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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몽객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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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몽객
작품등록일 :
2013.06.06 06:25
최근연재일 :
2018.03.11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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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30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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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약간 긴 프롤로그

DUMMY

자신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은 건 고등학교 졸업과 대입을 준비하는 그 정신없는 기간에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친척들이 와서 구슬피 우는 가운데 준영의 기분은 그저 무덤덤할 뿐이었다. 슬퍼야 하는데 슬프지가 않았다.

상주를 맡아 기계적으로 조문객들을 맞이하며 문득 과거를 돌이켜 보니 확실히 자신은 특이한 놈이었다.

그 흔한 사춘기 시절의 여선생 치마 속이 궁금하지도 않았고 도색잡지나 성인 비디오도 흥미가 없었다. 한때 자신이 게이가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별로 성적인 흥분이 없다 뿐이지, 여성의 굴곡에 자연적으로 눈이 쏠리고 감상을 하는 걸 보면 확실히 게이는 아닌 거 같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준영은 자신이 그냥 무뚝뚝한 놈인 줄로만 알았다. 하나 부모의 죽음에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스스로의 감정에 혼란스러웠고, 발인이 끝나자마자 슬슬 새어 나오는 돈 이야기에 만사가 귀찮아져 모든 재산을 친척들에게 나눠 준 뒤 도망치듯 군에 지원했다.

그리고 준영은 군에서 자신이 신기한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됐다. 사실 재능이라기보다는 이상한 초능력에 가까운 거였다. 분명 남들은 하지도 보지도 못할 테니까.

천재적인 사격술. 준영이 총을 들어 과녁을 조준하면 신기하게도 레이저 포인터처럼 푸른색 빛줄기가 과녁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그 사실을 발견한 건 신병 교육대의 소총 사격 훈련에서였다. 첫 사격인 만큼 조교들은 뻘 짓이 일어나지 않도록 신병들을 단내 나게 굴려 댔다.

총은 처음 신병 교육대에 왔을 때 지급받았으나 그때는 이상한 점이 없었다. 사격술 예비 훈련이라며 한바탕 구르고 나서 사격장 사로에 엎드려 탄창을 집어넣자 레이저처럼 빛줄기가 총구에서 쭉 뻗어 나왔다.

처음엔 더위를 먹어 헛것이 보이나 싶었다. 사격을 보조하는 부사수와 다른 사수들을 둘러보니 서둘러 사격을 준비할 뿐 빛줄기 따위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걸 보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대기 인원이 많이 밀려 사격 통제관은 서둘러 사격할 것을 지시했고, 준영도 레이저를 따라 과녁 한가운데로 사격을 시작했다.

세 발의 사격이 끝나고 영점 조절 시간, 자신의 표적지를 향해 다가가 보니 과녁엔 단 하나의 구멍만 뚫려 있었다. 같이 따라온 조교가 한 발은 정통으로 맞았는데, 나머진 어디 갔냐면서 견착 불량과 호흡 불량 등을 주절대며 조언을 해 줬지만, 준영은 열심히 듣는 척만 했을 뿐 단 하나의 구멍에 세 발이 모두 지나갔다는 걸 알았다.

이유는 모른다. 만화에나 나올 법한 특수 능력을 가졌다는 거 자체가 신기한 일이니까. 아무렴 어떠랴. 역시 자신은 남들과 다르구나 싶어 총구에서 레이저가 뿜어져 나온다느니, 전부 완벽하게 명중했다느니 등등을 주절거려 정신 진단으로 훈련을 열외하는 것보단 특등 사수로 훈련을 열외하는 걸 택했다.

다시 영점을 조절하고 세 발을 쏠 때 준영은 일부러 미세하게 총구를 조정해 사격했고 정확히 표적지 한가운데에 삼각형의 구멍을 만들어 조교와 교관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이어진 축소 사격에서도 멀가중, 멀가중, 멀중가중의 250, 200, 100미터의 표적을 의미하는 조잡한 종이쪼가리에 모인 세 개의 크기가 다른 표적지의 과녁 한가운데에 전부 꽂아 넣으며, 사격을 잘 못 한 신병들이 땡볕에서 다시 굴러다니는 가운데 홀로 그늘에 앉아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받으며 쉴 수 있었다.

