다는 리스크는 크다. 특히 아동복지에 관해 그리 큰 기대를 할수 없어 보이는 이 세상에서 고아가 됐다는것은 앞으로의 생활이 험난해 지리란걸 쉽게 예상할수 있었다.

‘큭! 역시 난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모양이야.’

부모의 시신을 눈앞에 두고도 무심한 자신의 모습에 속으로 피식 웃을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 달려오던 여기사가 보였다.

폭팔의 여파를 피하지 못했는지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얼굴의 반을 뒤덮고 왼쪽 팔이 너덜거렸다. 여기사는 연민어린 표정으로 자신과 부모의 시신을 바라보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아이작을 껴안았다.

“미안하구나…… 내가…… 내가 너무 늦었어……”





흔히들 말하는 불행한 사고였다. 신분제를 거부하고 만민이 평등하다는 정치사상에 입각한 국민에 의한 정치체제를 추종하는 프리덤이라는 조직이 자신들의 의견표명을 위해 제국 행정청에 폭탄 테러를 가하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지만

쌀나라의 NSA와CIA, FBI등, 유명한 정보기관을 몽땅 합쳐놓은듯한 역할을 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는 정보기관인 센트럴이 사전에 그 계획을 입수해 일망타진 하려는 찰나 들켰음을 눈치챈 프리덤 테러조직과 시장 한복판에서 격돌.

마지막에 프리덤의 주요 간부가 투항하길 거부한채 지니고 있던 마력탄을 가지고 폭사.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발표했다가 민간인인 아이작의 부모가 죽었단 사실이 언론에 들통나 버렸다.

그 뒤론 정신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이웃들의 도움으로 부모의 장례식을 치르기도 전에 신문사의 기자라는 양반들이 몰려들었다. 비극의 주인공, 안타까운 희생자,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며 자식만큼은 실린 가슴아픈 미담의 주인공등등 온갖 미사여구를 다 사용해 연일 신문의 일면을 장식하면서 정작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간신히 부모의 시신을 땅에 묻고 한숨 돌릴때 센트럴은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작에게 유감이라는 말 한마디로 끝내려 했으나 기다렸다는 듯 쪼아대는 여론에 입장이 난처해졌고 센트럴을 견제하는 제국의 다른 권력조직들간의 암투와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비롯한 권력싸움과 여론의 공격에 견디지 못한 센트럴이 결국 항복했는지 결국 보여주기식 전시행정의 극치를 선보이며 열살에 불과한 아이작에게 보상금으로 이십만 기가라는 거금을 떡 하니 지급한다고 팔표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계급주의 사회의 최 고위층 권력기관이 여론의 압박을 받는 모습에 어처구니 없는것도 잠시뿐. 부럽다는 표정으로 이십만 기가가 입금된 제국은행 계좌를 건네주던 센트럴 요원을 바라보며 아이작은 이것들이 미쳤나 싶었다.

제국의 화폐체계는 현대문명을 경험한 아이작도 불편함을 못 느낄정도로 발달해서 동전인 비트와 지폐인 메가, 기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충 한국돈과 비교해 보면 1비트는 백원 1메가는 천원, 1기가는 만원에 해당했다.

즉 이십만 기가면 이십억원정도의 거금이란 소리였다. 그걸 어린아이 손에 쥐어준다? 아니다 다를까 당장에 이웃사촌과 한방울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친척이라는 사람들이 몰려와 후견인을 자처했다.

거기나 여기나 사람들이 돈에 미치는건 똑같구나 하는 생각에 아이작이 혀를 찰 때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한다는 여론의 비아냥에 열이 받았는지 센트럴은 아이작의 의사 따위는 단 한마디도 묻지 않은채 정식 명칭 제국 황립 중앙 기사학교 일명 컬리지에 입학시켜 버렸다.

다들 부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조용하니 편하게 인생을 보내고 싶던 아이작에겐 미치고 팔짝뛸 일이었다. 컬리지는 귀족들도 엄격한 시험을 거쳐 합격해야지만 입학할 수 있는 최고의 엘리트 양성소였다.

이 세상의 인간이 성공하거나 권력을 얻기위해 거쳐야 하는 첫 번째 관문이 바로 기사학교의 졸업이었다. 대륙에 산재한 무수한 기사학교의 정점에 있는게 바로 컬리지 였다.

15년이란 엄청나게 긴 교육기간을 가지며 한학기 등록금만 1만기가. 일년이 두학기로 이루어져 있으니 매년 2만기가란 거금을 15년동안 내야하는 무지막지한 곳으로 평균 연수입이 천이백기가 정도인 일반 평민들로선 꿈도 꾸지못할 교육기관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컬리지에 못 들어가서 안달인 이유는 일단 컬리지 출신 기사라는 명함만 얻으면 그 뒤의 인생은 탄탄대로라 할수있었다.

게다가 컬리지만의 특전이자 수많은 기사 지망생들이 다른 기사학교를 제쳐두고 컬리지를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수한 강사진이나 최고급 시설, 막강한 인맥도 아닌 황립이란 칭호를 단 이상. 졸업만 하면 철밥통이 보장된다는데에 있었다.

반란에 준하는 죄만 짓지않는다면 컬리지 출신은 부정부패나 비리를 저지르더라도 한직에 밀려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짤리지는 않는 면죄부를 얻은거나 다름이 없었다. 다만 그만두는건 용납되지 않는다.

한번 기사는 영원한 기사. 죽을때까지 제국에 봉사해야 했고 아이작이 미치고 펄쩍뛰는 이유이기도 했다. 철밥통인건 좋은데 그 철밥통에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았다. 열살 꼬맹이가 싫다고 하는 소리를 제국의 실세인 센트럴이 귀담아 들을리도 없었다.


황립중앙기사학교.


웅장하고 위압적인 정문 위에 걸린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나타내는 문패를 바라보며 아이작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사람팔자는 뜻대로 되지 않는다더니 딱 그꼴이었다.

“아이작 론다트군?”

아이작이 정문에서 망연자실하게 서 있을때 문을 경비하던 경비병들이 일제히 예를 올리는걸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받아주면서 초로의 한 귀부인이 아이작을 향해 다가와 따뜻한 목소리로 아이작을 향해 물었다.

아이작은 멍하니 귀부인을 바라보다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귀족으로 보이는 귀부인에게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지금 아이작은 부모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정신적 충격에 헤어나오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다.

대번 아이작의 태도에 경비병들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귀부인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아이작을 향해 말했다.

“고생 많았구나. 어서오렴. 난 이 학교의 학교장인 학교장인 앨리샤라고 한단다.”

“……”

아이작은 내심 황당한 마음을 숨기며 앨리샤를 향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 제국에서 가장 명망높은 교육기관의 수장이란다. 명색이 기사학교란 이름을 내걸고 있으니 당연히 은퇴한 무장이 학교장을 맡고 있을줄 알았는데 평생 피튀기는 전투라곤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을거 같은 귀부인이 학교장이라니? 아이작은 정보가 부족함을 절실히 느꼈다.

“너무 그렇게 긴장할필요 없단다. 맘 놓으렴.”

앨리샤는 안쓰러운 눈길로 아이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다독였다. 수도 가벨린에서 벌어진 근 십여년만의 테러와 전투행위는 당연히 전 제국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불의의 희생자인 아이작에 대한 관심도 언론을 통해 집중적으로 조명되어 아이작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센트럴은 뜻하지 않은 국민의 희생에 이렇게 보답한다는걸 보여주기 위해 아이작을 황립중앙기사학교에 집어넣었다.

“냉정하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사실 네가 컬리지에 입학하는데는 학교 내에서도 많은 반대가 있었단다. 하지만 크리스씨가 강력하게 나서서 어쩔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단다.”

크리스 엘 펜들펀. 센트럴의 일급 기사이자 펜들턴 공작가의 가주 다크론공작의 부인. 그리고 시장에서 봤던 그 여기사였다. 유감이라는 말로 입 닦으려던 센트럴의 입장에 가장 강력히 반발하며 공작가의 인맥과 세력을 총 동원해 압력을 넣어 어떻게든 자신을 도와주려고 한 그 여기사의 설레발이 결국은 아이작은 컬리지 입학이라는 결과를 만들었다.

‘아아…… 백일휴가 복귀하는 이등병보다 더 가기가 싫다……’

아이작은 앨리샤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열살 꼬맹이가 가기 싫다고 하는 소리를 제국의 실세인 센트럴이 귀담아 들을리 없다. 그저 통보만 하고 할 일 끝났다는듯 사라져 버리는 센트럴 요원의 뒤통수를 노려보는게 아이작이 할수있는 최선의 반항이었다. 그나마 황립중앙기사학교에 입학한다는 소리에 컬리지 출신의 맘 좋은 행정관이 아이작의 신변정리를 도와줘서 간신히 황립중앙기사학교에 도착할수있었다.

‘그래…… 어차피 이 동네를 알기 위해선 학교를 다녀야 하니까. 잘된일이라고 생각하자…… 제국 최고의 교육기관이니까 배울게 많겠지…… 아마도……’

앨리샤를 와 마주쳐 지나가던 학생과 교수들이 앨리샤를 향해 공손히 인사하며 곁눈질로 아이작을 훔쳐보았다.

하나같이 귀하게 자란 티가 역력한 놈들의 호기심 섞인 시선에 아이작은 그려려니 하며 넘겼다. 이미 동물원의 구경꺼리가 된지는 오래였다. 이전의 세상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언론의 무서움을 이쪽 동네에서 절실히 겪고 있었다.

이놈들과 푸닥거릴껄 생각하니 벌써부터 한숨이 터져 나왔다. 몸은 열 살 어린아이의 모습이었지만 나이는 이미 성인, 그것도 발전된 현대문명을 살아오던 성인이었으니 모든게 눈에 차지 않는건 당연했다. 거기다 이놈의 신분제가 유지되는 세상에서 자신처럼 특채에 운좋게 그들의 공간에 끼어든 돌맹이는 발에 채일 수밖에 없다는건 만고불변의 진리다.

그저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버린 책상머리에서 펜대나 굴리는 놈들을 족치고 싶은 생각 뿐이였다. 여기나 저기나 하여간 관료들이 문제였다.

“저런 아이가 어떻게 들어온거지?”

“그러게 말이야. 혹시 장학생인가?”

“옷차림을 보니 그냥 평민같은데? 아무리 장학생이라도 일반 평민이 등록금을 감당하기는 무리아냐?”

“아! 혹시 얼마전 소문이 돌았던 그 행운의 아이가 저 애아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수근거림에 아이작은 고개를 숙였다. 고래싸움에 피본것도 모잘라 천애 고아가 되었고 벌써 인생이 결정되어 버렸는데 행운이란다. 제길…… 담배가 피고 싶어지는 아이작이었다.

“앨리샤! 갑자기 회의도중에 나가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다들 기다리다 지쳐서 일단 회의는 연기시켰어.”

“아! 부학장님. 죄송합니다. 신입생이 도착해서요.”

앨리샤의 앞을 가로막으며 투덜거리던 노인은 앨리샤의 말에 그제서야 앨리샤의 뒤에 서 있는 아이작을 발견했다.

“음? 이 아이는?”

“이번에 신입생으로 들어온 아이작이라고 한답니다. 인사드리렴 아이작. 부학장님이신 코듀로이 공작님이시란다.”

“……”

아이작이 말없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코듀로이는 뚱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모았다.

“이 꼬맹이가 이번에 센트럴이 밀어 넣은 불쌍한 놈인가?”

“……불쌍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것 같습니다. 오히려 행운아라 할수 있지요. 평민으로선 꿈도 꿀수없는 본 학교에 들어왔으니 말입니다.”

코듀로이의 뒤에 서 있던 한 중년남자가 불편한 표정으로 코듀로이의 말을 정정하자 코듀로이는 코방귀를 뀌며 들으라는듯이 외쳤다.

“행운은 개뿔! 딱 봐도 앞날이 암울하다는걸 알겠구만.”

‘공감합니다……’

아이작이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때 코듀로이 공작은 혀를 차며 아이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졸업만 하면 먹고살길은 내가 책임지고 마련해줄테니까 제발 자살하거나 도망치지만 마라.”

코듀로이 공작의 말에 앨리샤와 중년남자는 눈살일 찌푸리면서도 반박을 하지 못한채 우려섞인 시선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기사학교에 입교하는 학생은 두 종류가 있는데 아이작처럼 초급반부터 시작하는 학생들과 중급반에 편입해 오는 학생들로 어린 나이에 학교에 들어와 기초부터 교육받는 아이들은 대부분이 부유한 집안의 자식들이나 신흥귀족의 자제들이었다. 어린나이부터 단체생활을 하니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망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이 간간히 발생했다.

기사학교의 교육체계는 초급반 4년 중급반 4년 고급반 6년 졸업반 1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초급반에선 그야말로 모든 기초적인 부분을 가르치며 체력단련과 기본검술을 포함한 마나를 수련하는 방법등을 가르쳤다.

그래서 기사학교 초급반은 아이작처럼 운좋게 들어온 케이스나 돈많은 이들이 들여보낸 자식들이 대부분이었다. 전통있는 귀족가문은 가문 고유의 수련법이 있기 때문에 집안에서 수련을 시킨뒤 중급반에 바로 입학시켰다.

그리고 억! 소리나는 살인적인 등록금을 자랑하는 기사학교였지만 15년이란 교육기간을 다 채우는 자는 없었다. 월반제도가 있어 본인의 노력여하에 따라 쭉쭉 월반이 가능했다.

후배가 선배되는것은 순식간이다. 그리고 기사학교의 학생들 대부분이 초급반 생활을 제외하고 중급반으로 올라선뒤 짧게는 5년, 길게는 7,8년 이내에 졸업하는게 대부분이었다.

“여기가 앞으로 초급반 생활동안 지내게 될 기숙사란다. 일인일실이 기본이니까 불편한 상황은 없을거란다.”

옛 저택을 개조해 만든듯한 저택은 고풍스런 분위기가 풍겼다. ㄷ자 형태의 구조물로 건물 중앙엔 작은 분수가 포함된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고 집벽을 타고 올라간 담쟁이 덩굴이 오랜 시간을 알려주듯 저택외벽 전체를 점령하고 있는 인터넷 사진으로반 봐 왔던 서양의 전통있는 학교 이미지 그대로였다.

“앞으로 아이작군의 동료가 될 아이들이 있으니까 되도록 잘 지네기 바래요. 아셨죠?”

“……예. 알겠습니다.”

학교의 교육제도중 하나인 월반제도로 인해 5년이상의 년차가 아니면 선후배의 관계는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먼저 들어온 학생들이 선배라기 보단 그냥 동료에 가까웠다.

앨리샤는 아이작을 허름한 방으로 안내한뒤 거듭 주의를 강조하며 바쁜지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나마 기숙사가 1인 1실제로 운영되었다. 아이작의 방은 3층의 평범한 방으로 침대와 책상, 사물함등 정말 기본적인 물품만 비치되어 있었다. 삐꺼덕! 창문을 열자 아이작은 그나마 답답한 마음이 좀 풀어지는듯 했다.

“일단 지옥은 아닌거 같은데……”

아이작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려다 보았다. 대학 캠퍼스와 같은 분위기의 학교에 머리를 긁적였다. 영혼의 존재조차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는 세상에서 살던 준영이었다. 착하게 살면 천국, 막 살면 지옥이란 공식은 준영이 알고있던 모든 종교의 기본적인 교리였다.

일단 아이작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벌어진 사태지만 돌이킬수는 없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잘 적응하는건 군인의 주특기다. 비록 어려진 몸이지만 준영은 군인이었다. 그것도 오랜 전쟁으로 황폐해진 정신을 가진……

“일단은 정보가 필요해…… 단편적인 지식이 아닌 체계적인 정보가……”





아이작이 황립중앙기사학교에 온지도 삼년이 지났다. 초급반의 대부분이 어린나이에 입학했다는 사실을 고려해 기초체력단련과 대한민국의 초등학교와 비슷한 기초교육으로 문자의 습득과 산법, 기초상식등을 배우며 첫해의 대부분을 보냈고 2년차, 3년차도 마찬가지였다.

이 동네도 교육열이 극성인건 마찬가지인지라 초급반에도 적용되는 월반제도를 이용해 같은 출발선상에서 시작했으나 아이작이 기어간다면 벌써부터 날아다니는 아이들이 속출했다. 아니 오히려 그게 정상이었다.

사실 아이들 틈에서 아이작은 귀찮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아이들은 자신들과는 격이 다른 아이작을 신기하다는듯이 바라만 볼뿐 굳이 건드리거나 아무런 뒷배도 없는 아이작과 친하게 지내려는 아이들은 없었다.

호기심에 접근 하거나 아이작을 희생양 삼아 놀려는 놈들이 몇몇 있었지만 제대로 건드리기도 전에 쑥쑥 월반하며 사라져버렸으니 아이작으로선 참 다행이었다.

아이작의 일과는 단조로워서 아침에 일어나 단체구보를 하고 아침식사를 한후 저녁무렵까지 수업표에 따라 수업을 듣고 잠시 자유시간을 가진뒤 취침에 드는 일상이었다.

수업이라고 듣는게 정말 꼬꼬마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이라 아이작으로선 미치고 환장할 정도로 지루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드러냈다간 피곤해지는건 아이작 자신뿐이라는걸 다년간의 사회경험으로 잘 알고있기에 숨기고 오히려 최하위권의 성적을 얻는게 더 힘들 지경이었다.

학기가 끝난 뒤 방학에는 기사학교의 모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학교에는 아이작 홀로 남았지만 그건 아이작도 바라는 바였다. 오갈데 없는 천애고아가 홀로 학교에 남겨져 있으니 학교를 관리하기 위해 고용된 관리인들은 아이작이 안쓰러웠는지 다들 동정섞인 시선으로 아이작을 바라보며 호의를 베풀었고 아이작은 방학때마다 고용인들과 친하게 지내며 인맥을 싾았다.

인맥이 최고인 세상에서 살다온 아이작이기에 인맥이 가져다 주는 힘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삼년이 지나가고 드디어 아이작이 관심을 가지고 들을만한 교육이 시작되었다. 동기라 할수있는 다른 학생들은 이미 방학기간동안 개인 가정교사나 유력인사들로부터 필요한 수업을 들었기에 역사나 수학같은 교양수업은 패스하고 주력이라 할수있는 마나수련과 검술수업등에 매진하며 빠르게 월반에 월반을 거듭했다.

아이작은 그런 배경이 없기에 꽤 유명하다는 역사학 교수의 기초역사 강의를 공부에 관심이 없어 노느라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학생들과 같이 수업에 참가했다.

“300년전인 제국력 682년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연도라 할수있다. 역사학도라면 누구나 열광하며 논문한번 안써본자가 없을정도로 수많은 사건이 단 1년새에 일어난 이 해는 혹자는 혼돈의 시대 혹은 영광의 시대등 온갖 수식어를 가져다 붙이는 역사의 분기점이라고도 할수 있는데 이때 있었던 사건중 하나인 귀족연합의 권리장전 선언에 당시 황제폐하셨던 가이나스 폰로드 선황제폐하께선 급변하는 정세와 크나큰 혈란을 방지하기 위해 결국 귀족연합의 권리장전을 받아들였는데 권리장전의 내용을 살펴보자면……”

‘……이 동네는 정말이지 알면 알수록 모르겠군. 꽤 재미있는 동네긴 한데…… 뭔가 이상하단 말이야……’

아이작은 교과서로 지급된 역사책을 훝어보며 중얼거렸다. 첫 수업땐 나름 기대하며 제국의 건국부터 시작된 역사학 강의를 들었으나 들으면 들을수록 이 동네가 대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이곳 로라시아 대륙에 나라라고는 단 하나의 제국만이 존재했는데 판타지의 정석대로 마법사와 기사, 신관이 존재하고 엘프와 드워프등의 이종족들과 마물들은 물론 드래곤이라는 먼치킨급도 떡하니 버티고 있다.

제국은 언터처블. 절대 건드릴수 없는 황가가 제1계급이었고 신전의 인물들이나 귀족들, 부유한 상인들 같은 형편이 좋은 상민들이 제2계급. 그리고 절대다수를 이루는 평민들이 제3계급이었다.

아이작을 혼란스럽게 한건 철저한 신분제가 아닌 누구라도 노력하면 상위 계급으로 올라갈수 있다는 점이었다. 노예제가 없는 이 세상에서 시민들은 공을 세우면 귀족이 될 수 있고 귀족도 죄를 지으면 시민으로 지위가 내려간다.

다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건 비일비재해도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건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려웠지만 가능성과 실 사례가 있다는건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점이었다.

거기다 지내오면서 느낀 거지만 이 세계는 중세수준의 문명처럼 보이면서도 은근히 생활편의 위주로 많은 발전이 이뤄진 동네라는 거였다. 역사 교과서를 살펴보고 느낀거지만 문명의 생성과 발전의 사이클로 봤을땐 도저히 지금 수준에선 나올수가 없는 물건인데도 떡하니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며 몇 번이나 경악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종이였다.

종이라는게 대량보급이 이뤄지려면 제지술의 발전이 필수인데 중세문명에선 그 제지술이 초기형태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보급되는 종이의 질 자체가 이전 세상에서 흔하게 접하던 종이와 별다른 차이가 없을 정도의 품질을 자랑했다.

그 종이의 보급이 엘프들의 주 수입이자 독점사업이고 책과 필기구는 물론 신문마저 발행되 신분제 사회에서 언론이 형성될 정도로 흔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봤을땐 정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거기다 도시의 수준 또한 상하수도정비가 완벽하고 수압차와 펌프를 이용한 수도설비가 평민가정까지 보급되어있는 모습에 지금 자신이 있는곳이 중세인지 현대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혔다. 하긴 지금 자신이 사는 시대가 현대니까 현대문명이라 불러야 겠지만 말이다.

‘이전 세상과는 발전의 방향이 틀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문명또한 전쟁을 통과해야지만 비약적으로 발달해왔다. 그런데 신기한게 생활 편의면에서 감탄할 정도로 발달했으면서 전투병과와 기술은 중세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거였다. 간단하게 보병과 기사, 궁수등이 있고 대량살상이 가능한 결전병기급인 마법사와 게임에 등장하는 힐러급인 성법사까지 존재하는 문명은 근대급이면서 군사수준만은 중세를 벗어나지 못한 신기한 세상이었다.

특히 지금 교수가 강의하고 있는 역사의 분기점이라 하만한 권리장전에선 준영은 자신말고 누군가 황가의 인물로 그 시대에 나타난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권리장전은 귀족들의 영지에 대한 독립적 지배권을 보장한다는게 주 내용으로 이로 인해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지에선 왕과도 같은 지위를 얻었다. 독립적 지배권포함된 주 내용은 그간 제한되었던 영지병의 규모의 자율화와 세수의 자율화, 영지내에서 일어나는 범법행위에 대한 독자적 법집행권한과 중앙의 관리를 받을필요가 없는 행정운영권한과 중앙에 대한 세금납부의 전면중지등이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제국이 유지되고 있다고? 300년이 지났는데?’

권리장전의 내용을 강의받으며 아이작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권리장전의 조항이 실제로 이뤄졌다면 귀족은 자신의 영지에선 왕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라 정말 왕이었다. 그건 춘추전국시대나 마찬가지로 작은 군소왕국이 영주의 수만큼 있는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제국이 아직까지 멀쩡하게 유지되고 있다니 믿을수가 없었다.

“……황가는 귀족연합의 권리장전을 수용하며 한가지 조건을 내걸었는데 화폐의 통일과 제국에서 통용되는 모든 화폐의 관리와 발행 권한을 지닌 조폐청을 황가에서 관리한다는 조건이었고 귀족연합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천잰데?’

역사교수의 말에 아이작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그 당시 황제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감탄을 금치못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돈이다. 그건 인간의 문명에서 빠질수 없는 참진리. 황가는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도 금력을 손에 쥐었다. 제국이 여지껏 유지되고 있는 이유도 이해가 갔다. 군대는 돈 잡아먹는 귀신. 황가가 돈줄을 꽉 잡고있는 이상 귀족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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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방드 지방은 그 누가 보더라도 촌구석이라고 단정지을수 있을 정도로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지리적으론 수도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으나 동쪽을 관통하는 이스트 웨이와 남쪽을 관통하는 사우스 웨이의 사이에 절묘하게 자리잡아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라 완벽하게 외부와 단절된 지역이었다.

군사적, 상업적 중요성도 없고 전체 인구수또한 천여명에 못미치는 이 지역은 당연히 부임하려는 영주가 없다보니 귀족의 영지가 아닌 제국황실의 직속령으로 매번 행정관을 파견해 왔다.

물론 이런 낙후된 지역의 행정관으로 오려는 자 또한 아무도 없기에 플로방드 지방은 좌천된 인물이나 오랜 공무생활을 끝으로 은퇴를 준비하는 이들이 잠시 거쳐가는 지역이었다.

그런 플로방드 지방이 변화한건 갓 기사학교를 졸업한 젊은 행정관이 부임하고 부터였다. 도대체 전도 유망하고 출세를 향해 달려가야할 기사가 어째서 이런 시골 촌구석의 행정관으로 온건지 지역 주민들은 의아해 했으나 이상하게 본인은 매우 만족한듯 했다.

“후…… 덥구만.”

크렌트는 규칙적인 말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채 쏟아져 내리는 빰을 연신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잔인한 태양을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슬슬 초여름에 들어가는 날씨임에도 사방이 산으로 가로막혀 바람한점 불지않는 플로방드 지방은 초열지옥을 방불케 하는 더위로 사람을 힘들게 했다. 더위에 대한 짜증은 곧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상부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젠장! 첫 임무라는게 통신소 하나 없는 촌구석 행정관한테 서류를 전달하는 연락관이라니 재수도 없군.”