도망치듯 기어들어 간 군대가 의외로 준영은 마음에 들었다. 상명하복이 중심인 작은 세상에선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니까 다름과 틀림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 흔히 말하는 군대 체질이랄까?

당연히 일 잘하고 체력 좋고, 사격 실력 우수에 뭐든지 시키면 척척 해내는 준영을 간부들은 예뻐할 수밖에 없었고, 병사들 중에서도 준영에게 직접적으로 시비를 거는 놈은 없었다.

그 흔한 이등병 놀려 먹기나 갈굼도 없었는데, 묘한 카리스마라고 해야 하나?

준영이 납득하기 어려운 지시나 명령이 잘 이해가 안 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그시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말해 달라고 요청만 해도 상대방은 어쩔 줄 몰라 어물쩍거리다 흐지부지되곤 해서, 남들과 다른 게 좋은 점도 있구나 하는 새로운 사실만 깨달았다.

그렇게 무난히 상병을 달고 슬슬 병장 진급을 준비할 무렵 준영은 행정보급관의 호출로 내려간 관사에서 족발과 치킨, 피자와 연계한 소주와 맥주의 향연 속에 펼쳐진 꼬드김에 홀딱 넘어가 술김에 넙죽 부사관 지원을 해 버렸다.

준영이 부사관에 지원했단 소문이 부대 내에 쫙 퍼지자 다들 그럴 줄 알았다, 군인이 천직이다, 벌어질 일이 벌어졌다는 수긍 속에 축하를 받으며 준영은 부사관 학교에 들어갔다.

부사관 학교의 생활은 신병 교육 때보다 훈련이 좀 더 힘들 뿐 별다를 건 없었다. 부사관 학교에서도 특출 난 사격 실력은 물론 여타 다른 교육들을 탁월한 성적을 거두며 최우수 부사관으로 임관한 준영은 새로운 부대로 발령받았다.

준영이 새로 부임한 부대는 산골에 위치해 있는 대대가 신막사를 건설해 부대를 이전하면서 기존의 부대시설을 유지 보수하기 위해 파견한 독립 중대였다.

호랑이 없는 곳에 여우가 왕이듯 대대장 없는 곳엔 중대장이 왕인 독립 중대에서 간간이 순찰 겸 찾아오는 대대, 연대의 간부를 제외하곤 터치할 존재도 없어 상당히 편한 분위기를 가진 부대였다.

그렇게 독립 중대에서 여러 행정 업무를 배우고 애들 관리하고 여러 가지 작업과 훈련을 하며 나름 평화로운 군 생활을 보내던 준영이었지만 사람을 다루는 문제. 그중 보호관심사병, 일명 고문관이라 불리는 병사들만큼은 준영도 꽤 곤란한 문제였다.

보호관심병사를 다루는 게 어려운 이유는 애지중지 대하자니 다른 병사들과 형평성의 문제가 있고 또 강하게 이끌어 나가자니 요즘 세상에 이 자식이 징징거리며 개판을 치면 결국 욕먹는 건 간부들뿐이라 그 미묘한 줄타기를 하는 게 더럽게 어려워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신교대에서부터 소문난 특A급 고문관이 대대로 발령받았고 동 떨어진 독립 중대로 떠넘겨졌는데, 결국 짬 안 되는 부사관 막내인 준영의 소대에 까지 당연한 수순을 밟으며 떨어졌다.

독립 중대는 그 특성상 간부조차 인력 지원을 받는 데 불이익을 받아 소대장을 맡아야 할 신임 장교의 수가 모자라 준영의 소대는 준영이 임시 소대장을 맡고 있었다.

준영은 대대 인사 장교의 잘 관리하란 신신 당부를 듣고 이놈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고민했다. 편하게 다가가 어려운 점이나 힘든 일 등의 고민을 털어놓고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기엔 말 재주도 부족하고 그런 행동을 생각만 해도 귀찮음에 몸이 축 늘어지는 성격이다.