구스타프는 자신의 제복 왼쪽 다슴 부근에 수놓아진 여덟 개의 별을 매만지며 투덜거렸다. 제국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이는 제국황립중앙기사학교 일명 컬리지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한 교육기관을 8년만에 졸업해 8성을 부여받고 자부심 가득한 구스타프로서는 자신에게 맡겨진 첫 임무가 고작 서류 전달이라는 거에 대해 이해할수 없었다.

다른곳도 아니고 컬리지 출신이다. 그것도 흔치않는 8성을 단. 컬리지 중에서도 상위급에 속하는 기사다. 그러니 하늘을 찌를듯한 자부심에 상처를 내를 심부름은 불만일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찌는듯한 더위가 짜증을 더 키웠다.

한참을 투덜거리며 허허벌판과도 같은 제대로 정비조차 되지않은 길을 따라 이동하다 보니 열댓개의 아담한 별장같은 집들이 모여있는 촌락이 눈에 들어왔다.

“……특이한 건축양식인데? 어디 풍이지?”

컬리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기 위해선 단순히 무력만 강해선 안된다. 상류층에 걸맞는 교양과 지식을 갖춰야 했는데 구스타프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하나 하나 개성이 강한 건물의 건축양식이 어디 스타일인지 알수가 없었다.

“저…… 말씀좀 묻겠습니다.”

울타리 하나 없는 마을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길을 따라 이동하던 구스타프는 보기엔 시원하지만 민망한 반바지와 반팔을 입은채 나무그늘에 누워 망중한을 즐기던 노인을 향해 말들걸었다. 난데없는 남자의 목소리에 노인은 슬며시 눈을 뜬채 구스타프를 바라보다 왼쪽가슴에 수놓여진 별을 보곤 눈을 반짝였다.

“물어보게나.”

“……저 행정관청이 어디입니까?”

컬리지 출신의 기사가 눈앞에 있는데도 벌떡 일어나기는 커녕 드러누운채 귀찮다는 음성으로 말하는 노인의 태도에 잠시 발끈하다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꾹 눌러참은후 물었다.

“행정관청? 그런게 있긴 있었나? 뭐 행정관 찾는거면 마을 중앙쪽으로 가보게.”

할말만 마친후 볼일 끝났다는듯 다시 눈을 감는 노인의 태도에 구스타프는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절래절래 저은후 마을 중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노인의 무례를 지적하고 싸워봐야 자신만 피곤할뿐이었다. 이런 촌구석 무지렁이다보니 컬리지 출신의 기사라곤 한번도 보지못했을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으니 구스타프는 관용을 베풀어 넘어가기로 했다.

마을 중앙으로 향하며 구스타프는 더위를 잊을 정도로 각자의 개성을 뽐내는 집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크기는 아담한 이층집 규모면서 한 채의 성처럼 성벽과 성곽, 망루는 물론 도개교까지 재현해 놓은 집에서부터 맷돌처럼 생겨 1층과 2층이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회전하는 집과 지붕이 밑에있고 바닥이 하늘을 쳐다보는 기이한 집까지 생전 처음보는 신기한 형식의 주택들이 구스타프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그렇게 천천히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마을의 광장에 도착했는데 구스타프는 그 곳에서 다시 할말을 잃었다.

‘……여긴 마을이 아니라 양로원이었나?’

보이는건 나이 지긋한 연세의 어르신들뿐이었다. 각자 음악을 연주하고 그 음악을 감상하고 그림을 그리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딱 양로원의 정경이었다.

“넌 뭐여?”

멍하니 구경하는 와중에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작달막한 체구의 노인이 뚱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저는……”

“아 됐고. 뼈마디 시린 노친네들 말발굽에 맞으면 골로 가니까 웬만하면 내려오자?”

“아 예. 죄송합니다.”

노인의 지적에 구스타프는 황급히 말에서 내려왔고 내리자 마자 기다렸다는듯 나타난 한 청년이 말 고삐를 뺐다시피 낚아채곤 말을 끌고 걸어갔다.

“어? 아!”

당황한 구스타프가 청년을 불러 세우려는데 노인이 말을 걸었다.

“신경쓸 필요 없고. 어디서 온 놈이여?”

계속되는 반말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자신은 공무를 수행하는 몸이었다. 민간인 그것도 노인과 드잡이질을 벌였다는게 알려지면 인사고과에 점수가 팍팍 깍겨나갈게 분명해 꾹꾹 눌러참으며 은근슬쩍 보라는듯 자신의 왼쪽 가슴에 새겨진 여덞개의 별을 매만지며 말했다.

“플로방드의 행정관에게 서류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행전관은 어디있습니까?”

구스타프의 말에 노인은 살짝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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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하고 위압적인 정문 위에 걸린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나타내는 문패를 바라보며 아이작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사람팔자는 뜻대로 되지 않는다더니 딱 그꼴이었다.

준영은 매캐한 연기와 넘실거리는 화염의 한 복판에서 정신을 차렸다. 자신을 보호하다 죽은듯한 두 중년남녀의 시신 곁에 멍하니 서 있다가 문득 저 시체들이 조금전 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던 부모라는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10살 아이작으로서의 기억과 준영의 기억이 혼재되기 시작하더니 곧 아이작의 의지를 밀어내고 준영의 정신이 아이작의 몸을 차지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유럽의 도시와도 같은 건축물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멍하기만 한 아이작의 정신을 일깨운건 아이러니 하게도 비릿한 피내음이었다. 전장에서 항상 맡아오던 죽음의 냄새가 준영의 본능을 강하게 두드렸고 준영 아니 아이작은 자신이 부대에서 심심풀이로 꽤 재미나게 읽었던 판타지 진입물의 당사자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흔히들 말하는 불행한 사고였다. 신분제를 거부하고 만민이 평등하다는 정치사상에 입각한 국민에 의한 정치체제를 추종하는 프리덤이라는 조직이 자신들의 의견표명을 위해 제국 행정청에 폭탄 테러를 가하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지만

쌀나라의 NSA와CIA, FBI등, 유명한 정보기관을 몽땅 합쳐놓은듯한 역할을 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는 정보기관인 센트럴이 사전에 그 계획을 입수해 일망타진 하려는 찰나 들켰음을 눈치챈 프리덤 테러조직과 시장 한복판에서 격돌.

마지막에 프리덤의 주요 간부가 투항하길 거부한채 지니고 있던 마력탄을 가지고 폭사.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발표했지만 민간인인 아이작의 부모가 죽었단 사실이 언론에 들통나 버렸다.

그 뒤론 정신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이웃들의 도움으로 부모의 장례식을 치르기도 전에 신문사의 기자라는 양반들이 몰려들었다. 아이작은 중세처럼 보이는 문명에 신문과 언론이라는 이질적인 모습에 경악했다.

비극의 주인공, 안타까운 희생자,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며 자식만큼은 실린 가슴아픈 미담의 주인공등등 온갖 미사여구를 다 사용해 연일 신문의 일면을 장식하면서 정작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간신히 부모의 시신을 땅에 묻고 한숨 돌릴때 센트럴은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작에게 유감이라는 말 한마디로 끝내려 했으나 기다렸다는 듯 쪼아대는 여론에 입장이 난처해졌고 센트럴을 견제하는 제국의 다른 권력조직들간의 암투와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비롯한 권력싸움과 여론의 공격에 견디지 못한 센트럴이 결국 항복했는지 결국 보여주기식 전시행정의 극치를 선보이며 열살에 불과한 아이작에게 보상금으로 이십만 기가라는 거금을 떡 하니 지급한다고 팔표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계급주의 사회의 최 고위층 권력기관이 여론의 압박을 받는 모습에 어처구니 없는것도 잠시뿐. 부럽다는 표정으로 이십만 기가가 입금된 제국은행 계좌를 건네주던 센트럴 요원을 바라보며 아이작은 이것들이 미쳤나 싶었다.

제국의 화폐체계는 현대문명을 경험한 아이작도 불편함을 못 느낄정도로 발달해서 동전인 비트와 지폐인 메가, 기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충 한국돈과 비교해 보면 1비트는 백원 1메가는 천원, 1기가는 만원에 해당했다.

즉 이십만 기가면 이십억원정도의 거금이란 소리였다. 그걸 어린아이 손에 쥐어준다? 아니다 다를까 당장에 이웃사촌과 한방울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친척이라는 사람들이 몰려와 후견인을 자처했다.

거기나 여기나 사람들이 돈에 미치는건 똑같구나 하는 생각에 아이작이 혀를 찰 때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한다는 여론의 비아냥에 열이 받았는지 센트럴은 아이작의 의사 따위는 단 한마디도 묻지 않은채 정식 명칭 제국 황립 중앙 기사학교 일명 컬리지에 입학시켜 버렸다.

다들 부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조용하니 편하게 인생을 보내고 싶던 아이작에겐 미치고 팔짝뛸 일이었다. 컬리지는 귀족들도 엄격한 시험을 거쳐 합격해야지만 입학할 수 있는 최고의 엘리트 양성소였다.

이 세상의 인간이 성공하거나 권력을 얻기위해 거쳐야 하는 첫 번째 관문이 바로 기사학교의 졸업이었고 대륙에 산재한 무수한 기사학교의 정점에 있는게 바로 컬리지 였다.

15년이란 엄청나게 긴 교육기간을 가지며 한학기 등록금만 1만기가. 일년이 두학기로 이루어져 있으니 매년 2만기가란 거금을 15년동안 내야하는 무지막지한 곳으로 평균 연수입이 천이백기가 정도인 일반 평민들로선 꿈도 꾸지못할 교육기관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컬리지에 못 들어가서 안달인 이유는 일단 컬리지 출신 기사라는 명함만 얻으면 그 뒤의 인생은 탄탄대로라 할수있었다.

게다가 컬리지만의 특전이자 수많은 기사 지망생들이 다른 기사학교를 제쳐두고 컬리지를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수한 강사진이나 최고급 시설, 막강한 인맥도 아닌 황립이란 칭호를 단 이상. 졸업만 하면 철밥통이 보장된다는데에 있었다.

반란에 준하는 죄만 짓지않는다면 컬리지 출신은 부정부패나 비리를 저지르더라도 한직에 밀려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짤리지는 않는 면죄부를 얻은거나 다름이 없었다. 다만 그만두는건 용납되지 않는다.

한번 기사는 영원한 기사. 죽을때까지 제국에 봉사해야 했고 아이작이 미치고 펄쩍뛰는 이유이기도 했다. 철밥통인건 좋은데 그 철밥통에 개인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았다. 열살 꼬맹이가 싫다고 하는 소리를 제국의 실세인 센트럴이 귀담아 들을리도 없었다.

“아이작 론다트군?”

아이작이 정문에서 망연자실하게 서 있을때 문을 경비하던 경비병들이 일제히 예를 올리는걸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받아주면서 초로의 한 귀부인이 아이작을 향해 다가와 따뜻한 목소리로 아이작을 향해 물었다.

아이작은 멍하니 귀부인을 바라보다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귀족으로 보이는 귀부인에게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지금 아이작은 부모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정신적 충격에 헤어나오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다.

대번 아이작의 태도에 경비병들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귀부인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아이작을 향해 말했다.

“고생 많았구나. 어서오렴. 난 이 학교의 학교장인 학교장인 앨리샤라고 한단다.”

“……”

아이작은 내심 황당한 마음을 숨기며 앨리샤를 향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 제국에서 가장 명망높은 교육기관의 수장이란다. 명색이 기사학교란 이름을 내걸고 있으니 당연히 은퇴한 무장이 학교장을 맡고 있을줄 알았는데 평생 피튀기는 전투라곤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을거 같은 귀부인이 학교장이라니? 아이작은 정보가 부족함을 절실히 느꼈다. 아이작의 기억을 가지고는 있지만 별로 활용할만한 정보는 없었다. 열 살 꼬맹이라면 놀기 바쁜 나이이니 당연했다.

“너무 그렇게 긴장할필요 없단다. 맘 놓으렴.”

앨리샤는 안쓰러운 눈길로 아이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다독였다. 수도 가벨린에서 벌어진 근 십여년만의 테러와 전투행위는 당연히 전 제국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불의의 희생자인 아이작에 대한 관심도 언론을 통해 집중적으로 조명되어 아이작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센트럴은 뜻하지 않은 국민의 희생에 이렇게 보답한다는걸 보여주기 위해 아이작을 황립중앙기사학교에 집어넣었다.

‘아아…… 백일휴가 복귀하는 이등병보다 더 가기가 싫다……’

아이작은 앨리샤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열살 꼬맹이가 가기 싫다고 하는 소리를 제국의 실세인 센트럴이 귀담아 들을리 없다. 그저 통보만 하고 할 일 끝났다는듯 사라져 버리는 센트럴 요원의 뒤통수를 노려보는게 아이작이 할수있는 최선의 반항이었다. 그나마 황립중앙기사학교에 입학한다는 소리에 컬리지 출신의 맘 좋은 행정관이 아이작의 신변정리를 도와줘서 간신히 황립중앙기사학교에 도착할수있었다.

‘그래…… 어차피 이 동네를 알기 위해선 정보가 필요하니까 잘된일이라고 생각하자…… 은밀히 정보를 모으는덴 학교가 최적의 수단이니까. 제국 최고의 교육기관이니 배울게 많겠지…… 아마도……’

앨리샤를 와 마주쳐 지나가던 학생과 교수들이 앨리샤를 향해 공손히 인사하며 곁눈질로 아이작을 훔쳐보았다.

하나같이 귀하게 자란 티가 역력한 놈들의 호기심 섞인 시선에 아이작은 그려려니 하며 넘겼다. 이미 동물원의 구경꺼리가 된지는 오래였다. 이전의 세상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언론의 무서움을 이쪽 동네에서 절실히 겪고 있었다.

이놈들과 푸닥거릴껄 생각하니 벌써부터 한숨이 터져 나왔다. 몸은 열 살 어린아이의 모습이었지만 나이는 이미 성인, 그것도 발전된 현대문명을 살아오던 성인이었으니 모든게 눈에 차지 않는건 당연했다. 거기다 이놈의 신분제가 유지되는 세상에서 자신처럼 특채에 운좋게 그들의 공간에 끼어든 돌맹이는 발에 채일 수밖에 없다는건 만고불변의 진리다.

그저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버린 책상머리에서 펜대나 굴리는 놈들을 족치고 싶은 생각 뿐이였다. 여기나 저기나 하여간 관료들이 문제였다.

“저런 아이가 어떻게 들어온거지?”

“그러게 말이야. 혹시 장학생인가?”

“옷차림을 보니 그냥 평민같은데? 아무리 장학생이라도 일반 평민이 등록금을 감당하기는 무리아냐?”

“아! 혹시 얼마전 소문이 돌았던 그 행운의 아이가 저 애아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수근거림에 아이작은 고개를 숙였다. 고래싸움에 피본것도 모잘라 천애 고아가 되었고 벌써 인생이 결정되어 버렸는데 행운이란다. 제길…… 담배가 피고 싶어지는 아이작이었다.

“앨리샤! 갑자기 회의도중에 나가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다들 기다리다 지쳐서 일단 회의는 연기시켰어.”

“아! 부학장님. 죄송합니다. 신입생이 도착해서요.”

앨리샤의 앞을 가로막으며 투덜거리던 노인은 앨리샤의 말에 그제서야 앨리샤의 뒤에 서 있는 아이작을 발견했다.

“음? 이 아이는?”

“이번에 신입생으로 들어온 아이작이라고 한답니다. 인사드리렴 아이작. 부학장님이신 코듀로이 공작님이시란다.”

“……”

아이작이 말없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코듀로이는 뚱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모았다.

“이 꼬맹이가 이번에 센트럴이 밀어 넣은 불쌍한 놈인가?”

“……불쌍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것 같습니다. 오히려 행운아라 할수 있지요. 평민으로선 꿈도 꿀수없는 본 학교에 들어왔으니 말입니다.”

코듀로이의 뒤에 서 있던 한 중년남자가 불편한 표정으로 코듀로이의 말을 정정하자 코듀로이는 코방귀를 뀌며 들으라는듯이 외쳤다.

“행운은 개뿔! 딱 봐도 앞날이 암울하다는걸 알겠구만.”

‘공감합니다……’

아이작이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때 코듀로이 공작은 혀를 차며 아이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졸업만 하면 먹고살길은 내가 책임지고 마련해줄테니까 제발 자살하거나 도망치지만 마라.”

코듀로이 공작의 말에 앨리샤와 중년남자는 눈살일 찌푸리면서도 반박을 하지 못한채 우려섞인 시선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기사학교에 입교하는 학생은 두 종류가 있는데 아이작처럼 초급반부터 시작하는 학생들과 중급반에 편입해 오는 학생들로 어린 나이에 학교에 들어와 기초부터 교육받는 아이들은 대부분이 부유한 집안의 자식들이나 신흥귀족의 자제들이었다. 어린나이부터 단체생활을 하니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망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이 간간히 발생했다.

컬리지의 교육체계는 초급반 4년 중급반 4년 고급반 6년 졸업반 1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초급반에선 그야말로 모든 기초적인 부분을 가르치며 체력단련과 기본검술을 포함한 마나를 수련하는 방법등을 가르쳤다.

그래서 기사학교 초급반은 아이작처럼 운좋게 들어온 케이스나 돈많은 이들이 들여보낸 자식들이 대부분이었다. 전통있는 귀족가문은 가문 고유의 수련법이 있기 때문에 집안에서 수련을 시킨뒤 중급반에 바로 입학시켰다.

그리고 억! 소리나는 살인적인 등록금을 자랑하는 기사학교였지만 15년이란 교육기간을 다 채우는 자는 없었다. 월반제도가 있어 본인의 노력여하에 따라 쭉쭉 월반이 가능했다.

후배가 선배되는것은 순식간이다. 그리고 기사학교의 학생들 대부분이 초급반 생활을 제외하고 중급반으로 올라선뒤 짧게는 5년, 길게는 7,8년 이내에 졸업하는게 대부분이었다.

“그럼 저는 아이작군을 기숙사로 안내하고 갈께요.”

코듀로이는 엘리샤의 손을 잡고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아이작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특이한 놈이군.”

“예? 특이하다니요?”

코듀로이의 중얼거림을 들은 중년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코듀로이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중년남자를 노려보았다.

“눈치 못챈거냐?”

“……”

어리둥절한 중년남자의 모습에 혀를 찬 코듀로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꼬맹이 눈빛 말이다.”

“예? 눈빛이 무슨……”

“한심한놈…… 그 꼬맹이 눈깔이 죽어 있는걸 눈치 못챈거냐?”

“……그야 눈앞에서 부모가 죽는 충격을 받았으니 당연한거 아닙니까?”

“끄응…… 이런 놈을 비서라고 데리고 있으니 원…… 그놈 눈깔은…… 아무것도 아니다.”

중년남자에게 한바탕 소리치려던 코듀로이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되는 소리였다. 코듀로이는 중년남자의 말 마따나 정신적 충격에 의한거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그 소년과 비슷한 눈빛을 가진자들은 몇 번 본적이 있었다.

‘잘못본걸꺼야…… 어떻게 그 꼬맹이의 눈이 너무 많은 죽음을 봐와 무덤덤해진 인간의 눈을 하고 있겠어. 말이 안되는 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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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앞으로 초급반 생활동안 지내게 될 기숙사란다. 일인일실이 기본이니까 불편한 상황은 없을거란다.”

옛 저택을 개조해 만든듯한 저택은 고풍스런 분위기가 풍겼다. ㄷ자 형태의 구조물로 건물 중앙엔 작은 분수가 포함된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고 집벽을 타고 올라간 담쟁이 덩굴이 오랜 시간을 알려주듯 저택외벽 전체를 점령하고 있는 인터넷 사진으로반 봐 왔던 서양의 전통있는 학교 이미지 그대로였다.

“앞으로 아이작군의 동료가 될 아이들이 있으니까 되도록 잘 지네기 바래요. 아셨죠?”

“……예. 알겠습니다.”

학교의 교육제도중 하나인 월반제도로 선후배의 관계는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먼저 들어온 학생들이 선배라기 보단 그냥 동료에 가까웠다.

기숙사 정문 앞에는 턱수염이 지저분하게 난 중년인이 의자에 몸을 파묻곤 신문을 읽으며 연신 하품을 하다가 엘리샤와 아이작을 발견했는지 보던 신문을 접어 툭 던지곤 다가왔다.

‘뭐지? 저 사람은?……“

아이작은 중년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자신과 동류라는걸 직감적으로 알수 있었다. 무심하면서도 죽어있는눈. 단순히 한두사람을 죽인 눈빛이 아니었다.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자의 눈이었다.

“오셨습니까.”

“예. 인사하렴 아이작. 이 기숙사를 관리하는 케이시경이란다.”

“안녕하십니까.”

아이작이 꾸벅 고개숙여 인사하자 흘깃 곁눈질로 아이작을 훝어본 케이시는 엘리샤를 향해 말했다.

“이 꼬맹이가 그 꼬맹이입니까?”

“예.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뭐 제가 신경쓸게 있기나 하겠습니까? 지가 알아서 하는거죠.”

케이시의 무덤덤한 어조에 엘리샤는 약간 곤란한 표정으로 케이시를 바라보다 아이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케이시경을 따라가세요. 머물곳이랑 앞으로의 일정같은걸 자르쳐 줄거에요. 힘든일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고요. 알겠죠?”

“예. 감사합니다.

꼬맹이인데다 평민신분에 불과한 아이작에게 친절하고 정중히 대하는 엘리샤는 특권층의 귀족이라고 보기 힘들정도였다. 걱정이 되는지 연신 뒤를 돌아보며 아이작을 향해 미소지어주던 엘리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케이시는 아이작의 뒤통수를 톡 치면서 말했다.

“가자 꼬맹아. 앞으로 니가 살곳을 가르쳐 주마.”





아이작의 방은 3층의 평범한 방으로 침대와 책상, 사물함등 정말 기본적인 물품만 비치되어 있었고 한쪽공간엔 세면을 위한 세면대와 화장실이 만들어져 있었다.

‘……고시원이냐?’

공간만 더 클뿐이지 구조는 군대가기전 잠시 살았던 고시원과 똑같았다.

“기숙사는 기본적으로 1인 1실제다. 한 공간에 몰아넣고 우정을 키우게 하자고 헛소리 하는놈들도 있지만 그런건 최소 1년정도는 같이 생활할때나 가능한 얘기고 이곳은 그저 꼬맹이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장소에 불과하지.”

거기까지 얘기한 케이시는 빤히 아이작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어쩌면 네놈은 나이 제한이 찰때까지 지낼지도 모르겠군.”

“나이제한요?”

“여기는 어디까지나 꼬맹이들을 교육하는 초급 교육시설이니까. 중급반이나 고급반이랑은 따로 떨어져 있지. 초급반에서 지내는건 14세까지다. 15세부터는 중급반에서 교육을 받는다. 뭐 나이제한에 걸릴때까지 초급반에 남아있던 놈은 컬리지 역사상 단 한놈도 없었지만 말이야. 아직까지는……”

아이작을 바라보며 기분나쁜 시선으로 쿡쿡거린 케이시는 침대위에 놓여진 두벌의 옷과 여분의 양말과 속옷, 한 켤레의 신발, 그리고 몇권의 책이 늘어져 있는 침대 위를 가르키며 말했다.

“컬리지는 모든 것이 보급제다. 당연히 개인물품은 금지지. 소중하게 다루라고 보급나오기 전에 잃어버리면 꽤 곤란한 처지에 빠질테니까. 그리고 앞으로의 교육일정 같은건 조금있다 기숙사장을 시켜 가르쳐 주라고 할테니 일단 지금은 쉬고 있도록.”

제 할말만 하고 케이시가 나가버리자 아이작은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삐꺼덕! 방안의 텁텁한 공기대신 바깥의 상쾌한 바람을 맞으니 그나마 답답한 마음이 좀 풀어지는듯 했다.

“일단 지옥은 아닌거 같은데……”

아이작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려다 보았다. 대학 캠퍼스와 같은 분위기의 학교에 머리를 긁적였다. 영혼의 존재조차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는 세상에서 살던 준영이었다. 착하게 살면 천국, 막 살면 지옥이란 공식은 준영이 알고있던 모든 종교의 기본적인 교리였다.

일단 아이작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벌어진 사태지만 돌이킬수는 없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잘 적응하는건 군인의 주특기다. 비록 어려진 몸이지만 준영은 군인이었다. 그것도 오랜 전쟁으로 황폐해진 정신을 가진……

“일단은 정보가 필요해…… 단편적인 지식이 아닌 체계적인 정보가…… 그리고 대체 중세가 맞기는 한거야?”

이맛살을 찌푸리며 아이작은 이곳까지 오면서 목격했던것을들 떠올렸다. 길가에 얼핏 보았던 병사들이나 기사들은 번쩍거리는 갑옷에 중세 무기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창문은 유리로 만들어져 있다.

“중세때는 유리가 귀한거 아니였나? 이렇게 창문으로 쓸 정도로 유리가 흔했던가?”

중세의 문명수준에 대해선 영화와 소설을 통해서만 접했던게 다인 아이작으로선 긴가민가할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이해가 안가는건 또 있었다.

“……이건 종이잖아. 그것도 별 차이가 없는.”

아이작은 침대에 놓인 책 한권을 들어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중세시대에서 사용하던 종이나 양피지의 수준이 아니었다. 신문이 발행될 정도면 대부분의 사람이 읽고 쓸줄안다는 소리였다. 거기다 아이작을 컬리지로 보내버릴정도로 언론의 힘이 강하다는 소리는 귀족계급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 정도 수준이면 봉건제는 무너지고 절대왕정에서 공화제나 넘어가는 과도기의 시대가 펼쳐져야 하는데 이 동네는 얼핏 듣기론 아직까지 영주가 존재했다.

아이작의 혼란은 세면장을 훝어보면서 더 심해졌다. 세면대와 수세식 화장실은 상하수도가 완비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수도꼭지를 틀자 더운물이 콸콸 쏟아졌다.