아무렴 어떠랴. 그냥 간단하게 뒤통수 몇 번 어루만져 주고 지그시 바라보면 보호관심병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대다가 신기하게도 병이 완치되고 정신이 멀쩡해지는 기적을 보여 주면서 군기가 바짝 든 병사로 변하니, 준영은 자신의 눈에서도 레이저가 나가나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준영은 어째서 군대에 중간만 하라는 절대 진리가 존재하고 있는지를 똑똑히 깨달았다. 자살 위험이 높은 관심병사로 분류된 놈이 전입한 지 하루 만에 군기 바짝 든 이등병으로 변신하는 기적은 부대 내 장교들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대체 무슨 방법을 썼냐는 질문에 준영은 그저 뒤통수 몇 번 만져 주고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으니, 지가 알아서 빠릿하게 움직이더란 진실을 말했고, 간부들은 재미있는 농담이라며 껄껄 웃은 뒤 부대 내 골칫덩이들을 전부 준영에게 떠넘겼다.

부사관 임기 4년 중 2년 동안 준영은 부대 내 골칫덩이들을 상대하며 나만 이상한 놈이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군대란 게 워낙 별의별놈들이 죄다 모이는 곳이라 그런지 참 특이한 놈들이 많았다.

그중 기억에 남을 정도로 특이한 놈들이 있었는데, 준영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젊은 나이에 박사 학위를 몇 개나 딴 초천재라는 놈이 최전방 군대에 끌려와 빌빌대며 고문관 소리를 듣는 거 하며.

종이에 키보드를 그려 놓고 두들기며 외계어를 중얼거리면서 자신이 뚫지 못한 곳은 없다는 자칭 세계 제일의 해커라는 음침한 놈 하며.

국내 굴지의 글로벌 대기업 회장의 직계 손자로 미국 시민권까지 있으면서도 투철한 애국심을 가지고 이 한 몸 바치기 위해 조국의 부름에 따라 입대했노라 씨불이며 돈으로 모든걸 해결하려는 재벌3세에.

연예계에 관심이 없는 준영도 알 정도로 제법 유명한 영화배우라며 기어들어 온 놈은 TV에선 당당히 군에 지원해 최전방에서 군 복무를 마치겠다고 선언하며 들어와 놓곤 복무 부적응으로 빌빌거렸다.

거기에 삼합회, 야쿠자, 마피아, 카르텔 등등의 세계적인 범죄 조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이 나라의 밤 세계를 일통한 권문拳門이란 이름을 가진 폭력조직 문주의 직계 손자까지. 하나하나가 특급 골칫거리들이었다.

그런 놈들을 맡아 투덕거리다 내보내고 평범한 보호관심병사들과 어느덧 막내였던 조폭3세와 재벌3세가 말년 병장으로 ‘내가 낸데!’ 하며 재롱떠는 걸 보면서 평화로이 지낼 때 갑자기 준영에게 사격 대회 출전을 위해 대전 육군 본부로 이동하라는 난데없는 명령이 떨어졌다.

준영의 신기에 가까운 사격 실력은 사단장이 참관해서 보고 갈 정도로 유명했는데, 육본 사단장 모임에 참석했던 준영이 속한 부대의 사단장이 사석에서 준영의 자랑을 하며 특수부대 사령관들의 심기를 건드렸단다.

이런저런 설전이 오가던 중 말다툼이 기수와 선후배를 가리는 수준까지 떨어지자, 결국 한번 붙어 보자란 식으로 발전됐고 준영의 신기에 가까운 사격 실력을 이미 두 눈으로 목격한 적이 있는 사단장은 자신 있게 콜을 외쳤다는 게 알음알음 퍼진 비하인드 스토리였다.

준영이 그 소문을 들은 건 휴가 때를 제외하곤 벗어나 본 적도 없는 부대를 벗어나 좋다고 쫄래쫄래 대전까지 내려와 도착 신고를 한 당직사령에게서였다.

그런데 다음 날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던 사격 대회가 갑자기 취소됐다. 아무렴 어떠랴 싶어 내무실을 뒹굴거리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전날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려 준 대위가 찾아와선 곤혹스럽게 웃으며 사정을 알려 주었다.