거기다 컬리지로 오면서 느꼈던건데 교통수단은 마차인데 반해 도로는 포장도로다. 그것도 일반 자갈을 깔아놓은게 아닌 아스팔트처럼 평평한 포장도로.

이해할수 없는일이 너무나 많았다. 분명 문명수준은 중세유럽문명 같은데 사회편의시설이나 문화는 근대수준 아니 근대를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하나의 문명이 발전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단계를 몇단계나 뛰어넘은 이상한 동네였다.

아이작이 혼란에 잠겨있을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소년이 들어왔다.

“안녕! 네가 아이작이구나. 난 마젤란이라고해. 초급반 기숙사장을 맡고있지.”

“안녕하세요.”

아이작은 난데없이 쳐 들어온 소년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어린 꼬맹이한테 머리를 숙인다는 사실에 처지가 처량해 졌지만 아무리 어른의 정신을 가졌다 할지라도 자신은 10살 꼬맹이일 뿐이었다. 튀기 싫으면 묻어가는게 생활의 지혜였다.

마젤란이라고 자신을 밝힌 소년은 아이작의 인사에 싱긋 웃더니 아이작의 어깨너머 침대를 향해 눈길을 주고는 말했다.

“아직 안갈아 입었네? 일단 옷부터 입자. 컬리지에선 사복 착용 금지니까 말이야. 물론…… 그 옷을 계속 입을 생각은 없겠지?”

마젤란은 약간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아이작의 옷차림을 훝어보며 말했다. 평벙하고 약간 허름한. 전형적인 평민의 옷차림이다.

마젤란의 말에 아이작은 마젤란의 시선을 느끼며 떨떠름한 태도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착용자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대량생산의 결과물이었다.

“이런…… 가장 작은 사이즈를 가져온건데 그래도 약간 크네……”

약간이 아니라 무지하게 컸다. 마치 아버지 옷을 몰래 입어본 아이처럼 크고 헐렁한 옷에 아이작은 어른용중에 가장 작은 사이즈를 가져온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정도였다.

“어디보자 일단 소매는 접어서 고정시키고. 바지는 좀 잘라야 겠네. 이번엔 처음이라 내가 해주는 거지만 다음부턴 직접 해야 돼. 여기선 모든건 자기 스스로 하는게 원칙이거든.”

마젤란이 다정하게 손수 아이작의 옷차림을 대충 매만져 주자 그나마 봐줄만한 정도가 됐다. 마젤란은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드는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작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 가자 내가 기숙사 시설 소개시켜줄게. 그리고 내일부턴 수업을 들어야 하니까 수업방식 같은것도 알아야겠지?”

마젤란은 아이작의 손을 꼭 잡고는 기숙사 시설을 알려주었다.

“자! 여기는 가장 중요한 식당이야. 언제 어느때고 밥을 먹을수 있으니까 배고프면 한 밤중에라도 내려와서 주문하면 돼. 물론 밤에는 간단한 요깃거리만 되니까 그렇게 알고.”

마젤란이 제일처음 끌고간 식당은 넓은 홀로 길다란 식탁이 죽늘어선 곳이었다. 영화에서 봤던 이런 단체생활 하는곳의 식당과 똑같은 구조였다. 식당에는 몇몇 아이들이 제각각 무리지어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식당 안으로 들어온 마젤란에게 시선이 모였다가 아이작을 향해 호기심과 흥미로운 시선이 이동했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곤 다시 식사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자! 다 봤지? 그럼 다시 방으로 돌아가자.”

‘고작 식당 하나 보여주고 끝이라고?’

아이작이 어처구니 없어 마젤란을 올려다 보자 마젤란은 싱긋 웃으며 아이작의 머리를 헝크려 트렸다. 고작해야 열 다섯 살정도로 보이는 꼬맹이 한테 머리를 쓰다듬 당하는 처지에 아이작은 울고 싶어졌다.

“사실 알려줄만한건 식당밖에 없어. 나머지는 직접 겪어야지. 방 청소와 세탁물은 매일 아침 수업 들어가기 전에 침대에 올려놓으면 고용인이 알아서 처리할꺼야.”

역시 귀하신 몸들이라 직접 청소와 세탁은 하지 않는듯 했다. 아이작도 귀찮은 이을 대신 처리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다행이었다.

“보급품은 매달 첫째날 보급될꺼야. 이런…… 그러고 보니 넌 보금품이 올때마다 고생좀 하겠는데? 얼른얼른 커야겠어.”

“……보급품은 부족한 분량 신청할때만 나오는거 아닌가요?”

“응? 이런 싸구려 섬유로 만든 옷을 누가 오래입고 싶겠어. 그나마 매달 새옷이 보급되니까 별 불만없이 지내는 거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예산의 낭비를 봤나! 아무리 소수 정예의 컬리지라지만 그 인원이 만만치 않을텐데 매달 새 옷을 보급하다니. 거기다 옷의 질 또한 아이작이 입고 있던 평민옷과 별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럼…… 한달만 입고 버리는 건가요?”

“그러지 않을까? 뭐 기숙사 관리인들이 다 수거해 가서 어떻게 하는지는 나도 잘 몰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아이작과 마젤란은 아이작의 방문 앞에 다달았다. 마젤란은 다시 한차례 아이작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말했다.

“자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는 수업이 정신없이 진행될테니까 열심히해. 내가 언제까지 기숙사장을 맡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까지만이라도 잘 가르쳐 줄테니까 궁금한거나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와서 얘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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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의 주인이 헐레벌떡 뛰어와 넙죽 엎드리며 고개를 조아린게 벌써 다섯 번째였다. 처음 숙박을 거부 당했을때는 살짝 불쾌해서 군말없이 다른곳을 찾아 나섰지만 다른곳도 다 마찬가지였다. 하필이면 남부의 커다란 축제중 하나인 주류축제기간이었다.

술꾼들의 이상향이라 할수있는 각 지방의 명주와 특산물은 물론 최고의 술을 가리는 대회를 보기위해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온갖종류의 술을 시음해 보고 팔릴만한 술을 찾아 장사를 하려는 상인들마저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어 이미 머물만한 숙소는 예약이 꽉차있었고 주머니가 가벼운 여행객들은 날씨가 따뜻하고 잠보단 술이라는 이유로 거리에서 먹고자며 고주망태로 지냈다.

“이러고도 치안이 유지 된다니 꽤 유능한 가문이군.”

사람이 많으면 사고가 잃어나기 마련. 그것도 성이 술에 잠겼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술취한 자들이 대부분인 도시였으나 치안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은듯 했다. 온갖 토사물과 쓰레기가 난무해도 어느 순간 보면 깨끗이 정리가 되어 있었으니 공공행정부문에선 최고점을 줘도 모자랄 정도였다.

하지만 한쪽에선 영지전의 피해로 죽어간 유가족들의 통곡이 울려 퍼지는데 한쪽에선 축제 분기위기에 흠뻑 젖어 흥청망청이라니…… 인간사회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며 세상이 변해도 인간의 본성은 그대로라는 현실에 씁쓸해졌다.

“뭐 그건 그거고 일단 나도 술이나 한잔 할까?”

방금전 떠올린 생각과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이었지만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진 사실에 연연하는 단계는 이미 뛰어넘었다.

취객들로 가득한 거리에 비틀거리며 걷는 사람들 틈바구니를 용케 비집고 지나가며 어디 적당한 곳이 없나 둘러보던 아이작은 예전에 보았던 만화책의 재목과 똑같은 신의 물방울이란 간판이 달린 주점을 발견하곤 피식 웃으면서 들어갔다.

“……”

‘아! 실수했다.’

아이작은 주점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조용한 적막감과 함께 자신을 향해 일제히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평민과 귀족은 사는 세계가 틀리다. 당연히 컬리지의 학생 또한 상류층에 속한다.

아이작은 즐거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행동을 살짝 후회하곤 카운터로 걸어갔다. 후회는 후회고 이미 들어온 가게를 다시 나가 다른곳을 찾는 귀찮은 행동을 실행에 옮길 생각은 없었다.

“맥주한잔.”

“아! 예 알겠습니다.”

아이작이 바에 앉아 짤막하게 내뱉자 바텐더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맥주를 팔뚝많나 높이의 잔에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나이 지긋한 노년의 바텐더. 영화속에서나 나오던 완숙한 바텐더와 흡사하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군.”

바텐더가 조심스레 건넨 맥주를 받으며 아이작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만 해도 두배이상 차이가 나는 상대였지만 공대를 하는게 오히려 상대방을 더 곤혹스럽게 만든다는건 그간의 경험으로 충분했다. 지금 감사의 뜻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인것만 해도 바텐더는 황송해 몸둘바를 모르겠다는듯 어찌할줄을 모르고 있었다.

아이작은 등뒤에 콕콕 날아와 박히는 시선을 무시한채 묵직한 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맥주를 몇모금 마시던 아이작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잔은 입에서 떼지도 않은채 목울대만 계속해서 꿀럭거렸고 고개는 점점 뒤로 젖혀졌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입도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후아!”

탕! 개운한 숨소리와 함께 주석으로 만든 잔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큰 진동을 만들었다.

‘이거 물건인데?’

술을 딱히 좋아하는건 아니었지만 방금 마신 맥주는 그동안 마셔봤던 그 어떤 맥주보다도 더 깊은맛과 개운함을 가져왔다. 시원하고 알싸한 느낌이 부드럽게 목을 넘어가고 진한 맥주의 향기가 개운함과 동시에 감질맛을 나게 만들었다.

“와하하! 맥주 한번 시원하게 드시네요!”

“음?”

“크하하하! 자네 술좀 마실줄 아는데!”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와락 자신의 목을 팔로 감싸안으며 친한척을 하자 아이작은 당황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미 얼큰하게 취한듯 벌게진 얼굴의 중년남성이었다.

“이 이보게 클로델……”

당황한 표정으로 바텐더가 말리려 했지만 클로델은 개념치 않은 표정으로 바텐더를 향해 말했다.

“이봐 루덴트씨. 여기 맥주 두잔 더. 오늘 술좀 마실줄 아는 청년이랑 같이 기분좋게 취해 봐야겠어.”

클로델의 주문에 바텐더는 난감한 표정으로 아이작의 눈치를 살피다 아이작이 별 불쾌한 기색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금새 맥주를 두잔 가져왔다.

“자자! 마시자고. 술은 혼자보단 둘이, 둘보단 여럿이 마시는게 흥이 돋는다고.”

챙! 두터운 주석잔이 둔중한 금속음을 내며 울려퍼졌다. 클로델이 아이작을 붙잡고 있어주자 그제야 주점안은 아이작이 들어오기 전보단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두런두런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끼어든 클로델이란 남자는 주변의 시선이 없어지고 바텐더마저 불똥튀기 싫은듯 멀찌감치 떨어져 있자 겉으로는 웃으면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아이작을 향해 말했다.

“그래. 컬리지의 잘나신 양반께서 이런 서민들의 공간에 어쩐 일이신가?”

‘역시……’

아이작은 자신의 짐작이 맞아떨어지자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그러는 그쪽이야 말로 어쩐 일이십니까? 이런곳이랑은 어울리지 않는 분으로 보이시는데?”

“음?”

아이작의 되물음에 클로델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너 내가 누군지 아는건가?”

“아뇨. 하지만 컬리지의 교복을 입고있는 저 한테 스스럼없이 다가와 술을 마실수있는 사람은 단 두부류밖에 없으니까요. 너무 취해서 누가 누군지도 못알아보는 부류, 그리고 컬리지의 이름에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는 동등하거나 혹은 그 이상의 지위와 힘을 지닌자들. 뭐. 뒤통수에 콕콕 박히는 경계어린 시선을 감안해 보면 두 번째 같네요.”

아이작의 말에 잠시 눈을 크게뜬 클로델은 곧 즐거운듯 크게 웃었다.

“와하하! 이거 물건일세! 물건이야!”

유쾌한듯 껄껄 고개를 젖히며 껄껄 웃던 클로델이 웃음을 뚝 그치며 말했다.

“재미있는 놈이군. 그래서 펜들턴 성엔 어쩐 일이신가? 축제를 즐기러 온거라면 출세는 포기한건가?”

“아뇨. 가벨린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하룻밤 머물곳을 찾는데 하필이면 축제 기간인지라 여관들이 이미 예약이 꽉차 있더군요. 몇군데 돌아다니다 목이 말라서 맥주나 한잔하러 들어온겁니다.”

“여관? 호텔을 가지않고 여관을 찾았다고? 특이한 성격이군.”

클로델의 말에 아아작은 어깨를 으슥였다.

“뭐 옷걸이는 컬리지지만 알맹이는 가난뱅이라서요. 가벨린까지 가는데는 차비도 벅찬 지경이라. 호텔은 꿈도 못꾸죠.”

고급숙박업소인 호텔은 거상들이나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숙박업소다 보니 하루의 숙박요금이 헉 소리가 날 정도로 높았다. 비록 컬리지의 제복을 입고있어 할인을 받을수 있다고 하더라도 만만치않은 금액인건 사실이었다. 아이작의 기억을 더듬어본 결과 보상금으로 받은 20만기가는 컬리지를 졸업할때까지 사용할수 없는 묶여있는 금액이었다. 그렇다고 컬리지에서 용돈을 주는것도 아니었으니 아이작의 수중에 있는돈은 컬리지에서 파견 나올때 받은 최소한의 교통과 숙박을 이용할수 있는 여비뿐이었다.

아이작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클로델은 재미있다는 듯이 껄껄 웃기 시작했다.

“와하하! 컬리지를 다니는 놈이 돈이 없다고? 그건 요즘 가벨린에서 유행하는 최신 농담이냐?”

“애석하게도 차가운 현실이죠.”

아이작의 대꾸에 킬킬거리던 클로델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직까지 잘곳을 구하지 못했다는 거군.”

“예. 정 안되면 여기서 첫차 출발할때까지 술이나 홀짝이다가 차에서 잘 생각이었습니다.”

“그럴수는 없지. 후배가 돈이 없어서 끙끙거리는걸 그냥 지나칠 정도로 냉정한 선배는 아니라고.”

“흐음? 선배님이셨습니까?”

살짝 놀랍다는 투의 말에 클로델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후후. 자네 말대로 컬리지의 교복을 보고도 스스럼없이 다가올 정도의 위치를 가진자라면 대부분은 컬리지출신이지 않겠나? 논컬리지들은 컬리지 교복만 봐도 이를 가니까.”

말을 마친 클로델은 남은 맥주를 한번에 들이키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자! 가자고. 그 옷은 입고만 있어도 민폐를 끼치니까. 우리 집에서 다시 한잔 하자고. 덕분에 여긴 눈치보여서 더 이상 못 오겠군.”

클로델의 말대로였다. 눈앞의 남자를 신경쓰느라 몰랐는데 어느새 주점엔 서너명의 남자들이 점령한 두 개의 테이블을 제외하곤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컬리지의 학생이 있다는 소문에 손님들의 발길이 돌려지고 있던 손님들도 조용히 나가버린지 오래였다.

“루덴트씨. 그동안 고마웠어. 나중에 기회 되면 또 보자고.”

클로델은 바텐더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고 아이작을 향해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엉겁결에 일어나 같이 나서는데 끝까지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자들이 클로델을 따라 일어서는게 호위병력 같았다.

‘병사는 아니고…… 기사급이군. 제길! 기사급이 호위할정도로 잘난 양반이 이런 서민들 주점에 왜 있는거야!’

재빨리 눈으로 남자들을 훝어본 아이작은 그들이 잘 훈련된 기사들임을 알아챘다. 병사와 기사는 그 행동거지부터가 틀리다. 나름대로 녹아든다고 옷차림에 신경은 썼지만 기세를 지울수는 없었다.

“쩝…… 펜들턴에서 맥주맛으로 치면 세손가락 안에 꼽는 곳인데 이제는 못가게 됐구만.”

아쉽다는듯 투덜거리는 클로델을 따라 거리를 걷던 아이작은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투덜거릴거면 애초에 아이작을 모른척 하면 그만일텐데 먼저 다가온건 분명 클로델이었다.

그런 아이작의 심사를 눈치챘는지 클로델은 아이작을 바라보며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컬리지 출신이긴 하지만 컬리지 놈들이 싸가지 없는건 유명하잖아. 내가 즐겨찾는 술집인데 난장치면 모가지를 꺽어버릴려고 했지.”

“그러면 제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반응을 보고 움직였으면 정체가 들통날 일도 없었을텐데요?”

“……”

아이작의 말에 클로델이 못들은척 하며 반보 앞으로 나섰지만 아이작은 똑똑히 보았다. 아차! 하는 심정이 그대로 드러난 클로델의 표정을. 속으로 피식 웃으며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중얼거린 아이작은 클로델의 성격이 성급한 편임을 짐작할수 있었다.

“뭐 성급한 면이 없지않아 있었군. 인정하지. 그런데 나도 그쪽에 용건이 있어서 말이야. 자넬 본 순간 번쩍이며 떠오른 생각이었지. 그래서 싹수가 노란놈인지 쓸만한 놈인지 판단할 필요가 있었거든.”

클로델의 말에 아이작이 의문을 표할 때 어두운 골목길 안쪽에서 연락을 받았는지 평범한 마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 내더니 아이작과 펜들턴 앞에 멈춰섰다.

“자. 타지.”

“……”

클로델이 망설임 없이 마차에 오르며 말했지만 아이작은 얼굴이 살짝 굳는걸 숨길수 없었다. 마차 벽에 그려진 원형의 성벽과 그 안에 들어있는 한그루 나무문양. 보자마자 아이작의 기억에서 떠오른 주요 귀족가문의 문양중 하나이자 펜들턴 지방을 지배하는 펜들턴 공작가의 상징.

“공작각하셨습니까?”

아이작이 재빨리 예를 표하려 하자 클로델이 질색인 표정으로 손을 휘저었다.

“됐으니까 빨리 들어오기나 하라고.”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하는 클로델의 손짓에 아이작은 복잡해진 머리를 정리할 틈도없이 얼떨결에 마차에 오르고 말았다. 아이작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마차는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분좋은 진동을 느끼며 창밖을 바라보니 거리를 바삐 오가던 사람들이 전부 엎드린채 마차를 향해 경의를 표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나마 표면적으론 인간은 전부 평등하다고 포장되어 있는 사회에서 자란 준영의 정신은 계급의 차이가 직접적으로 표출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만가지 기분이 다 들었다.

“감상이 어떤가? 권력이 가진 힘을 가장 잘 표현하는게 바로 지금같은 모습이지.”

아이작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에 클로델이 심정을 짐작 한다는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왔다.

“확실히. 위로 올라서기위해 발악할 놈들이 전의를 다질만한 모습이네요.”

“호오? 자네는 아니란 말인가?”

“그럴만한 실력도 재능도 없습니다. 권력 끝자락에서 찌끄러기나 주워먹으며 사는 운좋은 인생일 뿐이죠.”

아이작의 말에 클로델은 졌다는듯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자네 대체 가문이 어딘가? 자네같은 괴짜를 길러낸 가문의 가주를 한번 보고싶군.”

클로델의 말에 아이작은 약간 괴로운듯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인사가 늦었군요. 전 아이작 론다트라고 합니다.”

“음? 아이작 론다트? 어디서 많이 들어본거 같은……”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클로델은 문득 깨달은듯 손바다을 탁 치면서 외쳤다.

“아! 기억났다! 센트럴이 집어넣은…… 그렇군. 흠. 허허 이거 참……”

클로델은 허참! 이거참!을 연발하며 홀로 중얼거리다 아이작이 멍하니 바라만 보고있자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하군. 사과하겠네. 아픈 기억을 들쑤신거 같아.”

“아닙니다. 저야 이미 익숙해진걸요.”

“그런가? 후후 고생 많구만.”

“그래도 분수를 아니 사는데 불편한점은 없습니다.”

아이작의 말을 끝으로 마차 안에는 불편하고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언제나 그랬다. 컬리지 출신이라고 떠받들고 친하게 다가오다가도 아이작의 과거사를 알게되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안면을 바꾸고 어색하게 거리를 벌린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아이작 본인은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아이작의 몸을 차지한 준영에게는 복에 겨운 헛소리일뿐이었다.





위압적인 성벽과 뾰족한 첨탑, 투박함은 못참겠다는듯 흰색과 푸른색으로 도색된 건물과 곳곳에 새겨진 바로크 양식의 조각과 그림은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아름다운 성이란 명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디즈니냐?”

멀리서 보았을덴 설마 했었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자마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백조의 성이라 불리는 독일의 노이슈반슈타인성. 디즈니가 상징으로 삼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성. 그 성과 비슷하게 생겼다.

‘언제 한번이라도 제대로 봤어야 뭐 아는척이라도 하지……’

서양권으론 여행 한번 못가본지라 대중 매체를 통해서만 접한게 다인 준영으로선 디즈니성과 펜들턴성이 똑같이 생겼는지 아니면 우연의 산물인지 알길이 없었다.

“어떤가 감상이? 남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이지.”

클로델이 자랑스러운듯 뿌듯한 표정으로 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확실히 아름다운 성이네요. 성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알고싶을 정도입니다.”

“응? 그야 우리 가문의 시조이신 볼프강님이시지.”

“……그렇군요.”

“자 빨리 들어가자고.”

아이작을 재촉한 클로델은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성벽을 빙 둘러 걷기 시작했다.

“……정문으론 안 들어갑니까?”

“후후 몰래 나온거라서. 들키면 골치아파지거든.”

장난을 치려는 악동처럼 눈을 반짝이며 키득거리는 모습에 아이작은 골치아픈 주군을 만나 고생하는 수행원들에게 애도의 묵념을 보내듯 뒤 따르는 기사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고 기사들은 자신들의 고충을 이해해주는 청년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성벽을 왼쪽에 오른쪽엔 해자를 둔채 사람한면 지나갈 정도로 좁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않아 길 앞을 가로막는 성벽이 나타났다. 각진 성벽을 바라보며 아이작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본적이 있는 성벽 양식이다. 성벽을 돌출시켜 적을 분산시키고 화력의 집중을 꾀하는 진화된 축성술. 그리고 준영이 기억하기론 분명 화약무기와 대포의 발달과 함께 진화되어온 축성술의 정점이었다. 원거리 무기라곤 화살이 다인 중세시대 무기체계론 발달할수 없는 기술이었다.

‘아! 아니군. 대포를 대신할 무기가 있었지.’

확실히 대포를 대신할 존재가 있기는 있었다. 마법사. 소설과 만화에서 보아온 불덩이를 쏴대고 독구름을 불러오고 비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비현실적인 존재. 하긴 이 세상 자체가 준영에겐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자자. 이리로 오라고.”

멍하니 성벽을 구경하는 아이작을 부르면서 클로델은 성벽과 성벽이 만나는 각진 부분 주위를 서성이다 갑자기 주저 앉더니 바닥을 더듬거렸다.

“여기다!”

가려진 흙을 걷어내자 나무판자 보였고 손잡이를 잡고 열어 제끼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밀통로 아닙니까?”

“당연히 비밀통로지. 비밀리에 이거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번만은 절대 틀키지 않을꺼야.”

이 인간 바보다. 이이작은 히히덕거리는 클로델을 바라보며 단언했다. 중요한 방어수단중 하나인 성벽에다 구멍을 뚫어놓다니. 하긴. 펜들턴성이 공격받을일 자체가 없다고 여길테니 이런일도 벌릴수있는거겠지. 그래도 세상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인데……

슬적 기사들을 바라보니 기사들도 마음이 편치 않은듯 차마 주군이라 뭐라 하지는 못하고 속만 삭히는듯 했다. 말을 들어보니 이런 비밀통로를 만든게 하루 이틀이 아닌거 같았다. 그 말은 겉으론 단단해 보이는 이성이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다는 거였다.

‘중요정보란 사실은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틈을 만드는건가?’

단순히 멍청한 사람이라면 펜들턴가의 당주가 될수있을리 없다. 복잡한 심정으로 클로델의 등을 따라 좁고 어두컴컴한 지하를 허리를 반쯤 숙인채 기득이 걸어갔다.

‘여기서 천장이 무너져 죽으면 사람들이 뭐라 그럴까?’

당연히 개죽음이라 그러겠지. 펜들턴가 가주의 사망은 제국을 뒤흔들 뉴스일테고 술마시러 몰래 빠져 나왔다가 자신이 판 땅굴이 무덤으로 변했다는 소식은 농담거리도 안되는 얘기였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면 클로델을 노리는 자에겐 절호의 기회란 소리였다. 물론 펜들턴가를 노리는 적이 있다는 가정하에서 벌어질 일이었지만 펜들턴가같은 대 귀족이 적이 하나도 없다는건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따지고 보면 위기상황?’

시덥잖은 생각은 점점 깊이 들어갈수록 사라졌다.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자욱한 흙먼지를 들이쉬며 산소가 부족해진 폐는 연신 거친 숨을 토한다. 뒤따라 오는 기사들 마저 숨소리가 거칠다.

‘이 고생을 하면서 놀러나갈 가치가 있는건가?’

바짝 마른 목구멍에서 아까 마셨던 그 시원하고 맛깔나는 맥주를 갈구하는걸 생각하면 뭐 고생할만한 가치는 있었다.

“자 다왔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향하는 한줄기 빛줄기처럼 밖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고 흙먼지를 뒤집어 쓴채 기어 나오자 마자 아이작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상쾌한 공기가 폐속에 싾인 먼지를 긁어가고 싸늘한 한기가 흘러내린 땀방울을 시원하게 식혀주었다.

응? 여긴 분명 건물 안인데다가 한여름인데 시원한 한기? 의아해진 아이작이 클로델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엉거주춤 설수밖에 없었다. 어미에데 뒷덜미를 물린 강아지처럼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클로델과 그 옆에서 팔짱을 낀채 날카로운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는 귀부인의 모습은 어떻게 된 사연인지 쉽게 짐작할수 있었다.