처음엔 그냥 준영을 비롯해 사격에 소질이 있는 자들을 모아 사격 대회를 여는 소소한 이벤트일 뿐이었는데, 별들의 자존심이 끼어들며 일이 점점 커졌단다.

사건의 발단은 홍보장교가 별생각 없이 이 나라 제일의 명사수를 선발하는 사격 대회란 문구를 국방일보 기사에 집어넣으면서였다.

군인은 자존심이 강하다. 그런 군인들 중 별을 달고 있을 정도면 그 프라이드가 얼마나 높을까.

특수부대 사령관은 물론 해병대가 참전했고, 병종은 다르지만 질 수 없다는 심정으로 공군과 해군마저 한 발 들이밀고 심지어는 소문을 듣고 경찰 특공대와 대통령 경호실마저 끼어들어 고작 육군만의 사격 대회는 그저 동내에서 짱 먹은 놈이 세계 제일이라고 자랑하는 꼴이라면서 비아냥거렸고, 발끈한 육군이 ‘꼬우면 덤벼!’라고 도발을 하자, ‘이 나라 제일의 명사수 칭호는 내 거다!’라며 우르르 몰려들었단다.

아무렴 어떠랴. 군인에게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시간은 소중한 법.

준영은 일이 커지자 불안한지 직접 찾아와 필승을 주문하며 밥 한 끼 안 사 주는 사단장을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오늘 저녁 반찬은 뭘까 궁금할 뿐이었다.

그렇게 사격 대회 날 자동화 사격장에는 각종 마크가 화려한 견장을 뽐내는 특수부대원부터,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총 한 자루 들고 구석에서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가지는 병사들과, 전문 스나이퍼 훈련을 받고 실전 경험까지 있는 복면을 쓴 저격수까지, 이 나라의 난다 뛴다 하는 특등사수들이 전부 모였다.

사격 대회는 급하게 열린 만큼 간단하게 진행됐다. 제한시간은 없고 참가자는 많은 만큼 빠른 시간 내에 참가자를 솎아 낼 방법을 만들었는데, 서른 발 사격, 합격 기준은 만발. 즉, 한 발이라도 빗나가면 불합격으로 그 즉시 사로에서 나와야 한다.

꽤 살벌한 기준이었지만 총구에서 뻗어 나오는 레이저 포인터가 보이는 준영에겐 별다른 제약조차 되지 못했다.

부사관으로 지내며 간간이 실탄 소비 겸 훈련 겸 해서 사격을 하다 보니 실력은 점점 늘어나 버렸다.

이 사격이라는 게 신기하게도 쏘면 쏠수록 익숙해져 이제는 표적을 보고 어디 맞혀야지 생각만 하면 몸이 알아서 움직인다. 심지어는 표적을 힐끗 보고 고개를 돌린 채 방아쇠를 당겨도 명중할 정도였다.

그런 준영이기에 예선은 가뿐히 통과하고 2차의 30초 내 완전 사격, 3차의 불규칙 표적지 완전 사격 등의 예선을 통해 거르고 거른 열 명의 명사수 사이에 살아남았다. 이 정도만 하더라도 준영은 충분히 톱클래스의 명사수였다.

그렇게 잠시간의 휴식 후 본 대회가 시작됐는데 대체 누가 만든 건지 궁금할 정도로 규정이 이상했다. 무한대로 지급하는 탄약을 가지고 불규칙 자동화 표적을 한 사람이 남을 때 까지 계속 사격하는 게 다였다.

수십 개의 탄창이 옆에 쌓였고 톱클래스의 명사수들답게 한 발의 실수 없이 다들 표적지를 쓰러트렸다.

그렇게 탄창을 하나둘 갈아 끼우며 사격을 하는 단조로움에 지루해진 준영은, 견착도 하지 않고 사로에 등을 기댄 채 한 손으론 총을 쏘면서 한 손으론 얼굴을 긁고 하품을 하는 등 점차 편한 자세를 취하며 방아쇠만 당겨 댔다.