아이작을 뒤 따라 구멍에서 올라온 기사들은 귀부인을 보자마자 딱딱하게 굳은채 직립부동자세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눈치를 살피는데 급급했다.

역시 사람사는 곳은 어디나 마누라가 실권을 잡는다는 만고불변의 법칙에 감탄할 때 귀부인이 싸늘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다 기어 나온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한목소리로 울려퍼지는 기사들의 우렁찬 목소리에 귀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청년은 처음보는 청년같은데?”

귀부인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아이작은 기억을 헤아려 오른손 주먹을 왼쪽 가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이작 론다트라고 합니다. 정중히 예를 표하지 못하는 실례를 범한걸 너그러우신 아량으로 헤아려 주시길 청합니다.”

아이작의 태도가 마음에 드는지 살짝 차가운 표정을 풀며 아이작의 면면을 훝어보던 귀부인이 말했다.

“엘레노아라고 합니다. 컬리지의 학생같은데 어떻게 부군과 같이 있게 된거죠?”

“여행의 여독을 풀기위해 잠시 쉬려는데 클로델 공작님을 만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공작각하이자 컬리지의 선배님이신 클로델님께서 술을 좀 과하게 드신 상태로 막무가네로 잡아 끄시는걸 거부하는 무례를 범할순 없는지라 어쩔수 없이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아이작의 천연덕 스런 대꾸에 기사들은 뜨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채 아이작을 바라보았고 클로델은 억울하다는듯이 고개를 번쩍 쳐들고 항변하려다 엘레노아의 사나운 눈초리에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된거군요. 못난 부군 때문에 고생하셨습니다.”

“별말씀을. 말씀 낮추시지요. 과분한 공개는 오히려 부담스럽습니다. 레이디.”

“호호호. 레이디라. 오랜만에 듣는 칭호군요. 낯뜨겁습니다.”

“아닙니다. 무례인거 같아 밝히지 않으려 했는데 처음 뵈었을땐 클로델님의 영애인줄 알았습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호호호 무례라니 무슨말을 그렇게 하니. 예를 거두렴. 컬리지의 학생이라면 내게도 후배가 되니 편하게 대할게.”

“감사합니다.”

젋다고 추켜 세우는데 싫어할 여자는 없다. 귀족가의 영애들에게나 붙이는 레이디의 칭호를 붙이며 슬쩍 아부를 늘어놓자 엘레노아의 서릿발처럼 차갑게 굳어있던 표정이 봄날의 화창한 오후처럼 풀어졌다. 그 모습에 기사들과 클로델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지 입만 버금거릴 뿐이었다.

“일단은 좀 씼어야 겠네. 시종을 시켜 머물 방을 안내해 줄게.”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호의는 무슨.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당연한거지.”

곁에 있던 시녀에게 시종을 불러올것을 명한 엘레노아는 안색을 다시 차갑게 굳히며 시선을 돌려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해야할 일이 뭔지 알겠죠?”

“예! 그렇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이런일이 한두번이 아닌지 기사들은 엘레노아의 명령에 즉각 자신들이 기어나온 구멍으로 다시 들어가는게 아마도 안쪽에서부터 구멍을 메울려는듯 했다.

그사이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시종이 안내해 줄꺼야. 난 잠시 이이랑 대화를 좀 나눠야 겠어.”

“그럼 잠시후에 뵙겠습니다.”

아이작은 클로델이 애타게 구원의 시선을 보내는걸 외면한채 시종을 따라 황급히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확실히 공작이 사는 성이 다르긴 다르군.”

따뜻한 물이 가득 든 대리석 욕조에서 몸을 담근채 근육의 피로를 풀며 아이작은 눈앞에 펼쳐진 전망을 바라보았다. 한쪽 벽이 전면 유리로 이뤄진 창 밖에는 펜들턴 성의 전망이 한눈에 보이도록 펼쳐져 있었다. 화려한 도시의 네온사인에 비할바는 못돼지만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수놓은 야경은 색다른 맛이 있었다.

“그나저나 난처한 상황을 기대했는데 그런건 없네?”

소설에서 보면 흔히 쭉쭉빵빵 시녀들이 목욕 시중을 든다고 속이 다 비치는 성욕촉진의류를 걸친채 주인공을 곤욕에 빠트리는 상황이 단골처럼 등장하지만 현실은 셀프 서비스였다.

따뜻한 물에 몸이 노곤노곤해질 정도로 목욕을 즐긴 아이작은 욕조에서 나와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고 허리춤을 수건으로 두른채 욕실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세탁을 마쳤는지 지저분한 간벌밖에 없던 아이작의 컬리지 교복이 깨끗하게 잔주름 없이 세탁되어 침대 한켠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옷이 날개라고 하기엔 본판이 엉망이군.”

멋을 중시해 디자인된 컬리지의 교족이었지만 정작 옷걸이인 아이작이 평범하다 보니 그럭저럭 봐줄만한 모양새일 뿐이었다. 목욕도 하고 옷도 입었겠다 이제 어쩌나 하고 잠시 고민할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아이작의 말에 문이 열리며 아이작을 방으로 안내했던 시종이 정중한 태도로 아이작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엘레노아님께서 아직 피로가 풀리지 않았을텐데 괜찮으시다면 같이 차라도 한잔 하자고 청하셨습니다.”

“당연히 가야지. 안내해.”

이짓도 오래해서 그런지 하대가 자연스레 나온다. 시종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으면서 촌티를 내지않기 위해 애쓰며 슬적 슬적 곁눈질로 주위를 살폈다. 채광이 불편한 성 답지 않게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마법등이 복도를 환하게 비추었다. 양쪽 벽에는 고풍스런 장식의 조각과 그림등이 걸려 있었고 천장에는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것만 같은 천장화가 입체감 있게 그려져 있었다.

복도를 구경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시종이 응접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라는듯 손짓을 해 보였다. 시종에게 살짝 고개를 까닥이고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을거라 생각했던 엘레노아와 클로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오르는 벽난로와 응접실을 장식한 그림과 도자기등을 감상하다 벽난로 곁에 마련된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벌겋게 달아오르며 은은한 열기를 내뿜는 숯을 바라보았다. 꽤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이었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전장에서 죽음을 격은후 이 세계로 떨어져 상황을 파악하느라 알게 모르게 피로가 누적된듯 했다.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한 온기를 쬐고 있자니 꾸벅꾸벅 졸음이 몰려왔다. 살짝 기지개를 편뒤 다피운 담배를 벽난로에 던져 버리고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을때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클로델과 엘레노아가 들어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구만.”

“아. 오셨습니까.”

아이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클로델과 엘레오아를 맞이했다.

“역시 컬리지 교복의 디자인은 걸작이야.”

“호호호. 옷을 보니까 옜날 생각이 나네요. 그때는 참 즐거웠는데.”

깨끗하게 세탁된 컬리지의 교복을 보고 클로델과 엘레노아는 옜 학창시절이 떠오르는듯 아련한 표정을 지을뿐 겉 치레라로도 아이작이 멋지다느니 잘생겼다느니 하는 얘긴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음? 그건 청연초? 자네 어디 다쳤나? 아! 전투를 겪었다고 했지. 그때 입은 부상인건가?”

클로델이 아이작의 손에 든 담배를 보고 갸웃거리다 납득이 간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가 빠르군. 벌써 아이작에 대한 신상명세를 확보했단 말이지……’

이름과 출신성분을 알려주긴 했지만 대륙 반대편과 실시간으로 통화하는 세상이 아닌 중세문명의 세계에서 이정도 시간으로 한 사람에 대한 최신정보를 알아볼수 있을정도면 오버 테크놀로지였다. 뭐 여기에도 마법이 관련되어 있을테지만 전기문명의 세상사람에게 마법문명의 세상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예. 화살이 한쪽 폐를 관통해서 죽기만을 기다리다 겨우 살아났습니다. 절 치료하신 성법사님의 말로는 보통의 신성력으론 완치가 불가능 하다고 그러시더군요. 고위 성법사분께 부탁드릴 여유도 없고 주기적으로 청연초만 사용하면 생활엔 지장이 없다고 해서 애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 성에도 유능한 성법사가 많은데 한번 진료를 받아보는게 어떻겠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완치는 어렵다고 하더군요.”

“음. 유감이네. 그래도 한번 진료를 받아 보는게 어떤가?”

폐를 다쳤다는건 제국의 중요 직책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중대한 결격사유였다. 컬리지 출신으로 제국의 수뇌부를 꿈꾸는 이에게 있어선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아이작에겐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신경쓰실 필요 없습니다. 한번 죽음을 경험해서인지 모든게 다 부질없는 짓으로 느껴지더군요.”

아이작이 아닌 준영의 의견이기도 했다. 죽음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사람이 얼마나 쉽고 허무하게 죽을수 있는지를 너무 많이 격어온 준영이 공이니 출세니 하는 문제에 연연하지 않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

아이작의 말에 분위기가 좀 어두워 지자 아이작은 싱긋 웃으며 분위기를 띄우려는듯 농담조로 말했다.

“오히려 다행이지요. 체력단련시간이 고역이었는데 이제는 정정당당하게 열외할수 있으니까요.”

“딴에는 그렇구만 하하하!”

아이작의 농담에 클로델이 과장스레 웃으며 호응하면서 분위기는 다시 밝게 변했다. 세사람은 테이블에 둘러 앉은채 시종이 가져온 빵을 곁들여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컬리지의 교수들에 대한 얘기와 예전 컬리지 시절 격었던 일화등을 흥미롭게 듣던 아이작은 차와 빵이 다 떨어져가자 슬슬 때가 되었다 싶어 본론을 꺼냈다.

“이제 슬슬 본론에 들어가도 될거 같은데요.”

아이작의 말에 엘레노아는 살짝 눈을 치켜뜨며 아이작을 바라보았고 클로델은 껄껄 웃었다.

“하하하.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구만. 피곤할텐데 오랜만에 옜 추억에 빠져드느라 시간가는줄 몰랐어.”

“별말씀을. 저도 선배님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가져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아이작의 입바른 말에 클로델은 손사레를 치며며 말했다.

“거참 요즘 컬리지에선 아부하는법도 가르쳐 주던가?”

“요즘은 생활의 지혜라고 그러더군요.”

“크하하! 역시 재미있는 청년이야!”

뭐가 그리 신나는지 큰소리로 웃던 클로델은 여운이 남는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다시 말했다.

“이번에 내 자식이 컬리지에 합격했다네.”

“호오? 축하드립니다. 역시 펜들턴가의 이름을 잇는데 부족함이 없는 인재군요.”

“……”

“……”

아이작의 축하말에 엘레노아와 클로델은 서로를 마주보며 눈치를 살피다 입을 다물었고 아이작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었다.

“험험. 자식자랑하는 팔불출 같지만 내 자식이라서 하는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말인데 내 자식은 천재라네.”

“예……”

자식자랑이 아니기는…… 입이 귀에 걸렸구만…… 아이작은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위해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수순이 자기 자식이 얼마나 천재고 얼마나 똑똑한지등의 자랑을 늘어 놓으리란건 안봐도 뻔했다. 그런 아이작의 반응이 마음에 안드는지 클로델은 살짝 눈썹을 오므리며 말했다.

“이번에 중급반에 들어간다네.”

“그렇겠죠?”

컬리지는 초급반과 중급반, 졸업반으로 나뉘고 각 5년씩 총 15년의 교육기간을 가진다. 그중 초급반은 아이작같은 특수 케이스나 신흥귀족, 상단의 자제등 명문이라 불릴만한 잠재력이 없는 가문에서 교육시키는것보다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기에 어릴적부터 컬리지에 입학시키지만 펜들턴가 같은 전통과 명망있는 가문에선 집안의 검술과 지식등을 가르치고 컬리지에는 초급반은 건너뛴채 중급반에 입학시키는게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18세 생일을 맞이했지.”

“헤에? 18살에 중급반을 들어간단 말.입니까?”

천재라고 그러길레 한 열셋,넷쯤 되는줄 알았다. 그 정도 나이에 중급반에 입학하는건 천재들로 우글우글한 컬리지 내에서도 빠른 진급이다. 보통 초급반에 열두살 전후로 입학한 아이들이 1,2년내에 초급반 교육을 이수하고 중급반으로 올라간다. 초급반을 거치지 않고 중급반에 편입하는 진입문턱이 초급반에서 중급반으로 올라가는것보다 난이도가 턱없이 높다는걸 감안해도 18세면 꽤 늦은나이였다.

역시 자식자랑일 뿐이었어 하고 속으로 중얼거릴때 클로델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애가 뭐 하나에 빠지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졸업반 편입시험을 봤는데 군사학부쪽 점수는 만점인데 행정이랑 마법학부쪽이 꽝이라 학점이 모자라서 중급반으로 가게 된거지.”

콜록! 아이작은 황당함을 감추기 위해 차를 마시다 이어진 클로델의 말레 사례가 걸려 콜록거리며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클로델을 바라보았다.