당연히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준영을 볼 수밖에 없었다. 견착을 안 한다는 건 조준을 포기했다는 뜻. 그런데 한 발 쏠 때마다 표적지에선 명중을 알리는 붉은 빛이 들어온다.

딱 봐도 언제 끝나나 싶어 지루한 표정으로 반복 작업을 하는 노동자처럼 사격하는 준영의 태도에 다른 사수들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하나둘 탈락하고 어느새 꽉 채운 탄창을 스무 탄창이나 소비했을 때 끈질기게 살아남은 한 명 남은 사수를 보며 져 줄까 고민하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 레이저 포인터로 날아가는 총알도 맞힐 수 있을까? 이 정도까지 했으면 할 만큼 했다 싶은 생각에 아무렴 어떠랴 싶어 준영은 사격을 하면서도 시선은 살아남은 사수를 향했다.

이 레이저 포인터는 준영의 눈에만 보이지만 준영이 든 총에서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실탄이 장전된 총을 들면 그 총에서도 쭉 뻗어 나오는 레이저 포인터가 보인다, 그것도 구분하기 쉽게 붉은색으로.

상대방의 총구에서 뻗어 나온 레이저 포인터를 주시하며 시선을 집중시키자 신기하게도 총알이 날아가는 게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단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의 표적이가 명중해 내려가는 틈을 타 상대편 표적지로 총구를 돌려 타이밍에 맞춰 방아쇠를 당긴 후 다시 새롭게 올라온 자신의 표적지를 향해 사격했다.

곧 ‘삐이!’ 하는 소리와 함께 사격 중지 방송이 사람들의 환호성과 함께 울려 퍼졌다. 자신의 표적지에 들어온 명중을 알리는 붉은색 빛과 상대편 표적지에 들어온 빗나감을 알리는 녹색 불빛에 준영은 정말 상대편의 총탄을 자신의 총탄으로 맞히는 영화 같은 일을 해냈음을 알았다.

상대편 사수는 사격 실패에 씩씩거리며 준영을 노려보면서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준영은 시치미를 뚝 뗀 채 모른 척했다.

그래도 상식이 있는 어른이라 의심은 가지만 차마 ‘네가 내 총알을 맞혀서 튕겨 냈지?’ 하고 묻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렇게 개선장군처럼 기분 좋아진 사단장의 풀코스를 얻어먹고 부대로 돌아온 준영을 반기는 건 난데없는 전출 명령서였다.

역시 중간만 하라는 불문율을 어긴 죄는 컸다. 하나 명령을 어길 수는 없는 법.

가지 말라고 어딜 가냐면서 자신의 집안과 인맥을 총동원해 막겠다는 재벌3세와 조폭3세의 설레발에 준영도 살짝 고민했으나, 특수부대라 월급 뻥튀기에 훈련도 거의 안 한다는 인사 장교의 비밀스러운 조언에 재벌3세와 조폭3세의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어 입 다물게 만들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재벌3세와 조폭3세는 준영의 휘발유 같은 기억력에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재벌3세는 제법 똘똘해서 이등병때부터 데리고 다니며 잔심부름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준영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조폭3세는 가장 골치 아픈 놈이었다. 신병이라고 받기는 했는데, 가뜩이나 엇나가기 쉬운 환경을 가지고 있는 놈이 불우한 가정사에 오냐오냐하는 이 나라 주먹계의 절대자를 배경으로 끼고 있으니, 망나니 개새끼로 부대에서도 건드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할 정도였다.

제약이 없으니 점점 행동이 심해져 술 처먹고 행패를 부리던 조폭3세는, 하필이면 그 당시 사이코 패스의 연쇄 살인으로 바깥이 시끌벅적할 때 뉴스에 나온 전문가가 사이코패스의 특징에 대해 떠드는 걸 시청하던 준영의 눈에 띄는 실수를 저질렀다.

자신이 남들과 다름을 인지하고 있던 준영은 사이코 패스,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는 사람을 죽여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타인과의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며, 전문가가 전문적인 지식을 전문적으로 떠드는 걸 심각하게 시청하며 진짜 사람을 죽여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할까 고민하던 차에 술 취해 비틀거리던 조폭3세가 눈에 들어왔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리는 도덕 정신이 투철한 준영은 이왕 사람을 죽여서 실험해 볼 거면 쓰레기를 상대로 실험해 보는 게 좋은 재활용이 되겠다 싶어 그놈을 붙잡았다.

비록 실패는 했지만 그날 이후로도 포기를 모르는 남자인 준영의 계속돼는 시도에 화를 내고 저항하고 반항하고 반격을 하다 어느새 완전히 얌전해진 조폭3세의 태도에 준영은 아쉬워 입맛을 다셨다.

만약 자신이 사이코 패스,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라가 아니라면 조폭3세를 죽였을 시 쓰레기 하나 치운 거라 별 죄책감은 없을 거란 계산에 조폭 3세를 죽이려고 한 건데, 쓰레기가 알아서 쓰레기통에 들어갔다가 목욕재개하고 재활용품으로 재생을 해 버리니 더 이상 죽이려는 시도를 할 수 없었다.

그런 특별한 경험 탓인지 유독 친하게 구는 조폭3세와 재벌3세를 뒤로한 채 전출 간 부대는 여기가 군대인지 연구소인지 구분이 안 가는 곳이었다.

부대 마크도, 부여 번호도 없는 이 이상한 부대는 흔히 말하는 특수부대. 그중에서도 극비로 다루어지는 비밀 부대였다.

이런 곳에 자신이 발령받을 이유가 없기에 뭔가 착오가 생긴 게 아닌가 싶었지만, 훈련도 없고 0이 하나 더 붙어서 나오니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그 부대엔 다양한 계급을 가진 군인들과 특유의 흰색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반반씩 있었다. 비록 전출 왔다지만 준영은 그 부대에선 애물단지처럼 취급돼 모든 일에 열외한 채 하는 일은 단 하나, 사격이었다.

말 그대로 권총류, 소총류, 저격총류, 산탄총류 등등 모든 종류의 총기를 다루며 주야장천 사격만 하는 일과가 다인지라 길가의 돌멩이 취급이지만, 이렇게 널널한 군 생활을 할 수 있는데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남는 시간에 준영은 군대에 와서 생긴 취미 생활로 시간을 때웠다.

무협, 판타지 마니아인 자칭 초천재라는 놈의 영향 탓에 접한 장르 소설은 ‘오! 재미있는데?’ 하다 점점 빠져들었고, 이제는 활자, 영상, 만화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보는 잡식성으로 변했다.

그렇게 종일 사격을 하고 퇴근 후 인터넷을 뒤적거리거나 만화방에서 뒹굴거리거나 영화관을 가는 등의 단조로운 준영의 일상에 충격을 준 건 한 편의 영화였다.

퇴근후 심심해서 뭐 할거 없나 지루해 하던 준영에게 만화방 알바가 숨겨진 명작이라는 영화를 하나 소개해 줬다.

원티드. 아는 배우는 졸리 누님밖에 없었지만 영화에 나온 총을 사용하는 장면은 준영에게 신세계를 안겨 주었다. 총알이 휘어지며 나가다니!

한번 더 보고 싶었지만 알바 말대로 인기가 없는건지 준영이 본 회차가 마지막이었다. 하긴 평일 저녁의 피크타임에 그 넓은 극장에서 영화를 본 손님이 혼자였으니 금방 내리는것도 이해가 가고 어째서 숨겨진 명작이라는지도 이해가 갔다.

준영은 즉각 다음 날부터 영화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권총을 잡고 팔을 휘휘 젖자 레이저도 따라서 회초리처럼 쭉쭉 휘어진다.

사격 데이터를 뽑던 연구원들이 저놈이 무슨 미친 짓을 하나 싶어 바라보았으나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현실 속에서 벌어지니, 기겁을 하며 달려들어 총에다 여러 가지 장치를 부착하며 다시 쏠 것을 주문했다.