컬리지는 세가지 학부로 분류되어 학생들은 하나를 전공으로 정해야 했다. 가장 인기가 많고 지원자가 넘쳐나는 학과가 군사학부였다. 공을 세워 출세하기 가장 빠른 길이 군사학부였고 인맥 또한 컬리지 출신들이 군벌이라 불릴정도로 군부를 주름잡고 있었다.

그 다음이 마법 학부로 육체적인 능력보단 머리쓰는쪽으로 발달한 인재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사실 군사학부와 마법학부는 육체냐 머리냐 하는 재능의 차이에 따라 갈리는 곳이라 언제나 지원자가 넘쳐났다.

컬리지에서 가장 홀대받는 학부는 행정학부였다. 제국의 재상을 비롯한 주요요직을 컬리지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가장 공을 싾기 어렵고 책상머리에만 붙어 있으며 하는 일이라곤 서류작업밖에 없는 행정일은 꿈과 야망에 부풀어 있는 컬리지의 젊은 학생들에겐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컬리지는 한가지 방면만 잘해서는 졸업하기도 힘들었다. 전공 외에도 다른 두가지 학과에서 일정점수 이상 학점을 올려야지만 졸업이 가능했고 그 말은 전공을 제외한 다른 학과더라도 세상에서는 일가를 이룰만한 실력을 싾았단 소리였다. 컬리지가 그 명성을 이어갈수있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실제로 제국의 재상을 맡고있는 칼슈타인후작은 행정이 아닌 마법학부 출신이었다.

“군사학부 만점이라고요? 그 깐깐한 교수진들이?”

기억을 더듬어 보자 온갖 실기시험과 평가에서 처참할정도로 사람을 짖뭉게놓던 잔인무도한 교수들이었다. 사소한 트집 하나도 그냥 넘어가는일 없는 교수들이 만점을 준다? 도저히 상상이 안가는 일이었다.

“내가 말했잖은가.”

“천재군요.”

“그래서 말인데……”

“죄송합니다만 거절해야할거 같습니다.”

“음? 내가 무슨말을 하려는지 알고 들어보기도 전에 거절하는건가?”

“컬리지에 합격한 자제분 얘기를 꺼내는것 보니 아직 입학은 안한것 같고 수행원 딸려 보내는것 보단 컬리지의 관계자와 같이 동행하는게 앞으로 있을 컬리지 생활에 대한 최신 정보를 얻는데 좋을거 같아 저에게 동행을 요청하시는거 아닙니까?”

“그 그렇지?”

“저야 펜들턴가의 이름에 편승해 편하게 이동할수 있으니 환영하고 싶습니다만 제 처지가 감히 펜들턴가와 함께 동행할 처지가 아니라서요.”

“음? 그건 무슨뜻이지?”

“정통 명문가인 펜들턴과 제가 함께있는 모습은 여러 가지 시비거리를 만들기에 좋은 구실입니다.”

“하! 대체 어떤 놈들이 시비를 건다는 건가!”

“펜들턴이야 상관없지만 감히! 펜들턴의 이름에 기생충처럼 기생하며 부스러기라도 주워먹으려고 알짱거리는 저를 못마땅하게 여길 사람들은 많거든요.”

“그 그런가? 그래도 스스로 그런말을 하는건 좀……”

“저야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뿐입니다.”

“흐음……”

아이작의 말에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클로델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진짜로 만들면 되지.”

“예?”

“졸업하고 우리 가문에서 일해볼 생각 없나? 자네말대로 우리 펜들턴의 힘이라면 자네 하나쯤 빼오는건 일도 아니니까. 어때? 딱 자네가 원하는 자리를 마련해주지. 고수익에 하는일도 거의 없고 출퇴근이 자유로운 자리로 말이야.”

클로델의 말에 아이작은 진심으로 고민했다.


“그 그런가?”

“출발은 언제 하실겁니까?”

“내일 아침인데?”

“생각보다 빠르군요.”

“그게 사실 일찌감치 예정되어 있던건데 자네가 온 김에 겸사겸사 부탁을 하는거라네. 여독을 다 풀지도 못했는데 무리한 부탁 같으면 거절해도 상관없네.”

“아닙니다. 어차피 저도 하루만 쉬고 떠나려고 했습니다. 축제가 끝난뒤에 움직이려면 교통편이 만만치 않을거 같아서요.”

“그렇지. 그래서 우리도 일정을 축제가 끝나기 전으로 잡은거라네.”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편한안 잠자리를 제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푹 쉬게나.”

아이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클로델과 엘레노아에게 꾸벅 인사를 한뒤 응접실 밖으로 나가자 가만히 두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엘레노아가 입을 열었다.

“특이한 청년이긴 한데 컬리지 놈들은 건방지고 싸가지 없다고 질색을 하던 양반이 어쩐일로 성까지 초대 한겁니까?”

“재미있는 놈이잖아.”

“확실히 컬리지출신이라고 보기엔 독특한 성격이네요.”

“그놈의 파란만장한 인생도 흥미가 있고 말이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건가요?”

“약간은. 그리고 우리 애한테 좋은 자극이 될거같지않아?”

악동처럼 눈을 반짝이는 클로델의 모습에 엘레노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인간이랑 결혼을 한 내가 미친년이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호화로운 방에서 오래만에 호사를 누린 아이작은 룸 서비스처럼 방으로 배달된 아침식사를 마치고 식후땡 겸 담배를 한 대 다 피울때쯤 돼서야 출발준비가 완료됐다는 연락에 시종을 따라 나섰다.

펜들턴 공작가의 인장이 뚜렸이 찍힌 화려한 마차와 마차에 짐을 싣는 인부들의 모습이 보였고 중후한 중년의 포스를 풍기는 푸짐한 덩치의 기사가 마부석에 앉아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아이작이 먼저 다가가 인사하자 의아한 눈으로 시선을 돌리던 중년인은 곧 아이작이 입고있는 컬리지의 교복을 보곤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 좋은아침일세. 자네가 어제 왔다는 그 컬리지의 괴짜 학생이구만.”

“괴짜요?”

“응. 벌써 소문이 파다해. 싸가지 없기로 유명한 컬리지의 학생답지않게 특이한 성격이라고 말이야.”

“그야 싸가지도 능력 있는놈들이나 부릴수 있는 호사니까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아이작이라고 합니다.”

“반갑네. 컬리지까지 함께 동행할 새뮤얼일세.”

“반갑습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아이작이 꾸벅 고개숙여 인사하자 새뮤얼이 재미있다는듯 껄껄 웃었다.

“허허허 내가 살면서 컬리지한테 인사도 받아보는 날이 올줄은 정말 몰랐구만.”

화통화고 쾌활한 성격인거 같아 다행이었다. 펜들턴의 정보력으로 자신의 출신성분과 과거사정도는 이미 파악이 끝났을텐데 업신여기거나 경멸스런 시선이 말조차 섞기를 거부하는 성격이었다면 컬리지까지 향하는 여정이 꽤 고달플뻔 했다. 클로델의 배려인지 펜들턴 기사들의 성격이 본래 이런건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행이었다.

기다리는 시간을 때우기엔 담배가 적격이었다. 품에서 꺼낸 담배를 입에물고 불을 붙이자 새뮤얼이 약간의 동정섞인 표정으로 담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청연초구먼. 부상이 아직 낮지 않은건가?”

“예. 영광의 상처일려나?”












작가의말

아. 새로운 시스템에 금방 적응을 못하고 헤매는 모습에서 아 나도 나이가 들어 신문물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아부지가 리모콘 조작 헤매는게 이해가 갑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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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4

  • 작성자
    Lv.1 후못후
    작성일
    12.11.28 07:35
    No. 1

    안되! 출판이 안되는거라니! 이보시오. 작가양반! 이게 무슨 난리란 말입니까! 책으로 나오기만을 바라는 독자의 마음을 모르신단 말이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5 꼬꼬입니다
    작성일
    12.11.28 08:19
    No. 2

    책으로 나오면서 수정하고 삭제한 부분을 작가님이 아까워 여기 남기신 겁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6 미드바르
    작성일
    12.11.28 08:22
    No. 3

    간만에 들어왔는데, 무척 반가운 글이군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그 재밌었던 글이 나왔었던 거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하날나래
    작성일
    12.11.28 09:27
    No. 4

    책으로 꼭 봐야겠습니다.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海印.
    작성일
    12.11.28 09:48
    No. 5

    그나저나 출판은 어디서 언제쯤 하세요? 11월에 하신다더니 벌써 12월이 다가오는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0 두현맘
    작성일
    12.11.28 09:48
    No. 6

    여러 줄기가 있었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Tica
    작성일
    12.11.28 11:52
    No. 7

    역시 아이작 같은 글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군요... 저 분량이 통편집되다니ㄷㄷ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 침묵의계절
    작성일
    12.11.28 12:14
    No. 8

    책을 빨리 보고 싶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3 lookman
    작성일
    12.11.28 12:22
    No. 9

    우어.. 아주 통으로짜르시네요.. 존경스럽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狂猫眼
    작성일
    12.11.28 13:12
    No. 10

    아, 그러니까요. 출판이 언제냐구요..ㅠ.ㅠ 목내놓고 기다리다가 목만 늘어나겠어요..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0 ks***
    작성일
    12.11.28 13:47
    No. 11

    재....재미있는데.. 왜?

    그럼 본판은.. 더 잼있겠죠?

    ㅜㅜ 기대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2 광신지
    작성일
    12.11.28 16:52
    No. 12

    드... 등짝... 이 아니라 책을 봅시다 책!!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눈솔
    작성일
    12.11.28 17:18
    No. 13

    출판해주십시오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 Jinss
    작성일
    12.11.28 18:54
    No. 14

    시험기간이니ㅠ 끝나고 이긴걸재밌게 인ㄱ을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8 행복이좋아
    작성일
    12.11.28 19:18
    No. 15

    12만자 언제보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J군
    작성일
    12.11.28 23:26
    No. 16

    음 이북으로도 출판되면좋겠네요 저같은경우는 종이책보관하기가 영 불편한지라..

    이북도 출판되면 딱 좋겠는데 말이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6 B612
    작성일
    12.11.29 00:18
    No. 17

    다 보았습니다. 연재분의 이야기가 여러 시도 중에서 갈라져 나온것을 보았습니다.
    잘 보았고요. 계속 연재 하셨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한데 안타까울 뿐입니다.
    사족입니다만, 컴퓨터의 자료는 처음부터 백업하여 보관하는것이 왕도입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독행남아
    작성일
    12.11.29 12:46
    No. 18

    네!! 여러갈래의 이야기였네요. 어쨌든 본편이 조속히 출판되었으면 합니다. 이북으로든 책이든 말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7 sa****
    작성일
    12.11.29 14:21
    No. 19

    여러 방향의 글을 보니 잼있네요.
    더불어 잼난 글을 더 볼수 없어서 아쉽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1 땅꾼
    작성일
    12.11.29 17:21
    No. 20

    건필 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2 대면한솔
    작성일
    12.12.02 05:57
    No. 21

    이걸 언제봐;;;
    날잡아서 봐야 긋네;; 오늘은 아님;;;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영혼의진실
    작성일
    12.12.12 19:08
    No. 22

    제발 아무것이라도 출판좀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2 헛방
    작성일
    13.01.22 12:21
    No. 23

    오래걸리네요..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8 황금동전
    작성일
    16.04.10 18:56
    No. 24

    정말 읽기 힘들게 써 놓으셨네요. 20대인 성인 가까이 라고 적었다가 갑자기 12세였다가 또 갑자기 전쟁터,거기에 부모죽는 것까지 너무 절차없이 순식간에 상황이 바뀌다 보니 머리속으로 화면이 안 그려지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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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원고는 출판사에 넘겼습니다. +32 12.12.17 5,204 0 -
공지 여기까지일꺼 같습니다. +55 12.10.09 21,040 11 -
공지 필리핀에서 +24 12.09.11 42,257 28 -
17 표지나왔습니다. +26 13.07.15 5,850 37 1쪽
16 아이작 (31) +23 13.06.16 11,081 66 11쪽
15 검궁비상 = 여기까지. +7 13.05.28 5,408 34 18쪽
14 고도만 1 +9 13.05.27 5,286 66 15쪽
13 고도만 +7 13.05.26 8,088 38 27쪽
12 빙검후 주약란 (1) +6 13.05.25 6,170 21 17쪽
11 빙검후 주약란 +1 13.05.25 5,368 27 13쪽
10 비만무림? 허풍무림? +1 13.05.25 7,183 14 6쪽
9 죄송합니다. +32 13.03.28 6,328 27 1쪽
» 잡설 +24 12.11.28 10,965 36 260쪽
7 30 +128 12.10.09 31,603 266 20쪽
6 05 +15 12.08.03 35,576 150 12쪽
5 04 +21 12.08.01 38,574 168 16쪽
4 03 +30 12.07.31 39,113 173 19쪽
3 02 +20 12.07.30 41,359 162 17쪽
2 01 +54 12.07.29 58,053 168 15쪽
1 0. +27 12.07.28 75,001 179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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