장애물 뒤에 있는 표적을 향해 초승달의 곡선을 그리며 명중하는 코너샷, 장애물에 튕겨 표적을 맞히는 도탄샷, 한 점에 속사로 파괴력을 중첩시켜 장애물을 뚫고 과녁을 맞히는 관통샷을 연습해 완성시키니, 연구원들은 준영을 괴물처럼 바라보았고 소문을 듣고 구경 온 군인들도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준영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관통샷마저 마스터 하고 또 어떻게 기발한 사격 방법이 없을까 고민할 때 전입 신고할 때조차 얼굴도 못 본 부대장이라는 대령 계급의 중년 남자가 준영을 부르더니, 그간 신경을 못 써 줘 미안했다면서 다음번 훈련에 참가하는 걸 허락할 테니 훈련 참가 전 휴가나 다녀오라며 사흘짜리 휴가증을 줬다.

준영은 어떻게 하면 훈련 없이 휴가증만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 훈련 참가를 영광으로 알라는 태도의 부대장에게 씨알도 안 먹힐 거 같아 그냥 영광입니다 하고 휴가증을 챙겼다.

그날 바로 휴가를 떠난 준영은 바로 후회했다. 친척이 몇 있지만 부모님 장례식 이후 만난 적이 없기에 찾아가기도 어색하고 학창 시절 친하게 지냈던 놈도 없으니 만날 놈도 없다.

휴가증을 안 받아도 자유로운 분위기상 퇴근 후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기에 그냥 출근 안 하는 걸 위안으로 삼자 싶어 단골인 만화방에 들어가 사흘 밤낮을 처박혔다.

단골을 향해 반갑게 인사하던 알바가 퇴근했다 출근했는데도 아직 서식하고 있는 준영을 향해 인사를 하고 퇴근했다 다시 출근했는데도 처박혀 있는 준영을 보고, 아무리 자기가 예뻐도 이러면 어떤 여자도 좋아할 리 없다고 충고하며 질린 듯이 바라보다 퇴근했다 출근해 보니 그대로인 준영을 보고 이놈은 날 어떻게 해 보려는 게 아니라 그냥 미친놈이라는 걸 깨닫곤, 사흘 동안 매상을 올려 준 준영에게 식사라도 대접하라는 사장의 명령과 용돈에 알바는 같이 퇴근해 준영에게 삼겹살에 소주를 곁들인 아침을 먹였다.

공짜 밥에 고기까지 먹은 준영은 어차피 복귀일이라 제발 집에 좀 들어가라는 알바의 걱정 섞인 신신당부에 대충 대꾸하며 헤어져 부대로 바로 출근을 했다. 그리고 부대가 사라져 버린 기적을 경험했다.


작가의말

이거슨 예약 연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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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중대발표 +51 18.03.03 9,436 0 -
68 발할라 프로젝트 +25 18.03.11 4,008 81 11쪽
67 선거는 전쟁이다. +18 18.03.01 3,412 88 13쪽
66 선거는 전쟁이다. +5 18.03.01 2,974 85 10쪽
65 선거는 전쟁이다. +4 18.03.01 2,770 80 13쪽
64 선거는 전쟁이다. +61 18.02.26 3,428 103 11쪽
63 킹 메이커 +83 18.02.24 3,563 114 12쪽
62 킹 메이커 +197 18.02.22 3,865 128 13쪽
61 킹 메이커 +106 18.02.21 3,736 129 12쪽
60 흔한 클리셰 +46 18.02.21 3,702 118 13쪽
59 흔한 클리셰 +11 18.02.19 3,982 136 12쪽
58 시스템 프로젝트 +10 18.02.13 5,114 133 14쪽
57 시스템 프로젝트 +14 18.02.07 5,118 133 15쪽
56 첫 임무 +6 18.02.01 6,021 146 14쪽
55 첫 임무 +9 18.01.30 6,003 178 15쪽
54 첫 임무 +14 18.01.29 6,314 203 14쪽
53 첫 임무 +22 18.01.24 7,316 221 13쪽
52 팬심으로 대동단결 3 +29 18.01.22 7,066 274 13쪽
51 팬심으로 대동단결 2 +15 18.01.20 7,289 267 13쪽
50 팬심으로 대동단결 +18 18.01.20 7,373 25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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